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근본악에 대해

근본악에 대해

나카지마 요시미치


우리는 진저리를 내면서 도덕 법칙에 따른다

학회 회원 여러분, 특히 연배가 되시는 분들은, 아마 칸트 윤리학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계시고, 그중에는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들도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칸트와는 30년 지기가 넘는 사이인데,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특히 우리 나라의) 칸트 철학자는 칸트 윤리학의 이름 아래에 실태와 다른 것을 가르쳐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칸트 윤리학의 중심적 어구인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이나 ‘인간 존엄성(Würde der Menschlichkeit)’이나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Achtung für moralisches Gesetz)’이나 ‘의지의 자율성(Autonomie des Willens)’ 등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이러한 어구들의 기저에 다음과 같은 오해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도덕 법칙을 존경한다는 오해,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에서 칸트 윤리학이라고 하면 공상적 이상주의적 도덕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어느 대목에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은 ‘쾌의 감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진저리를 치면서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이며, 그러한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에야, 흐름에 대항하는 의연한 이 태도가 도덕적인 것입니다. 혹은, 같은 『실천이성비판』의 다른 대목에서는 이러한 도덕 법칙을 존경하는 의식을 ‘끝없이 도덕 법칙을 위반하려는 의식’이라고도 ‘불순한, 즉 많은 (부도덕한) 동기를 혼입시킨 의식’이라고도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가능하면 도덕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맘편히 욕망에 따라 살고 싶어한다. 이것은 칸트의 기본적인 인간관이며, 그가 우리들 속에 내재된 이 자연적 경향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쉽게쉽게 아무런 저항도 없이 차례로 선한 일을 해 버리는 사람은 칸트가 보기에 도덕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율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자율이란 내가 도덕 법칙을 입법하고 스스로 그것에 따른다는 자기관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 (입법하는 쪽의 자신이 아닌) 입법에 따르는 쪽의 자신은 가능하면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어하는 자신일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입법하는 내가 자기자신을 진저리 치면서 도덕 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 그것이 자율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세속적인 욕망은 희박하고 도덕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만이 농후한 그런 인간은 이 도식에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칸트의 눈에는 ‘도덕적(moralisch)’이라기보다 ‘신성한(heilig)’ 것이며 윤리학의 범위 밖에 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런 인간은 없으므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칸트의 시선으로는 단지 내부에 태엽이 감겨 있어 항상 선한 일을 할 뿐이며, ‘회전 바비큐 기계’ 또는 ‘자동 인형’의 자유에 불과할 뿐 자율이 아닙니다. 애초에 태엽이 감긴 듯 쉽게쉽게 도덕을 실현해 버리는 자신에게 더욱 ‘도덕적이어라’하고 입법해 본들 지붕에 지붕을 얹는 꼴이므로 자율 개념은 공회전하고 맙니다.

따라서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 법칙을 입법하는 행위 또한 자율이 아닌 ‘타율(Heteronomie)’이 됩니다. 칸트는 이것을 곧잘 ‘문자(Schrift)’와 ‘정신(Geist)’의 구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의 의지에 기초하여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문자’에 진저리를 내면서 도덕 법칙에 따른다는 의식이 동반되어서야 처음으로 이것은 도덕적 의미에서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성의 원칙은 벗의 목숨보다 소중하다

칸트 윤리학을 ‘선’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악’이라는 또 하나의 관점으로 재검토하면 미사여구 따위가 아닌 그 리얼한 도덕적 센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칸트 윤리학의 근저를 베이스 음처럼 흐르고 있는 것은 ‘인간은 생래(von Natur) 악하다’라는 자각입니다. ‘생래’란 ‘자연에 방치해 두면’ 정도의 뜻으로서, 이것을 칸트는 개개의 ‘경향성(Neigung)’의 더욱 기저에 있는 것으로 ‘성벽(性癖:Hang)’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칸트는 이 ‘악에 대한 생래적 성벽’을 『종교론』(『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속에서 ‘근본악(das radikal Böse)’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면밀히 검토하고 있는데, 우선 이 개념의 뉘앙스에서 생겨나는 오해가 동반됩니다. 근본악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피도 얼어붙을 듯한 극악이라는 식으로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단적인 악을 칸트는 ‘악마적(teuflisch)’이라 부르며 인간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악이란 무엇인가. 칸트의 서술에 맞추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첫째로 도덕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과 일치하는 한에서 둘째로 행복을 추구해야만 하는데, 현실에서는 첫째로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것과 일치하는 한에서 둘째로 도덕을 추구하고 맙니다. 이 순서의 ‘전도(Umkehrung)’야말로 다름 아닌 근본악입니다.

