역사

다이쇼 데모크라시, 대일본제국의 봄 - 1

1920년대는 우리에게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 의해 문화통치가 시행되던 시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기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파악하면서도
정작 그 식민지를 다스렸던 식민모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식민지기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사이토 마코토.jpg

사이토 마코토 - 3대, 5대 조선총독(역대 최장기간 역임), 나중에 군부 쿠데타로 암살당함.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인 1905년부터 만주사변이 발생하는 1931년 전까지 이 25년 간 일본의 역사에는 그 전후와 구분되는 한줄기 역사적 지층이 형성되어 있다.
이 시기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얻은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구가했으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가 정착되면서

전화, 자동차, 라디오, 영화, 레코드 등이 일본의 새로운 풍경으로 떠올랐다.
고등교육이 확산되며 도서의 보급, 잡지발행도 활발해졌고 신문의 발행 부수가 100만 부를 돌파하는가하면 여성의 사회진출도 활성화되었다.


생활의 안정은 자연히 정치참여 요구로 이어졌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 시기에 지식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과거의 번벌 위주의 일방적인 정치가 비판 받기 시작했고 (번벌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정부요직을 독차지한 인사들을 일컫는다.)
정당민주주의가 시작되었으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은 물론 사회주의, 아나키즘 역시 민중들 사이로 흡수되었다.
이는 마침내 1925년 만25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서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법의 도입이라는 쾌거로 이어졌다.
바로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즉위했던 다이쇼 덴노의 이름을 빌려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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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덴노 - 재위 1912 ~ 1926

 

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정의를 내리기 굉장히 모호한 시기다.
그 전이나 그 이후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나 그 역시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웠던 시기는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정확히 언제 막을 내리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만큼은 여러 연구에서 대략 1905년 9월 발생한 히비야 폭동을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히비야 폭동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강화 조약 내용에 불만을 품은 대중들이 강화 반대와 전쟁 지속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한 옹호, 민족주의의 발호라고 볼 수 있는 셈인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논의가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것을 생각하면
히비야 사건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것은 일견 모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비야 사건의 의의는 다른 것들보다도 바로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러일전쟁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일전쟁은 전적으로 우익과 번벌 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전쟁이었고 정보 통제로 언론과 민간은 전쟁의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시베리아 바이칼호까지 진군해야 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이 대유행할 정도였다.(심지어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할것다.png

당대 일본인들의 망상.jpg


일본은 개전 초기에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1905년 1월 4일 뤼순(여순)항을 함락시켰으나 끝내 국력의 차이를 이기지는 못했다.
뤼순전투 이후 이어진 평톈(봉천)전투에서도 일본은 승리했으나 이 전투에서 무려 7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일본 육군은 전투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다.
더군다나 이미 군수 물자 생산력도, 보급도, 재정도 한계에 달한 일본으로써는 병력을 더 징집한다한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러시아는 유럽에서 거듭하며 병력을 파병, 하얼빈에 100만의 대군을 집결시키겠다고 호언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기도 허세였다.)

 

뤼순함락.jpg

뤼순항을 함락시키는 일본군 - 일본군은 이 뤼순공방전에서도 6만이 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시 상황이 어느 정도였냐면 평톈전투 후 도쿄를 방문한 고다마 겐타로 총참모장이 정부에게
‘일본 육군의 전력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상당한 보충이 없는 한 하얼빈 결전에 임할 수 없다. (중략) 이제 일본의 존망은 외교에 달려있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 점을 알고 있었던 일본정부는 필사적으로 미국의 중재를 통해 러시아와 강화를 맺으려 하였다.
이런 사실은 강화 회담 참석을 위해 항구로 이동하던 정부 관료들 사이의 대화 내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05년 7월 8일 고무라 주타로가 전권위원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갈 때, 도로는 환송나온 시민들로 가득차고 일장기와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
하지만 고무라는 환송 나온 가쓰라 수상에게  "돌아올 때는 정반대의 풍경을 보겠군요."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네가 참으로 딱한 처지에 몰렸군. 지금까지 쌓은 명예가 이번에 다 무너질지도 모르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원로 이토 히로부미는 "자네가 귀국할 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만은 반드시 마중을 나옴세." 라고 말했다.

