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99%의 노력' 행크 그린버그

1901년 아메리칸리그 창립 멤버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는 두 번의 전성기가 있었다. '타이 콥의 시대'와 '행크 그린버그의 시대'다.

디트로이트는 콥의 풀타임 첫 시즌이었던 1907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도 정상에 오르며, 아메리칸리그에서 처음으로 3연패에 성공한 팀이 됐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세 번 나간 월드시리즈에서는 모두 패했으며, 이후 콥이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로 떠나기 전인 1926년까지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디트로이트의 2번째 전성기는 그린버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디트로이트는 그린버그의 풀타임 첫 시즌이었던 1934년 25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그린버그가 군에 입대하기 전인 1940년 다시 리그 정상에 올랐으며, 그린버그가 군에서 돌아온 1945년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47년 그린버그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보낸 디트로이트가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는 무려 20년이 걸렸다.

디트로이트를 대표하는 두 타자는 정반대의 모습을 지녔다. 콥이 '그라운드의 악당'이었던 반면, 그린버그는 야구계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행크그린버그.jpg

최희섭보다 1인치가 작은 6피트4인치의 그린버그
그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 큰 키를 약점에서 장점으로 바꾸었다

 

 


그린버그의 통산 성적은 1628안타 타율 .313 331홈런 1276타점으로 '레전드급'이라고 하기에는 곤란하다. 명예의전당도 10수 끝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린버그가 뛴 시즌은 불과 9.5시즌이었다. 무려 4.5시즌을 군대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266승 2581탈삼진으로 은퇴한 밥 펠러(클리블랜드)가 군복무 4년으로 100승 1000탈삼진을 놓친 것처럼, 그린버그 역시 4년반의 군복무로 200홈런 600타점을 잃었다. 그린버그는 군에 입대하기 전 풀타임 5년간, 연평균 41홈런 152타점을 기록했다. 군복무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550홈런 1900타점이 가능하다. 1900타점은 루 게릭(1995) 스탠 뮤지얼(1951) 지미 팍스(1922)의 영역이다.

역대 홈런(755)-타점(2297) 1위 행크 애런의 별명은 'Hammerin' Hank'. '퍼지'의 원래 주인이 칼튼 피스크이고, '빅 캣'의 원래 주인이 자니 마이즈였던 것처럼, '해머링 행크'도 원래는 그린버그의 별명이었다.

AIG를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험회사로 만든 모리스 그린버그 전 회장은 보험업계에서 '행크' 그린버그로 불린다. 바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 선수인 행크 그린버그에서 따온 별명이다. 행크 그린버그처럼 모리스 그린버그 역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고 한국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 출신이다.

행크 그린버그는 193cm 98kg의 거구에서 나오는 가공할만한 파워를 자랑했다. 통산 장타율이 6할대(.605)인 5명의 은퇴선수(베이브 루스 .690 테드 윌리엄스 .634 루 게릭 .632 지미 팍스 .609) 중 1명으로(현역선수는 앨버트 푸홀스 .629 배리 본즈 .608 매니 라미레스 .600 3명) 풀타임 9시즌 중 장타율이 6할대가 아니었던 적은 첫 해와 마지막 해뿐이었다.

그린버그는 통산 4차례 96개 이상의 장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루스와의 타이기록으로 루스와 그린버그를 제외하면 3번을 기록한 선수도 없다.

그린버그는 엄청난 노력파였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self-made' 슈퍼스타였다. 그린버그는 경기 전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방망이를 휘둘렀고 경기가 끝나면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타격 연습을 했다. 배팅볼 투수들이 그린버그만 보면 도망다닐 정도였다.

1911년 1월1일 뉴욕에서 루마니아 출신 유태인 이주민의 후손으로 태어난 행크 그린버그는 야구계 최초의 유태계 스타였다. 훗날 샌디 쿠팩스가 월드시리즈 1차전 등판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켰던 '욤 키푸르' 날에 처음으로 출장 불가를 선언한 것도 그린버그였다. 1930년대 유럽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확산되는 가운데, 미국내 유태인들은 그린버그를 희망으로 여겼고, 그린버그 역시 이를 자신의 막중한 임무로 생각했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양키스타디움이 있는 브롱스에서 자란 그린버그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그린버그가 원래 가고 싶어했던 팀은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마침 자이언츠도 이미 뉴욕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은 유태계를 겨냥한 유태계 선수를 찾고 있었다. 고교 졸업 후인 1929년, 그린버그는 자이언츠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하지만 존 맥그로 감독은 당시만 해도 야구선수의 사이즈가 전혀 아니었던 그린버그의 굼뜬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실제로 그린버그는 민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그린버그를 뽑지 않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별명이 '리틀 나폴레옹'이었던 맥그로 감독의 키는 170cm.

