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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스포일러] 진격의 거인으로 본 니체, 실존주의, 그리고 자유

* 필자는 철학 비전공자이므로, 본 글에 편향되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또한 지적할 사항에 대해서는 통렬한 비판 댓글 부탁드립니다. 


 실존주의, 니체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기존의 철학 체계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혁명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또한, 어떠한 '본질' 그 자체를 상정하기보다는 이에 대해 반항하며, 파괴하고, 이를 재창조하는 데에 의미를 두는 사상이라는 점도 있다. 물론 두 사조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실존주의는 사실 그 실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그 스펙트럼이 넓고 그 분파끼리도 갈등이 있는만큼 -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역시 실존주의 문학가인 알베르 카뮈와 사상적 차이로 대판 싸우고 난 뒤 죽기 전까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 철학 비전공자인 필자가 이 두 단어를 하나로 묶어 어느 작품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실존주의-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류에 분명한 어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아나키스트라는 익명을 사용하는 필자로서는 이 사상들이 내재하고 있는 아나키즘적 면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위에도 이미 밝혔지만 수박 겉핥기로 독학한 철학 비전공자이므로 상당한 끼워맞추기식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오류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해주고 이를 따끔하게 꼬집어주었으면 한다. 


 진격의 거인은 2013년 돌연 네이버 검색어 순위에도 오를 정도의 화제작이었다. 고어한 연출과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는 매우 신선했고, 이 때문에 수많은 패러디가 양산되기도 하였으나 작가의 SNS 상에서 우익적 트윗이 발견됨에 따라 한국에서는 급속히 인기가 사그라들었고 급기야 분서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미 이에 앞서 논객 진중권은 작품에 우익적 사상이 녹아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으며, 이후 만화로 전개된 내용에서 일본 극우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 일본을 피해자로 암시하는 부분이 나온 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며, 실제 애니메이션 방영 이후 4년이 지난 만큼 진격의 거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스토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렇기에 스포일러가 다량 있으며, 진격의 거인을 그저 작품으로서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 뒤로가기를 누르셔도 좋을 것 같다. 


 도대체 니체부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류와 우익 논란이 일었던 진격의 거인 사이에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지금부터 필자는 작품 외적인 논란은 차치하고 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 진중권은 "대사라든지 스토리 라인이라든지, '진격의 거인'은 분명히 우익의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라고 트위터에 발언했다. 물론 이 뒤에 "만화는 만화일 뿐, 정치적 해석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라고 덧붙이긴 했으나 이후 진격의 거인의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극우 논란이 일며 재조명된 발언이다.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서 이 발언을 조명한 글을 참조해 봤을 때, 진중권이 진격의 거인을 우익적 세계관으로 상정한 이유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대사와 스토리라인, 생존 자체가 가혹하며 잔혹하고, 전체를 위한 희생을 논하고 있는 등의 요소 때문이다. 이 요소를 극대화한 인물은 작중 조사병단의 단장 엘빈 스미스로, 작중 테마 중 하나인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자는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는 자"와 완벽히 들어맞는 인간상이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의 복선이 대다수 회수되지 않았던 2013년, 2014년에는 작가의 만행과 더불어 본 작품을 우익 작품으로 치부해 버릴 만한 전개가 계속되었다. 특히 파시즘을 연상케 할 수 있는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소수"의 이미지가 진하게 드러나며 일본 제국을 향수하는 극우의 냄새가 짙게 밴 극우 작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의 메인 테마는 단연코 자유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며, 필자가 단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이다. 


 먼저 니체의 사상을 주인공 에렌 예거의 대사를 빌어 엿보려 한다. 


 "평생 벽 안에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밥 먹고 잠만 자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마치, 가축 같잖아..."