- 다치바나 다카시, 천황과 도쿄대(1), p413


이 대화 내용을 통해 정부 관료들이 이미 강화회의의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일본정부의 예상대로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결과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배상금은 한 푼도 없었고 지배권을 확정할 수 있었던 영토 역시 남사할린 지역뿐이었다.
출정군 총 94만 명, 사상자 40만 명, 20억 엔에 달한 전쟁 비용에 비한다면 분명 터무니없는 결과였다.


문제는 이 전쟁이 일본이 최초로 겪은 총력전이었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위해 수많은 국민들을 징집했고 세금을 걷었으며 그들에게 국채를 팔아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전쟁 참여의 기반이 된 일본 민중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화조약의 결과를 본 이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것 없는 전쟁을 위해 자신들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결과가 전해지자 일본 전역이 분노로 들끓었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 내무대신 관저가 불에 타고 계엄이 선포되기에 이른다.


일본정부는 집회나 소요를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이미 러일전쟁 기간 동안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집회나 행진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용인하면서
민중들은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집회를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진압은 민중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 꼴에 불과했다.
그리고 정부의 강경진압에 대한 반발은 결국 국민들을 배제하고 정치세력을 독점하고 있던 번벌들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즉 운동이 강화를 반대하고 정부의 굴욕적인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방향에서 번벌들이 오로지하는 정부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참여의 주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히비야 폭동이 그 내용에도 불구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게 된 이유다.


이런 움직임은 1906년 상업회의소 주도의 직물소비세, 소금전매, 쌀 수입세 등의 폐지를 요구하는 악세반대운동으로 다시 한 번 불붙게 된다.
당시 러일전쟁 기간 동안 부족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다양한 증세를 실시했는데
전후 이에 불만을 품은 상업 자본가 계층이 악세들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정부 내 번벌과 원로들에 좌지우지되는 의회는 이러한 움직임을 무시하고 오히려 설탕소비세, 석유소비세, 주세 등을 신설해 증세와 군비확충을 꾀했다.
이에 상업회의소는 전국적인 연합회를 조직해 악세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의회 일각에서 군비 확충에 반대하는 의견이 확산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의회에서는 국방은 주변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고 전쟁의 위협이 없으므로 군비 확충을 위한 증세는 악세라는 야당 측과
군비확충을 해야지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며 군비확충을 생산보다 먼저 고려해야한다는 여당 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민간에서는 심지어는 군함 감축과 사단 감축 주장까지 제기되었을 정도인데
군비확충을 꾀하는 번벌과 군부에 대항해 이를 공공연하게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업회의소는 실질적인 세수를 무시하고 군비확충에 편중된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폐단을 불러온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도쿄의 선거구에서 여당이었던 정우회는 11석 중 2석을 차지하는데 그친 반면
상업회의소의 악세반대운동과 관련된 의원들은 6석을 차지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물론 이들 자본가 계층이 제국주의 자체에까지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군비 감축이라는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지배체제의 개혁과 번벌 관료세력의 타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악세폐지운동은 단순히 세금제도의 개혁에 그치지 않고 국가 재정과 정치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쌓인 민권운동의 여력은 몇 년 뒤 한층 더 크게 터져 나오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중국이 혼란해지자 이를 중국 침략의 적기라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을 구성하고 있던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는 재정난과 국제문제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이에 반발해 사임했고 군부가 후임 대신 임명을 거부하면서 1912년, 내각이 붕괴하고 말았다.

 

사이온지 긴모치.jpg 우에하라 유사쿠.jpg

좌 - 사이온지 긴모치 / 우 - 우에하라 유사쿠


이후 군부에 호의적인 가쓰라 내각이 들어섰으나 언론과 민중들은 육군과 번벌이 내각을 무너뜨린 것에 대항해 호헌운동을 전개했다.
앞서 말한 상업회의소는 이번에도 사단증설과 군비증가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1912년 12월에는 입헌국민회와 정우회 등의 정당들을 중심으로 제1회 헌정옹호대회가 열렸다.
이 때 대회에는 삼천 명 이상의 군중들이 모였는데 불과 2개월 뒤 열린 3차 헌정옹호대회에는 1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였으며
호헌운동은 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1913년 2월 11일 혁명의 발발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자 내각이 총사퇴함으로써 가쓰라 내각은 수립 53일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이를 다이쇼 정변이라고 부른다.

 

다이쇼 정변은 국민의 여론과 정당들의 힘을 통해 일부 번벌들에 의해 좌우되던 근대 일본의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했다.

