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이야기

(펌,스압)또 다른 냉전

테크노 스릴러와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을 접목시킨 찰스 스트로스의 대체역사 단편소설 <또 다른 냉전 A Colder War>입니다. 번역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실린 애쉬블레스 님([email protected])의 번역본을 기본으로 약간의 수정을 가했고, 각주는 한국어 위키피디아 주석과 원 번역본의 역주, DC 기갑갤러리 엑스트라1 님의 주석을 참고해 편집, 추가했습니다. 
원문은 http://www.infinityplus.co.uk/stories/colderwar.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보분석가 Analyst


   로저 조겐슨은 서류를 읽으면서 의자에 뒤로 기댔다.
   그는 금발에, 삼십대 중반쯤 된 남자였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인공조명 아래서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 그런지 피부는 창백했다. 안경을 쓰고, 하얀 반팔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었으며, 목에는 사진이 첨부된 ID 배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창문이 없는 대신 공기정화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읽고 있던 파일 때문에 공포에 질렸다.
   예전에, 로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를 캘리포니아 사막에 있는 넬리스 공군기지의 개방행사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방호벽과, 번쩍이는 모니터 뒤쪽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주기장에 서 있는 대형 폭격기의 잘 닦인 기체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밝은 색깔의 끈들이 폭격기의 피토관1)에서 뻗어나와 있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축제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들은 잠들어 있는 악몽이었다. 일단 깨어나면 아무도 - 승무원들만 빼고 - 1마일 이내에서 그 핵폭탄으로부터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날개 끝 파일런 아래에 달려 있는 불룩한 포드의 반질거리는 표면을 보면서, 로저는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덩이를, 공습경보의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질 때의 싸늘한 공포를 느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아이스크림을 핥았고 군악대가 흥겨운 수자 행진곡을 연주하는 동안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선더치프 편대가 머리 위로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며 주위의 자동차 유리창을 덜덜 떨리게 만들 때에야 그 공포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어른이 되어 이 정보평가서를 읽으면서, 어릴적 콘크리트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핵동력 폭격기를 보았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파일 안에는 61년 가을 고공비행 중이던 U-2가 촬영한 콘크리트 박스의 흐릿한 사진이 들어있었다. 관 모양을 한 세 개의 호수는 북극의 태양 아래서 시커멓고 어둡게 보였다. 수로 하나가 방사능 경고 철조망과 무장 병력에 둘러싸인 채 서쪽, 소비에트의 심장부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깊은 수로의 물에는 칼슘염이 포화 용해되어 있었고, 콘크리트와 함께 금과 납으로 된 물막이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토를 겨냥한 채 잠들어 있는 거인이야말로 그 어떤 핵무기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위협이었다.

   이것이 프로젝트 코셰이2)였다.


1)피토관: 정압과 동압의 차이를 이용해 비행기의 속도, 고도 등의 자료를 구하는 장치.
2)코셰이: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사악한 불사의 거인, 여기서는 크툴루 신화의 그레이트 올드 원(외계에서 온 사악한 신)인 크툴루를 지칭.



돌아온 붉은 광장 Red Square Redux


경고
   다음 브리핑 영화는 비밀등급 골드 줄라이 부줌으로 분류되어 있다. 만약 비밀등급 골드 줄라이 부줌 인가를 받지 못했다면, 지금 즉시 강당을 나와서 부대 보안장교에게 보고하라. 본 지시사항에 대한 불이행은 구류 가능한 위반사항에 해당한다. 60초 내에 이행한다.

비디오 클립
   봄의 붉은 광장. 하늘은 맑고 푸르다. 높은 하늘에는 약간의 권운이 있다. 다섯 대의 4발 엔진 폭격기들이 잇달아 천둥소리를 내며 지평선을 가로지르다가 크레믈린의 높은 벽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에 완벽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보이스 오버
   1962년 노동절 행진 때의 붉은 광장. 소비에트 연방이 골드 줄라이 부줌으로 분류된 무기를 여기서 처음 공개했다.

비디오 클립
   같은 날 늦은 시간. 끝없는 무기와 병력의 행렬이 디젤 연기로 하늘을 흐리면서 쉴새없이 광장을 가로질러 행진한다. 꼿꼿이 앉은 병사들을 뒤에 태운 채 트럭들이 8열 횡대로 달려간다. 그 뒤로 포탑 위에서 차려 자세로 서서 단상을 향하여 경례를 하는 전차장들을 태운 T-56 대대가 구르릉거리며 지나간다. 머리 위에서는 MiG-17 편대가 엄청난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한다.
   탱크 뒤에서 네 대의 견인 차량이 느릿느릿 기어온다. 큰 트랙터들이 트레일러들을 낮게 매고 끄는데, 그 짐은 칙칙한 올리브 색의 방수천으로 덮인 채 묶여 있다. 그 아래 있는 것이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집채만한 크기의 울퉁불퉁한 빵 덩어리 같이 생겼다. 트럭은 양 옆으로 뒤에 무장한 병사들을 태운 지프처럼 생긴 차량의 호위를 받는다.
   각각의 방수포에는 은으로 다섯 개의 뿔을 가진 별을 그려 놓았다. 각각의 별마다 은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어쩌면 부대 휘장일 수도 있지만, 붉은 군대의 표준 양식과는 다르다. 기묘한 서체로 쓰여진 글자들이 테두리 원을 둘러싸고 있다.

보이스 오버
   이것들은 일시적인 통제 상태에 있는 살아 있는 종복3)들이다. 그것들을 견인하고 있는 차량에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의 핵시설 건설 작업에서 노역하는 형벌부대인 제2 공병여단의 휘장이 그려져 있다. 드레스덴 조약 당사국이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과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경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제67공병여단이 네 개의 대대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대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소비에트 ORBAT(Order of Battle; 전투서열)에 주어진 수치를 바탕으로 전체 전투력이 종복 288 개체에 이르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비디오 클립
   다섯 대의 거대한 Tu-95 베어 폭격기가 천둥소리를 내며 모스크바 하늘을 가로지른다.

보이스 오버
   이 결론은 조금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1964년에는 총 240대의 베어 폭격기 행렬이 레닌 묘 앞의 연단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때의 기술정보 제공자는 소비에트 공군은 이런 항공기를 160대 주기시킬 만한 주기장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인해주었다. 투폴레프 사무국의 사진에 기초해서 항공기 생산을 추정한 결과 당시의 폭격기 총생산량은 60에서 180대 사이로 알려졌다.
   1964년 군사행진 사진에 대한 추가분석 결과 스무 대의 비행기가 5대씩 네 개의 편대를 이뤄 동일 공역을 반복 선회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모스크바에서 맨눈으로 편대의 주항로를 관측할 수는 없었다. 1964년의 보고서가 소비에트 연방의 선제공격 능력을 300% 정도 과장해서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군사력 수준을 추정할 때에는 약간의 의심을 품고서 붉은 광장에서 본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종복 넷이 그들이 가진 전부일 공산이 높다. 그러나 역시 한편으로, 실제 전력은 그 추정치보다 상당히 높을 수도 있다.

정지사진 시퀀스
   고고도에서 - 아마도 위성궤도 높이에서 - 잡은 산악지방의 외딴 마을의 정경. 작은 오두막들이 솟아오른 바위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다. 근처에서 염소들은 풀을 뜯고 있다. 
   두번째 사진에서, 무언가가 마을을 짓밟은 다음 폐허의 흔적을 길게 남기고 지나갔다. 생겨난 길은 폭격으로 인한 피해의 흔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다. 대강 4미터 너비의 무언가가 마치 어마어마한 열을 가해 녹여버린 것처럼 바위투성이의 고지대를 반들반들하게 깎아내었다. 판자집의 한쪽 구석이 술취한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고, 다른 쪽은 매끈하게 잘려나가 있다. 그 궤적 안에서 새하얀 뼈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하늘에서 내려와 시체를 쪼는 독수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스 오버
   이 사진들은 최근에 KH-11 정찰 위성이 궤도를 잇달아 통과하는 동안 촬영된 것들이다. 사진간 시간 간격은 정확하게 89분이었다. 이 마을은 유명한 무자헤딘 지도자의 본거지였다. 1962년 행진에서 관측된 트럭의 화물칸에 실려 있던 짐과 자취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 흔적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비에트 군에 의해 운영되는 종복 부대가 실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화 흔적의 너비는 측정 결과 4미터로 나타났다. 그 흔적 위에 존재하는 유기물질들은 분자 단위에서 완전히 붕괴되었다. 파괴 속도 - 그 사건은 종료까지 5천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생존자는 보이지 않았고, 두번째 궤도 통과 때에는 그 원인이 된 존재는 이미 공수되고 없었다. 주민들이 DShK 중기관총과 RPG, 그리고 AK-47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위성이 궤도를 수정하여 정찰을 계속했지만 원인 요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전지역에서 주민들이 사라졌다. 잔해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거주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현저한 증거들을 검토해 본 결과, 소비에트 연방이 카이베르 고개4)에서 전투 태세로 골드 줄라이 부줌을 전개시킴으로써 드레스덴 조약을 위반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밖에 없었다. 나토군이 핵무기 없이 이 무자헤딘 전사들을 더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을 거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3)종복: 쇼거스. 크툴루 신화에서 인류 이전에 고대문명을 건설했던 외계생명체 올드 원이 노예로 삼기 위해 만들어낸 종족으로, 슬라임같은 부정형의 몸체를 어떤 형태로든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4)카이베르 고개: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에 걸쳐있는 해발 1000m의 고지. 인도에서 중앙 아시아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요충지이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파슈툰 족 무자헤딘들의 본거지였다.