 

 에렌 예거는 니체 사상의 핵심적 개념인 '위버멘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간상이다. 물론 그의 행적이 매우 미숙하고 충동적이며, 완벽한 초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니체는 수많은 저서에서 운명에 순종하고 권위에 굴종하는 삶의 방식을 부정했으며, 기존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이를 재창조하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다소 끼워맞추기식 해석일 수 있으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니체의 이 사상과도 맞닿아 있을 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위의 대사는 니체가 말한 노예의 도덕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대사이다. 니체는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보라! 저 온갖 믿음의 신자들을! 그들은 누구를 가장 미워하는가? 그들이 존중하는 가치들을 적어놓은 서판을 부수는 자, 그 파괴자와 범죄자를 가장 미워한다. 사실은 그가 바로 창조하는 자인데도 말이다."

 

 흥미롭게도 작중 에렌 예거와 그의 아버지 그리샤 예거는 벽 안 인류의 많은 것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거인에게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그리샤 예거는 진짜 왕가인 레이스 왕가를 멸절시켰고, 이들의 능력을 탈취했으며, 에렌 예거는 이를 물려받았고 벽 안 인류에게 거인으로 거인에게 맞선다는 다소 모순적이지만 보다 희망찬 해결책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에렌 예거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인류의 비밀을 알게 되며, 이 작품의 제목 진격의 거인의 의미가 밝혀졌다.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 대사이지만 위 차라투스트라의 어록과 비슷한 의미의 대사도 있다. 

 

 "나는 거인을... 죽인다. 한 마리도 안 남기고... 나는 이 세상을 전부를 파괴한다! 나는... 자유다!"

 

 에렌 예거가 여성형 거인과의 전투에서 폭주하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대사지만, 파괴하는 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니체가 강조하는 위버멘쉬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의지에 있다. 다시 한 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자. 


 "내게는 상처입히지 못하는 것, 결코 파묻어버릴 수 없는 것, 바위라도 뚫고 나오는 것이 있으니, 나의 의지가 그것이다. 이 의지는 말없이 변함없이 세월을 뚫고 간다."


 예전에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어 초인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해를 살 수 있었던 번역이었으나 최근 판본에서는 힘에의 의지로 번역되는 등 니체 고유의 사상으로 보려는 견해가 강하다. 어찌 되었든 이에 대응하는 에렌 예거의 대사는 이렇다. 


 "하겠어! 난 꼭 해낼 거야!! 나는 소질은 없을 지 모르지만... 근성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아! 논리 같은 건 몰라! 근거도 없어!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밖에 없어! 이것이  무기다!"


 의지에 대한 단순무식한 근성 찬양으로 보면 전형적 일본 만화의 정신력 찬양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 의지로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인 에렌 예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대사 중 하나라고 본다. 또한 그리샤 예거의 이 대사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인간의 탐구심은 우리가 또는 누군가가 말한다고 해서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있는 게 아니오."


 이는 단순히 탐구심에 대한 언급 뿐 아니라, 2000년 엘디아 인의 역사에서 진격의 거인이라는 거인이 가졌던 '자유'라는 상징성에 대해 그 자유가 가진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대사에 가깝다. 그리샤 예거에게 거인을 계승시킨 에렌 크루거의 대사다. 

 

 "'아홉 거인'에는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제부터 네게 계승될 거인에게도 말이다. 그 거인은 어떤 시대에서도 자유를 추구하며 나아가길 계속했다. 자유를 위해 싸웠다. 이름은 진격의 거인."


 에렌 예거의 캐릭터성을 벗어나 이번에는 작품 내에서 니체의 사상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을 보자. 

 작품의 초반부터 여신으로 칭해져 온 크리스타 렌즈는 히스토리아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벽 내 진짜 왕가의 마지막 후손임이 밝혀진다. 그녀의 캐릭터성은 "착한 사람"으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을 바꾸는 대가로 목숨만을 부지한 채 살았으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위해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도움을 주려 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를 에렌 예거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 하는 것 같아 부자연스러웠고 부담스러웠다."고 평했다. 그리고 이를 정확하게 니체는 지적한다. 