1913년에는 그동안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정당인 입헌정우회에 대항해 입헌동지회가 창당되었다.
입헌동지회는 이후 1916년 헌정당, 1927년 민정당으로 개칭하며 시베리아 출병 반대, 노동조합 공인 등의 정책을 주장하며
입헌정우회와 함께 양대 정당의 역할을 수행했다. 강력한 양대 정당의 출현은 일본 내에서 안정적인 정당 정치실현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어떤 사건보다 1918년의 쌀 소요는 정당 정치로의 변화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급격히 올랐는데
일본정부가 러시아혁명을 빌미로 시베리아 출병을 결의하고 미곡상들의 사재기가 겹치면서 1918년 7월, 한 달 동안 쌀 가격이 무려 60% 이상 폭등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베리아로 끌려간다는 민중들의 불안감은 소요를 더욱 자극했다.
소요는 나날이 확대되어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한 당대 일본 최대의 시위가 되었는데
민중과 언론들은 번벌 세력이었던 데라우치 내각의 정책 실패를 규탄하고 정치참여권의 확대를 요구했다.
데라우치 내각은 이런 민중의 움직임을 군경을 동원해 강력하게 진압했으나 결국 그해 9월 29일 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에게 총리 자리와 내각을 내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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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다카시 - 평민 출신으로 총리가 되었으나 군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다 우익청년에게 암살당함.


평민 총리라는 별명을 가진 하라 다카시 내각은 중의원의 다수당 의원들에 의해 운영된 최초의 내각이었고

육군대신, 해군대신, 외무대신을 제외한 모든 각료들을 정당 의원 출신들로 임명했다. 
정당 정치의 실현을 위한 일본 사회의 오랜 움직임이 드디어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하라 다카시는 총리 재임 중 암살당하기는 했지만(일본 역사상 최초의 현직 총리 암살 사건) 

2차 세계대전 전 일본에서 이례적으로 3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정당내각제가 자리 잡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3.1운동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군부, 특히 육군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일본 정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제(管制)에 따르면 총독은 내각이 아닌 천황 직속으로 되어 있었으며 육해군 대장만을 임명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외연상으로 일본의 내각 총리와 조선총독부 총독은 동등하고 독립적인 위치라는 것. ) 

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은 일본 육군의 지배를 받으며 군부의 경제력을 키워주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라 다카시는 이를 제어하기 위해 하세가와 총독에게 3.1운동의 책임을 묻고 정무총감이던 문관 출신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후임총독으로 내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문관총독을 임명하는 것은 3.1운동이 격화되어 책임이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관료들에게도 적용되고 육군의 반발이 거세지자 불발되었다.

그 대안으로 당시 퇴역한 해군 대장 사이토 마코토가 물망에 올랐다.

이는 군부의 반발을 달래면서도 육군과 연고가 없는 해군 출신 퇴역 장성을 총독에 임명함으로써

군부의 영향력을 잘라내고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계산이었다.

 

군부는 조선총독부를 정부의 통제 아래 두려는 하라 다카시의 계획에 계속 저항했다.

관제개혁안에 있어 군부는 총독의 문무관 병용 임명은 인정하면서도 군권은 무관출신 총독일 때만 주어진다는 규정을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추밀원에서 부정당한다. 

 

만약 진정 총독의 통치를 위해 (총독이) 군통수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면 반드시 이를 무관 총독으로 한정할 이유가 있겠는가.

만약 문관 총독에게 군통수권을 위임할 수 없다면 결국 총독을 무관에 한정하는 현 제도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생략) 총독으로서 그 출신이 문관인가, 무관인가에 따라 직권의 일부를 달리하여 마치 총독이 두 종류로 설치된 것과 같이 명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 추밀원회의의사록(20), p256

 

대신 총독은 필요한 경우 군령을 통해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들에게 군권 사용을 요청할 수 있다는 식으로 관제가 변경되었다.

