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와주러 왔던 16개국의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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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48만 명 참전,  3만 6574명 전사, 10만 328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해준 나라.

 

한국을 돕기 위해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나라. 

현대의 한국사에 좋은 쪽이던 안좋은 쪽이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

 

 

너무 유명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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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5만 6000명 참전,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 영국도 한국전쟁에 2번째로 많은 군인들을 파병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2차대전 직후 군축으로 병력이 부족했던 영국은 영연방 국가들에게 지원을 부탁 하였고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프리카 공화국,인도등의 국가가 합세하여 '주한 영연방군'을 결성하였다. 다른 나라들은 전부 미군 소속으로 미군의 지휘를 받았지만 영국만은 독자적 지휘권을 가지고 싸웠다.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활약이 적어서 그렇지 영국군은 보병부대 뿐만 아니라 기갑, 전투기, 항공모함 까지 운용했다. 임진강 설마리 고지 전투에서 3만의 중공군에 맞서 싸운 글로스터 대대의 항전은 지금까지도 화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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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1만 4936명 참전, 741명 전사,  2068명 부상,  163명  244명

 

'형제의 나라'  

터키는 2차대전 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바로 머리위에 있는 소련을 극도로 경계했다. 특히 공산주의 이념은 그들의 전통적인 이슬람 교리에 이율 배반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에게 협력하며 나토 가입과 자유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한국전쟁 파병 이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터키는  1개 여급의 병력을 파병하므로써 미국에게 신뢰를 얻었고 1952년 나토에 가입한다. 

당시 터키군은 제식화기로 독일제 무기를 써서 연합군과 탄종 호환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도착해서 미제 무기로 훈련부터 다시 받았다.

터키 정부는 한국을 돕는 이 전쟁을 지하드(jihād), 즉 성전으로 선언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를 믿던 터키군은 다른 유엔군들에 비해서 사기가 매우 높았고 전투에서도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싸웠다. 포로가 되서도 공산진영의 세뇌에 단 한명도 넘어가거나 배신하지 않는등 엄청난 단결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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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4992명 참전, 188명 전사, 459명 부상

 

2차대전때 독일한테 점령당했던 그리스는 1944년 해방됬지만 해방과 함께 공산주의 게릴라들과 5년간의 내전(그리스 내전)을 벌였다. 원래 그리스 정부는 내전이 끝난 직후라서 처음에는 소수인원만 보내서 생색내기식 파병을 하려 했지만 위에 철천지 라이벌 국가였던 터키가 먼저 파병을 하자 '질수없다' 라고 외치며 1개 대대병력을 파병 하였다.(이 부대의 이름이 스파르타 대대다.) 선발된 인원도 전부 그리스 내전에서 싸웠던 베테랑들 있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고 한다. 그리스와 터키 양국은 전쟁도 여러번 치뤘고 현재까지도 서로를 가상적국 1호로 규정하며 으르렁 거리는 사이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선의의 라이벌로 전공 경쟁을 벌이며 함께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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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참전, 339명 전사, 1216명 포로, 3명 실종, 26명 포로

 

영국의 영원한 동맹국 1호. 

 

호주-뉴질랜드 연합부대인 ANZAC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재밌는 점이 있다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국적이 오스트리아(Austria)였는데 이 두나라를 헷갈렸던 한국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온줄 알고 '장인나라에서 사위 도와주려고 보낸 군대'라고 불렀다. 이때 오스트레일리아군은 공군도 함께 참전 했는데 피난민들은 굉음을 내며 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들을 '호주기'라고 불렀다.(더불어 프란체스카 여사의 별명도 엉겁결에 '호주댁'이 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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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2만 5687명 참전, 312명 전사, 1212명 부상, 1명 실종, 32명 포로


영국의 영원한 동맹국 2호.

 

캐나다 또한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였다. 캐나다군은 1차대전 시절부터 잘싸우던 군대로 알려져왔는데 1950년대 까지만 해도 캐나다는 적은 인구와 특유의 거친 자연 환경으로 인해 수렵과 생존능력이 필수였던 나라여서 그런지 병사 한명한명의 전투력이 타국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다. 캐나다군은 한국전쟁에서도 그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는데 대표적으로 가평 전투에서 다른나라 부대가 다 후퇴하는 중에도 캐나다군 1개 대대가 혼자서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는 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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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3794명 참전, 23명 전사 79명 부상, 1명 실종

 

영국의 영원한 동맹국 3호.