퍼즐 궁전 Puzzle Palace5)


   로저는 군인이 아니었다. 그리 애국자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70년대 초 처치 위원회6) 청문회의 후폭풍 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CIA에 들어갔다. '회사'는 암살 임무에서 손을 뗐고, 관료적 엔진만이 국가 안보를 움직이고 있었다. 로저도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제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그는 더 이상 회사를 따라갈 수 없었고, 무심하게 일선에서 물러나 기어를 중립상태에 놓고 살짝 기울어진 길을 저절로 내려가는 자동차처럼 은퇴와 연금, 그리고 금시계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서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담배갑을 꺼내 불법제조 담배를 하나 꺼내물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잠시 뒤로 기댄 채 애써 긴장을 풀었고, 손 떨리는 것이 멈출 때까지 가차 없는 빛 아래 허공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파이들이 총이나 KGB 요원이나 철조망 같은 걸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스파이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문서였다. 비밀은 문서에 기록된다. 사형집행 명령도 문서로 전달된다. 이런 종류의 문서들, 흐릿한 18년 전 가짜 미사일 사진과 시간/생존자 곡선과 서서히 증가하는 정신병 발병비율이 실린 폴리오로도 충분히 악몽을 꾸다가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요약하고 있는 것은 기관장과 CIA 부국장이 승인하에 국가안보위원회와 대통령 당선자가 참고할, 상급 기밀로 분류된 서류 가운데 하나였고, 그는 여기 앉아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담배로 공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몇 분 후, 로저의 손은 진정되었다. 그는 담배를 독수리 머리 모양의 재털이에 버리고 다시 정보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보고서는 요약본으로서, 그 자체가 수천 페이지의 서류와 수백 장의 사진을 증류한 결과물이었다. 보고서가 준비되던 해인 1963년에 그랬던 것처럼, 원문을 작성한 CIA도 프로젝트 코셰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냥 개략적인 내용, 그리고 거물급 스파이로부터 입수한 소문 정도뿐이었다. 물론 이에 대응할 그들의 프로젝트도 있었다. 특정 분야에서는 소비에트가 뒤져 있었기 때문에, 미공군은 소비에트가 벙커를 개방하려는 징조를 보이기만 한다면 프로젝트 코셰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XK-플루토7)로 무장한 12대의 핵동력 폭격기를 지칭하는 NB-39 프로젝트라는 은도금된 애물단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300만톤의 수소폭탄이 목표물 하나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걸로 충분할 거라 장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남극에서의 숨기기 힘든 대실패도 있었다. 국제 공동구역에서의 지하 핵실험이라니, 완전 개망신이었다. 다른 일(역주:암살사건)만 없었다면, 이것만으로도 JFK의 재선을 막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핵실험은 나쁜 핑계거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에레버스 산 너머의 얼어붙은 고원8)에서 501 공수부대에게 일어났던 일을 고백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대중들은 모르고 있는 고원, 히틀러마저도 준수했던 1931년 드레스덴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의 지리조사국에서 발간되는 지도에는 실려있지 않은 고원. 소비에트 연방 상공보다 더 많은 U-2를,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보다 더 많은 탐사대를 삼켜버린 고원.
   빌어먹을. 이걸 어떻게 다 요약하란 말이야?
   로저는 읽는 사람에게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힘,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용기를 불어넣어줄 단어로 무심하게 공포를 요약할 방법을 생각해내려 애쓰면서, 이 20페이지 짜리 보고서를 다섯 시간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백악관의 새 주인9)은 직설적인 화법에 딱 부러지는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기에는 너무 신앙심이 두터웠고, 눈을 감은 채 미국이 아침을 맞고 있다고 믿으며 자기가 했던 연설을 듣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프로젝트 코셰이나 XK-플루토, MK-나이트메어, 그 문들을 다른 무기체계에 슬쩍 끼워넣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았다. 무기는 치명적이고 끔찍한 효과를 야기하긴 해도,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윤리적인 속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는 지워버릴 수 없는 고대의 사악한 힘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차라리 그는 일이 터지고 사이렌이 울리면, 자신과 앤드레아와 제이슨은 남아서 핵공격을 맞이하게 되길 바랐다. 문 너머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광대한 저 바깥 세계에 도사리고 있을 것10)들과 마주치는 것에 비하면 그건 자비로운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광대함을 보고 닉슨은 우주 진출 경쟁이 얼마나 위험할 지 깨닫게 되자, 애물단지 셔틀에 관한 농담만 남기고 유인(有人) 우주선 프로그램을 취소해버렸다. 그 문 너머의 어둠 때문에 지미 카터는 신앙을 버렸고 린든 B. 존슨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경질적으로 이쪽 다리에서 저쪽 다리로 체중을 옮겨 실으며 서 있었다. 그는 사무 공간의 벽을 둘러보았다. 잠깐 재털이 가장자리의 담배 연기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허공에 떠 있는 게으른 용처럼 청회색 연기가 꿈틀거리면서 기묘한 설형문자 같은 글을 만들어냈다. 그가 눈을 껌벅하자 글자는 사라져버렸고, 누가 자기 무덤에 오줌을 누기라도 한 것처럼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마침내, 고요를 깨고 한 마디 내뱉었다. 담배 꽁초를 눌러 꺼버릴 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벽을 힐끗 쳐다보았다. 19시였다. 늦었군, 너무 늦었어. 앤디가 많이 걱정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너무 오래 끈 셈이었다. 그는 폴더를 의자 뒤에 있는 금고에 집어넣고 잠금 손잡이를 돌린 다음 다이얼을 움직여 놓고 서명을 한 다음 열람실을 지나 일반 출구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30마일 동안, 그는 입 안에서 아우슈비츠의 재 맛을 지우려고 계속 창밖으로 침을 뱉었다.



5)퍼즐 궁전: 국가안보국의 별칭.
6)처치 위원회: 1975년, 미국의 조직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상원 위원회로, 조사 과정에서 CIA가 외국 국가원수의 암살에 관여했단 사실이 드러나 1976년 대통령령에 의해 CIA의 외국 원수 암살작전은 일절 금지된다.
7)XK-플루토: 냉전기 있었던 핵동력 램제트 순항미사일 계획. 현실에서는 개발 도중 취소되었다.
8)에레버스 산 너머의 얼어붙은 고원: 크툴루 신화 속의 가상지명인 남극의 렝 고원을 가리킨다. 과거 올드원들의 도시가 자리했던 지역이며, 크툴루 신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광기의 산맥'의 배경이 되었다.
9)백악관의 새 주인: 로널드 레이건을 가리킨다.
10)바깥 세계에 도사리고 있을 것: 크툴루 신화에서 우주는 사악하고 강력한 신들과 인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들로 가득찬 것으로 묘사된다.



한밤의 백악관 Late Night in the White House


   대령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들떠서 방을 왔다갔다 했다. "보고서 요약이 정말 훌륭하더군요, 조겐슨!" 그는 사무실 파일 캐비넷과 벽 사이의 틈 쪽으로 걸어갔다가 거기서 돌아서서 자기 책상의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핵심 요소를 제대로 이해했더군요. 마음에 듭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회사에 더 많았더라면 테헤란에서 그 지랄11)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씩 웃자, 로저도 따라 웃었다. 대령은 40년대 만화책 주인공처럼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로저는 의자 모서리에 거의 차려 자세처럼 꼿꼿이 앉아있어야 했다. 로저는 대령을 '서sir'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걸- 자신은 민간인이지 지휘계통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혀를 살짝 깨물어야 했다. "연락관으로서 우리 팀에서 함께 일하도록 이 부서로 당신을 재임용해달라고 맥머도 부국장께 요청했습니다. 그분께서 거기 동의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기쁘군요."
   로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기서 일한다고요, 서?" 이곳은 백악관 확장건물 행정청사 지하였다. 대령이 누구이든 간에, 상당한 실력자에게 연줄이 닿는 모양이었다.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서? 당신 말씀대로라면, 당신의 팀은-" "잠깐 진정하세요. 일단 커피부터 듭시다." 대령은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로저는 해병대 문장이 새겨진 머그에 떠 있는 갈색 커피 덩어리를 조심스레 마셨다. "대통령께서 제게 팀을 구성하라 하셨습니다." 대령이 말했는데, 너무 태연한 말투에 하마터면 로저는 커피에 사레들릴 뻔 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위해서죠. 선거를 앞두고 일어나는 돌발상황이라든지. 니카라과의 그 빌어먹을 빨갱이들12) 같은 것 말이죠. '우리는 악의 제국과 서로 노려보고 있는 중입니다, 오지. 눈을 깜박거릴 틈도 없죠.' 그분께서는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악의 제국은 더러운 수작을 많이 부리죠. 그래도 요즘은 우리가 그들을 앞섰습니다. 제3 세계의 독재정권 같은 촌스러운 짓들 같은 데서요 - 쇼고스를 보유한 오트볼타13) 같은 녀석들이죠. 제가 하는 일은 그놈들을 밟아서 꼼짝도 못하게 만든 다음 박살을 내는 겁니다. UN 회담장에서 행패를 부려서14) 양보를 얻어낼 기회 같은 걸 줘서는 안 됩니다. 그놈들이 협박을 할라치면 제가 그 허세를 까발릴 거고, 한판 붙자고 한다면 저도 기꺼이 상대해 줄 겁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왔다갔다했다. "5, 60년대에 회사가 그 일을 했었고, 잘 해냈지요.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손에 피 묻히면서 일을 하다가는 뉴스거리를 쫓아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기자들을 달고 다니게 될 거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팀만으로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책임은 여기서 지는 거죠." 대령을 말을 멈추고 천장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저 위에서 질 지도 모르죠. 어쨌든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나는 회사를 잘 아는 사람, 얼간이 같은 관료들을 모아놓은 위원회를 통과하기 전에 완벽한 허가를 갖고 내부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퍼즐 궁에도 아는 사람이 하나 생기는 셈이고, 빅 블랙과도 연줄이 닿게 되는 거죠." 그가 예리한 시선으로 로저를 바라보자,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 NSA) - 퍼즐 궁 - 정보 인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존재 자체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던 빅 블랙, 국가정찰국(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 NRO)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
   로저는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 대령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 정보기관이라는 비잔틴 세계에서 그는 자기만의 전함을 만들어 대통령이 서명한 사략(私掠) 면허장을 새긴 졸리 로저 깃발을 걸고 바다를 누비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로저에게는 노스 대령15)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아직 물어볼 게 몇 가지 더 있었다. "피버 드림은 어떻게 된 겁니까?"
   대령은 커피 컵을 내려놓았다. "그것도 제가 담당자입니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이트메어, 플루토도.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원하신다면 잉크도 안 마른 명령서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지휘 체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보류 상태이고 다음 번 군축협상에 포함될 계획입니다. 더 이상은 전쟁 억지력을 보유한 ORBAT의 일부가 아닌 셈입니다. 지금은 핵무기를 규격화하는 중이거든요.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것들도 제 그룹의 일부인 이상, 필요하다면 포함시켜 악의 제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감소시키는 데 사용할 겁니다."
   로저는 어린 시절의 공포가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 드레스덴 조약은...?"
   "걱정 마십시오. 녀석들이 조약을 깨면 저도 가만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대령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11)테헤란에서의 지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 CIA는 혁명의 발발과 전개에 있어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12)니카라과의 빨갱이: 1979년 미국의 후원을 받는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산다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NL)을 가리킨다.
13)쇼고스를 보유한 오트볼타: 미국이 소련을 깔보면서 하던 표현인 '핵무기를 보유한 오트볼타'의 패러디. 오트볼타는 아프리카의 소국 부르키나파소의 별칭이다.
14)UN 회담장에서 행패를 부려서: 작가가 이를 염두에 두었을지는 불확실하나,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가 UN 총회장에서 항의의 표시로 구두를 벗어 책상을 내려쳤던 일화는 유명하다.
15)올리버 노스: 실존인물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란-콘트라 사건의 입안자로 알려져있다.



