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 조선의 생산력은 일본의 1.6배
150만결,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식량 생산량을 가리킵니다.
결이라는 단위는 고려시대 면적을 의미했으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생산량의 단위가 됐습니다.
세종때부터 임진왜란 까지는 1결=300두를 의미했고, 조선 후기 농업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된 후, 1결=600두가 됐습니다.
두는 1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150만결 * 300말 => 4억5천만말,
1석 = 15말
4억5천만말 = 3,000만석
임진왜란 전 조선의 생산력은 3,000만석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의 생산력은 1,850만석에 불과했지요.
조선의 생산력이 1.6배 높았습니다.
임진왜란의 피해로 조선의 결수는 30만결 수준으로 줄었지만,
그 후 꾸준한 복구 노력으로 조선 후기 다시 150만결 수준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생산성이 증가하여. 6,000만석의 생산력을 가지게 됐습니다.
일본이 6,000만석의 생산력을 가지게 된 것은 메이지유신에 들어서입니다.
즉, 조선의 생산력은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의 시기를 제외하고, 메이지유신 전까지 지속적으로 앞섰던 것입니다.
이런 생산력의 차이는, 경지면적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일본의 경지면적은 임진왜란 전후 160만 헥타아르에 불과했습니다.
임진왜란후 도쿠가와 막부는 늪과 뻘이었던 간토평야를 개발했고,
적극적인 경작지 확장 노력으로 메이지유신 당시 302만 헥타아르로 늘어났습니다.
반면, 조선의 경작면적은 400만 헥타아르를 넘었습니다.
1910년 일본의 조사자료에 다르면 한반도의 경작면적은 422만 헥타아르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생산력을 앞선 시기는,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발한 이후입니다.
일부에서 일본이 국력이 조선초기부터 앞서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또한 조선인은 1인당 평균 240kg 수준의 식량을 소비할 수 있었습니다. 1인당 평균 100kg 대의 식량 소비가 가능 했던 일본인보다 월등히 윤택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park/8635927
<본인 추가>
조선의 "공식" 조세율은 10%, 그외 공납과 부과세를 포함하면 소득의 17~25%(1/6~1/4) 정도로 추정
조선후기 세도정치 때 소작농 병작반수제 50%
전국시대 조세율은 5공5민 50%
에도시대 "공식" 조세율은 21% - 나카무라 사토루
실질 조세율은 40~70%...때문에 에도시대 민중봉기만 3천번이 넘음
조선vs일본으로 싸우는데
두 나라 다 주력사업이 다를 뿐임
조선은 농공억상으로 농업에 올인한 상태고
주요 무역국이 명,청(특용작물/광물의 일부 1,2차산업 외 우위 산업x),
북방 유목민(청 이전엔 체제 갖춘 공식 무역 주체가 없고 있어도 대부분 영세해서 신뢰도 적음),
일본(농산물주고 광물받는 1차산업 무역)
이런 상태라 농업 만렙 찍음
왜란 전까지 조선이 쌀 생산량에서 우위
왜란/호란: 국토 씹창
그래도 다시 농업에 올인 -> 영조대에 선조 이상으로 복구
1910 병합 직후 경작지 까보니 422만 헥타르
일본은 메이지유신(1871) 때 경작지가 302만 헥타르
(간토평야 얘기하면서 고려<가마쿠라막부 라는 애들아, 거기 히데요시 뒤지고 세키가하라 끝나고 이에야스가 에도에 수도 박은 뒤에 개간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보다 산지가 많고(조선70%/일본80%)
강이 적은데다(한강514km, 낙동강525km, 대동강439km, 금강395km / 일본 최장 시나노강369km)
화산지형의 현무암질, 석회질 때문에 경작지 대비 생산력이 떨어짐
일본 하천 보거나 수도물 마셔 본 사람은 알 듯 (탈모충 참고: 석회수로 머리감으면 머머리 된다)
대신 전국이 배로 연결되는 교통망+전국시대 끝나면서 도로 정비,
화란 통한 외국 작물/기술력 입수,
화폐체제 정비로 상공업 아시아서버 만렙 찍은거
결론은 문과충들아 서류 광탈해서 울지말고 전과해라 이과가 답이다~!!
