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이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쓴 게 아쉽고 아까워서 올려봄니당
이 글은 평론가 이성혁 선생이 쓴 <신경숙 표절 논란과 재점화된 문학권력 비판에 부쳐>라는 글에 대하여 라는 글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풀어낸 글입니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Riss에서 구매 혹은 시립도서관, 대학도서관 등지에 계정을 생성하여 열람해보실 수 있습니다.
<신경숙 표절 논란과 재점화된 문학권력 비판에 부쳐>에 첨언
0.
문학의 역할론에 대한 그의 비전을 나는 긍정한다. 문학은 분명히 사회와 대중이 잠재한 흐름을 읽어야 한다. 비평도, 시도, 소설도 잠재된 흐름과 접속하여 창작하는 형성원리를 따름이 옳다. 하지만 읽는 내내 기존의 문학, 권력화된 제도에 대해 충분히 짚고 넘어가지 않은 채로 대안들이 도출되어 이상주의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소비자-대중에 대한 시혜적인 태도가 은근히 비치는 데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이에 읽으며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지점에 대한 비판과 동의하는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그의 글에 어줍잖은 몇 마디 말을 보태보고자 한다.
1. 에 대한 비평.
이 글은 문학 권력, 문단 권력이 구조화된 과정과 대중의 뿌리 깊은 불신의 근거를 밝히는 데 첫 장을 할애하고 있다. 불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메이저 출판사-창비, 문동, 문지-가 제도화에 경주하고 권력을 형성하여 불만을 낳았고, 이번에는 특히 특정한 출판 자원에 대한 무리한 상찬과 그에 더하여 표절 의심을 덮고 부인하기에 이르렀기에 대중의 공분을 사고 만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중의 입맛에 맞는, 취향을 따르는 상업주의로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중의 소비 취향과 대중의 잠재된 열망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겠는가? 대저 대중의 취향이란 무엇인가? 서가에 베스트셀러로 꽂히는 자기계발서인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가 무분별한 출판으로 인해 쇠락한 무협, 판타지, 로맨스 소설인가?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등 OTT 플랫폼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좋아요’ 목록에 있는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소비 취향과 잠재된 열망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개인이 웹툰을 소비한다고 생각할 때, 이 사람이 소비하는 패턴은 곧 이 사람의 취향이다. 취향은 또 자연스레 그 사람의 열망을 담고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미지의 세계>, <먹는 존재> 등의 작품을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이 사람의 소비에서 우리는 스노비 형성의 시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수많은 문학 작품과 시를 소비하는 태도에서도 우리는 같은 지점을 훑을 수 있다.1 김홍중은 그의 글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에서 세대와 코호트를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2 이를 통해 그는 청년세대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생존주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2010년경부터 에세이, 웹툰,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소설의 형식으로 청년 세대가 스스로 생산한 자기관찰”3의 예로 다수의 문화예술작품을 각주를 통해 보여준다. 신자유주의가 촉발한 무한경쟁과 생존에의 압박은 매체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지 않는, 제도에 종속된 문학만이 이 같은 흐름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글쓴이가 상업주의에 결벽증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문학가의 작품에는 이미 사회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시장에 팔기 위해 작품을 쓰든 그렇지 않든 그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평가 이전에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문단의 작품만 이 같은 반영이 결여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문단의 취향에 맞는 창작을 할 수밖에 없다. 소위 ‘시장’에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문학가와 그들의 작품은 어떠한가? 비단 문학가뿐 아니라 문학처럼 내러티브라는 이야기 형식을 공유하는 다채로운 매체들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떠한가? 그 기표가 아무리 상업적이며 대중에게 빛이 나는 모습을 가진다고 해도 기의는, 숨겨진 의도는 창작자가 대면하며 살아가는 대중-사회 속에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한국 문학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에 잠재되어 있는 어떤 열망과 연결되지 않고 자족적인 문학제도의 자율성 안에 안주해 있다”는 말에서 글쓴이는 이미 문제를 짚었다. ‘자족적인 문학제도의 자율성’에 갇힌 문학에 문제가 있을 뿐, ‘상업주의-시장 지향의 문학’이 아니다. 상업주의라는 말은 그 목적이 불분명하며 상업적인 기표 속에 문학적인 기의를 담으려는 수많은 시도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A Song of Ice and Fire』는 약자 승리 서사와 자연주의,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을 담은 이야기이나 주요 등장인물을 쉽사리 죽이는 충격적인 전개와 성애, 전쟁에 대한 묘사, 정치적 암투 등의 자극적인 소재를 내세워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대중의 열망과 취향에 대한 구분이 얼마나, 어떻게 가능한지, 또 그 다양성에 어떤 잣대를 세울 수 있는지, 상업주의 환경 하에서 대중과 사회의 열망의 반영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짐이 옳을 것이다.