보스토크 호숫가의 달빛 The moonlit shores of Lake Vostok


   온도가 화씨 0도 근처를 왔다갔다 하는 금속재 부두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얼음 아래 동굴 속은 숨이 콱 막힐 정도로 어두웠고, 로저는 여러 겹의 방한복을 입은 채 떨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발을 굴렀다. 침을 삼켜 먹먹해진 귀를 트자 여기 로스 빙판 아래에서도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얼음 천장으로부터 주입시킨 인공 공기거품의 압력 때문에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감압실에서 하루 넘게 앉아 있게 될 것이다.
   부두의 가장자리 바로 아래에서 출렁이는 물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명은 수면을 뚫고 계속 나아갔지만 - 남극 지표 아래 호수의 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 이내 사라져 호수는 바닥 없는 먹빛 심연처럼 보였다.
   로저는 대령 대신 탐사대의 도착을 지켜보고 그들이 가져올 물품을 수령한 다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나 보고하기 위해서 여기에 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애써 무시한 채 DC에서 온 사람 앞을 왔다갔다 했다. 미드짓 잠수함의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맥머도 기지에서 온 엔지니어와 병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중위 한 사람이 뗏목 한쪽 구석에서 총과 비디오 카메라를 합쳐놓은 것 같이 복잡하게 생긴 무기를 든 해병 소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해장비 유지반처럼 보이는 통상적인 플랫폼 요원들도 있었는데, 침울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들은 남극의 빙판 아래로 주입된 압축 공기거품 속에 떠 있었다. 그들 밑으로는 과냉각된 보스토크 호수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랑데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500야드 거리." 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다. "10 노트로 부상합니다."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미드짓 잠수함을 타고 오래 전에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무덤을 지나 고요하고 차가운 물 속 3마일을 지나온 요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 하선시켜." 그 잠수함은 거의 하루 정도 항해했었다. 충분한 양의 배터리액과, 기기고장이 일어난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동안 승무원들을 숨쉴 수 있게 해 줄 정도의 산소를 싣고 출발했지만, 긴급 안전장치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세계의 경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로저는 더 빠르게 발을 굴렀다. "교체했던 셀의 배터리액이 떨어져 저전압 아이솔레이터를 작동시키기라도 하면 우리가 여기서 얼어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을 걸." 잠수함 승무원이 동료에게 농담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로저는 해병 하나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았다. "고먼이나 서슬로위츠로부터 연락 온 건 없나요?"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중위는 클립보드를 들여다보았다. "출발한 이후로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일단 잠수를 한 이후에는 잠수함과 교신을 하지 않습니다. ELF(Extremely Low Frequency; 극저주파)가 희미해지는 것도 있고, 누가 교신을 엿들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미드짓 잠수함의 노란색 곱등이 탐조등의 불빛 가장자리에 언뜻 나타났다. 잠수함이 부상하면서 수면에 물결이 일었다.
   "잠수함이 보입니다." 조종사가 마이크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세부 조정을 하고 밸러스트 탱크에 공기를 주입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중기 팀도 바쁘게 움직여 호수 위로 기다란 기중기 팔을 내밀었다.
   이제 수면을 따라 오르내리는 잠수함의 해치가 보였다. 중위가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존스! 시바티! 기중기 움직여, 왼쪽 중앙으로!" 이미 기중기는 그 커다란 견인 고리를 잠수함 위로 움직여 견인할 준비를 했다. "해치를 열기 전에 선창을 들여다보고 확인하도록!" 호수 바닥에 10 개의 작은 구멍을 파서 - 그 가운데 유인 탐사를 한 것은 일곱번째 구멍이었다 - 고대의 사원 같이 생긴 침수된 구조물을 발견했는데, 로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조만간 여기서 영원히 나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몰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잠수함이 거대한 노란색 목욕 장난감, 유머 감각이 풍부한 신이 디자인한 사이보그 고래처럼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잠수함을 끌어올려서 플랫폼 위로 안전하게 내려놓는 데 몇 분이 걸렸다. 해병들은 각자 제 위치로 움직여, 잠수함 선수의 매끈한 곡선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두 개의 선창에 불빛을 비추며 들여다보았다. 위에서 누군가가 불뚝한 사령탑에 연결한 송화기에다 대고 뭐라고 하고 있었다. 해치의 잠금장치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고먼입니다." 그 중위였다. 나트륨 불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빛 바랜 듯 창백하게 보였다. 그 군인의 얼굴은 젖은 판지 색깔이었고, 안도감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로저는 그 잠수함 승무원 - 고먼 - 이 상갑판에서 불안한 자세로 기어내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큰 키에 여위어 보였고, 세 사이즈는 더 커 보이는 빨간색 보온복을 입고 있었다. 못 깎은 수염이 까칠하게 턱을 덮고 있었다. 지금 그는 마치 콜레라 환자처럼 보였다. 창백한 피부에, 신체에 저장되어 있던 단백질이 연소되면서 나는 쓴 케톤 냄새가 났고, 기분 나쁜 병색이 감돌고 있었다. 왼쪽 팔목에는 얇은 알루미늄 서류가방이 사슬로 매어있었고, 멍이 수갑처럼 피부에 떠올라 있었다. 로저는 앞으로 나섰다.
   "서?" 고먼이 잠깐 몸을 꼿꼿이 폈다. 군대식 경례처럼 보이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자세로 계속 서 있지는 못했다.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QA(Quality Assurance; 품질 검사용) 샘플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잠수함 실내에 있습니다. 자물쇠 암호를 알고 계십니까?" 그가 지친 듯한 말투로 말했다.
   조겐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1. 5. 8. 1. 2. 2. 9."
   고먼이 느릿느릿 서류가방의 복합 자물쇠의 다이얼을 맞추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손목에서 사슬을 풀었다. 조명이 하얀 가루,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방에서 수송된 5 킬로그램의 1급 헤로인으로 가득 찬 폴리에틸렌 포대 표면에서 반짝였다. 나머지 1/4 톤은 선실의 상자에 들어 있었다. 중위는 물건을 검사한 다음, 가방을 닫고 조겐슨에게 넘겨주었다. "배달은 성공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 고원의 폐허로부터 남극의 미군 기지까지, 외계를 연결하는 문을 지나는 우회로를 이용한 여행이었다. 선주 생명체를 제외하면 누구도 어떻게 열고 또 닫는지 알지 못하는 문을 통하여- 하지만 그들은 그 방법까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당신이 지나왔던 곳은 어땠습니까?" 로저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물었다. "뭘 보았죠?"
   위를 올려다보니 잠수함의 해치에 서슬로위츠가 크레인의 부속의자 위에 반쯤 주저앉듯이 해서 앉아 있었다. 그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한 듯 했다. 고먼은 고개를 젓더니 외면했다. 흐릿한 빛에 그의 얼굴에 난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주름이 두드러져 보였다. 목성의 달 표면처럼 갈라지고 산산조각난 얼굴이었다. 주름. 노화의 흔적들. 머리는 달빛처럼 하얗게 세어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렸지요." 그가 불평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출발한 뒤 내내..." 그는 자기 나이보다 훨씬 노후한 잠수함 옆면의 흐릿한 그늘 속에 기댔다. "태양이 너무 밝았습니다. 방사능 감지기는 쉴새 없이 삑삑거렸고요. 태양풍 같은 거겠죠." 그는 몸을 굽히더니 플랫폼 가장자리에다 구역질을 했다.
   로저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먼은 스물 다섯 살이었고, 빅 블랙에서는 해결사로 통하는 인물이자, 그린 베레에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다. 이틀 전, 그가 물건을 가지고 문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의 건강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로저는 중위를 힐끗 돌아보았다. "이제 가서 대령님께 보고해야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멈춰섰다. "이 두 사람을 의무실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세요. 당분간은 빅터-탱고 경로를 통해 요원들을 보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뒷짐을 지고 돌아서서 승강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로 3마일하고도 몇 광년인지 알 수 없는 거리로부터 날아온 외계의 달빛이 보스토크 호수 표면에서 반짝였다.


16) 보스토크 호수: 남극의 빙하 아래에 있는 호수
17) 맥머도 기지: 남극점 바로 위에 있는 미국의 남극기지



리메이 장군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거요 General LeMay would be Proud18)


경고
   다음 브리핑 영화는 비밀등급 인디고 마치 스나이프로 분류되어 있다. 만약 비밀등급 인디고 마치 스나이프 인가를 가지고 있지않다면, 지금 즉시 강당을 나와서 부대 보안장교에게 보고하라. 본 지시사항에 대한 불이행은 구류 가능한 위반사항에 해당한다. 60초 내에 명령을 이행한다.

비디오 클립
  기총포탑들이 썩은 나무 둥치에서 튀어나온 버섯과 같이 동체를 둘러싸고 , 기괴할 정도로 불룩한 엔진 포드가 양쪽 날개 끝에 멀찍이 매달려 있고, 네 개의 터빈 튜브가 각각의 원자 커널 주위에 붙어 있는 거대한 폭격기의 사진.

보이스 오버
   "콘베어 B-39 피스메이커19)는 우리 공군전략사령부의 무기중 가장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여덟 개의 핵동력 프랫 앤 위트니 NP-4051 터보젯의 힘으로, 이 폭격기는 명령을 기다리면서 언제까지나 북극의 빙산 위를 선회할 수 있다. 이 사진은 아이템 원으로, 비행 훈련 중인 시험기체이다. 다른 열두 대는 지상에서 대기중으로, 일단 출격하면 B-39는 그들을 취급할 설비를 갖추고 있는 알래스카의 두 비행장에만 착륙할 수 있다. 이 기체는 지금까지 9개월 동안 비행 중이며, 노쇠한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장면 전환
   보잉 727 크기의 상어 하나가 괴물의 폭탄 적재실로부터 떨어진다. 눈부신 섬광의 로켓 추진으로 힘을 얻은 짧은 델타형 날개가 공기를 가른다.

