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백합귀족 8

  나데즈다는 두 귀족 여성이 바닥에 서로 엉켜 있는 상황이 직감적으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연찮게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엔 분위기가 달랐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바냐와 달리 그 위에 올라와 있는 타티야나는 마치 이성이랑 닿기라도 한 듯이 얼굴이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타티야나는 고귀한 귀족 답지 않게 허둥지둥 댔다.
 "그러지 말고, 일단 제 위에서 내려오시는게 어떨까요."
 바냐가 싸늘하게 말했다. 타티야나는 물론 예쁘고, 바냐는 타티야나의 몸에 매력을 느끼고는 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베라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베라와 안 될 것 같은 지금으로서는 타티야나를 신경 쓸 기분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요컨대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 그럴게요… 제가 참, 오늘 이상하죠?"
 타티야나가 바냐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부끄러워서 바냐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럼요, 타냐양은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부분에서도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오늘은 정말 이상하네요."
 바냐가 딱 잘라서 말했다. 
 "그게, 저도 어째서 당신과 같은 시골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는지 잘 모르겠어요."
 바냐는 타티야나를 툭 밀치고 일어났다.
 "사람은 가끔 천박하게 놀 상대가 필요할 때도 있죠. 당신 같은 경우는 그게 저였나 보네요. 귀족이라면 말할 땐 좀 더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시는게 어떨까요 타티야나?"
 울컥해서 있는대로 말했다. 타티야나의 표정이 사색이 되는 걸 보고 나데즈다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나데즈다가 생각하기엔 타티야나는 바냐와 친구가 되고 싶지만 바냐와 타티야나는 살아온 배경이 달라서 서로 친해지기 어려울 뿐이었다. 바냐의 성격은 냉정하다보니 타냐의 실수에 대해서 교정할 생각도 또 기회를 줄 생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나데즈다는 애초에 바냐가 여자를 좋아할거란 생각도 못해봤다. 마찬가지로 타티야나가 바냐에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해봤다. 
 가장 복잡한 것은 타티야나의 마음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흔히 어떤 부분에서 갑자기 확 꽂히곤 했다고 말하지만, 애초부터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취해도 꽂힐리가 분명히 없다. 그러니 복합적이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냐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보니, 타냐는 자신이 어째서 고향에 돌아간다는 바냐를 경쟁자로 보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대상으로 느끼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다. 바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인지, 친구로서 옆에 두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이성을 좋아하듯 말하기 힘든 부끄러운 감정인 것인지 알 수 없다. 거기에 타티야나는 남자와 접촉한 적도 별로 없다보니 남자를 이성으로서 좋아해 본 적도 없다. 도무지 바냐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부끄럽게 바냐에게 와서 귀족의 품위도 없이 허둥지둥 대고 있는지 술에 취한 것 같이 정신이 없다.
 "아가씨, 타티야나님은 그럴 생각이 없어요. 서투르지만 아가씨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타티야나님에게 모질게 대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데즈다가 타티야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알게 뭐야. 난 고향으로 내려 갈 생각이니까, 이제 두번 다시 엮일 일도 없어. 그리고 타티야나양은 주변에 친구도 많아. 하지만 그 친구들에게는 지금처럼 대하지 않아."
 바냐가 쏘아 붙였다. 더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다. 바냐는 아직 싸지 못한 짐들을 슥 둘러보고 굳이 챙길 필요 없겠다 싶어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귀족이 직접 가방을 드는 모습도 타티야나에게는 어색했다. 바냐는 나데즈다에게 눈짓으로 빨리 따라 나오라고 했다. 나데즈다도 더는 변호해 줄 수 없다. 타티야나는 속이 부글부글 끊는다.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스스로도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게 연회장에서 바냐를 처음 봤을 때 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이유를 설명 할 수 없어도.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입술도 통제할 수 없다. 타티야나는 문을 나서는 바냐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바냐양."
 심장이 마구 뛰고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이제부터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그건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말하게 된다. 바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움직이는 입술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 건가 스스로에게 회의해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저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말해버렸다. 순간적으로 욱하듯 말하는 이 말이, 지금 이 말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입에 담은 이상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타티야나는 후회해도 늦었다. 여자와 여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금기고,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다. 바냐의 처분을 기다린다. 피가 반대로 도는 것 같이 핑핑 돈다. 얼굴이 붉고 터질 것 만 같다. 