 "그들, 이 착한 자들은 양보하고 참고 견딘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따라서 말하되, 바닥에서부터 복종한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히스토리아 레이스는 작품 내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 인물 중 하나로, 착한 사람이기를 연기했던 여신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당당한 여왕으로 각성하기에 이른다.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가 찾아와 레이스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라며 따뜻하게 대해주고 "진실"이라는 명목 아래 레이스 가문을 풍비박산 낸 그리샤 예거, 그리고 그를 계승한 에렌 예거를 잡아먹고 거인의 능력을 되찾아오라고 지시했을 때 이를 거부하며, 마침내 거인이 되어 폭주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면서 당당하게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이 역시 파괴에 이은 재창조라고 볼 수 있으며, 우라노스를 거세시킨 크로노스, 크로노스를 죽인 제우스에 비견할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한 번 더, 차라투스트라를 보자.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이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됨으로서, 히스토리아 레이스는 여왕이 된 것이다. 


 실존주의를 완벽하게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실존주의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전무하다. 철학의 보편적, 본질적 관념을 설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사상가들이 대부분인만큼 이는 당연한 귀결일 지 모른다. 그러나 "본질적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해체하여 인간 개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내재적 가치를 긍정하는 것은 아나키즘과 맞닿아 있고, 존재 그 자체가 가진 긍정적 가치에 대해 탐구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의 경향을 드러내는 것은 작품의 복선이 회수되기 시작된 시점부터라고 볼 수 있지만, 이미 그 전에도 리바이 병사장의 발언으로도 암시된다. 


 "너와 우리의 판단 차이는 경험에 기초한 거야. 하지만 그런 것에 기댈 필요 없어. 선택해. 너 자신을 믿든가, 나와 이 녀석들, 조사병단이라는 조직을 믿든가. 난 모르겠다. 줄곧 그랬어. 자신의 능력을 믿어도, 신뢰하는 동료의 선택을 믿어도, 결과는 아무도 몰랐어. 그러니 뭐, 마음껏 후회가 남지 않는 쪽을 선택해."

 

 본질적이고 기계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대사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에렌 예거는 조사병단이라는 조직을 믿고 후퇴하며, 그 결과는 리바이 병사장을 제외한 조사병단 특별작전반의 전멸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 결과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는 에렌을 향해 리바이는 다시 말한다. 


 "무엇이 정말 옳은 지 난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거 모르거든... 정말로 네가 틀렸던 거 맞냐?"

 

 본질 그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극우 논란을 일부 희석시켜줄 발언은 최근 연재분인 에렌 크루거의 대사이다. 


 그리샤 예거가 벽 밖의 세계에서, 즉 마레의 대륙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할 당시 그리샤 예거는 엘디아 복권 파의 리더와도 같았다. 실제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코드네임 올빼미, 에렌 크루거였으나 그 누구도 올빼미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그들은 마레가 왜곡한 엘디아 인의 역사를 부정하고, 엘디아 인의 우수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광신도적 행보를 보인 바 있다.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장면은 비판적 묘사가 다분하다. 엘디아 인을 일본 제국과 동일시할만한 근거는 꽤나 있다. 한 때 세상을 호령했으나 지금은 수그러들었고, 다소 비인간적인 전쟁 병기 - 일본군은 군대 내의 비인간적인 처우 - 그리고 일본 극우의 인식으로 보자면, 오늘날의 피해자. 그러나 에렌 크루거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진실 같은 건 없어. 그게 현실이다. 누구든지 신이든 악마든 될 수 있다. 누군가가 그걸 진실이라 말한다면 말이지."

 

 그는 엘디아 복권파가 믿고 있는 '진실'과 마레 제국이 말하는 엘디아 인의 '진실' 그 사이에 어느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거인의 힘을 최초로 받은 것으로 알려진 유미르 프리츠에게 거인의 힘을 준 '대지의 악마'가 엘디아 복권파가 말하는 천사인지, 마레 제국이 말하는 악마인지 알 수 없으며 자신은 어느 유기생명체일 것으로 믿는 투로 말을 꺼낸다.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알베르 카뮈는 실존주의자로 자처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그의 사상적 기류는 부조리주의에 가까웠다.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조건에 반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 자유를 위해 반항하는 본 작의 테마에 굉장히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작품 내의 수많은 상징적 비유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벽'이라는 키워드이다. 인간을 거인의 공포 - 최근 연재분의 과거 편에서는 마레 제국의 엘디아 인에 대한 차별 - 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만 그 존재 자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념의 총칭이 이 작품 내에서는 '벽'인 것이다. 