보이스 오버
   "개량형 나바호 미사일20) - XK-플루토 탄두를 싣기 위한 시험발사체 - 이 수송기에서 투하되었다. 실전용과는 달리, 여기에는 수소폭탄이나 적에게 보복 공격을 가할 핵분열 램젯은 실려 있지 않다. XK-플루토는 마하 3의 속도로 비행하여 적의 영공으로 진입한 다음 최종 목표를 찾아낼 때까지 선회하면서 적재되어 있는 모든 메가톤급 폭탄을 투하한다. 일단 목표물 상공에 도달하면, 원자로 노심을 사출하고 용해된 플루토늄을 목표물의 머리 위로 뿌린다. XK-플루토는 궁극의 무기이다. 나무 꼭대기 높이로 날아가면서 일으키는 충격파부터 원자로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최대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장면 전환
   벨센 수용소로 부터의 엽서. '지옥에서 보낸 휴일'이라는 제목의 아우슈비츠 관련 영화.

보이스 오버
   "이것이 우리가 그런 무기들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그런 무기들이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나치 제3 제국의 토트 조직에 의해 깨어난 구역질나는 괴물들은 이제 우크라이나로 옮겨져, 자칭 '소비에트적 신인류'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장면 전환
   불길한 분위기의 잿빛 콘크리트 석판, 상부는 동독산 시멘트로 지은 마야 식 계단형 피라밋이다. 철조망과 총. 피라밋 기단에서 나와 발트 해 연안으로 뻗어 있는 말라붙은 수로는 건설 과정의 흔적이다. 여기서 모든 게 비롯되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포로들의 수용소가 그 검은 제복의 건축가들에게 바쳐진 무시무시한 기념비 같은 피라밋 옆에 움츠리고 있다.

장면 전환
   새로운 보금자리. 거대한 콘크리트 모노리스 하나가 콘크리트로 구획된 세 개의 호수와 수로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땅 한가운데 자리잡은 채, 납작한 팬케이크처럼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보이스 오버
   "이것이 프로젝트 코셰이다. 지옥문을 여는 크레믈린의 열쇠인..."


18) 리메이 장군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거요: 냉전 초기 전략 폭격의 선구자였으며 공군전략사령부의 수장(首長)이었던 미공군의 커티스 리메이 장군으로부터 따 온 것이다. 그는 극도로 과격한 핵무기 정책으로도 유명했다.  '석기시대로 돌려보내겠다'는 발언으로도 알려져있다.
19)B-39 피스메이커: 실존하는 B-36 피스메이커의 핵동력 버젼 파생형으로 추정. 현실에서는 B-36H라는 이름으로 한대의 시제기만이 제작되었다.
20)나바호 미사일: 1959~61년 사이에 실전배치된 미국의 대륙간 순항미사일. 사정거리는 8500km, 순항속도는 마하 3에 달했다.



초고대문명의 수혜자 Technology taster


   "그것들은 선캄브리아기 때 여기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굴드 교수21)는 눈을 아래로 깔고 청중들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래프를 조작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고생물학자 찰스 D. 월콧이 캐나다 록키 산맥 탐사 중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동부 경계에 인접한 지역에서 발굴한 대규모 동물군 표본을 입수했습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흘려 쓴 글자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6억 4천만 년 전에 죽은 이 오파비나 같은 화석 말이죠. 이렇게 오래된 연체 동물의 화석은 아주 보기 드뭅니다. 버제스 혈암은 선캄브리아기 동물군 화석 중에서 최고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깨에 큼지막한 패드를 넣은 풍성한 머리칼의 빼빼 마른 여자가 큰 소리로 훌쩍거렸다. 그녀는 선사시대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로저는 안 됐다는 듯이 움찔했다. 저명한 고생물학자가 방문한다는 소문을 어디서 주워듣고 나타난 모양이었지만, 교수의 입장에서는 없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령의 비서였다. 나가라고 하는 건 앞으로의 직장 생활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서진 돌조각의 사진이 나타나더니, 오파비나의 공명 영상이 떠올랐다. "이빨 자국입니다. 1926년 퍼버디 남극탐사대가 가지고 돌아온 Z-계열 표본의 환형 조각에서도 완전히 같은 형태의 이빨 자국을 찾아냈습니다. 선캄브리아기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늘날 갈라진 대륙인 육지의 대부분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모여 있었습니다. 이 샘플들은 원래 2천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각자 다른 기생 생물을 지니고 있었겠죠."
   "이빨 자국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령이 물었다.
   박사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가 그들을 산 채로 잡아 먹었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여기저기서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여닫을 수 있는 턱을 지닌 무언가가요.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보는 무언가가."
   다른 그래프가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희미한 수중촬영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기괴하게 생긴 물고기 같은 게 보였다- 측면 스커트와 스포일러를 달고 터보 엔진을 장착한 갑주 두른 먹장어, 아니면 촉수가 부족한 오징어처럼 생겼다. 머리 윗부분은 납작한 원판 모양으로, 두 개의 양치식물 가지 같은 촉수가 머리 아래 기묘한 빨판 입 위로 늘어져 있었다. "이 사진은 작년 보스토크 호수에서 촬영된 것입니다. 먹이가 없어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은 아노말로카리스22)라고 하는 동물로, 아까 말했던 이빨 자국의 주인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게 이걸 보여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가 덧붙였다. "다른 동료들은 화를 내겠지만요."
   살짝 웃었던 걸까? 교수가 재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로저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생물입니다." 굴드가 말했다. 무슨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콜리플라워의 머리 부분, 아니면 뇌처럼 생겼다. 프랙탈 도형처럼 끝없이 뻗어나온 부속지들은 몸통을 따라 갈수록 길이와 굵기가 줄어들더니 무지개빛 솜털이 되어 가운데 줄기를 덮고 있었다. 줄기는 네 개의 굵은 촉수가 지탱하고 있는 원통형 몸체에 연결되어 있었다.
   "아노말로카리스는 어떻게 해서든 분류 체계에 끼워 넣었지만, 이런 건 금시초문입니다. 할루시게나의 몸통 일부분을 확대한 것과 놀랄 정도로 닮았더군요-" 여기서 그는 다른 그래프를 띄웠는데, 촉수를 빽빽히 박아넣어 만든 워 보닛을 쓴 것 같은, 뾰족다리의 지네처럼 생긴 동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1년 전 우리는 할루시게나의 화석을 뒤집어 보고는, 그게 전혀 다른 가시투성이 벌레란 걸 알았죠. 머리 부분에는 고준위 이리듐과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건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30년 동안 연구해 왔던 동물계에 속한 건 아니죠.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동료들에게 도와 달라고 했지만, 그들도 DNA나 RNA를 검출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진 기계에 가까웠습니다."22a)
   "연대를 측정할 수 있습니까?" 대령이 물었다.
   "예." 교수가 씩 웃었다.
   "1945년부터 시작된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보다는 오래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아무리 오래 되었다 해도 19세기 후반 때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죽은 지 몇십 년은 되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던 사람들 중에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있지요. 반면-" 그는 아노말로카리스의 사진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바위 속에서 찾아낸 이 표본은 대략 6억 천만년 전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진으로 넘겼다. 생체 구조는 비슷했지만 더 선명했다. "죽었지만 부패하지는 않은 표본과의 유사성에 주목하십시오. 분명 아직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겁니다."
   그는 대령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수줍어 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까 그걸... 지금 우리들이...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계속하십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알아야 하니까." 대령은 풍성한 머리칼의 비서와 로저, 열심히 필기하고 있는 빅 블랙 직원 두 사람, 대통령 경호실에서 나온 진지한 표정의 여자, 그리고 콜라병만큼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낀 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중턱의 대머리 제독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수줍어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저희는 여러분께서 제공해 주신 아노말로카리스 조직을 일단 해부해 보았습니다- 알아낸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면서 재빨리 덧붙였다. "간단합니다. 이 표본들은 지구의 생태계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세포내 특성에 대한 분기학적 분석과 생화학적 특성에 따르자면, 일정 시점에서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분기된 게 아니라 아예 공통 조상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양배추가 훨씬 인간에 가깝고 공통점이 많을 겁니다. 6억년 전에 죽은 화석만 보고서는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조직 표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또한, 다세포 유기체이지만, 각각의 세포가 핵으로 보이는 복수의 물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걸 합포체(合胞體)라고 합니다. DNA는 없고, 지구상의 생명체와는 달리 한쌍의 RN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대부분의 유기 조직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지구 생태계에도 이런 생물들이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아니 지구상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아미노산들을 이용해서 단백질을 합성하고 있습니다. 이 생물들은 고세균(古細菌) 이전 단계에서 우리 조상으로부터 분기했던지, 아니면-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 전혀 근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대령님, 문(gate)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크기로 보자면 그렇게 표현해야겠군요. 당신에게 드린 그 동물은 우리가 임무 수행 중에 포획한 겁니다. 문 반대편에서요."
   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리 더 얻을 수 있을까요?" 그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올해 초에 있었던 사고에 대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임무가 보류상태입니다." 대령이 의미심장하게 로저에게 힐끗 눈짓하면서 말했다. 서슬로위츠는 2주 전에 죽었다. 고먼은 여전히 중태로, 신체내 결합조직들이 부패하고 있었는데, 아마 엄청난 양의 방사선에 노출된 것이 원인인 듯했다. 통상적인 임무가 재개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 승무원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운송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 통로는 비워져 있을 것이었다. 로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임무가 재개되면 제게도 좀 알려주세요. 어쨌든, 문 반대편 쪽의 환경을 측정할 시설을 설치해 두셨습니까?"
   "아니오." 대령이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로저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령이 적재 공간 일부를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 이전, 네 번째 임무는 문 반대편에 있는 도시의 황량한 광장에 소형 전파 망원경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XK-마사다. 공기가 너무 희박해서 산소통이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한 곳. 하늘은 군청색으로 빛나고, 핏빛 태양 아래서 도자기처럼 변할 때까지 달구어진 황야 위로 건물들이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 전진기지의 시설에 기록된 펄사 신호를 분석한 결과, 지구와 같은 나선팔 안에 있으며 은하계 중심으로 6백만 광년 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외계의 건물 표면에는 우크라이나의 벙커 입구를 촬영한 흐릿한 흑백 미녹스 사진에서 본 것와 비슷한 문자가 적혀 있었다. 죽지 않은 채 영원한 잠에 빠진 프로젝트 코셰이, 발트 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도시의 유적23)에서 끌어올린 사악한 무언가를 지칭하는 상징.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그렇게 알고 싶어하는 거요?"
   "우리는 생명이 진화하게 된 과정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잠시 교수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자료, 그러니까 지구라는 우리의 세계 밖에 없죠, 아니 없었죠. 이제 우리에게는 두번째, 아니 두번째의 일부가 생겼습니다. 만약 세번째도 입수할 수 있다면, 이런 심오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죠. '외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으니, 이제 - 질문은 '외계의 생명체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살기에도 적합한 환경일까?'가 되겠죠."
   로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멍청하군, 그걸 알게 되는 날에는 아마 눈을 감아도 잠을 못 이룰 거다 -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것도 직장 생활을 위태롭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그건 교수의 명을 줄이는 행동이기도 했는데, 협조한 대가로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받는 건 부당한 일이었다. 게다가, DC에 있는 정부 청사를 방문한 하바드 대학 교수는 니카라과의 지저분한 정글 마을에 머물고 있는 빨갱이 선생보다 없애기 더 어려웠다. 누군가 눈치를 채고 떠들게 될 거고, 대령의 심기는 엉망이 될 게 뻔했다.
   로저는 굴드 교수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질문 있습니까?" 고생물학자가 물었다.
   "어- 나중에요." 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탈취한 나치의 생체실험 자료는 인간의 뇌가 발트 해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특이체(特異體, singularity)와 가까운 거리에서도 얼마나 오래 동안 살아남을 수 있나를 기록하고 있었다. 멩겔레24)의 광기가 빚어낸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SS는 증인이 될 수도 있는 생존자들과 증인들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들이 악의 어린 총처럼 장전된 채 미국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는 코셰이를 직접 보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세계를 잠식해 들어오는 정신"은 먹이가 없어서 깊은 잠에 빠진 상태에서도 광기로 가득 찬 꿈속을 표류하고 있었다. 여기서 먹이란 지적인 생명체였다. 그것이 원통형 몸체에 박쥐 날개와 촉수가 달린 괴물이든지, 아니면 그 뒤에 나타난 인간이든지 간에. "그들도 지적인 생명체였을까요, 교수님? 그러니까, 우리처럼 의식이 있는 존재였단 말씀인지요?"
   "그렇습니다." 굴드의 눈이 번뜩였다. "이 생물은-" 그는 그래프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는 선주 생명체, 원통형 몸체에 박쥐 날개가 붙은 생물을 지목했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뇌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인간의 뇌만큼이나 복잡한 신경절 같은 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움켜쥐는 기관으로 특화된 부분은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자료를 종합하면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존재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항성계를 공전하는 행성을 이어, 외계의 동식물군 같은 것을 왕래하게 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수준까지 발달해 있었고요. 항성간 문명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질학적으로 아주 오래 전 과거 - 공룡보다 열 배는 오래된 과거에 - 소멸된 문명이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북받치는 감정에 떨리고 있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 표면을 조금 긁적거리고 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류의 유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요? 우리가 세운 건물들, 피라밋마저도 모두 2만년만 지나면 다 무너져 버릴 겁니다. 고요의 바다에 남아 있는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도 50만년 정도만 있으면 극소 유성체의 낙하 때문에 부서져 버릴 거고요. 천만년 뒤에는 고갈된 유전이 다시 채워지고, 메탄도 맨틀에서 스며나오겠지요. 이동하는 대륙은 모든 걸 지워버릴 겁니다. 하지만 이 생명체들은...! 그들이 지은 건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우리가 그들의 기술 문명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을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대령의 비서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안 그런가요, 올리?"
   대령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암, 폰. 그렇고 말고!"



