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SF 단편 - 차가운 방정식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1954)] 

/ 톰 고드윈(Tom Godwin)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상한 낌새는 전혀 없었다. 단 하나, 생체 감지기의 자그맣고 하얀 바늘을 제외하고는. 조종실에는 혼자뿐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희미한 엔진 소리뿐이지만, 그러나 감지기 의 바늘은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모선인 스타더스트호에서 발진할 때에는 0을 가리키고 있던 바늘 이 한 시간쯤 지난 지금은

 

분명히 기어올라가 있다. 조종실 건너편 화물칸에 무언가가 있다. 분명히 열을 방사하고 있는 어떤 생물체가 저기에 숨어 있다.

 

감자기에 포착된 물체가 무언인지는 고민해 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건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었다.

 

 

 

 

그는 조종석 뒤쪽으로 등을 기대고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긴급연락선의 조종사로

 

일해 왔던 그는 항상 생명 위협과 맞닥뜨리며 살아온 까닭에 다른 사람의 죽음을 접해도 무덤덤하게 보아 넘길 수 있도록

 

감정이 무디어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가 할 일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 다른 해결책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무리 닳고닳은 긴급연락선 조종사라고 하지만, 터덜터덜 화물칸으로 걸어가서

 

 

 

 마치 쓰레기를 갖다 버리듯이 생판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건 법이니까. 우주 항행법 제 8장 제 12절에는 참으로 무정하고 단호하게

 

 

 

 우주의 철칙이 한 문장으로 명시되어 있다.

 

 

 

 

"긴급 연락선에 탑승한 밀항자는 발견 즉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건 어떠한 호소나 항변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 원칙이었다.

 

이 냉엄한 조항은 그러나 인간들의 무자비함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주 개척자들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극약처방이었다.

 

초광속 항행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류의 우주탐험 범위는 은하계 변경까지 점차 넓어졌고, 사간이 지날수록 우주 곳곳에는

 

 

 

미지의 별에서 한계상황과 싸우며 힘겹게 개척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은하계 구석의 외딴 별에 고립된 탐사대나

 

 

 

개척 식민지들은 지구와의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아득한 우주의 심연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거대한 우주선 모선은 인류 전체의 지혜와 노력이 총 결집된 눈부신 성과였다. 초광속 우주선 한 척을 건조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다. 따라서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개척지들마다 일일이 들러가며 필요한 지원이나 보급 활동을 펼 만큼

 

 


 많은 수의 모선을 만들 수가 없었다.

 

 

 

 

 

모선의 주임무는 새로이 개척된 외계 행성에 이주자들을 실어 나르는 것이었고, 그런 대규모 식민지들만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선 모선들의 운항 계획표는 아주 빡빡한 것이었고, 항행 도중에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어 예정에 없던

 

 

 

다른 개척 행성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운항계획표가 엉망이 되어 버려

 

 

 

지구와다른 모든 우주개척지들과의 연락체계는 완전히 빠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우주선 모선이 방문할 계획이 없는 식민지에서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에는 별도의 비상 연락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긴급연락선'이었다. 긴급연락선은 조그맣게 접혀질 수 있어서 모선에 실어도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로켓 엔진에다 가벼운 경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긴급연락선은 최소한의 연료만을 소비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우주선 모선은 보통 4대의 긴급연락선을 탑재하고 다녔는데, 항로 주변의 개척 행성이나 다른 우주선에서 긴급 호출이 있을 경우

 

 

 

 보급품이나 필요 인원을 긴급연락선에 실어 보내는 것이다. 긴급연락선은 초광속추진이 불가능한 1회용 장비였다.

 

 

 

우주선 모선은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이 긴급연락선 만을 투하한 채 우주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주선 모선에 장착된 엔진은 액체 연료를 사용하는 재래식 로켓이 아니라 핵 에너지 변환장치였다. 긴급연락선처럼

 

 

 

작은 우주선에 달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거대한 물건이었다. 우주선 모선들은 긴급연락선용의 액체 연료를 일정량 싣고 다녔지만

 

 

 

 제한된 공간이나 무게 때문에 넉넉한 양은 아니었다. 연료는 아주 정밀하게 미리 계산되어 실려졌다. 꼭 필요한 만큼만.

 

 

 

 

컴퓨터는 조종사, 화물, 긴급 연락선의 무게를 목적지까지의 비행 경로와 함께 계산하여 연료의 최소 필요량을 한 방울의

 

 

 

 

오차도 없이 산출해 내었다. 물론 그 방정식에는 `밀항자의 체중'같은 변수는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스타더스트호는 우주를 항행하던 도중에 우덴 행성의 개척 기지들 중 하나로부터 긴급 구호 요청을받았다. 그곳에 있는 여섯 명의

 

 

 

탐사대원들은 `칼라'라는 녹색의 곤충에 의해 지독한 열병에 걸려 있었는데, 때마침 엄습한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 때문에

 

 

 

 기지 전체가 풍지박산이 나면서 치료 혈청들이 모두 유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스타더스트호는 이 구호 요청을 관례대로 처리했다

 

 

 

 혈청을 실은 긴급연락선을 발사하고는 예정된 항로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이 우주공간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지금, 긴급연락선의 계기가 뭔가를 말하고 있다. 화물칸에 혈청 말고도 뭔가가 있다고 한다.

 

 

 

 

 

그는 화물칸의 좁고 하얀 문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안에 살아 있는 인간이 있다. 이젠 조종사가 자신을 발견해도 쫓아내기에는

 

 

 

 너무 늦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이다. 밀항자에겐 정말 너무 늦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조종사에게 발견되는 순간,

 

 

 

 밀항자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긴급 연락선이 대기권에 진입하여 감소하게 되면 밀항자의 몸무게 때문에 착륙하기 훨씬 전에

 

 

 

 연료탱크가 바닥이 날 것이다.

 

 

 

그리하여 1천 피트나 1만 피트 상공에서 속수무책으로 추락하기 시작할 것이다. 조종사와 밀항자는 긴급연락선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고, 금속과 플라스틱, 살점과 핏덩이들의 잔해가 한데 뒤엉킨 채 처참한 종말을 맞을 것이다. 밀항자는 긴급연락선에

 

 

 

올라탄 순간 자신의 시한부 인생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긴급연락선의 조종사와 혈청을 기다리는 탐사대원 여섯 명의

 

목숨까지 함께 담보로 삼고.

 

 

 

생체감지기의 하얀 바늘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이제부터 하려는 일은 불청객에게나

 

 

 

그 자신에게나 몹시 끔찍한 일이다. 빨리 해치울수록 좋다. 그는 조종실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작고 하얀 문 앞에 우뚝 섰다.

 

 

 

"나와!"

 

 

 

응응거리는 기계 소리들보다도 더 거칠고 냉엄한 목소리였다.

 

 

 

안쪽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다가 곧 조용해졌다. 밀항자가 한쪽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감이 사라지면서 들키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나오라고 했잖아!"

 

그는 밀항자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긴장한 채 문을 주시하면서 손을 옆구리에 찬 총 가까이 가져갔다.

 

문이 열렸다. 밀항자는 미소를 지으며 걸어나왔다.

 

 

"알았어요. 항복이에요.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밀항자는 어린 소녀였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손이 총으로부터 툭 떨어졌다.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밀항자는 남자가 아니었다.

 

 

 

10대 소녀가 작고 하얀 집시 샌들을 신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 갈색 곱슬머리 소녀의 키는 겨우 그의 어깨를 넘을락말락했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소녀는 약간 기우뚱하게 서서 미소를 짓고 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소녀의 눈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두려움도 없이 그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거요?' 라고 만약 낮고 탁한 남자 목소리가 질문을 했다면 그는 즉시 행동을 취함으로써 대답했을 것이다.