 

뉴질랜드 역시 영국의 요청에 따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세계의 변방에 위치한 뉴질랜드는 전쟁의 포화를 겪은 적도 없었고 나라 자체가 심심하고 재미없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조용한 동네다. 뉴질랜드 병사들도 '사는게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어서 군대 왔다'라고 말할정도. 참전용사들은 전쟁에 나가는걸 일종의 '모험'으로 여겼다고 한다. 뉴질랜드군은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1개 포병연대와 가평전투,고왕산 전투등 에서 활약 했다. 참고로 한국에 온 뉴질랜드군에는 유독 '마오리족'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하카를 추면서 부른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 라는 노래를 한국인들이 듣고서 따라부른게 바로 연가(비바람이 치던 바다~잔잔해져 오면~ 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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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3421명 참전, 262명 전사, 1008명 부상, 7명 실종, 12명 포로

 

프랑스군은 나치독일에게서 해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인도차이나 문제로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의 프로들인 '레종 에뜨랑제', 외인부대를 파병했다. 지휘관이었던 몽클라르 중장은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직접 중령으로 강등되면서 까지 부대를 이끌었다. 용병의 대명사로 알려진 외인부대는 지평리 전투에서 총검돌격으로 4배나 되는 중공군을 무찌르는 등 활약을 했다. 다만 슬픈점은, 이때 한국에 왔던 프랑스군은 전쟁이 끝나자 전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돌아갔고 이부대가 투입된 전투가 바로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의 끝을 알린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약자를 돕기 위해 왔던 자들이 약자를 핍박하기 위해 돌아갔다는 아이러니. (이때 외인부대에서 일하던 소수의 한국인 카투사들이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베트남으로 갔고 디엔비엔푸전투에서 같이 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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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5322명 참전, 120명 전사, 645명 부상 2명 포로


베넬룩스 3국의 맞형인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2차대전의 포화가 끝나지 얼마 안됬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참전 의사를 밝혔다. 초기에는 3척의 구축함만 파견했으나 수많은 민간인들의 자원 입대와 참전 촉구로 1200명의 자원자중 600여명을 선발하여 '네덜란드 대대'를 구성, 미군 소속으로 횡성과 인제 전투등에서 활약했다. 당시 미군들은 네덜란드 대대를 보고선 '수는 적지만 용감하고 믿을만한 친구들'이라고 평했다.

참고로 저위에 적힌 2명의 포로가 된 네덜란드군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벨기에군.jpg



벨기에


3498명 참전, 104명 전사, 336명 부상, 1명 포로


2차대전때 연합군과 독일군의 주요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 역시 전화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난뒤 자발적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특히 상류계층이 이에 앞장 섰는데 귀족 가문 출신으로써 사병으로 참전하거나, 국회의원이 직접 의원직을 버리고 통신장교로 참전하는등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라 대부분의 자원자들이 전직 군인이거나 레지스탕스 출신들이었고 2천명의 지원자들중 700명을 뽑아 옆나라 룩셈부르크군과 합쳐 '벨룩스 대대'를 편성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벨기에군은 전원 갈색 베레모를 썼는데 그때문에 그들의 별명이 브라운베레(brown berets)가 되었다. 벨룩스 대대는  미군에 배속되어 중부전선의 일익을 담당하며 싸웠고 1955년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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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83명 참전, 2명 전사, 15명 부상


서울시보다 작은 인구 20만의 유럽의 소국 룩셈부르크는 2차대전 당시 300명도 안되는 군대로 독일군에 맞서 싸웠다가 2시간만에 점령 당했다. 나치 독일로 부터 해방 이후,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룩셈부르크는 '미국에게 진 빚을 갚는다' 라는 명목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2개 소대의 전투병력이 참전했는데 이는 룩셈부르크군의 10% 달하는 수치였다. 이때 수많은 룩셈부르크 청년들이 자원하여 10: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카더라에 의하면 룩셈부르크가 참전의사를 밝히자, 미국이 '너희 같이 작은 나라의 도움까지는 필요없다' 라고 하자 빡쳐서 오기로 참전했다 카더라.) 하지만 미군이 요구한 '대대병력의 전투인원'을 충족시키기엔 워낙 수가 적어서 벨기에 군에 합류하여 싸웠다. 룩셈부르크군은 벨기에군과 함께 임진강, 학당리, 잣골 전투에서 활약했고 이후 복무기간을 충족해서 대부분의 병력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일부 자원자들은 벨기에 대대에 편입되어 전쟁이 끝날때 까지 한국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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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7420명 참전, 112명 전사, 229명 부상, 16명 실종, 41명 포로


1946년 미국으로 부터 독립한 필리핀은 얼마 뒤 벌어진 한국전쟁에 미국의 뒤를 따라 참전하였다. 당시 국내여론이 참전 반 불참반으로 나뉘었으나 결국 한국을 도와준다는 대의를 명분으로 참전이 확정되었다.  참전 초기에는 빨치산 토벌등에 투입되었고 율동전투, 양구 209고지 전투 등에서 한국군과 함께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포위된 영국군을 구출하는등 활약을 하였다. 필리핀군은 아시아계 군대중에선 유일하게 영어가 통하는 군대였고 2차대전 때 미군과 같이 싸운적도 있는 나라라서 미군들과 소통도 수월하였다. 이때의 기억은 필리핀인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으며 현재 필리핀 500페소 지폐에도 한국전에 참전한 필리핀군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필리핀은 한국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서울의 장충 체육관이 바로 필리핀 봉사단이 건설해준 것이다.  훗날 한국을 찾은 필리핀 참전용사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못살았던 나라가 이렇게 발전하수 있냐'며 놀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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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6326명 참전, 129명 전사, 1139명 부상, 5명 실종