그린버그는 루 게릭, 화이티 포드, 토니 라제리 등을 발굴하며 '스카우트의 전설'이 된 양키스의 스카우트 폴 크리첼의 눈에도 띄었다. 크리첼은 그린버그를 양키스타디움으로 초대했고, 배팅 연습하는 게릭을 가리키며 자랑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린버그의 마음을 바꿨다.

가뜩이나 굼뜬 자신이 맡을 포지션은 1루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린버그는 게릭이 있는 양키스로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결국 양키스의 입단 제안을 거절했다. 그렇게 양키스는 루스-게릭-그린버그의 중심타선을 만들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

1930년 9000달러를 받고 디트로이트에 입단한 그린버그는 3년만인 1933년 메이저리그에 올랐다. 하지만 버키 해리스 감독은 그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그린버그는 타율 .301 12홈런 87타점의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1934년 마침내 그린버그에게 기회가 왔다. 어슬레틱스 출신의 명포수 미키 코크레인이 '감독 겸 포수'로 부임한 것. 코크레인은 주저없이 그린버그에게 1루를 맡겼고, 그린버그는 타율 .339 26홈런 139타점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63개의 2루타를 날렸다. 특히 462타점을 합작한 코크레인, 그린버그, 찰리 게링거(2루수), 구스 고슬린(좌익수) 4인방은 '죽음의 부대(The Battalion of Death)'로 불렸는데, 이들은 모두 명예의전당에 올랐다.

 

 

행크그린버그1.jpg

 

그린버그(맨 왼쪽)와 게링거(왼쪽에서 두번째) 게링거의 표정은 대부분이 이렇다
1983년 디트로이트는 그린버그의 5번과 게링거의 2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했다


그 해 디트로이트는 25년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개스하우스 갱'으로 불린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이듬해인 1935년, 타율 .328 36홈런 170타점의 눈부신 성적을 올린 그린버그는 만장일치로 MVP를 수상했고 디트로이트는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그린버그는 비록 2차전에서 손목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지만, 디트로이트는 시카고 컵스를 꺾고 창단 35년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36년 첫번째 불운이 찾아왔다. 그린버그는 첫 12경기에서 16타점을 올리는 좋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12번째 경기 도중 주자와 충돌하며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당한 부위에 또다시 금이 가며 시즌을 마감했다. 상태는 심각해 은퇴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1937년, 그린버그는 타율 .337 40홈런과 함께 게릭이 1931년에 세운 아메리칸리그 기록에 1개가 모자란 183타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1938년 그린버그는 '성역'으로 여겨진 기록에 도전했다. 5경기를 남겨놓고 58개의 홈런을 날려 지미 팍스가 1932년에 세운 우타자 최다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룸과 동시에 루스의 60홈런 기록에 2개 차로 접근 한 것. 하지만 그린버그는 마지막 5경기에서 1개도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훗날 그린버그는 당시 루스의 기록을 지키려는 사람들로부터 협박편지를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시즌 막판 유태계 선수에게 루스의 기록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한 일부 투수들이 고의적으로 승부를 피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1940년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린버그에게 좌익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수비력이 형편 없는 루디 요크를 기용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그린버그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데뷔 시절 심각했던 1루 수비를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린 상황이었다. 팀내 최고 스타인 그는 팀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또다시 좌익수 수비 맹훈에 돌입했다.

그 해 디트로이트는 리그 1위에 오르며 양키스의 5년 연속 우승을 저지했다(양키스는 이듬패부터 다시 3년 연속 우승을 추가, 8년간 7차례 리그 우승과 6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쓸어담았다). 그린버그는 .340의 타율과 함께 2루타(50) 홈런(41) 타점(150)에서 1위에 오르며 2번째로 MVP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팀을 위한 희생이라는 더 큰 찬사가 쏟아졌다.