이 사실을 ‘거짓말’이라는 실례를 들어 검토해 보겠습니다. 『인간애를 까닭으로 거짓말을 할 권리라는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라는 타이틀의 소논문에 재미있는 예가 나옵니다. 친구가 그를 죽이려는 자에게 쫓기고 있어 숨겨 주었는데, 추적자가 ‘어디에 숨겼느냐’고 심문을 합니다. 칸트는 이 경우 ‘저쪽으로 도망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친구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반하는 이 결론을 두고 지금까지 수많은 (비판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이 결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칸트 윤리학의 진면목이 아닌가 합니다. 진실성의 원칙은 도덕 법칙의 세부를 이루는 것들 중 거의 유일하게 구체적인 것이며, 그것은 행복에 속하는 생명이나 우정보다도 우선적인 가치입니다. 따라서 진실성의 원칙에 반하는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친구를 죽이는 행위보다도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는 타인을 해칠 목적으로 많은 거짓말을 하지만 칸트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친구를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치는 경우(어쩔 수 없는 거짓말 또는 선의의 거짓말)를 굳이 예로 든 점입니다. 칸트의 속셈이 여기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우리는 빈번히 자타의 행복을 좇아 거짓말을 할 때가 있으며, 게다가 ‘어쩔 수 없었어’라는 변명을 자타에게 준비합니다. 우리는 도덕에 속하는 진실성의 원칙을 행복에 속하는 친구의 생명보다 우선해야 할 터인데, 후자를 전자보다 우선하는 전도를 범해 버리며, 한술 더 떠 이러한 전도를 ‘어쩔 수 없었어’라고 중얼거리며 정당화까지 하려 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악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멸망해도 악한 것은 악하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 전도를 범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이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한다면 사랑도 우정도 가족의 연도 경제 활동도 정치 활동도 예술 활동도 사라지고, 변호사도 의사도 성직자도 존재할 수 없게 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을 해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공동체는 붕괴할 것입니다. 칸트는 이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상 불가결하고, 순간순간 우리를 덮치는 악, 그리하여 이 전도는 근본악인 것입니다. 근본악이란 이렇게 (아주 나쁜 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 한 짊어져야만 하는, 어떻게 해도 없앨 수 없는,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뿌리(radix)’로서의 악이라는 뜻입니다.

전도는 궁극적으로는 ‘자애(自愛:Selbstliebe)’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 개념을 기초로 대단한 에고이스트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똑똑함(Klugheit)’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자애=똑똑함에 쫓겨 근본악을 범하는 인간이란 자타의 행복을 첫째 원칙으로 하고, 그러한 한에서 둘째로 진실성의 원칙을 지키려 하는 인간, 즉 배려심과 밸런스 감각이 있는 ‘선량한 시민’ 바로 그것입니다.

비이성적 동물은 악을 범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성 그 자체에 악이 내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악은 바로 동물적 욕망을 기반으로 이성이 ‘접목(pfropfen)’된 인간이라는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 속에서 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악을 저지르지 않고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과된 일은 최우선으로 진실성의 원칙에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은, ‘고통을 피하다’라는 자애를 첫째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전도이자 근본악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에 말려들면서도 우리는 자살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뭍으로 올라온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처럼, 낙원에서 추방된 우리 인간의 다리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나이프로 삭둑삭둑 베이듯 아파합니다. 즉 자타의 행복을 생각하려 할 때마다 ──그것이 진지하면 할수록──, 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첫 번째 위치에 와야 했을 진실성의 원칙을 두 번째 위치로 전도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며, 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잘살아 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악에 속박당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영원히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아무리 사회가 붕괴할지라도, 아무리 인류가 멸망할지라도 진실성의 원칙을 첫째 원칙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외침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상적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칸트와 함께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적인 한 설령 모든 행복을 대가로 치러서라도 진실성의 원칙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앎을 사랑함(philosophia)’이라는 영위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모두가 똑똑하고, 모두가 열심히 자타의 행복을 추구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고 진실성의 원칙을 덮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통용되는 현재의 우리 나라에서, 강렬한 치료제로서 칸트 윤리학을 재독하는 일이 있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어떠신지요.


출처:나카지마 요시미치, 어차피 다 죽는데 왜 지금 죽으면 안되나?(どうせ死んでしまうのに、なぜいま死んではいけないのか?)