 

 

 

 일단 밀항자의 신분증명 기록을 빼앗고는 에어록 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을 것이다. 밀항자가 반항하면 그는 총을 발사했을 것이다.

 

 

 

 그건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고, 1분 안에 밀항자의 몸은 우주공간으로 튕겨나갔을 것이다. 밀항자가 남자였다면 말이다.

 

 

 

 

 

그는 조종석으로 돌아왔다. 소녀에게 손짓을 해서 벽쪽에 있는 계기판 아래 상자에 앉도록 지시했다. 소녀는 순순히 따랐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소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못된 장난을 하다 들킨 강아지처럼 죄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무 말씀 안하시네요. 잘못했어요. 어떻게 되는 거죠? 벌금을 내야 되나요, 아니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왜 긴급연락선에 숨어들었지?"

 

"우리 오빠가 보고 싶어서요. 오빠는 우덴에 있는 탐사기지의 대원이에요. 오빠가 일하러 지구를 떠나고 나서 1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요."

 

"원래 스타더스트호를 타고 있을 때의 목적지는 어디였나?"

 

"미미르요. 제가 일하러 가는 곳이에요. 아빠는 항상 집에 돈을 부쳤고 저를 위해서 언어학 특별과정의 수업료를 대 주었어요.

 

저는 생각보다 빨리 그 과정을 졸업했어요. 그리고선 미미르에 일자리를 얻은 거에요. 게리오빠는 1년 뒤에나 우덴 일을 마치고

 

미미르로 올 수 있어요. 그전에는 오빠를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기 숨어들었던 거에요. 여길 보니까 공간도 충분했고 벌금을

 

 낼 각오는 진작 했어요. 또다시 1년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비록 규칙을 어기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요."

 

`규칙을 어기는 줄은 알고 있었어요.' 소녀가 법에 무지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 소녀는 이제껏 지구에서 살아왔고 따라서

 

 

 우주 개척지의 법이 그 법을 탄생시킨 환경만큼이나 거칠고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소녀처럼

 

 

 개척지의 가혹한 환경에 무지한 사람들을 위해 스타더스트호의 긴급 연락선 격납고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붙어 있다.

 

 

 누구든 신경 써서 살펴보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승무원 외 절대 승선 금지!]팻말이....

 

"오빠는 아가씨가 스타더스트호를 타고 미미르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예, 지구를 떠나기 한 달 전에 오빠에게 전보를 쳤어요. 졸업했다는 얘기랑 미미르에 한 1년 정도

일할 자리를 얻었다는 얘기를요. 오빠는 그때쯤에 승진해서 미미르로 올 예정이거든요. 오빠는 한

곳에 1년 이상 머물지 않아도 되요."

 

 

 

 

우덴에는 탐사 기지가 두 군데 있었다.

 

 

 

 

"오빠 이름이 뭐지?"

 

"크로스, 게리 크로스예요. 오빠는 우덴 제 2기지에 있어요. 주소에 그렇게 써 있었어요. 아저씨, 오빠를 아세요?"

 

 

 

"혈청을 요청한 곳은 제 1기지였다. 제 2기지는 서쪽 바다를 가로질러 8천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아니, 난 모르는 사람이야."

 

그는 계기판으로 몸을 돌려 약간 감속을 줄였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결국 닥쳐올 결말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갑자기 긴급연락선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소녀의 몸은 무기력하게 흔들려 그녀가 앉은 상자 위로 반쯤 들려졌다.

 

 

 

 

"어... 속도를 빠르게 하셨죠? 왜 그렇게 했어요?"

 

 

 

그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연료를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우주선에 연료가 많지 않은가요?"

 

 

 

그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소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밀항자를 어떻게...... 처리하세요? 저는 아무도 안볼 때 살짝 들어왔어요. 누군가 우덴으로 보낼 보급품 지급 명령서를

 

 가지고 보급품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제가 마침 거기에 있었거든요. 청소부 여자애가 겔란 태생이라고 그 애랑 겔란어를

 

연습하고 있었어요. 떠날 준비가 다 되고 아저씨가 들어오시기 직전에 몰래 화물칸에 숨어들었어요. 솔직히 말하지만 이건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이에요. 오빠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아저씨가 그렇게 무섭게 쏘아보시니까 아무래도 아주

잘못한 일인 것 같네요. 하지만 전 얌전한 모범 죄수가 될께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소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벌금이 아주 비싸더라도 다 낼 수 있어요. 요리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해요. 뭐든지 자질구레한 일은 다 할 수 있어요.

 

간호도 약간 할 수 있구요."

 

 

그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덴 기지에서 요청한 보급품이 무엇인지 아니?"

 

"아니요. 그건 왜요? 탐사 장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왜 소녀는 음흉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일까?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는 범죄자라면, 그래서 낯선 개척 행성에

 

 

 

숨으려고 밀항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새로운 식민지에 숨어들려는 기회주의자였다면, 아니면 어린 양들을

 

 

 

구원할 생각으로 개척지 포교에 나선 괴짜 전도사였다면. 긴급 연락선의 조종사를 하다 보면 일생에 한 번쯤은 그런 밀항자와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뒤틀려진 인간,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 잔인하고 위험한 인간을. 그러나 푸른 눈을 하고 귀여운 미소를

 

 

짓는 소녀는 결코 아니다. 기꺼이 벌금을 내겠다고, 그리고 오빠를 보기 위해 어떤 궂은 일이라도 하겠다는 그런 소녀는 아니다.

 

 

 

 

 

그는 조종계기판으로 돌아앉았다. 스타더스트호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송신 스위치를 올렸다.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마저 사그라지기 전에는 소녀를 무정하게 에어록에 밀어 넣을 수가 없다. 짐승을 다루듯이. 아니면 사나이를 다루듯이.

 

 

 

대기권에 돌입하기 전에 긴급연락선의 감속을 잠시 줄이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통신기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스타더스트다. 신분을 밝혀라."

 

"긴급연락선 34G11호의 바튼. 비상사태다. 델하트 사령관을 대 주시오."

 

 

 

접속 회선이 바뀌는 동안 희미하게 소음이 깔려 나왔다. 소녀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더 이상 미소가 감돌고 있지 않았다.

 

 

 

"나를 잡으러 오라고 부르실 건가요?"

 

 

 

통신기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감이 멀게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사령관, 긴급연락선에서 교신 요청입니다."

 

 

소녀는 걱정스럽게 재차 물었다.

 

 

 

"나를 잡으러 올 건가요? 결국 오빠는 볼 수 없는 거예요?"

 

"바튼인가?"

 

 

 

델하트 사령관의 퉁명스럽고 거친 목소리가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비상사태라니, 뭔가?"

 

"밀항자입니다."

 

"밀항자라고?"

 

 

약간 놀란 목소리였다.

 

"예삿일은 아니군. 그렇지만 비상호출이라니. 시간 안에 밀항자를 발견했으니 위험은 없을 것이고, 그냥 처리하면 되지 않나?

 

그리고 운항기록실에 통보만 하면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연락이 갈 테니까."

 

"그 때문에 연락한 것입니다. 밀항자는 아직 승선중이고 상황이 좀... 미묘합니다."

 

 

사령관은 성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미묘하다니, 무슨 소린가? 자네,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 긴급연락선 안에서 발견되는 밀항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야 돼."

 

 

 

소녀는 숨을 헉 멈추더니 더듬거렸다.

 

"무슨... 뜻이죠?"

 

"밀항자는 소녀입니다."

 

"뭐라고?"

 

"오빠를 만나 보겠다고 몰래 탔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게다가 상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 알았다."

 

 

 

 

 

사령관의 목소리는 더 이상 퉁명스럽지 않았다.