 바냐는 예상 밖의 말에 황당했지만, 이제서야 타티야나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설프다. 이렇게 울컥하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직위가 높은 귀족이라면 가볍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거나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식의 고백은 분명 모든걸 망쳐버릴 것이다. 바냐 역시 누군가에게 고백해 본 적은 없지만 이렇게 바보 같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직위가 높은…?'
 순간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었다. 타티야나의 지위를 이용하면 베라에게 접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바냐는 살짝만 튕겨보기로 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구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까요? 타냐양은 자신의 감정을 오해 하고 있어요."
 뻔뻔하게도.
 "아마도…… 이건 친구가 되고 싶은 감정과는 분명히 달라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어요."
 "바냐양 미안해요. 이상하죠?"
 대화를 듣는 나데즈다는 바냐보다도 얼굴이 붉어졌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여자가 여자에게 고백하는 순간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냉정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바냐는 가방을 내려두고 타티야나에게 가까이 갔다.
 "동성간의 연애 문제라, 이런 일이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간다면…… 곤란하겠죠?"
 "예? 아 그, 그건 안 돼요!"
 바냐는 타티야나의 약점을 잡았다. 
 "걱정마세요. 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장난칠 만큼 못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 준 만큼 저도 정직하게 당신의 마음에 답해줘야겠죠."
"……."
 바냐는 타티야나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
 "분명 이상하지만,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겠죠. 성별 따위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요. 타티야나양."
 "이해해주시는 건가요?"
 바냐는 타티야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 고개 숙이고 있던 타티야나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바냐는 손수건을 꺼내 턱에서부터 눈물자국을 따라 닦아 줬다. 가벼운 심사는 통과했다. 아무래도 쓸모가 있을 것이다.
 "타티야나양의 마음에 답해줄 수는 없어도……. 이 일은 우리끼리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해요. 저는 못 들은 걸로 해줄게요."
 "그럼 고향으로 가지 않는 거죠?"
 "생각해볼게요. 자, 너무 울었어요. 당신의 시종들이 찾겠어요. 어서 가보세요. 제 방에 오래 있었고, 울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보일 거에요."
 "그래요……."
 나데즈다는 바냐가 마음을 써서 애써 웃어 주고 있는 것 처럼 보여 기특했다. 나데즈다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귀족들과 달리 예절과 도리에서 좀 더 자유로운 민중들의 세계에선 동성애가 있곤 했다. 그것이 말 못하고 부끄러운 일인 것은 똑같지만, 일부가 성장하는 과정에 한 번 쯤은 겪어보는 일로 통하고 있었다. 나데즈다와 같은 시종들에게선 더욱 흔했다. 비슷한 또래가 모여서 같은 일을 하고 살다보니 시종들 끼리 연애와 비슷한 서로 쉬쉬 하는 그런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나데즈다는 똑똑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시종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데즈다 본인은 그런 상황을 모르고 있었지만.


 라울은 시종일관 숨어다니느라 바빴다. 왕궁도 시내도 모두 레온의 손이 뻗어 있었다. 라울은 자신이 왕자라는 입장이 최근과 같이 답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분명 베라가 나타나기 전에는 막연히 자신이 다음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베라가 나타난 이후로 모든 것이 베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라울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 다만 왕자라는 배경은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유용했고, 그 경우가 생각보다 자주 있다는 점에서 매우 써먹기 좋았다. 다만 써먹으면 써먹을 수록 레온과 같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왕자로서 자각하라는 압박을 넣어왔다.
 "빌어쳐먹을 왕족이 왕궁에서 숨어다니고 있으니, 가관이구만."
 모퉁이를 돌아 복도로 나가기 전에 힐끗 쳐다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라울의 금일 목표는… 없다. 다만 방에서 얌전히 앉아 있기엔 왕궁이 너무 좁고 답답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으면 백이면 백 레온이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여자랑 결혼하라고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망할."