12개의 댓글

2018.07.19
어떻게보면 순자랑도 통하는 면이 있네
0
칸트 윤리학의 최대 문제점은 인간이 동물이란 점을 간과해서 그들의 생존욕구에서 나오는 이기심을 무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음

공산주의가 왜 실패했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말 할 수 있고 알고 있지만 이를 지키는데 있어서

장기적인 이익과 단기적인 이익이 따라주지 않으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사회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상태야

그런데 장기적인 이익에 단기적인 이익 둘다 인정하지 않고 진절머리 내면서 따라야하는 순수 도덕 명령은

인간들에게 있어 흥미로운 연구 대상과 철학거리일뿐 실생활에 적용되기에는 굉장히 큰 무리가 따르는 사상임
1
@비엘티샌드위치
순수한 선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논하자면 칸트의 윤리학은 굉장히 거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현실에 타협적으로 접근하는 다른 윤리학에 대해서 칸트 윤리학은 너무나도 입바른 소리만 하는 탁상공론형 윤리로밖에는 보이질 않지
1
@비엘티샌드위치
어쨋거나 그의 철학 사상은 윤리와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 생존보다 윤리가 앞서야만 한다는

다른 성인들의 윤리사상을 좀더 직관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굉장하지

예수, 부처,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등 4대 성인도 현실의 부유함보다는 바르게 사는 인간의 행동원리를 더 중요시 했는데

이것을 분석해내 순수 악은 '인간이 미적 추구 상태에 있으면서 이를 더 중요시 할때' 임을 다른 성인들과 비교해

직접적으로 설명한 것이니까
1
어려워서 모르겠는레후우
0
RWC
2018.07.21
@세레브민주공원
아 거 뻥치지 마쇼
0
@RWC
글 재밌게 읽은데스우
0
2018.07.20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한다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고도화될수록
죄수의 게임처럼 상호협력이 최선의 결과를 내는 반면,
한쪽의 배신이 이익의 독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독박쓰기 싫으면 디폴트는 이타적으로 놓되
머리쓰고 계산하면서 등쳐먹으려는 새끼들은 똑같이 갚아줘야됨
0
내 학창시절 19년 내내 반마다 한명씩 천사 봤으므로 ㅂㅁ
0
2018.07.20
선한일을 하고 얻는 보람도 행동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는
양반아님? 세상에 그럼 선이 있나??
0
2018.07.20
무조건 진실을 말하는 행동이 왜 반드시 선임?
0
아몰랑 어려워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5244 [기타 지식] 도카이촌 방사능 누출사고 실제 영상 1 ASI 0 23 분 전
5243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2부 4 Mtrap 3 4 시간 전
5242 [기타 지식] 100년을 시간을 넘어서 유행한 칵테일, 사제락편 - 바텐더 개... 3 지나가는김개붕 1 2 일 전
5241 [기타 지식] 오이...좋아하세요? 오이 칵테일 아이리쉬 메이드편 - 바텐더... 3 지나가는김개붕 2 3 일 전
5240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지구 1부 30 Mtrap 10 3 일 전
5239 [기타 지식] 칵테일의 근본, 올드 패션드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야기 15 지나가는김개붕 14 4 일 전
5238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2부 21 Mtrap 14 3 일 전
5237 [기타 지식] 웹툰 나이트런의 세계관 및 설정 - 인류 1부 13 Mtrap 20 4 일 전
5236 [기타 지식] 서부 개척시대에 만들어진 칵테일, 카우보이 그리고 프레리 ... 3 지나가는김개붕 5 9 일 전
5235 [기타 지식] 모던 클래식의 현재를 제시한 칵테일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4 지나가는김개붕 2 10 일 전
5234 [기타 지식] 브라질에서 이 칵테일을 다른 술로 만들면 불법이다, 카이피... 5 지나가는김개붕 1 11 일 전
5233 [기타 지식] 럼, 라임, 설탕 그리고 다이키리 편 - 바텐더 개붕이의 술 이... 2 지나가는김개붕 6 12 일 전
5232 [기타 지식] 1999년 도카이촌 방사능누출사고 대량 방사능 피폭 피해자들 ... 9 ASI 5 12 일 전
5231 [기타 지식] 진짜 레시피는 아무도 모르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편 - 바텐... 3 지나가는김개붕 2 13 일 전
5230 [기타 지식] 통계로 보는 연애 상황에서 외모의 중요성 8 개드립에서가장긴... 11 15 일 전
5229 [기타 지식] 추울 수록 단맛이 유행한다, 위스콘신 스타일 올드 패션드편 ... 1 지나가는김개붕 8 16 일 전
5228 [기타 지식] '얼마나 걸릴까?'를 찾는데 걸린 시간은.. 1 동부전선이상무 5 17 일 전
5227 [기타 지식] '누구나 아는' 노래에 대한 이야기 9 동부전선이상무 20 21 일 전
5226 [기타 지식] 알코올 중독에 빠질 수 있는 칵테일, 브랜디 알렉산더편 - 바... 2 지나가는김개붕 5 23 일 전
5225 [기타 지식]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리는 칵테일 중 하나, 위스키 사워편 - ... 2 지나가는김개붕 3 24 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