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때 그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은.


저녁점호가 끝나고 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의 시간.

일련의 기계적 절차와도 같았던, 매일 매일이 비슷했던 그 시간.

양치하고, 세수하고, 흡연장에 가서 담배피고, 나란히 앉아 컵라면 후루룩 하고.

소등을 기다리며 침상에 가만히 앉아, TV 속 뮤직비디오를 감상하고.

소등하고 누워서 서로 얘기하고.

매일 매일이 똑같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들은 하나 하나가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방 안에 꽉 차있던 라면의 매콤칼칼한 냄새,

TV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에이핑크 정은지의 사랑스러운 미소,

생활반 안에 잔잔히 퍼지던 로이킴의 센치한 기타 소리,

흡연장에서 마시던 비타민 탄산 음료의 시큼한 맛.


소등하겠다고 말하던 후임의 어눌한 목소리,

벌겋게 생활반 바닥을 비추던 빨간 소등불,

잠 못 이루던 이가 내던 모포의 꺼슬꺼슬한 소리.


왜 나는 그 기억들이 떠오르는 걸까.
이 밤, 무더운 열대야 속에서 나는 왜 이 단조로웠던 기억들을 글로 적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는걸까.






21시 40분. 저녁점호를 끝내는 방송이 울리면, 모두들 생활반에서 복도로 쏟아져나온다.


어떤 이는 한 손에 '육개장 사발면'을 들고 급하게 정수기로 발걸음을 옮기고,

어떤 이는 '디스 아프리카' 한 갑과 라이터를 들고 흡연장으로 향한다.

어떤 이는 옆 생활반에 놀러가고,

어떤 이는 그저, 저녁 점호가 끝났다는 작은 해방감에 도취돼 생활반을 나와 복도를 서성거리기도 한다.


정수기 앞에는 줄이 서져있다.

뒤늦게 왔다가는 불이익을 볼 수 있었기에 모두들 서둘러서 온다.

사람이 몰려서 정수기의 온수 온도가 떨어지면, 늦게 온 사람은 뜨겁지도 않은 물을 컵라면에 부어 먹어야 할 수도 있고,

아쉬운데로 설익은 면을 젓가락으로 술술 풀어 미온수에 불려 먹는다고 해도, 면발의 속은 잘 익지 않는다.

후루룩 입으로 면을 끌어다가 아드득 아드득 이빨로 부숴먹고는, 미적지근한 라면 국물을 들이키는 것 만큼 불쌍한 일도 없다.


흡연자들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다. 느그적 느그적 슬리퍼를 끌며 계단을 내려가, 대대 흡연장에 이르면,

주머니에서 짤랑대는 동전을 꺼내 흡연장 앞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는다.

코코팜, 데미소다, 그리고 밖에선 보지 못했던 이름모를 비타민 탄산 음료.

담배를 쓰읍-하고 들이마셨다가 후우-하고 천천히 내뱉고는,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마신다.

담배 연기 몇 모금에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지면, 나도 모르게 후임에게 한모금 하라며 음료수를 건넨다.

음료수를 나눠마시며 시시한 얘기들 - 간부, 훈련, 말 안 듣는 후임 - 이 오가고, 담배대가 별로 안 남으면 앞니로 캡슐을 콱! 물어 터트린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 빛나고, 입안에는 캡슐 맛이 싸하게 도는데, 뭔지 모를 바람이 가슴에 휑하니 분다.




'배려의 방'에서 옹기종기 앉아 라면 하나에 그렇게도 행복해하면서, 후루룩 후루룩 하다보면,

보급으로 나온 앙증맞은 육개장 사발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러면 용기를 들고 남은 국물을 버리러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변기에 국물을 쏴악! 쏟아내고 쏴아아-하고 변기를 비워내면, 주머니에 미리 꽂아놨던 칫솔과 치약을 들고 세면장으로 향한다.

양치하는 소리만 조용한 세면장에 울려퍼지고, 거울 속 빡빡머리의 내 얼굴을 보며 '이 정도 얼굴이면 먹히겠지? 휴가 나가면?' 하고 생각하며

새까맣게 타버린, 입대 전보다 굵어진 팔뚝도 한번 스윽쳐다본다. '그래, 이정도면 먹힐거야.'


