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파르타쿠스, 자유를 찾아 로마에 대항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는 비천한 노예인 동시에 뛰어난 검투사였다. 그리고 초강대국인 로마와 맞서싸워 자유를 되찾기위해 검투사들을 이끌고 로마를 탈출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아래 모여들었다. 그는 로마를 탈출한지 얼마되지 않아 로마를 위협하는 반란군의 대장이되었다.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정규군과 싸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계속해서 승리를 쟁취해냈다.

비록 마지막 전투에서 로마에 패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패배자가 아닌 위대한 승리자로 역사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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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화뿐만아니라 드라마와 소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의 모티브가 된 스파르타쿠스의 행보를 따라가보자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이미 지중해의 패권을 쥐고있는 초 강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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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영토 >

 

당시 정복당한 식민지에서 로마로 끌려온 노예의 수는 2백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로마의 전체인구의 3/1에 해당하는 수였다.

유명 정치가와 재력가의 집에는 최소 2백~최대 4백에 달하는 노예가 주인을 위해 일했다.

 

그중에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트라키 출신의 군인 스파르타쿠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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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키의 위치 >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노예시장으로 끌려왔다.

스파르타쿠스가 어떠한 죄목으로 노예가 되었는지는 알려진바가 없다.

 

스파르타쿠스를 사들인 인물은 바티아투스였다. 바티아투스는 카푸아 근교에서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푸아에는 뛰어난 검투사들이 많았으며 최고의 검투경기들이 카푸아의 원형경기장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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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푸아의 원형경기장 유적 >

 

검투사가 되기위해 끌려온 스파르타쿠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검투사로써 싸우는 방법을 훈련받았다.

원래 검투시합은 위대한 인물이 죽었을때 장례의식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절차였다.

이러한 검투시합은 로마가 점차 커져나가면서 정치가나 재력가들이 시민의 지지를 얻기위해 베푸는 유흥으로 바뀌게된것이다.

힘있는 자들은 유흥거리로써 서로죽고 죽이는 잔인한 시합을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높여나갔던 것이다.

 

로마의 노예가 인간대접을 받는 곳은 거의 전무했다. 오직 단 한 곳 검투장을 빼고는 말이다.

로마인들은 장렬히 싸우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고 이런 영광은 노예신분인 검투사에게도 해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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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검투사의 신분은 아주 독특한 했다.

그들은 검투장안에서는 로마인들의 숭배와 찬양을 받았지만 신분상으로는 창녀, 노예, 범죄자와 같이 아주 미천한 존재들이었다.

검투사들은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로마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나마 검투장안에서만은 인간으로써 대접받았던 것이다.

 

바티아투스의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에는 각나라에서 온 노예들이 있었고 이들은 고용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검투사로써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검투사들은 서로에게 매우 배타적이었다.

비록 같이 생활하더라도 내일이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싸워야하는 적이 될 수도 있었기때문이다.

이 점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다른 검투사들과 달랐던듯하다.

스파르타쿠스는 다른 검투사들과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이 유대감을 바탕으로 삼아 카푸아를 탈출한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차분히 탈출을 계획했고 때가 되었을때 동료들에게 신호를 했다.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 70여명은 취사장에서 무기를 얻은뒤 곧 바로 양성소의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경비병을 제앞하자 무기고에서 각자의 무기를 챙겨들고 카푸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발 1,200m의

베수비오산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무리는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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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푸아와 베수비오산의 행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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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수비오산 >

 

당시에는 화산이 활동을 멈추고 있었고 숲풀이 울창했다.

( 베수비오산의 폭발 참고, 폼페이의 비극적인 종말 포스팅 http://jsy2125.blog/220143087429 )

 

로마군은 70여명의 탈출한 검투사들을 진압하기위해 3천여명의 로마군을 베수비오산으로 보냈다.

70대 3,000 엄청난 수적 열세 놓여있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영리했다.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들이 자리잡은 베수비오산 기슭에서는 캄파니아 평원에 위치한 로마군의 진영이 한눈에 들어왔다.

로마군은 수적으로 불리한 검투사들이 결코 자신들을 먼저 공격할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로마군의 생각을 간파한 스파르타쿠스는 덩굴줄기로 밧줄을 엮어 절벽을 타고 내려가 밤에 로마진영을 급습했다.  

허를 찔린 로만군은 혼란에 빠졌고 결과는 대승이었다. 노예였던 검투사들이 자신들의 주인이었떤 로마군을 무찌른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로마 전역으로 퍼졌고 스파르타쿠스의 이름 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는 검투사가 있었고 도망친 노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모인 사람들은 로마지주들에게 자신의 땅을 뺏았기고 갈곳이 없었던 로마의 하층민들이었다.

몇달사이에 남녀노소할것없이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의 단순 탈출사건이 아닌 노예해방운동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로마군은 처음의 2배에 해당하는 6천명의 대규모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상징을 들고 행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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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도끼상징 >

 

이 도끼상징은 얇은 나무막대사이에 도끼를 끼운것으로 로마의 법을 어긴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있다.