21)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 미국의 진화생물학자로 종래의 등속적이고 연속적인 진화론 가설에 맞서 짧은 기간의 폭발적인 돌연변이가 진화의 열쇠라는 '단속평형설'을 주장했다.

22) 아노말로카리스: 실존하는 종으로, 캄브리아기 때 멸종되었다.

22a) 크툴루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의 외계인, '올드 원Old one'의 묘사이다. 고도의 기술과 문명을 향유했으며, 지구상의 동식물들은 이들이 지구에 도착한 후 만들어 낸 것이다. 크툴루 스타 스폰(크툴루와는 조금 다르다.)과 전쟁을 벌이다 지구의 반을 내어주고 휴전에 들어가나, 자신들의 하인(종복)으로서 창조한 쇼거스들의 반란으로 결정적으로 쇠락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광기의 산맥>참고.

23) 발트 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도시의 유적: 크툴루가 잠들어 있다고 하는 르뤼에를 지칭하는 듯 하나 공식 설정상 르뤼에는 태평양에 위치한다. 작가의 독자설정인듯 하다.
24) 요제프 멩겔레(1914~1979), 나치 친위대의 군의관이자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으로, 잔혹하고 무의미한 인체실험을 반복해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강대한 악마 The Great Satan25)


   로저는 킹 데이비드 호텔의 바에 앉아 길쭉한 잔에 담긴 싸구려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는데, 냉방장치를 틀어놔도 땀이 줄줄 흘렀다. 시차 때문에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다 복통까지 겹쳐 밤 늦은 시간에도 방에서 나와 있어야 했지만, 앤드레아에게 전화하려면 앞으로 두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여기 오기 전에 또 한바탕 싸웠다. 그녀는 왜 그가 늘 이렇게 외진 곳으로 출장을 다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이가 아버지를 이따금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여기면서 자라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사방이 사업 이야기로 웅성거리는데도, 로저는 기분이 조금 우울했다. 그들이 전모를 파악한다면 - 앤드레아는, 늘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로 통화해야 하는 제이슨은 어떻게 할까 - 자신이 끌려가 수갑을 찬 채 백열전구 불빛 아래 심문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한참을 고민했다. 만약 대령이 모든 걸 까발린다면, 소심한 대머리 제독이 협박 때문에 비밀을 누설한다면, 그땐 누가 가족들을 돌봐줄까?
   로저는 비밀 공작원들이 어떻게 끝장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의 중추에는 많은 사람들과 방패막이 조직과 번호 계좌와 수상한 중동인 무기상이 있었다. 조만간 누군가 공론화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로저로서는 빠져나올 재간이 없었다. 그는 더이상 단순한 회사의 연락관이 아니었다. 그는 대령의 끄나풀이자 그림자, 외교관용 여권과 헤로인과 최종 소비자 증명서가 가득 든 불룩한 서류가방을 든 하수인이었다.
   그나마 배는 가라앉으면서 거꾸로 뒤집히니까 다행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최고위층에는 대령이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가 불거져서 워싱턴 포스트 1면을 때리면, 내각의 각료들과 장관들도 함께 목이 달아나고, 대통령 자신도 증인을 세우고 모든 관련 사실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스스로에게 문제를 제기하겠지.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만히 짚자, 그는 공상에서 깨어났다. "잘 있었나, 로저!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
   조겐슨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 것도 아냐."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앉아." 대사관에서 나온 실무자 - 마이크 해밀턴, 명목상으로는 대사관 의전 수행원 - 는 의자를 뒤로 빼고는 악의 없는 충돌사고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실무자가 아니라는 걸 로저도 잘 알고 있었지만 - 예일대에서 국제 관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실무자가 어디 있겠는가 -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뭔가 얻어내려 할 때마다 상대가 자신을 낙오자로 여기도록 만들고 싶어했다.
   "일찍 왔구먼." 해밀턴이 로저의 귀 너머를 바라보면서, 갑자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협의 사항 준비해, 내가 옆에서 거들어 줄 테니. 배경 조사는 다 했나? 타협의 한계선은 정해 두었지?"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위를 둘러보자 무함마드(성은 모른다)가 방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함마드는 로저의 한 달 급여보다 더 비싼, 저민 스트릿에서 재단한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수염은 깔끔하게 다듬었는데, 잉글랜드 액센트가 섞인 영어로 말했다. 무함마드라는 이름은 터키 식 이름이지 페르시아식 이름은 아니었다. 물론 가명일 테지. 그를 보고 있으면 서구화된 터키 인 사업가가 생각났다 - 확실히 헤즈볼라나 (이 대목에서는 작은 소리로) 콤의 현자 루홀라26)와 직접 선이 닿는 이란 혁명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란의 비공식 외교 사절이 텔아비브의 새끼 악마27)에게 볼 일이 있을 리 없고.
   무함마드가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런 모임은 으레 형식적이기 마련이지만, 잠깐 농담을 주고 받으니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그가 의외로 일찍 도착해서 그들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가 혼자 왔다는 것도 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요소였는데, 외교의 제일 원칙은 절대로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든지 도덕적인 우위를 점해서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압도적인 수적 우세는 막강한 심리적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로저, 반갑습니다." 그가 조겐슨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리고 닥터 해밀턴께서도 나오셨군요." 그가 더욱 환하게 웃었다. "대령 나으리께서 친구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나 봅니다."
   조겐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무함마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잠깐 그는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그것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 끌려가서 보게 되었다고 해야겠죠. 정말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위험분자들, 가슴속의 증오심 말고는 잃어버릴 게 없는 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로저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는 정리해야 할 빚이 있습니다만-"
   무함마드가 손을 들었다. "진정하시죠. 그 문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이들은 과격분자입니다. 자기 집이 잿더미가 되고 가족들이 갖은 수모를 겪는 걸 보면서, 그들의 가슴속은 분노로 가득 차게 된 거죠.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피로서 대가를 치르는 속죄의 행위를 치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법입니다, 알겠습니까? 가족의 일원을 잃은 사람들은 살인자의 피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 죄를 회개하고 알라의 뜻을 더럽힌 자들에 대항하는 성전에 동참할지어다."
   로저가 한숨을 지었다. "우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무기 수송해주지, 전면전으로 확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소비에트군과 싸우지28), 뭘 더 원하는 거죠? 인질29)들 말인데 - DC에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헤즈볼라가 그들을 곧 풀어주지 않으면, 다들 협상으로는 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걸로 끝이라고요. 대령은 당신을 돕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도 윗대가리들에게 보여줄 성과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죠?"
   무함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들이니까 인질들을 잡아두는 게 그리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걸 이해하죠. 그들은 당신들이 강대한 악마를 막아주길 바라고 있지만, 좋게 이야기하자면, 당신 나라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는 겁니다. 강대한 악마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날뛰면서 한밤중에 마을 하나를 쓸어버릴 때, 당신들이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미국은 외면하기만 했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이라크의 바트당원30)들... 불경한 티크리트 형제단31)과 그들의 정보기관 하수인들이 바스라32)에 있는 예어-수토트33)의 신상 앞에서 밤마다 희생제를 올리고 있어요. 테헤란에서의 유혈 사태34)가 그 효과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싸우지 않겠다면, 비카34a)의 과격분자들은 어떻게 해야 미국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겠죠. 그들은 우리처럼 세련된 편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로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공공연하게 소비에트에 맞설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미국이 전면에 나섰다가는 그들이 치르고 있는 국지전을 훨씬 뛰어넘는 사태로 발전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탈레반이 러시아에 대항해서 싸우는 데 미국이 도와줄 거라 생각해도, 공개적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싸우고 있는 건 러시아 인들이 아닙니다." 무함마드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과 손잡은 것들이죠. 그들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생각하지만, 행동을 보면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거든요. 렝 고원의 얼어붙은 자취가 러시아의 동토에 나타나고 있는 걸 보니, 러시아 인들이 키탑 알 아지프35)에 기록된 것들을 도구로 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드레스덴 조약을 위반했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저주받은 불경한 존재가 한밤중에 히말라야의 산길을 배회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있어요. 러시아 인들이 이 사악한 군대를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는대도 귀를 막고 있을 겁니까? 예언된 대로, 여기저기서 문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번 주에 우리는 그 문들 가운데 하나로 카메라 중계 포드를 장착한 F-14C 한 대36)를 날려보냈습니다. 조종사와 화기통제사는 천국으로 갔지만, 우리는 지옥을 들여다보았고 이를 입증할 영상 자료와 레이더 항적을 입수했죠."
   이란 외교관의 싸늘한 시선에 대사관에서 나온 실무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당신 대사에게 전하세요.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공장37)에서 생산된 물건을 구매할 목적으로 모사드와 예비 회담을 했었다고요. 당면한 문제가 우리 모두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해묵은 적개심은 일단 제쳐두자고요. 당신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야톨라 성하38)께서도 영혼을 먹는 괴물들의 처소로 핵무기를 안고 돌진하는 자는 낙원에 들 것이라고 비공식적으로 말씀하셨죠. 닥터 해밀턴, 우리 손으로 직접 그 괴물들의 아가리 속으로 핵폭탄을 밀어넣어야 한대도, 반드시 이 지구상에서 고대의 괴물들을 숭배하는 자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25) 강대한 악마: 이란 군부가 미국을 '강대한 악마'라고 부른 것을 반어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26) 콤의 현자 루홀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가리킨다.,
27) 텔아비브의 새끼악마: '큰 악마'미국의 새끼, 즉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28) 소비에트 군과 싸우지: 아프가니스탄에서 CIA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무자헤딘 게릴라 지원작전을 말한다.
29) 인질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지칭. 혁명으로 미국으로 도피한 팔레비 국왕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도중 미대사관에 난입·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 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한 사건이다.
30) 바트당: 정식 명칭은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이다. 모든 아랍 국가를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는 동시에 당시 아랍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서구 식민 지배에 투쟁하기 위한 아랍 민족주의 및 세속주의 운동. 이라크의 바트당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였으며, 타 아랍국가 바트당의 본산 역할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기 전까지 이라크의 지배정당이기도 했다.
31) 티그리트 형제단: 이슬람 형제단. 1928년 설립된 이슬람 급진주의 그룹으로, 식민주의와의 투쟁과 이슬람 전파를 기치로 삼고 있다.
32) 바스라: 이라크 제2의 도시. 이라크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33) 예어-수토트: 일반적으로는 요그-쇼토스. 크툴루 신화의 아우터 갓 중 하나.
34) 테헤란에서의 유혈 사태: 현실에서는 1980년 후세인의 침공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실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전황은 8년간 교착상태를 유지하였으며,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 까지 전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34a) 비카: 레바논의 도시. 헤즈볼라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35) 키탑 알 아지프: 크툴루 신화 속의 가장 강력한 마도서 중 한권, 이계의 신(그레이트 올드 원)을 불러낼 수 있는 비법이 적혀있다고 한다.
36) F-14C: 실제로는 이란이 보유한 것은 F-14A였다. F-14C는 F-14B의 개량계획안으로, 개발도중 폐기되어 후에 F-14D로 이어진다.
37) 디모나 공장: 이스라엘의 핵무기 생산시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38) 아야톨라: 시아파에서 고위 성직자에게 수여하는 칭호이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철학, 윤리학 등 최고 전문가들이 갖는 칭호로 꼽힌다.