2.에 대한 비평과 보론
그가 소비자가 종속된 주체라 언급하였으나, 소비자의 선택과 작품은 상호호혜적으로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소비재와 광고는 소비자를 종속된 주체로 만들 수 있으나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사회나 대중이 내재한 그 다양한 열망은 그에 맞는 작품을 가지며, 소비자는 자신의 형성된 내면을 작품에 맞추어 문화를 소비한다. 요컨대 소비자는 그 푼크툼에 따라 자신만의 소비 체계를 이룩해나가며, 창작 또한 같은 방향에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규정한 소비자는 한정적이고 단면적인 역할모델일 뿐, 실제 문화상품이 유통되는 시장에서 실효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각종 서점의 성별과 연령에 따른 베스트셀러 항목을 참고했을 때, 2030대 연령층의 여성이 『82년생 김지영』을 가장 많이 소비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4,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은 해당 연령대의 소비자들에게 유효한 접근을 성공한 작품이고, 독자는 자신들에게 가장 알맞은 작품을 주체적으로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시대의 흐름을 담고 있다. 후술할 ‘문학권력’의 논의영역이기는 하나 첨언하자면, 오히려 문학장 안에서 선택받고, 어떤 자격을 하사받아 상품으로 나오는 작품들이야말로 그 소비자에 대해 주체적 선택을 박탈하고 작품의 가치를 호도하는 측면이 있어 소비자를 ‘심성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명관의 글이 ‘대중의 지성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그의 주장과 앞서 소비자를 ‘심성 조작의 대상이기도 한 것, 자신의 주체성을 교묘하게 박탈당하는 자의 명칭’이라 정의한 것은 내부적으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명관의 견해에서 글쓴이가 도출한 비평 정신의 회복은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꾸준히 모색해보아야 하겠으나 일단 온당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소위 ‘주례사 비평’은 비평가는 자신의 입으로 원하는 말을 할 수 없게 하고, 작품이 온당한 비평을 얻기 어렵게 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독자는 작품을 알기 어려워진다. 아래의 글을 살펴보자.
“비평은 개인적 실천임과 동시에 사회적 공적 실천이다. 비평적 판단과 평가에는 전국적 비평 커뮤니티, 독자, 예술공동체, 문화집단,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전체가 참여한다. 비평이 공적 사회적 실천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비평적 실천의 이런 성격을 의식하는 순간 비평 종사자는 자신의 판단과 평가 행위가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적 가치와 공공성의 원칙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 외면할 수 없는 능력, 그것이 말하자면 비평적 ‘분별’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비평적 실천의 공적 성격이라는 부분이 비평가의 의식의 표면에 늘 떠올라 있다가 필요할 때 즉각 가동되어 그의 판단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는 비평적 판단이 비평 행위의 사회적 공적 성격을 존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동지적 우정이나 친밀집단에의 충성 같은 것은 소중한 공동체적 가치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가치들이 비평의 공공적 판단에서 존중되어야 할 다른 더 본질적인 가치들을 압도해버릴 때 발생한다. 가치들 사이의 선후성과 위계에 대한 분별이 몰수되었을 때 비평은 엎어진다”5
대중 매체가 장악한 정보소비 사회에서는 비평의 기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기사가 비평을 대체하고, 마니아가 전문 독자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산업 사회 이후를 살고 있는 문인들에게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자연러운 결과임에 분명하다. 문화적 텍스트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중개자로서 비평가가 온전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사회는, 바꿔 말하면 지식과 취향을 둘러싼 정보 독점이 강화된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제도적 조건은 독점에서 해방된 지식과 정보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비평가로서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되는 것은 대중들을 겁먹게 만드는 지식의 장벽, 다시 말해 일상적인 언어로 접근 불가능한 ‘이론’의 장벽 속에 비평을 제도화하는 일일 확률이 높다.6
비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평 정신의 회복이다. 비평은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정당성을 얻는다. 이명원의 언급처럼 평론이 독자적인 지위를 위해 폐쇄적인 영역을 구축하거나, 평론에 사회적 공적 성격에 우선하는 다른 가치가 있어서는 비평 정신이 올바르게 발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마녀는 어떻게 부드러워지는가’이다. 이때 마녀는 전경린의 초기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적 탁월성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비평은 마녀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글쓰기다. 비평이 마녀의 역할을 버리고, 개심한 스크루지 할아버지처럼 인자해질 때, 즐거워 비명을 지르는 것은 ‘시장’과 ‘문학권력’이 아닐 수 없다. 전경린의 소설에도 다시금 ‘마녀’들이 귀환해야겠지만. 비평계에도 더 많은 마녀들이 어슬렁거려야 한다. 이 글은 그러한 희망 속에서 쓰여졌다.7