태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전투부대를 파병한 나라였다. 한국으로 파병되기 위해 창설된 왕립 21보병전투단은 1950년 10월 한국에 도착했다. 열대의 나라에서 온 이들은 곧바로 이어진 겨울은 너무나도 추웠다. 태국군은 미군 2사단에 소속되어 폭찹힐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이 활약을 본 미군들은 태국군에게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한국인들도 파란눈의 코쟁이 외국군 보단 자신들과 비슷한 키작은 동남아인들을 친근하게 대했다고 한다. 태국군은 1950년 한국에 발을 디디고 그 후에도 전후 복구 지원을 위해 계속 남아있었으며 1972년 5월 마지막 중대병력이 철수하면서 22년에 걸친 파병을 끝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태국군인들은 훗날 태국군의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었으며 21세기 현재 태국군의 고위장성들 중 많은수가 한국전 참전 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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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3518명 참전, 121명 전사, 536명 부상


아프리카 유이의 독립국가인 에티오피아는 1937년 이탈리아에게 침략 당했었다.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전세계의 강대국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문에 셀라시에는 다수의 국가가 연합하여 약소국을 도와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셀라시에가 주장한 이 이론을 '집단 안보'라고 한다. 지금의 유엔의 역할과 딱 맞아 떨어짐.)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이유도 반공이데올로기도 아니었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고자도 아니었다. 모든걸 이해관계로만 따지는 국제사회에서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나라가 나오지 말게 하자는 순수한 신념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에티오피아군은 전근대적인 무장을 한 3류 군대였으며 지방군은 활과 창으로 무장한곳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셀라시에 황제는 가장 정예부대인 자신의 친위대 메할 세파리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1개 대대를 편성한다. 그리고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는 뜻이 담긴 강뉴(kangnew)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물론 이들 역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몇주간 미군식으로 다시 훈련을 받았다. 강뉴 대대는 미7사단에 배속되어

매우 용맹하게 싸웠고 미군 또한 이들을 높게 평가 하였다. 강뉴대대 역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수많은 훈장과 연금등을 받으며 좋은 대접을 받았으나 1974년 공산쿠데타 세력에 의해 셀라시에 황제가 폐위 되고 에티오피아가 공산화 되자 '미제의 앞잡이'라는 이유로 전재산을 몰수 당하고 핍박 받았다.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기 까진 30년의 세월이 걸렸다.(참고로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선수 '아베베'도 강뉴 부대였다.)







콜롬비아군.jpg




콜롬비아


5100명 참전, 163명 전사, 448명 부상, 28명 포로

 

남미 유일의 파병국. 

콜롬비아는 전통적으로 우파의 힘이 강한 나라이며 이때나 지금이나 좌파 게릴라와 끝없는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내코가 석자인데 어디 군대를 보내냐는 여론이 대부분이었지만 남미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이나라는 반공 이념에 합세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다른 참전국들이 지원자들로 구성된 반면, 콜롬비아군은 게릴라와 싸우던 일선급 부대 대신 후방의 2선급부대에서 무작위 차출로 병력을 충당했다. 당시 콜롬비아군 병사들중 일부는 '우리가 그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 왜 가야 되냐'라며 불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열대성 기후국가인 콜롬비아는 겨울이 없는데 한국에 온 콜롬비아군들은 난생 처음 '눈'과 '겨울' 이란것을 경험 했다. (이때 참전한 콜롬비아군 출신이 쓴 소설로 맘브루 라는 책이 있다. 기회되면 한번 읽어보도록.)

이 나라 군인들도 슬픈 뒷이야기가 있는데 전쟁이 끝나고 콜롬비아군이 고국으로 돌아오자 마자 콜롬비아에서는 좌파 게릴라와 우파 정부간의 큰 내전이 벌어졌다. 지옥에서 살아나온 이들이 도착한 집은 또다른 지옥으로 변한 것. 이 내전은 지금까지도 지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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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826명 참전, 36명 전사, 9명 포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연방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남아공군은 지상병력 대신 공군병력만 파병하였는데 전원 2차대전 참전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남아공 공군의 제2 전투비행 대대 "플라잉 치타"가 참전 하였다.  참고로 아프리카 국가이긴 했지만 흑백차별이 강했던 남아공은 군대도100% 백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전사자 대부분이 전투기 조종사들이었고 '미제용병'으로 취급 받아 포로가 될시 지독한 고문을 받다 죽기도 했다. 참고로 참전국들중 제일 존재감이 없는 나라이기도 한데, 남아공 참전용사들도 한국에 대한 기억은 그저 '창공에서 바라본 폐허' 정도로만 떠올릴 정도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정권때 있었던 2차대전,한국전쟁 참전사실을 은근히 흑역사로 생각하며 후손들에게 알리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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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개의 댓글