 레온이 옆에 여자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여자는 다소 차갑고 사나워 보였다. 라울이 옆에 있는 방에 숨자 둘은 아무것도 모른채 지나갔다.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보았을 때 라울의 방으로 가는 듯 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옆에 있는 여자는 최소한 바냐양은 아닌 것 같네."
 위기는 넘겼지만, 시간문제다. 라울은 레온이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일이 얼마나 경각에 달렸는지 알게 되었다. 레온이 정해주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때는 끝이다. 레온의 손아귀에 들어가서 무시무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다툼을 시작해야한다.
 '정치적인 욕심만 없다면 레온 만한 친구가 없는데…….'
 라울은 머리를 굴려본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확실하게 벗어 날 수 있을까.
 "뭘 그렇게 고민하시는 겁니까, 왕자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울은 깜짝 놀라서 미끄러 넘어질 뻔했다. 돌아보니, 레온의 주변에 있던 노귀족으로 라울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압박을 넣던 귀족중의 한명이었다. 최악이다. 레온을 피했다고 생각했더니, 그 일당의 굴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노귀족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그 테이블 위에 펼쳐진 몇가지 문서를 보아하니 국토의 개발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다가 잠시 쉬는 듯 했다. 
 "허둥지둥 이 방안으로 들어와서 바깥을 힐끔힐끔 보고… 레온이라도 지나갔습니까?"
 '유리……. 노친네… 쓸데없이 눈치 빠르긴.'
 라울이 목구멍까지 말이 나오려는 걸 우겨 넣는다. 유리는 라울이 어릴적부터 많이 신세진 귀족이다. 그가 레온의 편에 섰다고 해서 함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레온을 피해서 숨는 것이, 꼭 결혼하는 걸 피해서 도망치는 것 같습니다."
 "하,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모른 척 했던 거야?"
 라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 해보시죠. 왕자님."
 유리가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됐어. 당신도 레온편이지, 결국 레온이 데려온 여자랑 결혼하라고 설득하려는 셈이잖아."
 "그러지 말고 앉아보세요. 전 레온의 편이 아니고. 이 나라의 편이고. 또, 왕자님의 편입니다."
 유리가 사람 좋은 눈빛으로 라울을 쳐다봤다. 라울은 정치인들이란 정말 맘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라고 투덜대지만 별 수 없이 자리에 앉는다.
 "말해두겠는데, 난 이제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러니까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라울이 의자에 앉으면서 탁자에 발을 얹었다. 그러고 유리의 눈빛을 읽었다. 유리는 라울이 그러거나 말 거나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왕자님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릇 왕족이라면 이 나라를 위해서 모두 바치는게 그간 누려온 특권을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레온을 비롯해서 많은 귀족들이 베라님 보다도 왕자님이 이 나라의 지도자에 걸맞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다녀왔는데도 부족하다는 거야?"
 라울이 발끈했다.
 "살아 있는 한 계속 해야죠."
 "안하겠다는 거잖아."
 유리는 라울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유리는 탁자에 발을 올리고, 최대한 불량하게 굴려고 노력하는 라울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레온의 말도 옳지만, 왕자님을 오래 봐온 어른으로서는 라울 왕자님이 빨리 여자를 만나는 것이 방황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황? 아니, 난 앞으로 이렇게 살 거니까. 이건 방황이 아니라 제 갈길을 찾은 거지."
 "제눈엔 확실하게 방황으로 보입니다."
 유리가 웃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레온이 선정해준 여자와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데?"
 라울이 묻자 유리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누구든 좋습니다. 저는 그가 선정한 여자랑만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그래…… 저번에 어떤 검고 긴 머리의 여자와 있지 않았습니까?"
 바냐를 이야기 하고 있다.
 "아, 그녀석……."
 
 유리는 열린 문틈으로 복도를 슥 쳐다본다. 라울도 시선을 돌려보니 복도 밖에서 소리가 나고 있다. 레온이 그를 찾고 있다.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복도가 울리도록 라울의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조만간 이 방에 있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
 "아무튼, 레온의 입장이 아닌 어른으로서 말하는 겁니다."
 "유리…… 여자만 만나면 해결 될거라는 발상은 굉장히 꼰대 같은데."