수영장 Swimming pool


   "미스터 조겐슨, 이란 정부가 UN 결의안 216호38)와 1956년 제네바 협정39)에서의 비확산조약을 위반하겠다는 걸 어느 시점에 알게 되었습니까?"
   로저는 뜨거운 전등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직설적으로 물었습니다. 어느 부분을 이해 못하겠단 말인가요? 천천히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란 정부가 결의안 216호와 핵확산에 관한 1956년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겠다고 하는 걸 언제 알게 되었느냔 말입니다."
   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머리 주위를 맹렬하게 날아다니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제가 이란 정부와 직접 접촉한 것은 아닙니다. 베이루트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인질들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무함마드라는 사람을 만나 메시지를 교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령이 - 몇 년 동안 - 수 차례에 걸쳐 이 남자나 그의 후견인과 비밀 협상을 해왔다더군요. 무함마드는 이란 행정부내 파벌들에 관해 넌지시 말을 꺼내기는 했습니다만, 그가 말하는 게 사실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외교관 신임장 같은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하원의원은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징계하는 자리에 참석한 배심 교사처럼 그와 마주 앉아 질의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선생들이 그를 재판정에서 세운 다음 몇 년 동안 감방에서 썩게 만들어, 정말로 제이슨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전화로만 듣고, 에어쇼나 야구장에 함께 간 추억도 없이 자라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에는 무엇을 질문할 것인지 의논하면서 작은 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로저는 의자에 앉은 채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청문은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 카메라가 국회 문서보관소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한 떼의 굶주린 민주당원들이 물 속에서 공화당원 피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가운데 있던 의원이 로저를 바라보았다. "잠깐. 당신은 이 무함마드라는 자를 어디서 알게 되었죠? 누가 당신에게 그를 만나라고 지시했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었습니까?"
   로저는 침을 삼켰다. "언제나처럼 폰에게서 메모를 받았습니다. 마침 포인덱스터 제독40)이 이 친구와 이야기할 사람을 필요로 하는 참이었는데, 요컨대 이미 권력 중추에 접근해 있는 사람을 밀사로 쓰자는 거였습니다. 노스 대령은 비공식적으로 승인한 다음, 저에게 자기 판공비로 여행 경비를 충당하라고 했습니다." 의원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앞으로 내밀고 서로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걸 보니,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보좌관이 게걸음으로 다가와 쪽지 하나를 받아들더니 부리나케 달려가버렸다. "무함마드라는 사람이 중재자였다고 들었습니다." 로저가 덧붙였다. "베이루트 인질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서 말이죠."
   "중재자라." 남자가 못미더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의 왼쪽에 있던 남자가 - 피부는 달표면처럼 거칠었고, 가는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고, 매부리코에는 기미가 나 있었으며, 눈꺼풀은 푸대자루처럼 늘어져 있었다 - 소리내어 큭큭거렸다. "히틀러가 했던 것도 외교라고 본다면 그렇겠죠. '영토를 조금만 더 주면 멈추겠다'라."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잊었습니까?" 그가 힐난하듯이 물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저가 진중하게 대답했다.
   수석 심문자가 코웃음쳤다. "정확하게 무함마드는 이란이 어떻게 할 거라고 하던가요?"
   로저는 잠깐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들이 디모나 공장으로부터 뭔가를 구입할 거라고 그러더군요. 이스라엘 국방성의 핵무기 연구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논의의 맥락에서 파악하자면 -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단 하나, 핵무기뿐입니다. 어쩌면 여러 개를 구입한다는 것일 수도 있죠. 아야톨라가 바스라에 있는 요그 소토스 사원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공격을 감행하는 전사는 낙원에 들 거라고 선포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소비에트 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협정을 위반한 무기체계를 전개시켜 왔다는 확증을 잡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논의의 맥락에서 이것은 대량살상무기의 불법적 확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라크 쪽 정세를 염려하더군요."
   "이 무기체계라는 건 정확히 어떤 겁니까?" 매서운 표정으로 말없이 패널 왼편에 앉아 있는 세번째 심문자가 물었다.
   "쇼고스라고 하는 종복 생명체인데, 분자 규모의 부품으로 구성된, 진보된 로봇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형태를 바꿀 수 있고, 물질을 원자 단위에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부식성 산이나 분비 다이아몬드처럼요. 대개 미끈미끈한 구체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일부는 - MIT의 닥터 드렉슬러가 유틸리티 포그(utility fog)라고 하던 - 희미한 연기처럼 생긴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복제 재생산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정말로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들을 여기 남기고 사라진 선주 생명체의 기록을 복구한 데서 끌어낸 명령어를 사용해서 로봇처럼 프로그램하는 게 가능합니다. 소비에트는 1930년대 몰로토프 공습으로 다수의 쇼고스를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놓친 기록, 그리고 남극 탐사대의 보고서를 계속 조사하는 것뿐입니다. 특히 리브쿤스트 교수의 파일이 그들에 손에 넘어간 것은-"
   "잠깐. 그러니까 당신 이야기는 러시아 인들이 이것들, 어, 쇼고스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없다는 거로군요. 그리고 바그다드의 그 얼간이 아랍 녀석들도 이걸 손에 넣으려고 하는 참이고요. 쇼고스로 인해 우리 국방력에 전략적인 틈새가 생겼다는 뜻입니까? 러시아가 그들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리고 있다고 이란 인들이 말했다는 거죠?"
 로저가 재빨리 말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만, 한쪽이 그걸 선점한 결과 양쪽 모두 약하나마 신적인 힘을 지닌 존재들을 군사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쟁으로 치닫게 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대항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앉은 의원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30년 동안, XK-플루토와 함께 SIOP41)에 의해 운영되었던 B-39 피스메이커 부대는 러시아 인들이 지난 전쟁의 말기에 나치로부터 빼앗은 동면중인 외계의 존재, 프로젝트 코셰이를 가동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보유중인 모든 미니트맨 미사일을 다 합친 것에 필적하는 위력의 플루토급 핵동력 크루즈 미사일 12기가 항상 그 괴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그 괴물이 완전히 깨어나서 주위 200마일 이내 모든 인간의 정신을 흡수해버리기 전에 놈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주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두번째로, 우리는 쇼고스를 다루는 소비에트의 기술이 기껏해야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간 산악지대의 농촌 마을을 덮치도록 프로그램할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쇼고스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무기로서의 이용은 제한적이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스라의 사원입니다. 여기에는 가동중인 통로가 있는데, 무함마드에 따르자면, 이라크 비밀경찰인 무카바라트가 통로를 어떻게 조작하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중이랍니다. 그들은 그 통로를 통해 무언가를 소환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 - 그리고 러시아 인들이 - 무엇이든간에 그들이 불러들인 것의 통제력을 잃게 되는 걸 우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프로젝트 코세이의 핵심인 크툴루 같은 신적 존재를 또 하나 불러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 많은 남자가 말했다. "그 푸루인가 하는 거 말입니다만 - 바보 같은 K 접두사는 빼도록 하죠 - 그것도 그 일족입니까?"
   로저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통로가 적어도 세 개의 다른 행성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행성이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로를 어떻게 만들고 또 닫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통로로 사람들을 보내거나 입구에 벽돌을 쌓아 막는 것뿐입니다." 그의 거의 이를 악물다시피 했는데, 외계에는 그 세 개 이상의 행성이 있었고, 그는 그 가운데 최소한 한 곳은 가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XK-마사다42)에 NRO의 비밀 예산으로 세워진 피난처가 있었다. 그는 버크민스터 풀러43)가 설계하면서 만년을 보낸 수 마일 높이의 돔을, 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의 환형 포대를 보았다. 스컹크 웍스에서 제작한,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는 검은 다이아몬드형 전투기 편대44)가 XK-마사다의 하늘을 정찰하고 있었다. 수경 농장과 텅 빈 병영과 아파트 구역이 국회의원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수천 명의 지원인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 그들은 정부 청사 건물 지하실, 잭이 마릴린과 홀딱 벗은 채 수영을 즐기던 수영장45) 아래에 있는 방으로 이전된 출입구를 통해 대피할 예정이었다.
   "이제 녹화를 중지하게." 나이 많은 의원이 끊으라는 손짓을 했다. "끄라고."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끄고 자리를 떴다. 그는 몸을 앞으로, 로저 쪽으로 내밀었다. "자네 말에 따르자면, 우리는 비밀리에 전쟁을 치르고 있었단 말이군, 언제부터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것보다 더 오래전이라면, 20년대 퍼버디 남극 탐사대의 생존자들이 이 외계의 유산을 처음으로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리고 이제 이란인들이 이 게임에 끼어들어 사담과 싸우고 있다는 거고?"
   "예." 로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음." 의원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자네 '거대한 필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거대한-" 로저는 말을 멈췄다. 굴드 교수였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고생물학자가 강연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분이 그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군요. 왜 비행접시는 늘 보이는데 외계문명과 공식적으로 접촉한 적이 없는지에 관한 거죠."
   의원이 코웃음쳤다. 그 옆사람이 움찔하더니 자리에 바로 앉았다. "퍼버디와 그의 동료들, 리브쿤스트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우리는 우주에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거대한 필터라는 건, 그 대부분의 생명체가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고 다른 항성계를 방문하는 것을 막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 지적 생명체들이 자신들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전에 무언가가 이들을 멸망시킨다는 말이지. 이게 고대 생명체의 유물을 건드리는 걸 의미한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로저는 초조해하면서 입술을 축였다. "상당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말했다. 점점 불편해졌다. 의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자네의 대령이 들쑤시고 돌아다니고 있는 이 무기들 앞에서 우리 핵무기는 장난감 활에 불과할 텐데, 고작 하는 말이라곤 상당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뿐인가? 내겐 오벌 오피스의46) 누군가가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1980년 1월에 공포된 대통령령 2047조는47) 군이 핵무기를 대량살상목적에 적합하게 표준화하도록 했습니다. 다른 무기들은 점차 사용을 중단하게 될 것이고, 잉여분은 포인덱스터 제독의 합동군수위원회에서 관리하게 됩니다. 거기에 노스 대령은 USMC 사령부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고, 백악관에서도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의원들이 화가 나서 돌아보았다.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입구에 서 있는 보좌관은 망설이는 듯했다. "의원님, 저기, 어, 중대한 안보상 문제가 발생해서, 지금 당장 대피해야 한답니다-"
   "어디? 무슨 일인가?" 의원이 물었다. 하지만 로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보좌관이 의회 위원회 위원들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보좌관 뒤에 서 있는 사람이 경호실 요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스라입니다. 우리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로저의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는 동안, 주위의 시선이 그를 힐끔거렸다. "모두 이쪽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38) UN 결의안 216호: 현실의 결의안 216호는 남로디지아 독립선언의 인지 거부에 대한 내용이다.
39) 1956년 제네바 협정: 현실에서 56년에 조인된 제네바 협정은 존재하지 않으나, 1955년에 군비통제에 관한 제네바 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40) 존 포인덱스터: 해군 제독, 레이건 행정부의 안보보좌관으로 1988년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인해 기소당했다.
41) SIOP: Single Integrated Operational Plan. 미국의 핵전쟁에 대비한 최고 작전 계획.
42) 마사다: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마사다 요새에서 인용한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깨닫자, 유대인들은 결국 집단 자살을 택하게 된다.
43) 버크먼스트 풀러: 미국의 건축가, 지오데식 돔(가장 경제적이고 견고한 돔 형태)를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44) 스컹크 웍스에서 제작한,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는 검은 다이아몬드형 전투기 편대: F-117 스텔스 전폭기를 말한다. 스컹크 웍스는 록히드 마틴의 개발부서 중 하나의 별칭이다. 
45) 잭이 마릴린과 홀딱 벗은 채 수영을 즐기던 수영장: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염문설의 패러디.
46) 오벌 오피스: 대통령 집무실.
47) 대통령령 2047조: 현실의 대통령령 2047조는 엘크 보호구역에 관한 내용이다.