비평 또한 대중이 가진 사회적 흐름에 접속해 있어야 하며 접속을 통해 그 날카로움을 첨예하게 유지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 정신이 설령 회복되고, 독자 대중이 비평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제도가 이들에게 입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 말은 제아무리 크게 소리쳐 말해도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사라질 운명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해체 없이는 새로운 공론장이 만들어질 수 없다. 문제 해결에 있어 선결적인 과제는 ‘문단 마피아’의 구조를 해체하는 일이다. 장 안에서 목소리 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것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독자의 참여도 대중의 발언도 다 허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3.에 대한 보론
글쓴이와 비슷한 생각은 문학장 내에서도 이미 많이 찾을 수 있다. 표절과 공통적인 것, 소위 공유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견해는 일반론이라고 불릴 만 하다. 필자는 다른 영역에서 저작권과 공유재에 대한 이야기를 차용해보고자 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로스쿨 교수이자 사회운동가인 로런스 레식이 2001년 출판하고, 한국에서는 2012년 윤종수 판사가 감수하고 이원식이 번역하여 출판된 『아이디어의 미래』는 저작권의 지나친 적용이 불러올 수 있는 폐해를 다양한 층위에서 분석한 글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과격한 규제가 낳을 부작용을 선구안적인 시선으로 진단한다. 이 가운데 예술을 예로 든 지점을 옮겨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시론에 관한 교과서를 쓰는 학자들은 이미 창작된 시를 사용해 비평을 해야 한다. 극작가들은 다른 사람의 소설을 기초로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소설가들은 이미 알려진 줄거리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역사가들은 일어난 사실들을 이용해 재구성한다. 영화감독들은 우리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끌어와 영상에 담는다. 음악가들이 특정 장르의 음악을 만들려면 과거의 콘텐츠를 사용해야 한다. 특히 재즈의 경우 과거 음악에서 따오지 않은 작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창작은 대개 이미 나와 있는 컨텐츠에 의존한다.8
내려받아라, 섞어라, 구워라. Pip, mix, burn
애플이 말한다. Apple instructs.
어차피 그건 당신의 음악이니까. After all, it’s your music
물론 애플은 컴퓨터를 팔려고 그런 광고를 냈다. 하지만 그 광고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깊이 흐르는 이상적인 정신을 건드린다. 애플이 판매하는 기술(물론 다른 회사도 판다.)은 인류 사회의 시초부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해 온 것을 우리 세대가 우리 문화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한 뒤 ‘내려받고’베낀다는 뜻, ‘섞고’원하는 대로 고치라는 뜻, ‘굽는’다른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는 뜻 행위를 말한다. 이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창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이 음악의 ‘소비’수동적으로 듣기만 한다는 뜻에서 단독으로, 또 집단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하는 삶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음악만이 아니라 영화, 예술, 상업 행위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능력은 디지털 기술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다. 랩 음악은 다른 사람의 음악을 ‘차용해’음악 중 일부를 추려서 베낀다는 뜻 거기다가 가사나 다른 음악을 ‘섞고’, 그렇게 만든 음악을 음반이나 테이프로 ‘구워’ 다른 사람에게 파는 형태였다. 재즈도 한 세대 전에는 마찬가지였다. 음악만 그런 게 아니지만 특히 음악은 늘 이전의 것을 기초로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창의성을 문화와 경제의 광범위한 부분으로 확장할 잠재력을 확보했다. 기술은 한 세대 전체에게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창의성을 인터넷의 하부 구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작한 영화, 새로운 형태의 음악, 디지털 예술,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하기와 글짓기, 그리고 시, 비평, 정치적 행동주의가 거기서 생산된다.9