 "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면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건달 흉내는 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레온이 화가 난 듯 찾고 있다. 라울은 아무래도 빨리 이 방을 나서야 겠다고 생각한다.
 "어른의 말을 믿어보십시오 왕자님, 저는 베라님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에 있습니다. 남자를 모르고, 앞으로도 알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그분은 앞으로도 잔혹하고 냉정한 성격을 버리지 못하겠지요."
 "유리! 말이 심하다!"
 
 라울의 노성 때문인가 레온이 라울의 찾는 소리가 멈추고 잠시 뒤 방문이 벌컥 열린다. 레온은 창문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는 노귀족 유리만 볼 수 있었다. 유리는 뒤돌아서 레온을 쳐다보면서 어깨를 으쓱 했다. 레온은 성난 발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창문 밖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이미 라울은 사라진 뒤다. 
 "레온님!"
 뒤늦게 나타난 것은 보라빛 머리칼을 가지고, 다소 키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사나운 눈매에 맞게 음성도 말투도 높고 날카로웠다.
 "……."
 레온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 분입니까?"
 유리가 흥미를 가졌다. 여자아이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노귀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니카라고 합니다."
 레온이 끼어들어 말했다.
 "아니카양의 가문은 최근에 들어 보신 적 있을 겁니다. 본래 그렇게 눈에 띄는 가문은 아니었으나, 최근 몰락해가는 가문의 영토와 영지를 얻어내 급히 성장했죠. 해외에서 노예를 대량으로 들여와 대규모 농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 그런 행위를 금하고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매우 협조적이고, 또 실질적으로 재정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왕자님이 좋아하실지 어떨지는 모르겠군요."
 유리가 웃었다.
 "좋아하게 될 겁니다."
 

 타티야나를 보내고 난 뒤 바냐는 말 없이 정원을 왔다 갔다 거리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나데즈다는 짐을 당장 풀지는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건 바냐의 지시였는데, 타티야나에게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 보여주기를 한 다는 것은, 바냐가 고향에 내려갈 생각을 접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금 전까지도 모든 것이 끝장이고, 촌년으로서 인생을 마무리 하게 될 거라 생각해서 우울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 굴러 들어오고 말았으니, 바냐로서는 쉽게 놓기 힘들었다. 
 어째서 타티야나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지만, 타티야나의 지위를 어떻게든 이용해서 베라에게 접근 할 방법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 생각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티야나의 집에 식객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러면 높은 귀족은 물론, 왕족도 참석하는 연회에 나갈 구실이 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바냐는 사실 타티야나와 같은 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른다. 
 바냐는 혼란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겉으로 냉정한 척 표정을 굳혀도 속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모르는 사람은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춘기 소녀 정도로 생각할테다. 그가 반만 맞다는 건 생각도 못하겠지만.

 "어라,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바냐는 불쾌하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봤다. 타티야나의 옆에 있던 아니카다. 하필이면 머리가 복잡 할 때 마주쳤다. 또 무슨 시비를 걸지 모른다. 바냐는 자신의 가문이 한미한 시골 출신인 것에 대해서는 오직 베라를 만날 수 없다는 것만 불만이지, 아니카와 같은 사람들이 깔본다고 기가 죽지는 않았다. 
 "……."
 바냐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피하는 것이 정답이다. 갑작스럽게 잘나가는 귀족이 된 아니카로서는 무시당하는 것 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 없다. 그녀는 보란듯이 툭 치고 걸어가 바냐를 돌아보았다. 바냐가 무섭게 노려봐서 움찔했지만, 아니카 역시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깡촌 출신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내일 있을 왕자비 간택을 기대하나 보죠?"
 "……."
 속이 끊지만 간신히 억누르고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카를 더욱 열받게 했다. 
 "뭐라고 말을 하세요!"
 아니카가 성질을 냈다. 바냐도 울컥했다.
 "가던길…… 어서 가시길 바래요 아니카양."
  바냐는 부족하다 싶어서 다시 말을 잇는다.
 "타티야나양의 옆에 붙어다니기만 하는 기생충 주제에 자꾸 상대해 달라고 하시는데……. 전 다른 일로 바쁘니까요."