 

 

 

"날 왜 불렀지? 어떤 희망을 기대한 건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 스타더스트는 예정대로 운항해야 해.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어. 나도 자네의 심정을 잘 이해하겠다. 하지만 자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네.

 

그렇게 해야만 해... 운항기록실로 연결해 주지."

 

 

통신기가 희미하게 칙칙거렸다. 그는 소녀 쪽으로 돌아앉았다. 소녀는 긴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경악한 표정이었다.

 

"무슨 뜻이죠. 그렇게 해야만 한다니. 절 우주선 밖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게 무슨 말이죠? 정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저를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럴 순 없어요. 정말로 뭐라고 한 거죠?"

 

 

 

거짓말로 잠시나마 안심하도록 해 주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 아가씨가 방금 들은 그대로야."

 

"안돼요!"

 

소녀는 마치 그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공격을 막아내려는 듯이 두 팔을 반쯤 들어올린 채로. 소녀의 눈은 불신과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돼."

 

"아니에요. 농담이죠? 저를 놀라게 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미친 짓이에요. 그럴 순 없어요!"

 

"미안하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미리 얘기해 주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나는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거야. 스타더스트호에 먼저 연락을 해야만 했어.

 

 사령관의 이야기는 아가씨도 들었지."

 

"그래선 안돼요. 우주선 밖으로 나가면 전 죽어요."

 

"알고 있어."

 

소녀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의 눈에 어린 믿기지 않는다는 거부감을 그에게서도 찾아보려는것 같았다.

 

 

 소녀의 얼굴에 천천히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알고... 있다구요?"

 

 

 

소녀는 말을 더듬었다. 얼이 빠진 듯한 괴상한 모습이었다.

 

"그래야만 돼."

 

"정말인가요? 그렇게 해야만 돼요?"

 

 

 

소녀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축 늘어졌다. 조그맣고 낡은 인형처럼 흐늘거리고 있었다. 저항과 거부감이 갑자기 빠져나가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나를... 죽게 할 작정이에요?"

 

"미안해."

 

 

그는 다시 침통하게 말했다.

 

"아가씨는 내 심정을 모를 거야. 이건 규칙이야. 전 우주의 누구도 예외없이 지켜야만 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나는 죽을 만한 죄를 짓지는 않았어요. 난 안했어요......"

 

 

 

그는 힘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있어. 아가씨는 죽을 죄를 짓진 않았지."

 

"긴급연락선!"

 

 

 

통신기에서 금속성의 삑삑 소리가 났다.

 

 

 

"운항기록실이다. 밀항자의 신분증명 자료를 보내라."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녀 앞에 섰다. 소녀는 의자의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갈색 머리 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이 큐피드의 활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지금... 인가요?"

 

"아가씨의 신분증명 기록이 필요해."

 

 

 

소녀는 의자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두려움에 떨면서 목에 걸린 플라스틱 원판의 고리를 초조하게 더듬거렸다.

 

 

그는 소녀 대신 손을 내밀어 고리를 푼 다음 원판을 가지고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자료를 보내겠소. 기록실. 신분증명번호 T-8-3-7......"

 

"잠깐만."

 

기록실에서 말을 끊었다.

 

"이건 물론 회색 카드에 기입할 내용이겠죠?"

 

"그렇소."

 

"실행시간은?"

 

"나중에 알려 주겠소."

 

"나중이라니, 무슨 소립니까? 밀항자의 사망시각은 발견 즉시가 아니오?"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지금은 대단히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먼저 신분증명 내용을 받아 주십시오. 밀항자는 어린 여자아이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걸 그대로 듣고 있소. 이해하겠습니까?"

 

 

 

충격 뒤에 오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기록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계속하십시오."

 

그는 원판을 읽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오래도록 이 피할 수 없는 일을 지연시키려고 천천히 읽었다. 소녀가 이제껏 겪어 보지 못했을

 

 

 

 

 이 절망적인 공포를 견디도록 1초라도 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체념과 감내 속에서나마 소녀를 도우려고 애썼다.

 

"번호 T8374-Y54. 성명, 마릴린 리 크로스. 성별, 여성. 출생일, 2160년 7월 17일..." 18살밖에 안 되

었다... "신장, 5피트 3인치. 체중, 110파운드..."

 

 

 

너무나 가볍다. 하지만 얇은 물거품 정도밖에 안되는 긴급연락선에는 치명적이다...

 

 

"모발, 갈색. 눈, 푸른색. 피부, 백색..."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혈액형, O형. 목적지, 미미르 포트 시티..." 무의미한 자료들이다......

 

기록을 다 불러 준 뒤 그는 말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소."

 

 

그는 다시 소녀를 향해 돌아섰다. 소녀는 벽에 등을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서 무감각한,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 기다리고 있는 거죠? 아저씨가 나를 죽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죠? 내가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거죠?"

 

 

긴장이 풀어졌다.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모두들 내가 죽기를 원해요.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아무도 다치거나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 난 단지 오빠가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가씨 생각처럼 간단한 게 아니야. 전혀 아니지. 아무도 아가씨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아. 만일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만 있다면 아가씨는 절대로 죽지 않아."

 

"그런데 왜죠?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래야 하는 거죠?"

 

"이 긴급연락선은 `칼라'라는 열병의 혈청을 우덴의 제 1기지로 운반하고 있어. 회오리바람이 몰아

쳐서 보급품들이 다 파괴되었거든. 아가씨의 오빠가 있는 제 2기지는 거기서부터 바다를 가로질러

8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제 1기지를 도우러 갈 수가 없었어. 이 긴급연락선이 예정대로 시

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제 1기지 대원들 여섯 명은 모두 죽고 말 거야. 긴급연락선들은 원래 목적

지에 도착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연료만을 싣게 되어 있어. 정기우주선에 여유공간이 별로 없

기 때문이지. 그런데 아가씨가 탔기 때문에 이 우주선의 무게가 늘어나서 연료가 일찍 바닥이 바닥

이 나 버리게 되었어. 우덴에 착륙하기 전에 연료가 떨어져서 공중에서 추락하게 될 거야. 그러면

아가씨도 나도 우주선과 함께 박살이 나서 죽게 되겠지. 물론 혈청을 기다리던 여섯 사람도 같은 운

명이 되고."

 

1분이 넘도록 소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소녀의 눈은 점점 무감각해지는 듯했다.

 

"그 때문인가요?"

 

마침내 소녀는 입을 열었다.

 

"연료가 충분치 않아서. 단지 그 이유로군요."

 

"그래."

 

"혼자 죽든지, 아니면 일곱 명의 목숨을 함께 데리고 가든지. 그거로군요."

 

"그렇지."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구요."

 

"아무도."

 

"저...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가요? 모두들 함께 애쓰고 궁리해 보면 저를 구할 길이 있는 것 아닌가요?"

 

"모두가 너를 돕고 싶어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스타더스트호에 연락을 취하는 것뿐이었어."

 

"하지만 스타더스트호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요? 혹시 다른 정기 우주선이 이 근처를 지나가지는 않나요? 저를 도울 만한

 

사람이나 장소는 전혀 없는 건가요? 정말로 희망은 없는 건가요?"

 

 

 

소녀는 애타는 마음으로 몸을 앞으로 내민 채 대답을 기다렸다.

 

 

 

"없어."

 

 

차가운 돌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소녀는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표정에서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보였다.

 

 

 

"정말로 확실한 건가요? 어쩜 그렇게 쉽게 대답이 나와요?"

 

 

"확실한 거야. 이 근처 40광년 안에는 다른 우주선은 하나도 없어."

 

"아무도, 그 누구도 제 운명을 구원할 수 없는... 거예요?"

 

 

 

소녀는 자신의 무릎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이 냉혹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듯 말이 없었다.

