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진화를 생각할 때 고려할 것들

개붕이 주제에 과학 분류로 직접 글을 쓰는게 너무 건방진가? 라는 생각도 잠깐 해봤지만, 제 공식 타이틀이 Master of Science (M.Sc.) 니까 자격이 된다고 봐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써 봅니다. 

 

1. 진화엔 방향이 없다.  

우선 진화라는 낱말이 좀 어폐가 있습니다. 진화의 진은 나아갈 진 자입니다. 이 말은 마치 세상에 앞과 뒤가 정해져 있어서 진화란 앞으로 나아가는(진) 변화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화는 엄밀히 말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아니라 그냥 변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화 말고 다른 더 적절한 말을 찾아내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 진화엔 의도가 없다.

종종 "이러저러한 특성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했다" 와 같은 진술을 보게되곤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더 많이 살아남아 재생산을 이루었고, 그 특성을 안 가진 개체들은 대체로 재생산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 없어졌다. 그 결과 오랜 세월 후엔 그 특성을 가진 개체들만 남게 됐다." 이런 식으로 말해야 정확합니다. 

 

유전자는 흔히 DNA 🧬 라고 부르는 물질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생물체의 선천적 형질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일종의 코드 조합일 뿐, 그 자체로 어떤 목적성도 의도도 갖지 않습니다. 의도나 목적은 많이 발달한 중추신경계를 지닌 생물에게서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코딱지나 먼지가 의도와 목적을 갖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3. 생존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

위에서 하던 얘기랑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진화 하면 으레 적자"생존" 등의 말을 떠올리게 되고, 당연히 더 잘 적응하여 더 잘 살아남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거니까 생존을 위해 이뤄지는 거라고 보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를 엄밀하게 숙고해 보면, 그러한 특성조차도 진화의 본성이 아니라 진화라 부르는 변화의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특성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사태를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기능이 있는 작은 뭔가가 있습니다. 이걸 작은 생물이라고 불러봅시다. 이 생물에 어떤 변이가 일어납니다. 이 작은 생물에도, 그 생물에게 일어난 변이에도 "살고자" 하는 목적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변했을 뿐인 겁니다. 다시 먼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지는 생존 같은거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먼지는 바람에 더 잘 날려가고, 어떤 먼지는 덜 날려 가겠지요. 그럼 그 장소에는 덜 날려가는 먼지가 더 많이 쌓여있을 겁니다. 진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잘 안 날아가서 여기 쌓여 남은 먼지인 셈입니다. 앞서 말한 작은 생물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지도 사고도 없이 그저 어쩌다 변화가 생기고, 그 생물이 살던 곳, 이를테면 연못 환경상 변화한 작은 생물이 더 많이 남는다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엔 변화한 작은 생물만 산 채로 발견되고 변화전의 작은 생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나 시체로 (예컨대 화석으로) 발견되겠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롯한 다양한 동물들을 보면 마치 생존에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부를 만한 성질이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도 진화에 선행하는, 진화가 "추구"하는 (2번 항목을 떠올리세요!) 것이 아닙니다. 변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변화 자체엔 그런 목적성이나 방향성이 없습니다. 

 

4. 지금 남아있는 형질이 꼭 생존 및 재생산에 유리해서 있는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변화엔 목적도 방향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 살아있는 어느 생물종이 가진 어떤 형질이 꼭 살아남고 재생산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생긴거라고 결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 형질은 딱히 생존에 도움이 안 되지만 그 형질이 있다고 해서 또 꼭 재생산 실패하고 죽을 확률이 올라간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남아있을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대중들 사이에서 전파되는 담론들을 보면 자주 그런 경향이 보입니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행동•사고•감정 경향을 갖는 건 그게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라고요. 어떤 형질은 정말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랬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의 형질은 하나의 삶 영역, 예컨대 새끼 돌보기, 사냥하기, 짝 선택하기 등등등 중의 하나의 영역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적용되게 됩니다. 남자가 대머리가 되면 항상 대머리인 거지, 소개팅 할 때만 대머리고 일할때나 잘때는 풍성한 게 아니죠. 깃털이 달리면 날 때만이 아니라 잘때 먹을때 구애할 때 등등 항상 깃털이 달려있는 거고요. 어떤 형질이 어떤 경위로 탄생했는지, 그 형질이 가장 눈에 잘 띄는 삶 영역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한 형질이 어떤 영역에서 재생산에 유리했다고 다른 영역에서 더 크게 불리하지 않았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어찌저찌 맞아떨어져서 불리한 형질도 남았을 수 있습니다. 사실 무수히 많은 형질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그 형질을 놓고 기본적으로 생존과 재생산에 유리했으니까 이런 형질이 있는 거라고 제멋대로 단정한 다음 '이게 어떤 식으로 생존에 유리했을까' 라고 궁리한다면 애초에 첫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 되는 겁니다. 

 

1번부터 4번꺼지의 사항들은 진화를 논할 때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가는 가정입니다. 말하자면 패러다임입니다. 제 전공분야가 진화생물학은 아니기때문에 그 분야에서 최근에 패러다임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있다고 해도 조심스러운 추측 수준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진화에 방향성이 있는 건 아닐까? 생물로서의 어떤 근본의지같은 신비한 영향력이 존재하진 않을까? 우리의 근본가정이 틀린건 아닐까?" 이런 느낌으로 말이죠. 

 

5. 가설이 그럴싸하다고 그 가설이 옳다고 입증된 게 아니다. 