양치를 끝내면 늘 귀신같이 소변이 마려워진다. "양치하고 나면 꼭 소변봐라!" 하고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도, 밑이 근질근질 해진다.

이미 여러명이 들러붙어있는 소변기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소변을 보면 그제서야 잘 준비가 된 듯 몸이 안심이 된다.

21시 50분, 복도는 생활반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후달들로 가득하고, 짬밥들 몇명은 벌써 TV 앞에 의자를 깔고 연등할 준비를 한다.





생활반에 들어가 관물대에 칫솔과 치약을 던져놓고는, 침상에 털썩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이미 나처럼 침상에 앉아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매일 밤, 분침이 숫자 11을 가리킬때쯤이면, 우리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것을 암묵적으로 거행하곤 했다.


매일 밤, 21시 55분이 되면 누군가가 리모컨을 집는다.

이미 틀어져있던 생활반 TV에서 예능을 하고 있었든-영화를 하고 있었든-뉴스를 하고 있었든- 상관없었다.

리모컨의 '메뉴' 버튼을 누른 뒤, 상하버튼을 누른다.

메뉴 화면에 떠있는 목록의 아래쪽으로 하얀칸이 움직이다가, '올레tv 뮤직차트'에 멈추면 확인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차트의 곡들을 위 아래로 왔다갔다, 움직이며 "오늘을 마무리할 음악"을 고르는 것이다.


리모컨을 쥔 이는 생활반 최고 선임자가 될 수도, 생활반 막내가 될 수도 있다.

모두 조용히 앉아 오늘 어떤 음악을 고를지를 쳐다보면, 그는 차트 위 아래를 조심스레 왔다갔다하면서 어떤 곡을 선곡할지 고르는 것이다.

"오늘은 이 곡 하는게 좋겠습니다!" 하고 누가 말하는 일은 적었다.

그저 상하 버튼을 누르며 생활반 안을 둘러보다가, 모두가 그 곡에 동의하는 눈빛을 보이면 확인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곡은 매일 매일 달랐다.

우리는 에이핑크의 'Mr. Chu'를 보며 잠시동안 달달한 환상에 빠지기도 했고,

씨스타의 'Touch my body' 를 보며 "와 씨발 허벅지 보소." 하고 꼬추를 빨딱 세우기도 했다.

EXID 의 '위아래' '핫핑크' '아예' 를 보며, 제발 오늘 밤 꿈에는 저런 애가 나오기를 기도하기도 했고,

f(x)의 'NU 예삐오' 를 보며 "최자 이 새끼 완전 개새끼네." 하고 말하기도, "그래서, 엠버 쟤 바지 벗기면 뭐가 있는거냐?" 하고 잡답하기도 했다.


악뮤의 "200%" 를 틀때면, 걸리면 뒤지는 것 알면서도, 후달들은 살짝살짝씩 무릎을 들썩이곤 했는데,

나도 후달때 어반 자카파 "Get" 들으면서 어깨 들썩였던 기억이 있으니, 봤으면서도 못 본체 하곤 했다.

한번은 빈지노의 "Aqua man"을 듣다가, 소등하고 나서도 단체로 "하루종일 너란 바닷속을 항해하는 나는 아쿠아맨~~" 하고 떼창하기도 했다.


유난히 밤은 어둡고, 달과 별은 빛나는 밤이면

우리는 10cm의 "스토커"를 듣기도 했다. 아! 뮤비속, 다리 위에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퐁네프의 연인들이 서로 얼싸안고, 춤추고, 넘어질때면

전입온지 얼마 안된 생활반 막내의 눈에서도, 폭삭 늙어버린 생활반 최고 선임자의 눈에서도, 그 연인들이 사랑하는 모습이 비춰지곤 했다.

악뮤의 "얼음들"을 틀을때면, 웬지 모를 센치한 감정을 느끼다가 조용히 잠에 들기도 했고,

윤종신의 "지친 하루"를 들을때면, 그 서글픈 목소리가 얼마나 가슴을 후벼파는지,

에디킴의 "굿나잇"을 들으며 위로의 말을 듣지 않고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밤 21시 55분, 아니, 밤 아홉시 오십오분이 되면,

잠시나마 답답한 대대 생활관, 좁아터진 생활반과 네모반듯한 침상을 벗어나,

저 밖의 세상, 또다른 인생을 살았다.