 

 

 

 소녀는 손가락으로 스커트 자락을 꼬기 시작했다.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 모든 희망과 기대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체념으로 옮겨진 것이다. 소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밖에는 여유가 없다. 얼마나 남았을까?

 

 

 

 

긴급연락선에는 선체 냉각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기권 진입 전에 속도를 절반 정도 감속해야만 한다.

 

 

 

중력 0.10 정도까지 감속할 것이다. 컴퓨터가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착륙예정지에 접근할 것이다.

 

 

 

긴급연락선이 스타더스트호에서 떨어져 나온 곳은 우덴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에 지금 아주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착륙예정지에 접근하고 있다. 감속을 해야만 하는 시기는 곧 닥칠 것이다. 그러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순간도

 

 

 

바로 그때 닥치는 것이다. 감속을 시작하면 소녀의 몸무게는 두 배가 된다. 컴퓨터가 긴급연락선의 필요 연료량을

 

 

 

 계산해 낼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변수. 소녀는 감속이 시작되기 전에 우주선을 떠나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언제쯤이 될까. 얼마나 오래 소녀를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남았죠?"

 

 

 

그는 자신의 생각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흠칫 놀랐다. 그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컴퓨터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긴급연락선은 대기권에 돌입한 뒤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것에 대비하여 극히 소량이지만 여분의 연료를 갖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모선의 컴퓨터에는 긴급연락선이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료들이 입력되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입력된 자료들을 손댈 수 없고, 단지 추가 입력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소녀의 몸무게와 출력 0.10으로까지

 

 

 

 감속을 시도해야 할 정확한 시각을 얻기 위해 추가 입력이 필요하다.

 

 

 

"바튼?"

 

 

 

델하트 사령관의 목소리가 갑자기 통신기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막 스타더스트호를 불러내려고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기록실에 알아보니 아직도 보고서가 다 채워지지 않았더군. 감속을 줄이고 있나?"

 

사령관은 이미 그가 어떤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중력 0.10에서 감속할 생각입니다. 17시 50분에 감속을 멈추었고 소녀의 체중은 110파운드입니다.

컴퓨터가 계산해 주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중력 0.10을 유지할 작정입니다. 컴퓨터에 입력해 주시겠

습니까?"

 

원래 긴급연락선의 조종사는 항로 변경을 할 수가 없다. 규칙 위반이다. 감속 시기도 물론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그러나 델하트 사령관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물어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기우주선의 사령관이 될 수 있다.

 

 

"입력해 주겠네."

 

 

 

단지 그 말뿐이었다.

 

통신기가 조용해졌다. 그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컴퓨터는 불과 몇 초 뒤면 결과를 알려 줄 것이다.

 

 

 

 새로운 자료들이 기억장치의 입력용 금속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전기신호가 복잡한 회로를 통과하고 중계장치가 찰칵찰칵거린다.

 

 

 

 조그만 톱니바퀴의 이도 돌아간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기신호가 해낸다. 옆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소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형태도 없고 마음도 없는 전기신호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연산장치 속의 금속 조각들이 잉크가 묻어 있는

 

 

 

 리본 위에서 빠른 박자로 군무(群舞)를 출 것이다. 그 다음 출력 장치의 금속 구멍은 자료가 인쇄된 종이를 잘라서 토해 낼 것이다.

 

 

 

계기판의 정밀 시계가 18시 10분을 가리켰을 때 델하트 사령관이 다시 나왔다.

 

 

 

 

"19시 10분에는 감속을 시작해야 한다."

 

 

 

소녀는 계기판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곳으로부터 떨어졌다.

 

 

 

"제가 떠나야 할 시간을 말한 거지요?"

 

 

 

소녀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다시 무릎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항로를 수정해 주겠다."

 

 

 

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예외는 있을 수 없지만 특별히 상황을 참작하는 것이다. 더 이상은 도울 수가 없다. 새로운 지시에 반드시 따르도록 하라.

 

 19시 10분에는 보고서 작성을 완료해야 한다. 자, 수정된 항로 자료를 불러 주겠다."

 

 

낯선 기술자의 목소리가 수정된 항로를 불렀다. 그는 계기판 가장자리에 있는 메모판에다 좌표를 받아 적었다. 이제 감속의 시기가 결정되었다.

 

 

 

대기권 가까이 진입하여 중력 5 정도가 되면 시작할 것이다. 중력 5에서 110파운드는 550파운드가 된다.

 

 

 

 

기술자는 항로 좌표를 불러 준 뒤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통신기에서 사라졌다. 그는 주저하면서 통신기의 스위치를 내렸다.

 

 

 

18시 13분이다. 19시 19분까지는 달리 보고할 일이 없다. 소녀가 마지막 순간에 하는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이 듣게 놔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는 계기판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불필요하리 만치 느리게 일을 진행했다. 소녀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에겐 소녀가 상황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만한 방법이 없었다. 동정 어린 말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

 

 

 

미동도 없던 소녀가 몸을 움직였다. 18시 20분.

 

 

 

"그 길뿐이군요."

 

소녀를 마주보기 위해 그는 뒤로 돌았다.

 

"... 이해하겠지. 방법이 있다면 모두들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아. 절대로."

 

"알아요."

 

 

소녀가 대답했다. 얼굴빛이 좀 회복되어 있었다. 입술도 더 이상 파랗게 질려있지 않았다.

 

 

"나를 태우고 갈 만큼 충분한 연료가 없다는 거지요? 긴급연락선 안에 몰래 숨어 탄 순간 나도 모르는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린 거군요. 대가를 치러야겠죠?"

 

소녀는 인간이 만든 `승선금지'라는 법을 어겼다. 그러나 그 법은 사실 인간이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철회시킬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자연법칙 제 1조는, 1만큼의 연료로는 1만큼의 질량만을

 

 

 

가진 긴급연락선을 목적에 안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제 2조는, 1만큼의 연료로는 1만큼의 질량에다 `소녀'만큼을

 

 

 

더한 긴급연락선은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긴급연락선은 자연법칙에만 충실하게 순응한다.

 

 

 

 소녀를 향한 인간들의 연민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자연법칙 제 2조를 거스를 수는 없다.

 

 

 

"무서워요. 난 지금 죽기 싫어. 살고 싶어요. 모두들 나를 그냥 포기하고 있어. 마치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면서. 난 죽어야 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어요."

 

"아가씨, 그렇지 않아. 나도, 스타더스트호의 사령관도, 그리고 운항기록실의 기록원도 모두들 걱정

하고 있어. 아가씨를 도우려고 다들 최선을 다한 거야. 물론 충분치 못하지만. 아니, 사실상 아무 일

도 못한 거나 다름없지.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연료가 모자라서... 난 이해할 수 있어요."

 

 

소녀는 그의 말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난 죽어야 해. 나 혼자서."

 

소녀가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소녀는 죽음이라는 위험과 언제나 공존해야 하는 환경을 알지 못한다.

 

 

 

바다의 파도 거품이 바위투성이 해안을 향해 밀려가 부서지듯이 인간의 생명이 그처럼 허약하게 무너져 버릴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알지 못한다. 소녀는 평화로운 지구에서만 살아왔다. 젊음을 즐기고 또래들과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구.

 

 

 

삶이 언제나 소중하게 보호되는 곳. 내일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항상 존재하는 곳. 소녀는 이제껏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태양, 신비스런 달빛,

 

 

 

 우아한 예의가 있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거칠고 음산한 개척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죠? 이렇게나 끔찍하게도 빠르게? 한 시간 전에 난 스타더스트호에 타고 있었어요.

 

 미미르로 갈 예정이었죠. 그런데 스타더스트호는 떠나 버리고 나는 죽어야 한다니. 난 게리오빠도 엄마도 아빠도 다시는 못 봐요.