이건 진화 담론에서 뿐만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얘기긴 합니다만, 대중적으로 진화심리학이라고 일컬어지며 유통되는 담론들을 보면 위에 나열한 사항들이 듬뿍 버무려져 일단 상당히 타당해 보이는 가설을 써놓고 그게 타당해보이니까 증명된 진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체로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특성이 진화과정을 통해 형성된 거다!" 같은 모습을 띠죠. 가설은 물론 타당해 보이게끔 세워지는게 당연합니다. 그럴듯한, 옳아보이는 설명을 일단 세워 놓고 그 다음에 그게 진짜 맞는지 검증을 하는게 대체로 합리적이겠죠. 전혀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설명을 만들어놓고 검증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잘 궁리해서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그게 곧 참으로 증명된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간과하게 되곤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며

 

우리는 복잡하게 발달한 중추신경계를 갖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생물입니다. 거기에는 무질서에서 패턴을 발견하려고 하는 경향, 동물(인간 포함)행동에서 어떤 의도(intention)를 추정하는 경향, 그런 바탕 위에서 현상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제시하려는 경향, 동시에 되도록 간명하고 이해에 에너지가 덜 드는 설명을 얻고자 하는 경향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경향들은 진화라는 컨셉을 둘러싼 담론들에서도 당연히 발견되는 거고요. 다른 학문들도 미찬가지지만, 이런 경향들이 학문의 존재 자체를 가능케 하는 것이긴 하되, 동시에 오류에 빠지게 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주의하면 좋겠지만, 주의해야할 의무 같은 게 있진 않지요. 그러니 주의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게 될 겁니다. 이건 타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죠. 모두가 각자 자기 자신과 논의해서 결정할 일일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내 마음에 드는 설명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앞서나? 논리적 정합성과 분명한 근거를 통해 입증되는 설명을 엄격하게 선별해 내는 게 내 마음에게 제일 중요한 건가? 내 마음은 무얼 향하고 있지?' 

23개의 댓글

2024.01.17

왜 마스터에서 멈추셨져? 닥터의 길을 가시지

0
@해해해

그만한 역량은 안 되는 것 같아서… ㅎㅎ 연구 방향으로 갈까 생각해 봐도 정확히 뭘 연구하고싶다 이런 마음도 없고…

0
2024.01.18

사실 종의 기원만 읽어봐도 알수있는 내용인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디지몬이랑 포켓몬으로 공부하는게 문제..

0
2024.01.18

간단하게 다양한 형질이 돌연변이로 생기고 그시기에 가장 유리한 형질이 많이 번식해서 남는다 맞지?

0
@미식실장

대~략 그런 셈이지

 

좀 엄밀히 말하자면 유리하다는 건 어떤 목적에 비추어 보느냐에 따라 유리할수도 아닐수도 있고, 같은 목적에 비춰 보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안 유리하지만 멸종을 유발하진 않았을 수도 있고, 그렇겠지

 

번식의 경우에도 많이 번식 안 했는데 남을 수도 있을 거고

 

확실한건 멸종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처하지 않은 경우엔 계속 대를 이어갔다, 이거겠지

1
2024.01.18
@날씨가나쁘잖아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마스터 오브 사이언스

1
2024.01.18
[삭제 되었습니다]
@아와비아

그러고보니 학교에서 배운 내용에 그런 게 있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네. 좋은 첨언 감사.

0
2024.01.19

먼훗날 봤을때 인류의 등장 이후 '진화'라는게 발생할 가능성은 어떻게 보십니까

애초에 현 시점에서 말하는건 의미없지만 의견이 궁금합니다

0
2024.01.20
@파송송심영탁

글을 다 읽으신건진 모르겠지만

글의 요지는 진화는 그런 결과의 의미가 아니라 과정의 의미라는 것 같은데

0
@파송송심영탁

질문을 못 이해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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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퇴화도 진화에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거에서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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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진않았으나 조만간 유니콘이나 페가수스가 태어난단소리죠? 알겠습니다

0
2024.01.20

앙 이 글을 높게 평가

1

이게 여기까지는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아닌데도 이악물고 개소리 하는 사람들은 투표권제한을 하는게 낫다고 봄

1
2024.01.25
@띵호아띵호잉루

내 생각엔 이정도를 이해했는지못했는지 여부로 투표권 운운하는 니가 투표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함

너무 편협하고 극단적이고 자기객관화가 덜 되어있음 니라고 모든걸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데 넌 그걸 모름

2
@mlcc

그종교분이시구나.. 됐어요 상납안해요.

1
2024.01.25
@띵호아띵호잉루

ㅇㅇ종교 하나도 안믿고 중고딩이후로 진화론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투표권운운은 진짜 머리빈소리임ㅋㅋ 니같은애들이 지 이해못하고 모르는건 가볍게 넘김

2
@mlcc

어이구 지옥가

1
2024.01.25
@띵호아띵호잉루

넹넹~

0
@mlcc

창조과학 강연도 종 보고 그래라

1
2024.01.20

난 진화를 설명할 때 물 한 방울을 튕기는 걸로 설명함.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그걸 손가락으로 침. 그럼 사방으로 튀겠지. 그리고 일부분을 닦음. 사방으로 튀는 게 돌연변이고 일부분을 닦는 게 환경임. 보통 환경에 변화가 없을 경우는 맨 처음 물방울을 떨어뜨린 곳 주변을 닦음. 그럼 맨 처음 물방울만 남고 나머지는 사라짐. 이게 돌연변이가 대부분 사라지는 이유. 하지만 환경이 변해서 닦는 부분을 변화시키면 원래 물방울도 닦이고 그 주변에 있는 게 남음. 그 남은 물방울이 점점 커지는 걸 난 진화라고 설명함.

0

작년에 문과 석사 개붕이가 '진화에 의도, 방향성이 있다' 라고 개소리 퍼트리길래 키배 떴었는데...

개붕아 너도 이 글을 보고 있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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