두번째 전투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승리했다. 로마군의 권위를 상징하던 도끼는 이제 로마를 위협하는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검투사로써 1:1능력이 월등했던 스파르타쿠스의 일행은 게릴라전으로 승리한듯 보인다.

로마장군들과 달리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눠가졌고 부하라는 개념보다 동료라는 개념으로 반란군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로마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사람들을 이끌고 폼페이를 지나 남쪽의 작은 마을, 메타폰툼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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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폰툼의 위치 >

 

메타폰툼은 겨울을 보내기 완벽한 장소였다. 로마로부터 560km나 떨어져있었고 뒷편에 바다가 있기때문에 포위당할 염려도 없었다.

그리고 앞쪽에는 가파른 언덕이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메타폰툼은 먹을거리가 풍푸한 지역이기도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메타폰툼에서 3~4개월을 머물면서 그의 대원들을 군인으로써 훈련시켰다.

 

문제는 군장비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사꾼들에게 전리품을 팔았다.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대원들에게 금과 은대신 녹여서 무기를 만들 수있는 철이나 동을 판매댓가로 받게했다.

그렇게 모아들인 철과 동을 녹여 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모두를 무장시켰다.

그들의 무기는 검투사( 라틴어 : 글라디아토르 )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글라디오스라는 단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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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라디오스 >

 

글라디오스의 길이는 평균 56cm, 무게는 1.4kg 정도였다.

이 무기는 몸을 관통시키거나 찌르는 용도였으며 근접전에는 최상의 효율을 자랑했다.

 

스파르타쿠스에겐 큰 문제꺼리가 있었다 바로 여러 나라의 대원들을 하나로 통솔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에게 처음 이의를 제기한건 갈리아인과 셀틱인이었다. 크릭서스가 이끄는 독일인도 스파르타쿠스의 의견에 대립했다.

이들은 약탈을 즐겼으며 다루기 힘든 집단이었다.

이들 중 크릭서스는 70여명으로 출발했던 인원에서 수천명으로 불어난 반란군의 규모를 못마땅해했다.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는 싸울수 있는 인원도 있었으나 노약자같은 비전투인원도 상당했기때문이었다.

그들을 지켜주기위해 자신들이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정규군의 장군 같은 타입이 아니였고 인간성으로 집단을 이끄는 리더 타입이었기때문에 그의 통솔역은 강력한 편이 아니였다.

스파르타쿠스는 고심 끝에 노예반란군들에게 제안을 했다. 로마군을 물리치고 자유를 찾아 북쪽의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가기로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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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아의 위치 ( 붉은색 참고 ) >

 

크릭서스와 독일인들도 스파르타쿠스의 의견에 동의했으나 행군은 자기들끼리만 하겠다고했고 그들은 따로 출발했다.

크릭서스와 독일인들은 얼마가지 못했다. 독일인들은 가르가노산에서 매복중이던 로마군의 습격을 받아 크릭서스를 포함한 2천여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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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릭서스의 이동경로 ( 핑크색화살표 참고 ) / 로마군의 이동경로 ( 빨간색 화살표 ) >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서스의 추모 검투시합을 열였다. 그에게는 3백명의 로마군 포로들이 있었고 그들로 하여금 검투시합을 하게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우수하다고 믿는 민족이었기때문에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노예들의 이런 반항행위에 정신적 위협을 느겼다.

 

스파르타의 군대는 손쉽게 북으로 진격했다. 그에게 운이 따라준것이다.

당시 로마내에는 외국과의 전쟁으로 대부분의 정예 로마군들이 해외원정에 나가있었던 것이었다.

 

알프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모데나 지역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뛰어난 로마정예군대와 맞딱드렸다. ( 위 지도 3번참고 )

로마군의 리더는 카이우스 카시우스였다.카이우스 카시우스의 군대는 오랜기간 복무한 실력있는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카시우스의 군대 바로 넘어에는 알프스 산맥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자유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것은 2천여명의 노예반란군이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알프스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바로 자신을 지배하던 로마를 정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스파르타쿠스는 고민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받아드리고 로마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 스파르타쿠스의 진군경로 : 위 지도 파란색화살표 참고 )

 

로마에서는 그 누구도 스파르타쿠스를 막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이 한 사람이 나섰다. 그의 이름은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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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수스 >

 

크라수스는 전쟁경험은 거의 없었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야심가였으며 대부호였다.

크라수스는 막대한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군대를 조직했다.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군의 토벌한다면 그의 정계진출은 확정된것이나 다름 없었다.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수비를했지만 로마의 성벽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스파르타쿠스는 피체눔에서 로마군을 끌여들였다.

크라수스의 군대는 형편없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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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눔 ( 2번 / 화살표 참고 ) >

 

로마군은 무기까지 버리고 줄행랑을 쳤고 이를 본 크라수스는 오랫동안 금지되어있던 고대 로마의 처벌인 ' 데시메이션 '을 부활시켰다.

데시메이션은 고대 로마에서 겁쟁이에게 내린 벌이다. 이것은 10명마다 한사람씩을 뽑아 때려죽이는 처벌방법이었다. ( 십분형으로 불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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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시메이션 >

 

크라수스의 군대에서는 모두 4천명이 같은 동료에게 맞아죽었다. 이로인해 더이상 도망자는 나오지 않게되었다.