 

아무 것도 다시는 못 본다구요."

 

 

그는 어색하게 머뭇거렸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무정하고 잔인한 불의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도록 소녀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소녀는 외계의 개척지가 어떤 곳인지 모른다. 안전한 지구의 원시림 정도로나 생각할 것이다. 지구에 사는 귀여운 소녀가 우주선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런 잔혹한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에서는 소녀가 곤경에 처했다면 재빨리 검은 색 경찰차가

 

 

 

 출동할 것이다. 모든 뉴스 화면이 소녀의 이야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이 마릴린 리 크로스란 소녀를 구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긴 지구가 아니다. 경찰차도 없다. 그들을 남겨 둔 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린 스타더스트호만이

 

 

 

 있을 뿐이다. 소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내일 뉴스에서도 마릴린 리 크로스의 미소는 없을 것이다. 단지 한 긴급연락선 조종사의 가슴에 영원토록

 

 

 

 아픔을 주는 이름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단지 스타더스트호의 기록실 회색 카드 위에서나 남을 이름일 뿐이다.

 

 

"여기는 지구와는 달라.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울 수가 없기 때문이야. 개척지는 죄다

지구와는 아득하게 먼 곳들이야. 서로들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도 얼마 없지. 우덴을 봐. 전체를

통틀어 16명뿐이야. 그저 탐사기지 둘에 대원 몇 명들. 처음 개척하는 식민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험난한 환경과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어. 나중에 올 정착민들을 위해 기반을 닦아 두려고 애쓰면서

말이야. 낯선 외계의 환경에서 한번의 실수란 곧 죽음을 의미하지. 외계 개척지에 안전이란 없어.

정착민들을 위한 기반 시설이 완성되어 새 세계가 어설프게나마 안정될 때까지는 안전이란 있을 수

가 없지. 그때까지 사람들은 실수에 대해 가혹한 대가를 지불해야 돼.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왜냐하면 아무도 도울 수가 없기 때문이지."

 

"전 미미르에 가고 있었어요. 개척지는 몰라요. 단지 미미르에 갈 예정이었다구요. 거긴 안전해요."

 

"미미르는 안전하지. 하지만 그리로 가던 정기선을 떠난 것은 바로 아가씨 자신이야."

 

 

 

소녀는 한동안 침묵했다.

 

 

 

"처음엔 너무 신났어요. 여기엔 공간도 충분해 보였고, 곧 게리오빠도 볼 수 있을 테니까. 연료에 대

해서는 전혀 몰랐어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겁나지도 않았어요. 야단 맞고 벌금을 내면 그만이

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소녀의 이야기는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그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 없이 갈망에 찬 용단을 내리려고 끔찍한

 

 

 

 공포와 싸우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연락선 선창에 둥근 공처럼 떠올라 보이는 우덴은 대기가 푸른 안개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별들이 반짝이는 죽음의 암흑을 배경으로

 

 

 

우주를 유영하는 듯했다. 엄청나게 큰 매닝 대륙이 동해에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은 모래무덤처럼 무질서하게 뻗어나가 있었다.

 

 

 

보다 작은 동쪽 대륙은 서쪽의 절반 가량이 아직 시야에 들어왔다. 우덴 행성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따라 가느다란 그림자 선이 있었는데

 

 

 

동쪽 대륙은 우덴이 자전하면서 점점 그 선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는 대륙 전체가 보였지만 지금은 1000마일 정도가

 

 

 

얇은 그림자 선 안의 그늘로 들어가서 행성의 밤을 향해 반대편 쪽으로 돌고 있다. 짙은 파란색 점으로 보이는 로터스 호수가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제 2기지가 있는 곳은 로터스 호수의 남쪽 가장자리 어디쯤이었다. 그곳은 곧 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우덴의 자전 때문에 제 2기지는

 

 

 

머잖아 무선 통신이 불가능한 위치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소녀가 오빠와 통신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리기 전에 미리 말해 주어야 한다. 어쩌면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 둘 다에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두 남매는 마지막 순간에 나눌 이야기들을 길이 간직할 것이다.

 

 

칼날처럼 가슴을 에이는, 그러나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소녀에게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오빠에게는 남은 삶을 위해서.....

 

 

 

그는 단추를 눌러 화상스크린에 격자망을 띄우고 행성의 지름을 이용해서 거리를 측정했다. 제 2기지가 있는 로터스 호수의 남쪽 끝자락은

 

 

 

 머지않아 무선통신 범위 밖으로 벗어나 버릴 것이다. 5백 마일, 30분 남았다. 계기판의 정밀시계가 18시 30분을 가리켰다.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19시 05분을 넘어서는 안된다. 우덴의 자전 때문에 소녀 오빠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어져 버릴 것이다.

 

 

 

서쪽 대륙의 가장자리는 이미 행성의 왼쪽 편을 따라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4천마일을 가로질러서 서해안이 있고 제 1기지가 있다.

 

 

 

서해에서 발생한 회오리바람이 기지를 강타하여 조립식 가건물들을 절반 이상 휩쓸어 버렸다. 그 바람에 의료기기들이 저장된 건물까지도

 

 

 

날아갔다. 평소에 고요하던 서해 해상에는 회오리바람이 발생하기 이틀 전부터 거대하고 부드러운 공기덩어리가 형성되고 있었다.

 

 

 

제 1기지는 일상적인 탐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가까운 바다 위에 거대한 공기 덩어리들이 뭉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공기덩어리가 어떤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 힘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기지를 덮쳤고,

 

 

 

앞에 놓여진 모든 것을 철저히 망가뜨리려는 듯이 천둥 소리를 내며 광폭하게 지나갔다. 포효하는 파괴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쓰레기같은 잔해 몇 가지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돌풍은 마치 임무를 다했다는 듯이 다시 부드러운 공기덩어리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지만 그것은 어떤 사악함이나 고의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도 없는 장님이며,

 

 

 

단지 자연의 질서에 순응했을 뿐이다. 언젠가 그것은 그 격렬한 위력으로 또다시 외계에서 온 인간들을 찾아올 것이다.

 

 

 

 

존재는 질서를 필요로 하고 질서는 존재한다. 돌이킬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자연의 법칙들. 인간은 그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 원의 둘레는 항상 파이 곱하기 지름이다. 인간의 과학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바꿀 수 없다.

 

 

 

화학품 A와 B를 C의 조건하에서 결합하면 반드시 D라는 반응이 일어난다. 중력의 법칙은 불변의 방정식이다.

 

 

 

그래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두 개의 별이 하나의 중심을 도는 거대한 공전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핵분열 과정은 정기 우주선이 인간을 다른 세계로 운반하도록 동력을 준다. 새로운 별이 생성될 때와 똑같은 과정은 동일한 효과로

 

 

 

세계를 파괴할 것이다. 자연은 그랬다. 우주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움직였다. 우주의 개척지에도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예외없이

 

 

 

 줄지어 서 있다. 때때로 그들은 지구 밖에서의 삶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에게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개척지의 사람들은 섣불리 자연을 다루려는 것이 쓰디쓴 무모함임을 이미 오래 전에 깨달았다. 그것은 장님이고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은하계의 별들은 증오도 연민도 모르는 냉엄한 자연법칙에 의해 태초의 순간부터

 

 

 

우주공간을 떠돌아 왔던 것이다.

 

 

 

 

개척지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온 순진한 소녀가 그걸 완전히이해할 수 있을까.

 

 

 

 1만큼의 연료는 1만큼의 질량에 `소녀'를 더한 긴급연락선을 목적지에 안착시키지 못한다. 긴급연락선의 조종사에게나,

 

 

 

 그녀의 오빠나 부모에게는 귀여운 10대 소녀이지만 자연의 냉혹한 방정식에서는 불필요한 변수일 뿐이다.