15분내에 폭격 시작 Bombing in fifteen minutes48)


   로저는 고개를 숙인 채, 국회 직원들이 서류를 옮기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로를 부르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복도를 지났다. 검은 정장의 경호원이 다가오더니, 로저에게 위원회 의원들을 따라오도록 재촉했다. 귀울림 같은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무슨 일이죠?" 그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실로 내려갔다. 다시 복도가 나왔는데, 해병대 초병 두 사람이 총을 뽑아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경호원은 무전으로 짤막한 보고를 주고받았다. 위원회 의원들은 좁은 군사용 통로를 따라 멀어져 갔다. 로저는 그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거죠?" 그가 경호원에게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잠시 무전을 듣고만 있었다. 이 친구들은 명령을 받을 때마다, 맹금류들이 먹잇감을 찾아 지평선을 훑어보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쭉 내밀곤 했다. "델타 포 진입한다. 오버. 이제 터널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이쪽입니다."
   "어떻게 되어 가냐고요." 로저는 순순히 통로로 이끌려가 통로 끝에서 모퉁이를 돌았고, 다시 물었다. 처음 느낀 둔중한 충격은 이제 진정되었다. 그는 차분히 계속 걷고 있었다. 
   "지금은 데프콘 원 상황입니다. 명단에 당신께서 백악관 직원으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왼쪽 두번째 문입니다."
   어두운 조명의 지하실에서 사람들의 대열이 빠르게 움직였고, 사람들이 철제문을 지나 하나씩 사라지는 동안 하얀 장갑을 낀 초병들은 클립보드에 표시를 했다. 로저는 당혹스러워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폰! 어떻게 된 거예요?"
   비서도 당황한 듯했다. "모르겠어요. 로저? 당신은 오늘 증언하기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고 있었죠." 그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밖에 아는 거 있어요?"
   "로니가 헬싱키에서 연설중이었어요. 대령님께서 제게 그걸 사무실에 녹화해 두라고 말씀하셨죠. 악의 제국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우리는 15분 내로 폭격을 시작할 수 있다고 농담도 했죠. 그러고 나서 일이 이렇게-"
   그들은 문 앞에 다 와 있었다. 문이 열리자 철제 벽으로 둘러싸인 에어록이 나왔고, 해병대 초병이 사람들의 배지를 받은 다음 사람들을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직원 두 사람과 중년의 준장 한 사람이 들어오자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주위에서 들리던 소음이 사라지고, 로저의 귀에서 뾱 하는 소리가 나자, 안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고 다른 해병이 그들에게 응접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여긴 어디죠?" 풍성한 머리칼의 비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XK-마사다예요." 로저가 말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공포가 솟아오르자 그는 토하고 싶어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48) 15분내에 폭격 시작: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라디오 방송을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이 마이크 테스트 멘트로 "친애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제가 러시아를 영원히 없애버릴 법안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오늘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는 5분 내로 폭격을 개시할 겁니다."라고 말한 일화의 패러디. 



