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두들킬

사계절이 엇박자로 밀려서 달력에 어긋나게 맞춰져 있었다. 중얼거리면서 일몰이 갓 끝난 후의 백화점 옆 인도를 걸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나뭇잎의 색이 물든 그 밑으로 겨울의 날씨를 맞아 최대한 껴입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최대한 구기고 먼저 걸어가던 누군가의 뒤통수를 쏘아보다가 모퉁이에 걸려 팔과 다리를 허우적댔다. 그저께 연습장에 한 낙서가 떠올랐다. 난 입체감을 표현할 수가 없어 그저 선을 아무렇게나 찍찍 그어놓고 연결한 후에 가장 그럴듯한 모양을 덧칠하고, 일부러 조잡한 선들로 하얀 공간들을 채워 나갔다. 물방울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170cm 정도 되는 숏컷의 소녀가 차도에 서 있다. 원래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왼손에는 실에 묶어져 있는 풍선이 고무 부분 대신에 솜사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뭉실뭉실한 촉감을 연상한 후에는 뻔 한 파스텔 톤의 저녁노을이 하늘 위로, 그 옆에는 전기 송신탑이 양쪽에 세워졌다. 소녀가 밟고 있는 2차선 도로의 우측 하단에는 어릴 적 명랑 만화에서 보던 소리 지를 때의 삐죽삐죽한 말풍선과 같은 모양으로 싱크 홀이 뚫려 있다. 하지만 나는 디테일에 욕심을 내 버린 나머지 여자의 옆모습을 그리려는 시도를 했고, 공상 속에선 몽환적 배경에 청초하게 서 있던 소녀는 주걱턱과 새우 눈을 가진 단발머리의 중년 아저씨로 점점 변모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리는 걸까 볼펜을 들어서 가위표로 연습장을 난자한 후에 나는 공책을 덮어버리고 다른 일에 정신을 돌렸다.
쓰레기통에 구겨버린 실패한 그 그림이 내 목구멍으로 쳐 박혀져서 껴 있는 것 같았다. 감기의 증상은 없었는데도 목구멍이 쓰라려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도 얼굴도 이미 흐릿해져버린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짝꿍이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이제 백화점 건물에 점점 멀어져서 어두컴컴한 주택가 골목 쪽에 들어와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지자 계속 중얼거리던 혼잣말이 이젠 새삼스럽게 내 귀에 인식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대상없는 욕을 쏟아내고는, 다시 실실 웃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한걸음을 더 느리게 옮겼다.
87만 4천 7백 20원. 구겨서 접힌 채 꽤 오래 방치된 듯 한 종이쪽지에 적혀있는 액수였다. 지갑에 20원이 있는 사람은 요새 흔치 않다고 생각했다. 윤서체로 적혀있는 주민등록증에는 73으로 시작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골목은 점점 더 소리가 적어져서 나중에는 도둑고양이들의 소리, 버려진 쓰레기들이 바람에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만 들려 신경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다시 40여분을 분주하게 걷자 불빛이 현란하게 뒤섞인 번화가가 나왔다. 건물 옆을 지나가다가 음식점 앞에서 담배를 피던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3초 이상 머물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날씨에 맞지 않게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 시점에서 오른쪽 귀에 보편적인 검정색 피어싱을 한 그는 꽁초를 두 손가락으로 튕겨서 버린 후에 다시 음식점, 혹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로로부터 몇 블록 더 지난 후였다.

소녀는 플라스틱으로 된 거미줄의 한 모퉁이에 한 발로 몸을 지탱한 채 서 있었다. 그녀가 신은 빨간색 아디다스 운동화는 하얀색 실리콘 접착제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난 거미였던 것 같다. 내가 역겨움에 토를 할 때마다 내 입에선 뜨거운 실리콘 액이 흘러나와서 줄과 줄 사이에 새로운 줄을 만들거나, 덧칠했다. 내 손과 발, 그러니까 꽤 많은 수의 다리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소녀의 가슴을 내가 쪼아서 파먹어버린 후에는, 그녀의 심장 자리에 놓인 것은 장 아무개 씨, 42살의 반쯤 무너진 얼굴, 그리고 화들짝 놀라 다음 정류장에 내리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느껴진 87만 5천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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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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