중갑옷빌런
어그로끌었다
굳이 1두로 하면 될 것을 석으로 고쳐서 계산해서 개소리 씨부리는 새끼들 많음
어그로끌었다
제대로된 농기구조차 없었다
우경법도 한국만큼 전국적으로 보급된게 아니라서
한국은 자연사해서 죽은 소를 갖고도
요리법이 만들어질만큼 소가 있던데 비해
좆본은 요리법이 만들어질만큼 있지도 않았음
등급인생
일제강점기때 제주도에서 소 가져다 교배해서 와규 만듦
그리고 고기 다루는 기술은 조선이 최고였다
부위별 구분, 도축기술, 조리법에서 씹압살
일본은 천왕이 불교 들먹이며 살생 금해서 천년동안 강제 금육시켜서
꿩이나 자라는 고기가 아니다라며 일부만 편법적으로 먹었대
옥국자자
조선왕조 실록에서도 저 쪽바리색기들은 왜 넘의살을 안쳐묵하는걸까? 라고 쓴기록도 있음
토끼는 새입니다 하고 먹은 일화도 있지
어그로끌었다
나무 쟁기였을거다
깊이갈이 하는것과 하지않는것 차이
지력의 차이때문에 휴경기간도 차이나게되고
기후좋아서 2년3작같은소리 하는 얼간이 많던데
사실 이런게 안되면 꿈도 못꾸지
정말 토질이 극도로 좋아서 가능한 극소수의 지역빼고
농사에 대해 주워들은 지식조차 없으면
얼마나 큰차인지 실감도 못하고 무시하기 바쁨
하여간 나무괭이로 소없이 땅 갈아엎고
휴경기간도 좆나 씹스러울 수 밖에 없는데
같은 면적이라도 생산량차이가 넘사벽일 수 밖에 없음
어그로끌었다
면세지가 늘어나서고 너가 말한것 조차 면세지를 뺀 숫자에 불과함
면세지 둘다 빼면
좆본 농업 생산량은 쇼군직할지가 전부겠지
다이묘 같은것들의 것은 빼야되니까
그러니까 너가 말한것도 적게잡아 1.6밴데
사실 면세지 다 포함하면 2배에서 2.5배이상은 될거다
아마 경기도 평안도는 뺐을테니까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 식량생산이 그따위니
왜소한 체격이고 해적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임
옥국자자
어그로끌었다
세금 내는 자작농이
토지를 많이 가졌던 시절에 비해
향교다니는 학생충이니 관료나 이런것 있잖아 면세자들
그런놈들한테 땅 다넘어가서임
옥국자자
공자님하고 성현에게 제사지내라고 땅줬더니 이새끼들이 고리대금업해서 땅뺐고 그랬지 그리고 정부정책 맘에안들면 한양으로 쳐들어가서 시위하고 그래서 영조와 흥선대원군이 괜히 빡쳐서 서원 때려부순게 아닐듯
어그로끌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벌인 짓거리지
영조까진 괜찮은데 아편전쟁 두번이나 터져서
청나라가 영혼까지 개털리고 네르친스크로 러시아한테 땅털린걸 뻔히 보면서
대원군새끼는 왕권강화나 할 생각을 했지 병신씹새끼
한국 역사상 최고 개새끼는 김일성도 아닌 대원군새끼임
타리릭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래프에 실제 과세결수랑 원장부 결제수랑 차이가 나는거고
니가 말하는 장부에서 사라진 면세지는 은결인데 은결은 조선 후기에나 횡횡하던거임 ㅋㅋ
다른사람한들에게 잘못된 지식 주입하기 전에 국사공부좀 제발 하고왔으면 좋겠네
뽕간다
문틈
등급인생
afck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pn=1&num=132859
어그로끌었다
250만결을 석으로 바꾸면 5천만석임
자료 내부에서 모순있는걸로 보면 어떤식으로 충실한지 이해 안가지만
굳이 생각해보자면 자기임의로 한국식 단위체계를 일본식으로 바꾸면서 오류 생김
일본식이 72k였나 144였나 모르겠는데
한국식은 180으로 기억한다
공통단위인 두로 전환하면 계산하기 편함
하여간 저건 과세기준의 농지면적이라서
면세지까지 생산량에 포함하면 250만결은된다고
생각하고 2.5배까지 잡았는데
당시 일본도 대충 그렇다고 봤는듯
꼬북꼬북
곡식이나 액체, 가루 같은 물질의 분량을 측정하는 계량단위. 승(升)으로도 표기한다.
중국 상고 때의 제도를 보면, 선사시대인들은 장년남자의 두 손을 모아 거기에 담기는 곡물량을 1승이라 하였는데, 이 분량을 부피의 기준량으로 하고, 그것의 10배를 1두(斗), 100배를 1석(石)이라 하였다.
우리나라도 상고 때는 장년 농부의 양손을 모아 담긴 양을 1되 또는 1승이라 하였다. 전래되어온 1되의 용적은 596.4㎤였는데, 1902년에 일본의 되가 쓰이고 부터는 1,804㎤가 되었다.
어느나라 공통단위인지?
타리릭
년차 익머생
결국엔 전통적인 수준에서 꽤 그럴듯하게 경영한 조선이 줄을 잘못 서서 패망한 거구만..
이래서 혼자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세를 잘 읽고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단 생각이 드네.
암만 혼자 잘해도 우리보다 더 잘나고 센 놈들은 득시글 대니깐
년차 익머생
이글만 가지고 해당 이슈를 결론내리기는 어렵겠다.