 

소녀는 다시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편지를 쓸 수 있을까요? 엄마와 아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그리고 오빠하고 얘기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어요?"

 

"지금 시도하려는 참이야."

 

 

그는 대답하면서 통신기를 켰다. 그리고 호출 단추를 눌렀다.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응답을 했다.

 

 

"아, 여보세요? 지금 사람들은 좀 어때요? 긴급연락선은 오는 중이요?"

 

"여긴 제 1기지가 아니오. 긴급연락선이오. 게리 크로스란 사람 있소?"

 

"게리요? 그는 오늘 아침에 대원 두 사람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나갔소. 해가 거의 지고 있으니 한 시간 안으로 돌아올 겁니다만."

 

"헬리콥터에 있는 그와 통신연결이 가능합니까?"

 

"으음, 곤란합니다. 통신기가 접촉불량으로 고장난 지 두 달이 넘었소. 기관의 회로 몇 개가 엉망이되어서 다음 번 정기선이

 

 올 때까지는 고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중요한 일입니까? 나쁜 소식? 아니면......"

 

"아주 중요한 일이오. 그가 돌아오면 가능한 빨리 연락을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대원 하나를 트럭에 태워 내보내서 들판에 나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할 일은?"

 

"없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가능한 한 빨리 부탁합니다."

 

 

 

그는 신호 단추를 작동시킬 때 지장이 없도록 소리를 들리지 않는 최저음까지 낮추었다. 그리고는 계기판 구석에서

 

 

 

 메모판을 떼어 새로운 비행좌표를 적은 종이를 찢어 낸 뒤 연필과 함께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게리 오빠에게도 편지를 쓰는 게 좋겠어요."

 

 

 

소녀가 받으면서 말했다.

 

 

 

"시간 안에 기지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소녀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연필을 쥔 소녀의 모습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마치 써야 할 이야기들 더미에 놓여 이리저리

 

 

 

 치이는 것처럼 연필이 떨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무의미하게 화상 스크린을 노려볼 뿐이었다.

 

 

 

 

소녀는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애쓰는 외로운 어린아이였다. 소녀는 사랑했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것이다.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적을 것이다.

 

 

 

그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바라면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마지막은 거짓말이겠지. 고르지 못하게 쓰여진 글들 속에서 거짓말임이 드러날 것이다. 받을 사람들에게 훨씬 더 커다란 상처를 남길

 

 

 

 용감하고 작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소녀의 오빠는 개척지에 있다. 오빠는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긴급연락선의 조종사가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긴급연락선의 조종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이동생의 죽음 소식을

 

 

 

 들을 때의 충격과 고통이 덜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 소녀의 부모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구에 있고,

 

 

 

 생사가 오로지 가느다란 선 하나에 매달려 있는 그런 곳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때로는 생명이 전혀 보장되지 않기도 하는 곳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딸을 그냥 죽게 내버려둔, 얼굴도 모르는 조종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소녀의 부모는 그를 끔찍하게 증오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가 소녀의 부모를 만나거나 알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에게는 단지 쓰라린 기억만이 남는다. 단지 냉엄한 자연의 법칙 때문에 죽어야 했던 푸른 눈의 예쁜 소녀가. 그런 그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는 앞으로 매일 밤마다 집시 샌들을 신은 그 소녀가 나타나서 죽어가는 모습에 괴로워할 것이다.

 

 

 

 

그는 굳은 얼굴로 화상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생각을 감정이 무딘 곳으로 몰아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는 소녀를 도와줄 수가 없다.

 

 

 

 소녀는 청춘이나 아름다움을 전혀 모르고 연민이나 관용도 베풀 줄 모르는 자연 법칙에 따르려 하고 있다.

 

 

 

후회는 비논리적이다. 후회가 비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지워버릴 수 있을까?

 

 

 

소녀는 알맞은 단어를 찾으려 애쓰는 듯이 때때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연필로 종이에 속삭이곤 했다.

 

 

 

18시 37분, 소녀는 다 쓴 편지를 네모꼴로 접고 그 위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마치기도 전에 운명의 시각이 닥칠까봐

 

 

 

두려워하면서 두 번이나 시계를 쳐다보았다. 두번째 편지를 마치고 이름과 주소를 적은 것은 18시 45분이었다.

 

 

 

 

 

 

소녀는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들을 책임지고 부쳐 주실 수 있어요?"

 

"물론."

 

 

 

그는 편지를 받아서 회색 유니폼 셔츠의 주머니 속에 고이 넣었다.

 

 

 

"다음 번 정기선이 오기 전까지는 보낼 수 없겠지요? 스타더스트호가 돌아오려면 오래 걸릴 거구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계속 말했다.

 

 

 

"너무 오래되면 소홀히 다룰지도 모르겠군요. 이 편지들은 저나 부모님이나 오빠에겐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알고 있어. 잘 알고 말고. 꼭 전해 줄 거야."

 

 

 

소녀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저 시계는 점점 빨리 가는 것 같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녀가 물었다.

 

 

 

"게리오빠가 시간 안에 기지로 돌아올까요?"

 

"그럴 거야. 그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라고 했으니까."

 

 

 

소녀는 손바닥으로 연필을 굴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랬으면. 전...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러면 아마 덜 외로울 거예요. 날 겁쟁이라 해도 할 수 없어요."

 

"아니야, 넌 겁쟁이가 아니다. 두려운 거지. 그건 겁내는 것과 달라."

 

"차이가 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차이가 있지."

 

"난 외로워요.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아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전에는 항상 엄마와 아빠가 있고 친구들이 있었는데. 전 친구가

많거든요. 떠나기 전날 밤에도 친구들이 송별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기억해야 할 친구들, 음악, 그리고 웃음. 화상스크린에 비친 로터스 호수는 밤의 그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게리오빠도 마찬가지 처지가 되나요? 제 말은, 만일 오빠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이

 

 그냥 혼자서 죽어야 하냐구요."

 

"개척지에서는 다 똑같아. 어떤 개척지라도 다 그럴 거야."

 

"게리오빠는 이런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냥 봉급이 많아서 보낸다며 항상 집에 돈을 부쳤어요. 아빠

의 작은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은 식구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거든요. 그밖엔 자기 일에 대해서 별로

얘기를 안했어요."

 

"자기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고?"

 

"아뇨. 아마 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겠죠. 개척지의 위험이라면 아주 재미있고

흥분되는 모험일 거라고 생각했죠. 3차원 쇼에서처럼."

 

 

애잔한 미소가 잠시 소녀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아니에요.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진짜니까. 쇼가 끝난 뒤에 집에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돌아갈 수 없어."

 

 

소녀의 눈은 정밀시계에서 에어록의 문으로, 다시 메모지와 그녀가 쥐고 있는 연필 위로 가볍게 지나갔다.

 

 

 

소녀는 옆쪽에 메모지와 펜을 놓아두려고 약간 자리를 옮겼다. 그는 소녀가 신고 있는 것이 베가 행성에서 만든

 

 

 

진짜 집시 샌들이 아니라 값싼 모조품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버클은 은이 아니라 잘 닦아서 윤이 나는 철이었고

 

 

 

보석들은 색유리였다. `아빠의 조그만 가게에서는 겨우 먹고 살 정도의 수입만이 생기거든요.' 소녀는 학교를 1년만에 그만두고

 

 

 

직업을 얻기 위해 언어학 과정에 등록했을 것이다.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수업이 끝난 뒤에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했을 것이다.

 

 

 

스타더스트호에 남아 있을 소녀의 개인소지품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지겠지만, 그 소지품들은 결코 비싸지도 않고

 

 

 

지구로 돌아가는 정기선의 창고를 많이 차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저, 여기......"