 아니카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기…기생충? 뭐야! 당신 정말 미쳤어요? 언행을 함부로 하는군요!"
 아니카는 자신의 언행이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타티야나의 옆에만 붙어 다녔다구요? 그거, 참. 우습네요."
 아니카는 내일이면 입장이 바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타티야나의 옆에 더이상 붙어 있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레온을 비롯해 귀족들이 라울을 왕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니카는 승승장구다. 
 "지금이라도 싹싹 비는게 좋아요."
 아니카는 바냐의 앞에서 자꾸 얼쩡거렸다. 바냐는 머리가 복잡하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가!"
 바냐는 도대체 아무 상관 없는 자신을 붙잡고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구는지 귀찮아 죽을 것 같았다. 아니카는 바냐의 태도에 울컥하고 들고있던 부채로 바냐를 후려치려고 했다. 바냐는 차마 아니카를 향해 손을 쓸 수 없었다. 대신 있는 불쾌함을 모두 담아서 노려 보았다. 
 "살짝 장난만 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바냐양, 당신 정말 후회하게 될 거야. 왕자비가 되고 싶은가 본데, 이미 내가 되기로 예정이 되어 있는 일이니까! 자기 입장을 잘 생각해 보라고요……."

 그러나 아니카의 부채는 바냐의 얼굴을 후려치지 못했다. 
 "그만하시죠. 귀족이라면 왕궁에서 품위를 지키시길 바랍니다."
 라울이었다. 아니카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놀랐다. 라울은 아니카의 팔을 놓아 주었고, 아니카는 부채마저 떨어트렸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들었나 싶어서 허둥지둥댔다. 바냐는 그런 모습을 싸늘하게 지켜보았다. 
 "와, 왕자님? 실례했습니다!"
 아니카는 잽싸게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려 했다.
 "아니카양? 부채를 놓고 가시면 안되죠."
 라울은 아니카를 붙잡고 떨어트리 부채를 건네주었다. 아니카는 부채를 받아쥐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라울은 왕궁 뒤편으로 해서 담을 넘으려다가 날카로운 언성이 들려서 호기심에 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트러블의 장소에 바냐가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바냐라는 여자는 항상 문제를 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항상 문제를 몰고 다니는데, 자각은 있겠지?"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조회 수
32443 [그림] 플러스터 토마+포세이혼 1 뿔난용 2 1 일 전 22
32442 [그림] 플러스터 토마+포세이혼(스케치) 뿔난용 1 1 일 전 13
32441 [그림] 오랜만에 샤프 낙서 장윈영 2 1 일 전 38
32440 [그림] 야밤 동탄 1 프로수간충 2 1 일 전 113
32439 [그림] 플러스터 간+기가듈 뿔난용 1 1 일 전 22
32438 [그림] 플러스터 간+기가듈(스케치) 뿔난용 1 1 일 전 17
32437 [기타 창작] 개다, 요루시카 권주가 1 1 일 전 34
32436 [그림] 플러스터 간+테라 뿔난용 2 2 일 전 47
32435 [그림] 플러스터 간+테라(스케치) 뿔난용 1 2 일 전 21
32434 [그림] 스윽 5 구파 7 3 일 전 70
32433 [그림] 플러스터 간+바로제 뿔난용 3 3 일 전 44
32432 [그림] 플러스터 간+바로제(스케치) 뿔난용 1 3 일 전 35
32431 [그림] 스압) 죽음이 보이는.manhwa 1 띠굼아 5 4 일 전 112
32430 [그림] 플러스터 토마+가브리온 뿔난용 2 4 일 전 47
32429 [그림] 플러스터 토마+가브리온(스케치) 뿔난용 1 4 일 전 24
32428 [그림] 블아 네루 8 2049 13 5 일 전 145
32427 [그림] 플러스터 토마+깅가드 2 뿔난용 4 6 일 전 96
32426 [그림] 플러스터 토마+깅가드(스케치) 뿔난용 2 6 일 전 33
32425 [그림] 플러스터 토마+마샨타 뿔난용 2 7 일 전 229
32424 [그림] 플러스터 토마+마샨타(스케치) 뿔난용 1 7 일 전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