년차 익머생
일본은 1700년경에 이미 2700만을 찍음... 애초에 쌀 생산량 산출에 오류가 있는 것 같네
인구로는 이미 게임 끝이었네 역시.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을런지...
어그로끌었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단위는 석이 아니라 두임
년차 익머생
어그로끌었다
si기준72 144 180 다 다름 그래도 똑같은 취급하고
실제로 구한말에 강제통합되어 착각하게 되는경우가 많음
어그로끌었다
하여간 8세기 이전에 일본이 역전함
그리고 알잖아 옛날 한국인 밥먹는 양이
무슨 세숫대야 수준인데 일본인은 그냥 간장종지만하다고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조선군의 쌀의 양보고
조선군이 엄청난 대군인줄 알고 쫄았는데
병사 좆도 없었고
조선군은 일본군이 얼마안되는줄알다 생각보다 대군이었다는것에 놀랐고
인구와 식량 상관관계는 있는데 전가보도는 아님
년차 익머생
어그로끌었다
엄청난 대군인줄 알고 여기저기서 지원군 끌어모으다고
적진에 병력 없으니 필시 매복해 있을거라고
찾는다고 시간 날려먹었던가 ㅋㅋ
뭐 정확한건 아니고 그냥 극단적으로 하면
한국인 한명이 먹는쌀 = 일본인 세명이 먹는쌀
이렇게 되면 인구많으니
쌀은 당연히 일본이 많이 생산했을것이다
라는 추론은 엉터리추론이 됨
근데 일본인 세명어치는 좀 과소평가일수도 있음
지금 쌀소비량 급격히 줄은 현대조차
일본과 비교하면 1.5배는 더먹음
밥그릇 공기조차 크기보면 티나잖아
년차 익머생
어그로끌었다
조상님 밥그릇 크기 봐라
년차 익머생
어그로끌었다
일본인 몇명분을 혼자 쳐먹을정도면
아니 현대조차 일본인 1.5배먹는데
쌀의양으로 인구 추론 하면
남한인구는 5천만이 아니라 7500만이 되어야함
현실은 아니잖아
위에 농업기술의 차이까지 따져보면 글쎄 ㅋㅋ
꼬북꼬북
막노동하는 놈은 어느나라나 많이 먹고
그중 특이한 경우로 일반화한것 뿐이지
보릿고개로 자식새끼 굶어죽고 노비가 되는데
밥은 3인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게 말이되냐?
느그조상은 메갈이라도 되냐?
년차 익머생
인구 = 800만 : 1200만 (인구 숫자가 차이 나더라도 대략 2:3 정도로 봄)
석고 = 1200만 : 1800만 (이 역시 숫자가 좀 달라져도 결국 2:3정도로 봄)
※ 근데... 우연히... 지금도 남북한과 일본의 인구는 2:3 정도.
임진왜란 기준으로 이렇다네.
http://t1.daumcdn.net/cfile/cafe/265B5D4658F9EC1515?type=thumb&opt=R474x0a
어그로끌었다
석고는 일본만의 단위체계라 거름
애초에 인구는 6세기 7세기사이에
일본이 역전했다는데 굳이 말하는 이유는..
년차 익머생
http://cafe.daum.net/shogun/1Db/7446
어그로끌었다
일본이 조사한 기준에선 저게 맞는데
일본의 농업기술력과 농기구로
일본의 방식대로 농사지었을때 저런 석고가 나온다는것임
년차 익머생
어그로끌었다
1평에서 1k수확하고 2년동안 농사짓고 1년 휴경한다면
3년간 2k생산하겠지
한국은
1평에서 1.5k수확하고 4년간 농사짓고 1년 휴경한다면
5년간 6k생산한다
즉 15년간 10k생산하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15년간 18 k 생산하게됨 즉 1.8배정도의 차이
정확한건 아니고 그냥 예시임
위에 왜 그런지 대충 설명 했고
일본기준으론 저 정도로 석고 잡았을텐데
실제로 조선은 저렇게 1결당 300두씩 생산했다는것
일본이 250만결에 1800만 했다고
모순됐다고 깠는데 전후없이 읽어봐서 그랬지만
일본의 기술력과 농기구로 250만결이면 1800만 밖에 못했을 것이고
조선은 5천만 했을것이다 이정도
그와 별개로 임진란 전의 일본 정보력을 높이 평가하는 편임
하지만 그렇더라도 기껏해야 토지면적을 조사했을테지만
생산량이나 휴경 기간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파악하진 못했을거다
현실적으로도 장기 체류 세작들이
오랜기간 각지에서 몇년씩 보며 조사해야 아는데
일본식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음
기술차이 반영 못해서 산출량 적게 추정했을테고
년차 익머생
농기구의 차이면에서도 우리야 워낙 겨울 기후가 혹독했던 탓에 얼어붙은 토지가 많아 (한반도에 흔한 화강암질의 암석들도 그 단단한 경도로 유명하지) 그런 조건을 견디기 위해 단단하고 효율적인 농기구가 잘 발달했지만 일본은 토질과 기후가 다르기에 환경에 맞게 발달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고 봐.
http://i.img*ur.com/rhA51Jp.jpg
위 주소에서 *를 빼고 들어가봐.