 

 

 

 

소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여기 춥지 않아요?"

 

 

 

 

소녀의 질문은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아저씨는 춥지 않은 것 같아요."

 

"아니, 추워."

 

 

 

 

그는 온도계를 보았다. 방의 온도는 정상이었다.

 

 

 

 

"그래, 평소보다 추워."

 

"오빠가 늦기 전에 돌아왔으면... 정말 시간 안에 돌아올까요? 날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한 건 아니죠?"

 

"오빠는 시간 안에 돌아올 거야. 기지 사람들이 곧 돌아와야 된다고 했어."

 

 

 

화상스크린의 로터스 호수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 서쪽 가장자리의 가늘고 푸른 선도 머지 않았다. 그가 시간을 잘못 추정한 것일까.

 

그는 주저하다가 애써 입을 열었다.

 

 

 

"오빠가 있는 기지는 몇 분 안에 통신 범위를 벗어날 거다. 오빠는 저기 저쪽, 우덴의 그림자 안에 있어."

 

 

 

그는 화상스크린을 가리켰다.

 

 

 

"우덴이 자전을 하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면 통신을 할 수 없게 될거야. 오빠가 곧 돌아온다 해도 남

은 시간이 별로 없어. 얘기를 거의 못 할거야. 어떻게든 해봐야 할 텐데. 지금 연락을 취해 볼께."

 

"내가 머물 수 있는 시간보다도 더 짧은가요?"

 

"그럴 것 같구나."

 

"그렇다면......"

 

 

 

소녀는 똑바로 서서 차갑게 에어록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게리오빠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 버리면 난 떠나겠어요. 그 뒤까지 기다리진 않겠어요.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겠어요."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제가 이기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나중에 아저씨가 오빠에게 말해 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소녀는 통신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무의식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오빠는 아가씨가 기다리기를 원할 거야."

 

"오빠가 있는 곳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잖아요. 오빠에겐 긴 밤이 남아 있어요. 엄마와 아빠는 내가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직 몰라요. 난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줄 거에요.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다. 모두들 알고 있어. 이해할 거야."

 

"처음에 저는 아주 겁쟁이였어요. 죽음이 너무 무서웠어요. 제 생각만 한 거죠.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죽는 게 무서운 이유는 내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에

요. 진짜 이유는 모두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들의 존재가 내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는지 이젠 얘기해 줄 수 없어요. 또 나를 위해서 모두가

해 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도 말해 줄 수 없어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도 얘기해 주지 못 해요. 난 어떤 것도 말해 본 적이 없어요. 누구든 철이 들기

전에는, 삶이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뿐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거예요. 감상

적이고 바보스럽게 들리는 게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완전히 달라지겠죠. 할 수 있을 때 얘기를 하고 싶을 거예요. 여

태껏 그들에게 했던 사소한 잘못들에 대해서 모두 사과하고 싶을 거예요. 정말은 그들의 마음을 다

치게 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고 여태껏 나 스스로도 몰랐지만, 내가 그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

지 꼭 기억해 주기만을 바랄 거예요."

 

 

 

"직접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럴까요?"

 

소녀가 물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아저씨는 그들을 모르잖아요."

 

"아가씨가 어디에 가 있든 인간의 본심은 다 같은 거야."

 

"그러면... 내가 모두를 사랑한다는 걸... 그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럼, 알고 있지.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으로 훨씬 더 잘 알고들 있어."

 

"난 모두들이 날 위해 해 주었던 일들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예요. 아주 사소한 것도. 지금 내게는

모두 너무나 소중해요. 게리오빠 일이 생각나요. 오빠는 내 열 여섯 번째 생일날 다섯 개의 루비로

된 팔찌를 보내 줬어요. 무척 예뻤어요. 오빠는 한달치 월급을 몽땅 털었을 거예요. 또 내 아기고양

이가 거리로 달려 나가 버렸던 날 밤에도 오빠는 나를 팔에 안고서 눈물을 닦아 주었어요. 여섯살

때였어요. 울지 말라고, 플로씨는 털갈이를 할 동안만 잠시 나갔다 올 거라고, 내일 아침이면 언제

나처럼 침대 발치에 플로씨가 있을 거라고 했어요. 난 오빠 말을 믿고 울음을 그쳤어요. 내 아기고

양이가 돌아오는 꿈을 꾸며 잤어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까, 아주 멋지게 하얀 털코트로 갈아

입은 플로씨가 침대 발치에 있었어요. 오빠 말대로요.

며칠 뒤에 엄마가 말해줬어요. 오빠는 새벽 4시에 애완동물 가게에 가서 주인을 깨웠대요. 당연히

주인은 마구 화를 냈고, 게리오빠는 주인에게 당장 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팔든지 아니면 목이 부러

지든지 택일하라고 그랬대요."

 

"어떤 사람의 기억이란 항상 그처럼 사소하고 소박한 일로 인상이 남기 마련이지. 너를 위해서 사람

들이 해 주었던 조그마한 일들. 아가씨도 마찬가지야. 아가씨도 오빠나 부모님들께 조그맣지만 마

음이 담긴 일들을 해 주었어. 스스로는 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러길 바래요. 저를 그렇게 기억해 주기를 바래요."

 

"그럴 거야."

 

"나는......"

 

 

 

소녀는 울음을 삼키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걸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요. 난 우주에서 죽은 사람들

의 모습이 어떤지 알아요. 책에서 읽었어요. 내장이 모두 파열되어 터져 나가고 입으로는 폐가 튀어

나오고 몇 초 뒤에는 완전히 형체도 없게, 끔찍하고 추한 모습이 되어 버려요. 난 그렇게 끔찍한 모

습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요."

 

"아가씨는 부모님의 딸이고 또 오빠의 누이동생이야. 모두들 아가씨가 원하는 바와 다른 모습으로

는 결코 기억하지 않을 거야. 모두들 아가씨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할 거야."

"난 아직도 무서워요."

 

 

 

소녀가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오빠에겐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만일 오빠가 제 시간에 돌아오면

 

 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할 거예요. 그리고......"

 

 

 

통신기의 신호음이 날카롭고 단호하게 소녀의 말을 막았다.

 

"게리오빠!"

 

 

소녀가 벌떡 일어섰다.

 

"오빠에요!"

 

그는 급하게 소리를 키우면서 물었다.

 

 

"게리 크로스요?"

 

 

"그렇습니다."

 

소녀 오빠는 작지만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쁜 소식이라뇨?"

 

소녀는 그의 뒤에 바짝 다가서서 통신기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소녀의 작고 찬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오빠야?"

 

 

애써 가라앉힌 소녀의 목소리에는 그러나 가느다란 울림이 떨고 있었다.

 

"오빠가 보고 싶었어."

 

"마릴린!"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오빠의 목소리는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긴급연락선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오빠가 보고 싶었어."

 

 

 

 

소녀가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오빠가 보고 싶어서 여기에 숨어들었어."

 

"숨어들었다고?"

 

"난 밀항자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는 정말 몰랐어."

 

"오, 맙소사. 마릴린!"

 

 

 

그 목소리는 이미 영원히 그로부터 떠나간 누군가를 덧없이 절망적으로 부르는 외침이었다.

 

 

 

 

"무슨 일을 한 거니?"

 

"난... 아니......"

 

 

 

소녀는 더 이상 억제하지 못했다. 차갑고 작은 손이 그의 어깨를 격렬하게 움켜쥐었다.

 

 

 

 

"오빠, 그러지 마. 난 오빠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오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제발 그러지 마."

 

 

 

그의 손목 위에 따뜻하고 축축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는 가만히 의자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 소녀를 자리에 앉힌 뒤 마이크를 입 앞에 대 주었다.