매일밤, 단 5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군인에서 벗어나,

씨스타 보라의 튼실한 다리에 매달리기도, 에이핑크 손나은의 입술에 키스하기도 하였고,

악뮤처럼 천진난만한 대학생으로 돌아가기도, "Get" 처럼 도도하고 시크한 현대인이 되기도 하였고,

퐁네프의 다리에 선 연인이 되어, 내 '지친 하루'를 위로해줄, "굿나잇"하고 말해줄 누군가를 꿈꾸기도 했다.









시계를 쳐다보던 생활반 막내가, 스위치 옆으로 가서 서있다가

"6중대, 소등. 소등." 하고 방송이 울리면

"김상우 해병님 소등해도 좋습니까?" 하고 물어본다.

"그래." 하고 답이 돌아오면, 형광등이 꺼지고 벌건 소등불은 켜지고,

"편히 주무십시오!" 하고 모두가 외치고 침상에 누워 모포를 덮으면

"그래..." 하고 답이 돌아오고,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생활반 최고 선임자인 김상우가 생활반 막내인 김종집에게 "종집아, 너 아다는 뗐냐 근데?" 하고 물어보면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이야기 꽃을 또 피우는 것이다.


어둠속, 모포 속에서 뒤척이며 "첫경험 썰 털어놔봐." 하고 누군가 종용하면,

신이 나서는 "어떻게 옷은 벗겼는데, 얘가 사실 뽕브라였던 겁니다." 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옆에서 "미친ㅋㅋㅋ" 하고 웃음이 빵 터지기도 하고,


"이 새끼 존나 재미없네. 니 맞선임이 재미있는 이야기 준비하라고 말 안해주디?" 하고 존나 까이다가

"악!" 소리와 함께 껌껌한 어둠속에서 대가리 박고 5분간 버티기도 하고,


"민규, 너 내일 첫휴가 나가지? 뭐 할 생각이냐?" 했는데 "일단 여싸친 만나서 꼬신 다음에, 모텔에서 한 2박 3일 할 계획입니다." 하고 말하면,

"야, 그, 부산 서면 쪽에 감성주점 하나 있거든. 거기 존나 분위기 오진다. 가서 술멕이고 좀 꼬시면 바로~ 넘어간다." 하고 알찬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최성현 해병님 곧 전역이신데 전역하면 뭐하실건지 알고 싶습니다." 하면,
"하아...솔직히 모르겄다. 일단 복학이나 해야지. 대학 생활 어떻게 하지.... 씨발."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종집아." "일병 김종집!" "오늘 수고했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실수 덜하고 욕 덜 먹자. 그래도 너정도면 잘하고 있는거야." 하면

웬지 모르게 울컥해져서 "...감사합니다!" 하고 내뱉으며 가슴이 찡해지기도 하고.



온갖 이야기 다 하며 웃기도, 한숨 쉬기도 하며 이야기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었다.











전역하는 날, 터미널에서 동기들과 작별 인사하고,

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향하던 그날. 집에 도착해 털썩 소파에 앉았을때,

텅빈 집안은 조용하고 나 홀로 멍하니 TV에 비친, 전역복 차림의 나를 보면서,

뭔가 가슴은 먹먹한데, 그 먹먹한 가슴에 휑하니 바람이 불었던 건,


이런 기억들 때문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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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은 훈련, 좆같은 밥, 좆같은 간부 새끼들,

좆같이 짧은 휴가, 좆같이 긴 작업, 좆같이 반복되던 과업....


그 많은 좆같았던 것들 때문에, 전역해도 다시는 이쪽 바라보고 오줌도 누지 말아야하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가끔씩 그때가 생각날 때가 있더라. 오늘 밤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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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인거 미안.

근데 (스압)하고 앞에 적고 싶지는 않더라 ㅋㅋ 미안.

위에 올려진 음악들 중에서도 그때 그 시절 생각하면 10센치의 스토커 생각나더라.

걔 들으면서 읽으면 그나마 읽을만해.

누구 하나라도 내 글 읽으면서 '새끼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하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