토지비옥도에 대한 참고자료야.
보면 상당부분의 영토가 우리보다 등급이 높은 걸 볼 수 있지?
우리도 대동강이나 낙동강 유역은 질이 괜찮은 편이지만 그 외의 지역에선 중간 등급밖에 되질 못함을 알 수 있지.
토지회복력과 생산성에 둘다 최고 등급을 받는 1번 유형의 토양은 찾아볼 수도 없고 말이야.
여기에 기후까지 더해지면 마냥 우리가 생산성이 높았다고 단정짓기에도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어그로끌었다
토지비옥도 드립치지만 깊이갈이 안봤냐
저정도 차이는 깊이갈이 안되면 오히려 뒤떨어진다
농알못이 하는 소리에 신경쓰지마라
쌀농사는 그딴것 보다 수리시설이 훨씬중요한데
강 크기부터 넘사벽이여
어그로끌었다
이게 기술빨이 적다생각하는거냐
막말로 한국과 일본 농사기술력차이가 천년쯤은 난다보면 됐다
300두 생산하니까 1결이 된건데
그게 250만결이면 5천만석 나오는데 왜 1800만밖에 안뜨냐
너가 알아서 생각좀 해봐라
년차 익머생
기후도 꽤 중요할 수 있지 왜 한민족계 북방 왕조들이 몰락했고, 벼농사 북방한계선이 한반도 중간에 잡히는데
더욱이나 기술의 한계가 뚜렷한 전근대의 생산량 추산이라면 기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나저나 구체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농경기술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참고할 만한 자료 있음?
타리릭
글쓴이가 도량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이런일이 일어난거임.
도요토미가 임란전 조선 생산량을 1200만석정도로 추정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파악한 토지는 150만결정도임
당시 생산량 추정치 1결=300두 해서 생산량 45000만두
15두=1석 해서 3000만석
일본 1석이 180L 고 조선 1석이 85L 정도임
대입해서 일본석 단위로 전환하면 1400만석정도 나옴
도요토미가 추정한 추정치가 마냥 헛소리는 아님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8&index_id=cp03080227&content_id=cp030802270001&print=Y
내가 참조한 우리나라 도량형임 일본석고는 검색하면 나온다.
년차 익머생
여하간 요새 같이 국제식량무역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에 인구는 농업생산량에 비례했다고 추정하는게 합당하다고 봄.
타리릭
조선인 대식가설 이딴건 진짜 보면볼수록 내가 다 부끄러움
년차 익머생
타리릭
그거 대입해보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림
대식가설 주장하는애들이 말하는게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성인 남자의 한 끼 식사량을 7홉을 표준으로 하되 남녀노소를 평균하여 1인 5홉으로 하고 하루 두 끼로 하여 하루 식사량을 1되, 1년 식사량을 36말로 하였다. '
요건데 계산해보면
조선시대 36말이면 1말에 6L 정도니까 200L정도임
일본 석고 1석이 180L(성인 하나가 1년간 먹을 양)
일본인보다는 확실히 많이 먹었지만 대식가설에서 말하는것처럼 그렇게 과장되게 많이 먹은것도 아님.
어그로끌었다
타리릭
좀 알려주려면 똑바로 알려줘라
당시 일본 1석이 180ℓ이건 일제시대까지 계속 이어진다
우리나라 도량형
말[斗]은 10되로 세종 28년에 규정된 말은 신영조척으로 길이가 7촌, 넓이가 7촌, 깊이가 4촌, 용적이 19척 6촌으로 약 6.1ℓ였다. 1902년에는 6ℓ, 1906년에는 18ℓ로 통일되었다.
섬[石, 斛]은 황종관에서 나온 무게 단위로 120근을 나타내는데 고려시대에는 1석을 15두로 조선시대에는 소곡(小斛)[평석(平石)]을 15두 대곡(大斛)[전석(全石)]을 20두로 정하였다. 세종 28년에 규정된 소곡은 신영조척으로 길이가 2척 넓이가 1척, 높이가 1척 4촌 7분으로 약 91.7ℓ에 해당하고 대곡은 길이가 2척, 넓이가 1척 1촌 2분, 높이가 1척 7촌 2분으로 약 122.3ℓ에 해당한다. 1902년에 1석은 15두, 90ℓ로 통일되었고 1906년에는 10두, 180ℓ, 2가마니로 통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