예술, 문학이 기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것’의 바탕에서 생겨남은 다시 말하기에 새삼스럽다. 표절의 문제는 공유재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어느 범위까지 용인되는가에 요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은수의 표현을 빌리면, “설령 현실의 법정에서는 명백하게 저작권을 침해했다 하더라도 문학의 법정에서는 아무 하자가 없을 수조차 있으며, 판결 없는 재판이 한없이 지속될 수도 있다. 마치 외설죄처럼 말이다.”10 신경숙의 표절 역시 표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표절을 둘러싼 태도 면에서, 양심적인 문제에 있어서 지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표절을 했으나 이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사용하였는가에 대한 해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경숙은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 문학의 성년(成年)이 되지 못한 ‘문학소녀’만이 의식적인 표절을 해놓고도, 표절을 더러워하는 자기기만 속에 허우적댄다. 그래서는 모던(modern)을 성취할 수 없다.”11 글쓴이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듯 신경숙의 표절은 명백한 표절임에도 불구하고 독창성이라는 아우라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기만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문제가 되었다. 표절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그의 말마따나 적실하지 않으며, 표절 자체가 아닌 표절 전후로 보인 신경숙의 태도에 대해서 윤리적인 비판이 있음이 온당하다 할 것이다. 또, 표절에 대한 일반론이 신경숙의 표절 사태와 한 지면에 진술되는 데에 전자가 후자에 대한 옹호 논리 내지는 논점 흐리기로 읽힐 우려가 충분히 있으나 신경숙에 대한 비판을 명징하게 나타내고 감에 글쓴이의 현명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와 5에 대한 비판 – 문단권력, 문학제도; 공모전과 등단제도
앞서 말한 “문학계가 ‘좌파’에 점령당했다면서 오른쪽으로 구부리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는 그의 말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문단권력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좌파-우파의 프레임을 씌우는 시도로 보이게 할 염려가 있다.
“가난한 작가들에게 좋은 조건을 제공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였으나 어떤 작가에게,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해주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소위 ‘Big 3’라고 불리우는 3대 출판사의 제도권 바깥에 있는 작가들의 가난은 누가 해결해주었는가? 그들의 목소리는 들린 적이 없으니 아마 글쓴이도 몰랐을 것이다. 문학장 바깥의 문학가는 말할 수 없고, 읽히지 않고, 들리지 않는 불가촉천민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두 가지 사례로 전체를 평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나 문학의 권력장에 편입되지 못한 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문학장에서 입을 빌릴 수 없었던 그들이 어떤 말을 해 왔는가 살펴봄에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청주 수암골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 작가 림민의 사례.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살았고, 늘상 가난과 함께였다. 연탄재를 전시하는 작가가 되기 전 “10년가량 습작을 해왔고, 기성 작가에게 구걸하는 듯한 등단 시스템에 환멸을 느껴 마음 맞는 친구들과 3년 정도 ‘인디문학 웹진’을 운영하기도 했다.”12 그러나 문단은 그의 가난을 해결해준 적 없다. 그의 글을 주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등단하지 못했고, 문학장은 그의 글을 보지 않았다.
소설가 손아람의 <소수의견>은 문학장 바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후에야 제대로 된 평론을 얻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소설이 발간된 이후 5년 동안 문학장 내에서 아무런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청룡영화제에서 영화 <소수의견>이 상을 받은 후에야 문학장 내에서 비로소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13 문학이 문학장 내에서 발견되지 못하고 문학장 바깥에서 먼저 주목을 얻은 후에야 문단의 주목을 얻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성혁의 말마따나 이 출판사들이 “문학의 장을 마련하려고 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까?
아래는 2회 삼성 리더스허브 문학상 대상으로 1억 원의 상금을 받은 김재욱 씨의 이야기이다. 그의 소설 역시 문학장 내에서 아무런 평가를 얻은 적 없다.
2012년에 받은 상금으로 지금까지 놀고 있는데 돈이 거의 다 떨어졌어요. 지금은 3백만 원도 안 남았어요. 다른 경제 활동은 안 했죠. 그냥 그 돈으로 놀았어요. ‘아 신난다!’ 하고. 물론 계속 글도 썼어요. 그다음에 쓴 게 <1997 방사능 치킨 극장>이에요. 작년 8월까지 장편을 하나 썼고요. 원래 계획은 그걸 공모전에 내서 한 7천만 원 받고 또 3년 놀자 이거였는데, 안 되더라고요. 저는 단편을 안 써요. 그런 게 한국 문인들이 활동하는 방식이잖아요. 문예지랑 관계를 맺고, 단편을 문예지에 발표한 다음에 책으로 내는 거. 그걸 하기 싫더라구요. 너무 멋 없는 거 같아요. 돈도 많이 안 주고. 큰 한 방이 있는데. 한번 큰돈의 맛을 봐서 그런지 귀찮더라고요. 아 뭐, 큰 거 하나 쓰면 1억 버는데. 근데 다시 안 되더라고요. 요즘 1억짜리 문학상도 없어요. 세계문학상도 7천만원이고요. 다 줄었어요. 이제 돈 없으니까 예술인 복지 신청하려고요. 3백만 원 준대요.14
-작가라는 자의식은 생기나요?