2차대전이 심화된 1941년, 디트로이트는 그린버그를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입대를 받아들여 스타급 야구선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방망이 대신 총을 들었다. 1941년 12월5일 그린버그는 '만 28세 이상자 제대' 조치에 해당이 돼 군복을 벗었다. 그렇게 그린버그의 군생활은 1년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린버그가 제대한 지 이틀 후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린버그는 다시 군복을 입었다. 미 공군의 전신인 USAAF에 자원 입대한 그린버그는 사관학교 졸업 후 중위로 임관했고, 3년반 동안 중국-버마-인도 전선을 담당한 B-29 폭격기 부대에서 활약했다.

한편 연봉 재계약을 하러 차를 몰고 가던 도중 라디오에서 나오는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차를 돌려 자원 입대한 펠러는 전함 앨라바마호의 대공포 사수로 최전선을 누비며 8개의 무공훈장을 달고 제대했다.

1945년 7월, 그린버그가 4년2개월만에 돌아왔다. 그린버그는 복귀 첫 경기에서 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지금도 디트로이트 역사상 최고의 홈런으로 남아있는,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9회초 역전 만루홈런을 쏘아올렸다. 디트로이트는 1935년에 이어 다시 컵스를 꺾고 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도 홈런(44)과 타점(127)에서 1위에 오르며 제몫을 다한 그린버그는, 어느 날 운전 도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소식에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연봉 협상에서 이견을 보인 구단이 자신을 3만5000달러에 피츠버그로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린버그는 구단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정말로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자신에게 먼저 알려주지도 않고 언론에 공개한 구단의 행동에 분개했다.

반면 피츠버그 구단은 그린버그에 정성을 다했다. 그린버그를 내셔널리그 최초의 10만달러 선수로 만들어줬으며, 그린버그가 홈런을 펑펑 넘길 홈구장 포브스필드의 좌측 펜스 뒤 불펜을 'Greenberg Gardens'로 명명했다(극단적인 당겨치기를 하는 그린버그 홈런의 대부분은 좌측 펜스를 넘었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시즌 내내 부상에 시달리면서 타율 .249 25홈런 74타점에 그쳤고, 만 36세의 이른 나이임에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그린버그는 대신 풀타임 2년차의 랄프 카이너에게 정성을 쏟았고, 그 해 카이너는 51개의 홈런을 날리며 폭발했다. 'Greenberg Gardens'는 이듬해부터 'Kiner's Korner'로 불리기 시작했다.

 

 

행크그린버그2.jpg

 

그의 얼굴에서 차승원이 느껴지는건 나뿐인가? 얼굴 겁내긴 차승원 ㅋㅋㅋ

 

 
그리고 그린버그는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에 모습을 드러낸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에게 먼저 다가가 격려를 해준 것이었다. 상대팀 스타 선수 중 그린버그와 같은 행동을 취한 선수는 없었다.

1946년 뉴욕 백화점 재벌의 딸과 결혼한 그린버그는 은퇴 직후인 1948년 빌 빅이 구단주로 있는 클리블랜드의 팜디렉터를 맡았다. 1950년 단장에 부임한 그린버그는 1954년 클리블랜드의 최고 시즌(111승)을 이끌었다(하지만 빌 제임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알 로페스 감독을 해임하는 등 그린버그의 실책이 이후 클리블랜드의 몰락을 불러왔다고 역설했다).

그린버그는 1958년 빅을 따라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부회장이 됐고, 화이트삭스는 이듬해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이후 본거지를 캘리포니아로 옮기고 싶었던 그린버그는 LA 다저스의 지분 매입을 희망했지만 월터 오말리가 이를 거부하자 야구계를 떠났다.

그린버그는 1963년 고향 뉴욕에서 은행업에 투신, 성공적인 은행가가 됐다. 얼마 후 그린버그는 자신의 회사를 캘리포니아주 비버리힐즈로 옮겼고, 1986년 비버리힐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통산성적

 

 

행크그린버그3.JPG

 

통산 OPS가 ㅎㄷㄷ;;; 역시 지리는 애들은 지린다...

 

 

 


2개의 댓글

2013.04.09
멋진선수일세
전쟁만 아니었으면 역대급이 될수있을지도 몰랐겠다ㅜ
0
2013.04.09
@오니지랄
시대를 타고 났으면 레전설은 이사람이였겠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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