 

 

 

"슬퍼하지 마... 오빠가 슬퍼하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떠나고 싶지 않아."

 

 

 

 

소녀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울지 마. 마릴린. 울지 마."

 

 

 

게리의 목소리는 갑자기 모든 고통을 삭인 듯 차분히 가라앉아서 따뜻하고 온화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울지 마, 울지 말아야 해, 마릴린. 모두 괜찮아. 다 괜찮다구."

 

"난......"

 

 

 

소녀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오빠가 슬퍼하지 않았음 좋겠어. 곧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냥 안녕이란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그래야지. 그런 뜻은 아니었어."

 

 

 

게리는 갑자기 빠르고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긴급연락선, 스타더스트호에는 연락했소? 컴퓨터로 항로를 알아보았습니까?"

 

"약 1시간 전에 스타더스트호에 연락했소. 돌아올 수도 없고, 40광년 이내엔 다른 정기선도 없소. 그

리고 연료도 부족하오."

 

"컴퓨터의 자료는 정확한 겁니까?"

 

"그렇소. 내가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었겠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소. 지금이라도 방법이 있

다면 나는 절대로 주저하지 않았을 거요."

 

"아저씬 나를 도우려고 애썼어요, 오빠."

 

 

 

소녀의 아랫입술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짧은 블라우스 소매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도 도울 수 없어요. 더 이상은 울지 않겠어. 오빠와 아빠, 엄마 모두 잘 지낼 거지, 그렇지?"

 

"그래, 우린 잘 지낼 거야."

 

 

 

게리의 말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최대로 올렸다.

 

 

 

"오빠가 점점 통신범위 밖으로 나가고 있어."

 

 

 

그가 말했다.

 

 

 

"1분 안에 끊어질 거야."

 

"오빠, 오빠가 멀어지고 있어."

 

 

 

소녀가 말했다.

 

"오빠가 통신범위 밖으로 나가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다 할 수가 없어. 곧 안녕이라고 해야

만 돼. 하지만 난 다시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야. 난 머리를 땋아 늘인 채로 오빠의 꿈 속에 나타날 거

야. 죽은 새끼고양이를 안고 울기도 할거구. 아마 난 소근거리는 미풍처럼 지나가면서 오빠를 만질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오빠가 얘기해 준 황금 날개를 가진 종달새가 될지도 몰라. 그래서 오빠가

보고 싶어 바보같이 서둘렀던 나의 어리석음을 노래할 거야. 오빠는 나를 볼 수 없더라도 내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겠지? 게리오빠, 그렇게만 생각해. 항상 그렇게. 다른 식으론 말고."

 

 

 

우덴의 자전때문에 게리의 목소리는 갈수록 희미해졌다. 꺼질듯이 조그맣게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항상 그렇게, 마릴린... 항상 그렇게. 절대 다른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께."

 

"시간이 됐어, 오빠. 이제 가야만 해. 안......"

 

 

 

소녀의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입술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녀는 손으로 입을 꽉 눌러 막았다.

 

 

 

잠시 뒤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안녕, 오빠."

 

 

 

형언할 길 없이 뼈에 사무치는 마지막 말이 차가운 금속 통신기를 따라 가녀리게 흘러나왔다.

 

 

 

"안녕, 마릴린... 안녕, 내 귀여운 동생."

 

 

 

 

소녀는 고요함 속에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마치 말소리가 사그라져 가면서 남는 메아리의 흔적을 들으려는 듯이.

 

 

 

그리고 나서 소녀는 조종석에서 일어나 에어록으로 걸어갔다. 그는 입구 옆에 있는 검은 색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에어록의 문은 마치 소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감옥처럼 가볍게 미끄러지며 열렸다.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똑바로 든 채 걸어 들어갔다.

 

 

 

갈색 곱슬머리가 소녀의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하얀 샌들을 신은 두 발은 연락선 안의 미약한 중력에도 아랑곳없이 확고하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계기판의 파랗고 빨간 전등빛들이 샌들의 장식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녀는 결코 도움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에어록 안에 완전히 들어선 소녀는

 

 

 

 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목에 나타나는 격동만이 소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준비됐어요."

 

 

 

소녀가 말했다.

 

 

 

그는 손잡이를 밀어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순식간에 벽을 만들며 문이 닫혔다. 소녀의 생에서 가장 마지막 순간은

 

 

 

칠흑같이 검고 어둠침침한 공간 안에 갇혀 버렸다. 문이 잠기는 딸깍 소리가 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호하게

 

 

 

빨간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공기가 에어록에서 쏟아져 나가면서 연락선 선체가 가볍게 떨었다. 마치 무엇인가가 지나가다가 부딪힌 듯,

 

 

 

에어록 쪽의 선체 벽에서 울림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곧 고요해졌다. 긴급연락선은 우덴의 대기권으로 계속 하강하고 있었다.

 

 

 

그는 붉은 손잡이를 잡아당겨 텅 비어 버린 에어록의 문을 닫았다. 그 다음 늙고 병든 사람처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조종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조종석에 기대어 앉아 통신기의 단추를 눌렀다. 응답은 없었다. 물론 그는 응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소녀의 오빠가 제 1기지를 통해 연락하려면 밤이 지나야 한다.

 

 

 

아직 감속을 시작할 시간은 아니다. 그를 태운 긴급연락선은 아직도 하강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기다렸다.

 

 

 

로켓추진기가 부드럽게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기다렸다. 로켓추진기가 부드럽게 진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생체감지기의 바늘이 0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만큼의 연료에 1만큼의 질량. 냉혹한 방정식의 균형은 이제 이루어진 것이다.

 

 

 

긴급 연락선에는 그 혼자뿐이다. 바깥 공간에서 형체도 없는 추한 모습의 무엇인가가 연락선을 앞질러서 바삐 내려가고 있다.

 

 

 

소녀의 오빠가 뜬눈으로 밤을 새울 우덴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텅 빈 긴급연락선 안에는 아직도 소녀의 존재가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냉혹한 방정식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소녀가 아직도 있는 것 같다. 금속상자 위에 앉아 있는, 놀라고 당황하는 소녀의 모습이

 

 

 

아직도 보이는 것 같다. 소녀가 떠난 공허한 공간에는 소녀가 남긴 말만이 끊임없이 분명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 나는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난 안했어요......

13개의 댓글

2017.07.29
개인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SF단편
0
2017.07.29
슬프다
0
2017.07.29
반전이 없네 슬프다
0
2017.07.29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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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수엔딩을 기대하며 내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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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9
눈물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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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같은 반전 기대했는데.. 오히려 반전이 없어서 반전같은 느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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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9
이거 올릴까말까하다가 저작권 걸릴까봐 안올렸는데 올라왔네
작가가 저 여자애를 살리기위해 창의적인 방법들을 고안해내서 출판사에 제출했지만 편집장이 다 거절하고 결국은 지금의 엔딩이 선택됐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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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자, 이제 어떻게 할거요?' 라고 만약 낮고 탁한 남자 목소리가 질문을 했다면 병으로 죽기직전 아들한번 보려고 목숨건 아조시의 사정은 묻지도 따지지도 사정봐줘서 특별히 모선 연락하고 궤도수정할것도 없이 총맞고 우주공간으로 팽개쳐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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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날
아조시 목숨은 아주 파리 목숨이야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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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2
왜 안 살려 시이발 아 기분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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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죽었냐? 앞에 암걸려서 못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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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본래 소녀가 있어야 할 곳엔 무심하게 조종사의 머리를 뜯어먹는 날카로운 이빨만 있을 뿐이었다.
혈청을 실은 연락선이 우덴으로 향하고있다.
이런 결말일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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