다시 크라수스의 군대와 마주친 노예반란군은 전세가 기울어 도망칠수 밖에 없었다. 노예부대는 점점 남쪽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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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의 남하경로 ( 파란색 화살표 참고 ) >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에게는 남하하는 목적이있었다. 바로 시칠리아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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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 붉은색 ) >

 

시칠리아는 로마의 곡창지대였으며 과거 노예의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이 곳을 점령한다면 로마의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반란군의 힘을 기를수 있었다.

하지만 시칠리아와 본토사이에는 거친바다가 있었고 스파르타쿠스는 해적을 매수할려고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이 묶인 스파르타쿠스의 뒤를 크라수스가 막아섰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을 몰아넣고 나오지 못하도록 성벽을 세웠다. 그는 스파르타쿠스 일행을 굶겨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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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수스의 성벽 >

 

스파르타쿠스는 양쪽 군대가 모두 볼수 있는 곳에 로마군 포로를 십자가로 못박에 걸어두었다.

십자가형은 오래도록 고통받다 사람을 죽게한다. 팔목과 발목에 대못을 박아 몸을 지탱시키는데 이렇게 하면 몸의 무게가 아래로 쳐지게된다.

그러면서 흉부에 강한 압박을 받는 동시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된다.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한 한 로마군인은 72시간동안 살아있었다고 한다.

 



로마원로원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닿았고 해외로 원정갔던 정예군대를 불러들였다.

크라수스는 새로 나타난 경쟁자들때문에 조바심을 느꼈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런 크라수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항복하는 대신 반란군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크라수스는 노예들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노예반란군들은 야밤에 자유를 향해 마지막 시도를했다. 난공분락이던 성벽을 넘은 것이다.

크라수스의 포위망을 뚫고 그들은 북으로 진군했다. 해외에서 돌아온 2개의 로마군과 크라수스의 군대가 세군데에서 그들을 조여왔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군을 상대로 9번이나 승리했으며 로마를 2번이나 종단했다.

수적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싸우다 죽기를 원했다. 솔라리스 강에서 노예군대는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크라수스는 드디어 원하던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전투에서 2만에 이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이 죽었으며 스파르타쿠스 역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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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시체를 찾았으나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크라수스와 로마는 노예반란군 6천명을 반란에 대한 본보기로 로마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모두 십자가에 못박았다




< 6천여명을 십자가형에 처함 >

 

로마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로마에대한 반란의 댓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실패로 끝이났지만 강대국이던 로마에 대항하여 자유를 위해 싸운 사실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있다.

비천한 노예인 동시에 검투사인 그가 자유를 상징하는 영웅적 존재가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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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의 동상 >

 

참고 : mbc 스파르타쿠스의 실체, kbs 워리어, 구글, 위키백과



http://www.fmkorea.com/index.php?mid=knowledge&category=33474171&search_keyword=%EC%8A%A4%ED%8C%8C%EB%A5%B4%ED%83%80&search_target=title&document_srl=7845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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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퍼왔다 ㅇㅇ 읽판이니까 문제될거 없겠지?



12개의 댓글

2016.09.07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넘어가 자유를 얻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변했을랑가
0
@시민룰루
로마의 사치와향락을 맛보며 살았는데 북으로 가면 야만인들처럼 살아야되니 그게 싫어서 돌아왔다는 썰이있음
0
2016.09.07
@근혜가문재인걸안철수
닝겐의 욕심은 끝이없고..
0
2016.09.07
로마 전역을 왔다갔다 했다는건, 결국 로마를 전복시킬만한 힘이 없어서 기회 보느라 갈팡질팡 했다는거? 아니면 오판때문에그런거임?

어차피 알프스 넘어봐야 고대 신분제 국가들이 받아주면 거기서도 하층계급이 들고일어날테니 탈출한 노예반란군을 반길리도 없고
중립국이 반군을 받아들이면 로마와 외교적으로도 득될게 없을뿐더러,빠져나간 노예반란군은 오갈데 없는 떠돌이 취급될게 뻔할텐데
0
2016.09.07
@동심파괴
우리가 그시대 사람이 아니라 모르지만 결국은 물량이 딸린거지

당시 로마를 상대로 저만큼 개긴 집단이 없음

로마는 내부에서썩어 망한거지 외부에서 쳐들어와 망한게 아니니까..
0
2016.09.07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엄청 야하잖아
0
2016.09.07
@푸드득푸득
군대에서 합법 야동이라고 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0
2016.09.08
@반선FC
아이..엠.. 스파르타쿠스!!!!
0
2016.09.07
엥? 파키스가 집정관을 뜻하는 장식물일텐데?
0
2016.09.09
@년째 숙성주
파스케스는 로마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임.

선출공무원들은 직급에 따라서 파스케스를 든 호위가 있음.
뭐 집정관 법무관 이런 고위
0
2016.09.09
폭도 ㅂㅁ. 그리고 도끼는 파스케스임
0
2016.09.09
와 ㅈㄴ 재밌다 ㅋㅋㅋ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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