 거인의 공포에 짓눌려 벽 안에서 '가축'처럼 살아가는 인간을 에렌 예거는 경멸한다. 타성에 젖어 술에 절어 있는 주둔병단 한네스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런 그의 태만한 모습에 분노했고, 그런 모습을 늘상 보여주는 병사들을 경멸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니체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면,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대들 또한 나로 하여금 사랑하고 희망을 가지도록 하는 많은 면이 있다. 그대들이 경멸했다는 것,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그것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게 한다. 크게 경멸하는 자는 크게 존경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절망했다는 것, 거기에는 존경할만한 점이 많다. 그대들은 참고 견디는 것도 가소롭게 재치를 부리는 것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그리샤 예거 또한 같았다. 오로지 비행선을 보고 싶었기에 그리샤와 그의 여동생은 수용구를 탈출했으나, 단지 수용구를 탈출한 엘디아 인이란 이유로 자신은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 이 때 그리샤를 구타한 장교가 바로 에렌 크루거로, 마레 제국에 잠입한 스파이였다 - 여동생은 장교 그로스의 유흥거리로 개에게 물어 뜯겨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부모는 이에 굴종하여 함구하고, 아들에게 마레가 강요하는 역사 교육을 시행한다. 그리샤는 자신의 부모를 경멸했으며, 그렇기에 엘디아 복권파의 수장격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 대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잃어버리고, 동료, 사랑하는 아내마저 거인이 되어버리자 자신은 그 대가가 이럴 줄 알았으면 바라지 않았을 거라며, 크루거가 원했던 진격의 거인의 후계자로서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크루거는 이렇게 답한다. 


 "너를 고른 가장 큰 이유는 네가 마레를 남보다 훨씬 증오해서가 아니야. 네가 그날 벽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날 네가 여동생을 데리고 벽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너는 아버지의 진료소를 잇고 다이나와는 만나지 않았고 지크도 태어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여동생은 지금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벽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자유를 원했고 그 대가는 동포가 지불했다. 그 값을 치를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동포를 떨어트린 날부터 너는 네 여동생을 벽 밖으로 나간 날부터 그 행동이 보답받을 날까지 계속해서 나아가는 거다. 죽어도, 죽은 후에도."


 그렇게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신은 그의 아들 에렌 예거에게도 전수된다. 에렌이 거인의 힘에 휘둘려 폭주했을 때, 아르민은 그에게 속삭였다. 


 "에렌.. 대답해 줘. 벽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으면 거기는 지옥 같은 세계인데, 왜 에렌은, 바깥 세계로 나가고 싶어 했어?"


 그리고 에렌은 답하고, 각성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야!"


 존재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자유를 위해 부조리를 뛰어넘는 이 사상은 진격의 거인 전체를 꿰뚫는 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존재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성스러운 행위는 에렌의 어머니 카를라 예거에 의해서도 언급된다. 조사병단 단장이었던 키스 샤디스가 엘빈 스미스와 비교당하며 자신의 무능함에 열등감을 가졌고, 그가 짝사랑하던 카를라가 그리샤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자 카를라와 아이를 향해 폭언을 퍼붓었으나 카를라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소용 없는 건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이 아이는...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해도 좋아요.  남들보다 우수하지 않더라도... 자, 봐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그렇기에 이 아인 위대해요. 이 세상에 태어나 줬으니까."