2018.06.25
터키랑 소련이랑 사이 안좋았던건 전통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게 가장 크고, 더 크게는 소련이 터키에 주둔함로서 지중해 진출을 노렸다는게 훨씬 큰 요인임
이슬람 사상이랑 안맞는다는건 개소리 저때만해도 이슬람주의자 탄압받을때인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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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흙밖에 없는땅 진화시켜준게 어디냐
대대로 좆밥국가였는데 원조로 살아나내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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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충성충성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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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저렇게 많은 나라한테 도움받았는데 이제는 후진국이라고 필리핀 태국 에티오피아 이런나라들 무시하는 모습이 많이 보임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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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솔직히 영국한테는 전혀 고맙지가 않다 저 씹새끼들은 국제분쟁 스노우볼 오지게 굴린 씹쌔끼들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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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DrMushroom
인류평화를 사랑하는 찌질이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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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DrMushroom
영국이 한번이라도 침략한 땅을 제외하면 지구상에 남는게 거의 없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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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장충체육관은 루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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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장충체육관 건축설계는 건축가 김정수, 구조설계는 건축가 최종완, 감리는 미국의 벡텔, 시공은 삼부토건이 담당했음. 필리핀 원조설은 그 당시 감리를 맡았던 베텔의 아시아지사가 필리핀에 있었기에 나온 루머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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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거진 3차대전으로 봐도 되지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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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시간개빨리가네
공산권 핵심인 소련이 직접 관여하지 않아 좀 무리가있지... 그게 없어서 대리전 소리 듣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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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캐나다랑 뉴질랜드 사망률 왤케 낮냐
ㄹㅇ 파이터들인가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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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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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터키성님들... 알라후 아크바르!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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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무패의 신화임... 단 한번도 패배를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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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저렇게 도와 줬는데 밀린게 존나 어이 없네 왜 밀린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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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피바다
중공군이 갑자기 개씹바퀴벌레 마냥 존나 처밀고 내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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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사타구니털
역시 짱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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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피바다
원래 선빵친놈이 유리한거.
그리고 머가리 수로 밀어붙이는데 쉽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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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피바다
1. 한국전쟁 북괴의 침략 초기 플랜을 짜준게, 불과 3년전에 바로 나치독일을 깨부순 소련의 희대의 명장들이였음.
2. 무장 또한 소련이 대다수 지원
3. 중공군 또한 2차대전때 중일전쟁에서 사실상 일제를 틀어막던 명장들과 정예부대가 내려옴.
특히 간도에서 일본과 싸우던 최정예인 팔로군을 필두로 다수가 내려옴.
4. 중공군이 의외로 전략에 엄청 능했음.

짱깨가 흔히 아무 전략없이 인해전술을 쳤다고 오도되곤 하는데
생각보다 전략적으로도 손색이 없었음.

전쟁 경험이라는건 역시 무시못하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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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로렌
이게 맞음. 그동안 반공교육 영향으로 중공군하면 소련군마냥 무장도 없이 몇백만 몇천만이 내려와서 뭉갠 이미지가 강했는데 실제론 그렇게 쪽수도 많지않고 무장도 어느정도 잘 갖춰져있었음. 그당시 UN군과 국군이 거의 마라톤경기수준으로 정신없이 올라가다보니 진형이랑것도 없었고 중공군이 그걸 간파해서 각개격파를 잘한게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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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원
30만명 정도로 추측되는데 그렇게 많진 않아도 적은 숫자는 아니지. 중국 애들이 전술을 잘 써서 사방에서 튀어나오니 당하는 입장에선 숫자가 많다고 느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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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혜화동매콤주먹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우리측도 쪽수는 그렇게 밀리진 않았음. 중공군도 처음엔 전선 방어를 목적으로 했으니 뭐... 만일 UN군이 서두르지 않고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었으면 중공군 처음 계획대로 함경도정도에 고착시키고 1.4후퇴처럼 쭉 밀리진 않았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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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현대의 한국사에 좋은 쪽이던 안좋은 쪽이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


안좋은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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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미국 응딩이뒤에 숨는게 맞는건데 몰상식한병신들이 자주국가 외치면서 미군철수 외치는꼬라지보면 죽여버리고싶다. 지가 세운 나라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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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감사한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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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진짜 많이 도와줬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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