우리에게는 자네가 필요해 We need you back


   로저는 다음 한 주를 멍하니 보냈다. 이곳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작은 호텔 객실 같았다 - 보안 장치, 온도조절 장치, 그리고 건물의 내부 쪽으로만 난 창이 있는 게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는 주위 환경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돌아갈 집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로저는 더이상 면도를 하지 않았다. 양말도 갈아 신지 않았다. 거울을 보거나 머리를 빗지도 않았다. 엄청난 양의 담배를 태우며, 배급소에서 싸구려 버본을 사서 매일 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는 게 전부였다.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자기파괴적 행동이라 할 만했다. 그를 지탱해 주던 것이 일거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직장, 소중한 사람들, 가족들, 그의 인생.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방사능 피폭으로 이미 죽어 안으로부터 부패해가면서도 아직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잠수함 앞에서 서 있던 고먼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그 생각에 그는 거울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흘째 되는 날 그는 의자에 앉아 녹화해둔 '나는 루시를 사랑해' 재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누가 방에 들어왔다. 그는 대령이 화면 앞을 지나 벽에서 TV 전원선을 뽑아버린 다음, 그의 옆자리에 앉자 그제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대령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긴 게 보였다. 재킷은 구겨져 있었고 목깃의 단추는 열려 있었다.
   "이러지 마, 로저."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로군."
   "예, 뭐, 대령님도 만만치 않군요."
   대령은 그에게 얇은 마닐라 폴더를 건넸다. 내키지 않는 투로, 로저는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들이었군요."
   "그래." 잠시 침묵. "정말인지는 몰라도, 아직 진 건 아니야. 아내와 아들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어쩌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대령님 가족들도요." 비참한 현실의 껍질을 통해 전달된 것이었지만, 대령이 걱정해주는 말에 담긴, 앤드레아와 제이슨이 무사할 거라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에 로저는 감동받았다. 그는 잔이 비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잔을 다시 채우는 대신 그는 잔을 발치의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 "왜죠?"
   대령은 그의 마비된 손가락에서 종이를 빼냈다. "아마도 누군가가 킹 데이비드49)에서 자네를 발견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미행했을 거야. 무카바라트 요원들이 사방에 깔려 있고, 그들이 KGB와 협조하고 있는 관계였다면..."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어. 때마침 대통령은 꺼져 있어야 할 마이크에 대고 농담을 해버렸고... 이번 주 정보 보고서 요약 읽어보고 있나?"
   로저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봐야 하나요?"
   "아직 사태는 진행 중이야." 대령은 뒤로 기대고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이곳에서 현재 상황에 관해 판단할 수 있는 건, 아직 모든 인류가 멸망한 건 아니라는 것뿐이야. 리가체프50)는 격분한 나머지 핫라인에다 대고 우리가 대량 살상을 저질렀다고 고함을 질렀어. 그가 아직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지. 유럽은 폐허가 되었고, 중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 블랙버드 정찰기로도 알아낼 수 없었어."
   "티그리트에 있던 그것이로군요."
   "그래. 나쁜 좋은 소식이야, 로저. 우리에게는 자네가 필요해."
   "나쁜 소식이라고요?"
   "최악의 소식이지." 대령은 자기 무릎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말 안 듣는 아이처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담 후세인 알 타크리티는 고대의 과학기술을 손에 넣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어. 그가 마침내 요그 소토스에게 접근하는 문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나봐. 아랍 습지대, 그러니까 이라크 동부 늪지의 모든 마을들이 사라져버렸어. 하늘에서 노란색 비가 내리고, 사람들의 피부가 뼈가 드러날 때까지 녹아내렸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겁을 먹은 이란인들은 마침내 핵무장을 하기로 했지. 문제는,  연설 두 시간 전에 핵무장을 했다는 거야. 플로츠크51)의 어떤 얼간이가 SS-20 우랄스코예 미사일포대52) - 8개월 전에 즉응태세로 전환된 - 의 절반을 남쪽으로 발사시켰어. 주예수를 찬양할지어다. 중동 지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이상- 나일 강에서 카이베르 고개까지 몽땅 태워버렸지. 우리는 아직 모스크바로부터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SAC는53) 전 피스메이커 편대를 공중 비상 대기시켰어. 지금까지 우리는 노스 버지니아까지의 동부 해안지대를 잃었고, 그들은 던바스 일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잃었지. 완전히 통제불능 상황이야. 우리가 빨갱이들이랑 싸우고 있는 건지, 다른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건지도 의견이 분분했어. 하지만 체르노빌의 관이 - 프로젝트 코셰이 말야 - 열렸던 거야, 로저. 그 상공을 지나는 키홀-11 위성이, 서쪽으로 향하는 자취를 발견했어. 플루토 공격으로도 그걸 멈출 수는 없었어 - 바르샤바 조약 가입 국가들이나,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라."
   대령은 로저의 와일드 터키 병을 움켜쥐고, 병목을 깨끗이 닦은 다음 병채로 마셨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로저를 바라보았다. "코셰이가 풀려났다고, 로저. 그 새끼들이 그걸 깨웠단 말이지. 그래놓고는 이제는 그걸 통제 못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내일 아침부터 다시 출근해줬으면 좋겠어, 로저. 우리는 이 툴루라는 괴물이 무슨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해. 놈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고. 이라크는 잊어버려. 이제 이라크는 지도상에 뻥 뚫린 채 연기를 피워올리는 구멍일 뿐이야. 하지만 크툴루는 대서양쪽으로 향하고 있어. 만약 놈을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49) 킹 데이비드: 예루살렘의 5성 호텔.
50) 리가체프: 예고르 리가초프. 소련의 고위 정치가, 소련 말기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반대하는 소수파벌을 이끌었다. 
51) 폴로츠크: 벨라루시의 도시. 보로비치 공군기지가 위치해 있다. 
52) SS-20 우랄스코예 : RSD-10 Pioneer. 구소련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53) SAC: Strategic Air Command. 전략공군사령부. 미공군의 핵전력을 총괄한다.



마사다 Masada


   XK-마사다는, 죽어가는 항성 주위를 공전하는 건조한 행성 표면의 차가운 고원 정상에 거대한 버섯처럼 1마일 너비의 돔이 튀어나와 있는 곳이었다. 새벽과 저녁이면 도시 바깥의 하늘에서 F-117의 뾰족한 검은 형체가 굉음과 함께 지나가며,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넓게 펼쳐진 위협적인 텅 빈 벌판을 정찰하곤 했다.
   시내 거리에서는 제복 입은 인간의 모양을 한 그림자들이 돌아다녔다. 그들은 솟아오른 콘크리트 건물의 발치에서 가을의 마른 낙엽처럼 부스럭거리며,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들 위로 탑의 철제 꼭대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지오데식 돔을 떠받치고 있었고, 돔은 악의 어린 외계의 별자리를 시야에서 가리며, 노쇠한 세계의 해골을 주기적으로 씻는 모래 폭풍으로부터 연약한 인간들을 보호했다. 이곳은 중력이 약한 편이었고, 낮에는 죽어가는 태양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반투명한 가스층이 밤하늘에 소용돌이 치면서 대리석 같은 무늬를 그렸다. 긴 혹한기의 밤에는, 이산화탄소의 눈보라가 돔의 표면에 몰아쳤다. 하지만 대기는 건조했고, 도시는 지하의 대수층에서 뽑아낸 물로 겨우 해갈(解渴)했다.
   이 행성도 한때는 생명으로 넘치던 곳이었다 - 아직도 적도 부근에는, 대기에 산소를 공급하는 찌끼 같은 조류(藻類)의 바다가 있었고, 북극 근처에는 판구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화산 지대가 있었다 - 하지만 행성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역사는 유구했지만, 미래는 없었다.
   가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로저는 도시 바깥으로 나가 건조한 고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의 등 뒤 도시에서 각종 설비가 가동되면서, 도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 요즘,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지워버리기 전에 무엇이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건져내도록, 지구로 가는 탐사대를 구성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로저는 그런 일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지구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앤드레아와 제이슨과 부모님과 여동생과 친지들과 친구들에 관한 기억을, 이 빠진 자리만큼이나 아프게 하나 하나 떠올릴 때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곳 고원 가장자리에 서서, 공허함과 쓰라림, 그리고 아픔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가끔 로저는 자신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에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필사적으로 알아내려고 애썼다. 살아 있는 시체들이 그의 주위에서 이야기를 하고, 매점에서 무언가를 먹고, 때때로 그에게 말을 붙이고는 대화를 하고 싶은 듯 기다리곤 하며 돌아다녔다. 여기에는 남자들과 여자들, 민간인과 군인들의 시체가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체들 가운데 하나인 군의관은 그에게 로저가 생존자의 죄책감이라는 통상적인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로저도 인정했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넋나간 표정으로 보내는 낮과 잠 못 이루는 밤이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고, 가족 장례식에 파놓은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래처럼, 흙은 절벽으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도시의 발전시설 기반으로부터 조금 아래쪽으로, 원자로의 래디에이터에 의해 가열된 뜨거운 공기가 나오는 커다란 격자창이 있는 곳에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좁은 길이 나 있었다. 로저는 그 길을 따라가면서, 사암질 토양이 그의 닳은 신발 아래로 부서지는 걸 느꼈다. 머리 위에서 낯선 별들이 알아볼 수 없는 별자리를 만들어 그가 집으로부터 정말 먼 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며 반짝이고 있었다. 길은 고원 정상으로부터 멀어졌고, 그는 도시가 그의 어깨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일 때까지 걸었다. 그의 오른쪽으로는 거대한 단층 협곡 사이로 죽은 자들의 고대 도시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어찔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너머에는 외계의 산맥이 솟아올라 있었고, 그 봉우리는 화성의 사화산만큼이나 높고 대기가 희박해 보였다.
   돔으로부터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길은 바위가 돌출된 곳을 휘감고는 비탈 아래로 지그재그로 내려갔다. 로저는 길이 굽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사막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리에 앉아 거친 절벽면에 등을 기대고 길 건너편으로 다리를 뻗자 그의 발은 허공 위로 나오게 되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 저 아래, 죽음의 계곡은 직각 방향의 지반 침하로 고랑이 패여 있었다. 예전, 수백만년 전에는 저기도 들판이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처럼, 로저처럼, 죽어 있었다.
   그의 셔츠 주머니 안에 구겨진 담배갑이 들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하얀 담배를 하나 꺼내 냄새를 맡아본 다음, 담배에 라이터를 갖다대고 짤깍거렸다. 담배가 귀했기 때문에 아껴서 피워야 했다. 그는 텁텁한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시고는 괴로운 듯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세계대전 덕분에 암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 없었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자, 희끄무레한 연기는 비탈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왜 날 골랐지?"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공허는 대답하는 데 뜸을 들였다. 그는 대령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알잖아."
   "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식구들을 버려두고 올 생각은 아니었다고."
   공허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민 발 아래로는 수 마일 높이의 허공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렇겠지.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지 몰라." 그가 말을 멈췄다. "뭘 해도 소용 없었겠지."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는, 죽음의 연기를 한 모금 더 길게 들이마셨다. "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거였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몰라."
   "가피한 일이었는지도-"라고 멀리 지평선에서 메아리가 돌아왔다. 멸종된 익룡의 메아리와 같이, 시커멓고 각진 무언가가 별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뱃속에 품은 터보팬을 울리며, F-117이 배회한다. 이미 싸움에서 졌다는 것도 모른 채, 고대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 오늘도 정찰을 하고 있었다. "자네 가족들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앤드레아? 제이슨? "정말인가?"
   공허는 다시 큰 소리로 심술궃게 웃었다. "영혼을 먹는 자 안에는 영원한 삶을 살게 돼. 누구도 잊혀진 채 방치되거나, 안식을 얻을 수는 없지. 그들은 그 존재의 정신이 만들어 낸 시뮬레이션 속에서, 그들의 삶에서 가능한 모든 결말을 경험하게 될 거야.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로저는 못 믿겠다는 듯이 들고 있던 담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밤하늘을 향해 담배를 집어던졌고, 담배는 평원 위로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불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배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용기를 내어 한참 동안 절벽 가장자리에 서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뒤로 물러선 다음, 돌아서 천천히 고원 위의 요새를 향해 길을 되짚어 갔다. 현재 상황에 대한 그의 분석이 틀렸다면, 적어도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셈이었다. 만약 그가 옳다면, 죽는다고 해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요즘 지옥이 왜 이렇게 추운지 의아해 했다. (He wonders why hell is so cold at this time of year.)

3개의 댓글

2014.01.14
이거길어도 너무길잖아...3개로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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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4
이야, 좋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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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4
아 ㅋㅋㅋㅋ글씨가 너무작아서 모바일로 보다가 결국 사무실 콤퓨타 켰는데 글 자체가 글씨가 좀 작은거구낭 ㅋㅋ 그래도 잼난다 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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