 예거 가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존재에 대한 긍정은 니체와 실존주의 그 사상을 읽어낼 수 있는 큰 밑바탕이며, 그리고 자연스레 이 작품의 메인 테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진격의 거인이란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필자는 인간 그 자체를 긍정한 기념비적인 만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판할 부분도 많은 작품이지만, 필자에게 굉장한 영감을 준 작품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굉장히 길고 산만한 글이었지만 끝까지 읽어주었다면 매우 감사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진격의 거인 매드 무비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6개의 댓글

2017.01.14
궁금해서 그런데,
"너와 우리의 판단 차이는 경험에 기초한 거야. 하지만 그런 것에 기댈 필요 없어.
선택해. 너 자신을 믿든가, 나와 이 녀석들, 조사병단이라는 조직을 믿든가. 난 모르겠다. 줄곧 그랬어.
자신의 능력을 믿어도, 신뢰하는 동료의 선택을 믿어도, 결과는 아무도 몰랐어. 그러니 뭐, 마음껏 후회가 남지 않는 쪽을 선택해."
라는 리바이 병장의 말이 왜 '본질적이고 기계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대사'냐?

또, "무엇이 정말 옳은 지 난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거 모르거든... 정말로 네가 틀렸던 거 맞냐?"라는 건
왜 '본질 그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냐ㅋㅋ
0
2017.01.14
@분기타
본질이라는 건 원래 옳은 것,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이데아"가 있다는 걸 가정해. 그러니까 옳은 선택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 본질을 추구함이라고 볼 수 있는데, 리바이는 옳은 선택이란 건 없다고 말하지. 실존주의에서는 본질을 부정해. 즉, 원래부터 절대적으로 옳은 선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상대적인 결과가 도출될 뿐이라는 게 실존주의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생각하면 리바이의 발언이 본질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지.
0
2017.01.14
대체 누가 썼나 다시 봤더니 정사게의......

하지메라는 사람자체가 이렇게 심오한걸 생각하면서 진격의 거인을 그렸을거 같지는 않음.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하지메의 우익트위터 논란 당시 해명이 일본식 역사교육을 받아온 젊은세대들의 한계를 여길히보여주는 발언이라고 할수 있으니까.

나는 하지메의 발언 같은걸 보면서
여태까지 일본이 잘못된 역사교육하는 걸 지들이 저래봤자지 하면서 신경 안쓴걸 반성했음.

진격의 거인은 전개방식도 그렇고 주제도 그렇고, 물론 몇몇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을 제외하면 우익이 들어갈 요소가 없어보이지만 작가의 사고가 저렇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지

물론 유시민이 차라스투라 얘기할때 진경의 거인이랑 굉장히 닮은거 아냐? 라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지만 ㅋㅋㅋ
0
2017.01.14
@음음음
이거 정사게에 썼다가 거기 글 리젠이 빨라져서 여기에 올림 ㅋㅋㅋ 하지메가 그런 생각을 갖고 썼는지 아닌지는 내가 모르지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으로서 좋아하는 사상과 공통점이 있어서 써봤다 ㅋㅋ
0
2017.01.14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긴 했음

개인적으론 좀 아쉬운 게
니체가 추구한 실존이
기존의 실증적 계몽사상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들의 사상만이 통용되는 것이나
칸트의 신앙과 이성의 분리로 인한 구습과 종교의 지배가
지속되는 가운데

진정한 '근대성'을 얻고 인간 그 자체로서 존속하는
이상향을 꿈꾼 것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글에서는 자유에 대한 투쟁으로 환원한듯이
내용이 지속되는 것 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넹

예를 들면 벽을 숭상하는 종교에 대한 의심이나
기존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벽 내부의 사람들과 직접 대립하면서(예컨대 초반에 에렌이 재판받기까지의 과정)
기존 구조에 대한 반감을 갖는 부분 등이 더해지면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의 어린 아이처럼
항상 의문을 제기하는 니체의 인간관을 좀 더 풍부하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물론 글쓴 게이의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0
2017.01.14
@트리니티
내가 집중했던 부분이 자유에 대한 투쟁이라서 오히려 다른 부분을 놓쳤을지도 모르지 ㅎㅎ 생각해보면 그렇네.. 월교라는 종교에 대한 거부는 이미 니체 사상의 큰 뼈대 중 하나이고, '진실'을 보기 두려워하고 묻어두려는 재판 중의 여러 인간상들도 보면 니체가 줄기차게 비판했던 인간상들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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