관제개혁안이 만들어진 후 하라는 1919년 6월 13일 내각회의에서

"내가 대만․조선의 현제도 설정 연혁을 말하고, 현제도는 구미제국의 식민지를 모방한 것으로서 근본에서 잘못이 있다면

결국 내지(일본)와 같도록 하는 방침을 취하여 상당한 개혁을 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는 군부에 의한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조선땅에 대해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실제로 인사권을 가진 정무총감에 하라가 신뢰하던 관료인 미즈노 렌타로를 임명하고

또 렌타로가 모든 인사권을 사이토 마코토로부터 일임받음으로써 하라는 조선총독부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미즈노 렌타로는 하라의 기대에 부응하여 총독부에 대한 영향력을 되살리려는 군부의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이를 차단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총독의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고 군통수권을 상실했으며 막료나 부관도 둘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라 다카시는 식민지 조선에서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나름의 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일본의 조선 통치 방식이 1910년 무단통치에서 1920년대 문화통치를 위시한 유화책으로 전환된 것에는 이러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다.

 
이런 사회운동의 성장과 민중들의 정치적 성장은 1923년 12월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미수사건을 책임지고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이던 기요우라 게이고가 내각을 구성하자 제2차 호헌 운동을 벌임으로써 다시금 그 존재를 드러냈다.
기요우라 내각은 추밀원의 귀족의원들 중심으로 이뤄진 탓에 ‘귀족내각’이라 불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입헌정우회와 입헌동지회의 후신인 헌정회 등을 포함한 호헌3파 연정이 총선에서 승리해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하면서 정권을 잡았고,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1925년 보통선거권을 도입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 해에 아나키즘, 공산주의운동 등을 비롯한 사회운동을 처벌하는 치안유지법이 제정되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는 절정의 순간 몰락하기 시작했다. 

 

15개의 댓글

2017.02.04
저런 역사를 겪어온 나라의 후손들이 이번 한국 시위를 보며 비웃었다니
0
2017.02.04
@독새끼
일본 시민사회의 역량이 100년 전보다 못하다는 느낌...
0
2017.02.07
@페탱
일본의 전후를 기점으로 민중의 주역세대가 바뀌어가는 타이밍에 일본대공황, 잃어버린 10년 등 민초들에겐 패배의식이 있고 이를 노린 일본 정부의 2차대전 이전의 시대를 바탕으로 한 우편향적 교육이 먹혀들어간것으로 보임.
0
2017.02.04
저정도의 민주운동이 있었는데 지금의 일본은 왜 우민국가가 됬을까?
0
2017.02.04
@하루살이냐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철저하게 실패한 시대임.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0
2017.02.04
일본이 한 70년대까지는 민주주의가 기능하고 있었다고 봄

근데 러일전쟁은 ㄹㅇ 막장이넼ㅋㅋㅋㅋ
0
2017.02.04
잘 읽었어! 다음편이 기대된다.

마지막에 히로히토 암살 미수보고 난 이봉창 의사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연도가 완전 다르네..
0
바이칼호까지 ㅋㅋㅋ행군이면 ㅋㅋㅋ 걍 아무도안건드려도 뒤질듯 ㅋㅋ
0
2017.02.05
@난인간을그만두겠다
그거 일본군이 2차 세계대전 때 잘하던 짓 아니냐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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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인간을그만두겠다
과연 동맹국 히틀러가 친구먹을만하넼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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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이런글 참 좋다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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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크 중간에 나오는 저 뤼순항 공략
대일본제국 육군의 병신력을 가감없이 보여줬던 전투 아니냐
이때 이새끼들이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0
2017.02.08
누가 됬든 쓰레기였겠지만 우리나라에 무관 총독만 있었잖아요
만약에 문관 총독이 있었으면 만행이 조금이라도 덜했을까요?
별차이 없었을까요?
만약 일제가 민주적 발전을 달성했다면 조선은 어찌됬을까요?
저는 역사에 if넣는것을 좋아해서 궁금합니다
0
2017.02.08
@pro불편러
이미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이행되면서 일제의 노골적인 만행은 많이 줄어들었음요
그러니 만약 진짜 문관총독이 나왔다면 더 유화적인 통치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사실 의미없음...
이 글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 일견 긍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할애를 많이 했지만
이 시기도 글 초반에 썼듯이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시기가 아니예요.
민족주의가 점점 강해지던 시절이고 군부와 사회의 우경화도 심해지고 있던 시절이기도 하구요.
당장 관동대지진과 그에 따른 학살이 일어난 것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그러니 이런 움직임도 있었구나 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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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8
일본사시간 참 재밋게 들었는데 ㅋㅋㅋ
일기를 죽을때까지 썼다는애가 쟨가? 암튼 잘보고있음 다음편도 기대할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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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
1194 [역사] [2차 고당전쟁] 3. 몽골리아의 각축 1 bebackin 5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