없어요. 전 문인협회 이런 것도 모르고 가입도 안 되어 있을 거예요. 심지어 그 책 저작권을 제가 아니라 삼성이 갖고 있어요. 무슨 문인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도 이게 처음이에요. 으하하하하. 듣보잡 소설 하나 나온 거죠. 근데 전 1억 받았으니까 됐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책 써서 1억 못 벌잖아요. (명성 같은 것은) 너네 다 가져라. 그걸로 뭐 할 건데? 이런 생각이죠.15
그는 당면한 가난을 글을 통해 해결했다. 그의 가난을 해결해준 것은 그의 글이지 출판사가 아니다. 스스로 집안의 빚을 청산할 만큼 상금을 얻은, 글을 쓴 사람의 글이라면 그 가치를 충분히 입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도 문학장도 그를 ‘문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문예지들이 겪어온 역사를 말하고 있으나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그곳-과거’이 아닌 ‘이곳-지금’이다. 현재의 문학장은 문학의 생산자도 되지 못하며 문학에 대한 안목 또한 일천하기 그지없다. 1, 2에서 언급했듯 애초에 문학이, 출판이 시장의 영역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상론만을 펼치고 있을 뿐이니 이 지점을 짚어낼 수 있겠는가? 소위 문학장이라는 곳에서 문학이 호명되지 않으며 소수의 취향이 ‘보편’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실정이다. 글쓴이의 “도리어 작가들의 생활을 뒷받침할수록 문학권력으로 자리 잡아 문학의 불온성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제도가 되어갔다는 것도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와 같은 진술은 소수 취향이 선별한 작가들의 생활을 말할 뿐, “작가들의 생활을 뒷받침” 운운함은 위와 같은 사례들에 한해서는 기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제도 측면을 살펴보자. 그가 상술하지는 않았으나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문학 제도는 결국 부패한다.”, “점차로 작가에게 문학적 귀족 작위를 하사하는 기관이자 문학적 출세를 위한 등용문이 되어갔다고 판단된다.”라는 말을 통해 문단 시스템에 대한 문제는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등용문’으로 문학장에서 말할 권리를 부여하는 등단, 공모전 제도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공모문학상과 비견될 수 있는 여타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심사위원이 매해 같더라도 대중의 입김이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소수취향에 국한된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상금 혹은 등단이라는 트로피를 걸고 유사한 경쟁을 벌이는 문학의 등용문은 어떠한가? 소수의 심사위원이 평가의 권리를 독점하는 형태로 그들의 취향과 그들의 시도가 ‘작가’와 ‘문학’을 만들어낸다. 정작 문학을 읽을 독자는 안중에 두지 않은 채 말의 잔치로 포장하고 시장에 상품으로 내어놓는다. 출판사들이 출판 자원을 선점하기 위해 공모전과 신춘문예의 시스템을 공고화하고, 이 밖의 공간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권력/구조가 곧 글쓴이가 주장한 ‘비평 정신의 회복’, ‘사회 내의 잠재적인 흐름과 접속하는 문학’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그의 논의가 훌륭한 결론을 도출해내었음에도 한계를 가지는 지점이 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대안이 훌륭하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초극하기에는 지극한 어려움이 따르며, 기능하기 위해서도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 공모문학상과 비평의 지원사격을 통해 철저하게 포장된 상품으로서의 문학과 장 바깥에서 아무런 비평적 평가를 얻지 못하고 소외된 문학은, 현실적으로 시장에서 대결이 성립하지 않는다. 소비되지 않는 문학,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문학은 죽은 문학에 진배없다. 그러나 이 책임이 작가에게 있는가? 문학을 사유화하고 있는 문학 권력에 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공모전을 통과하고, 문예지에서 비평의 지원을 받는 작가는, 당장 팔리는 것 이상으로 힘을 얻어요. 여기에 참여하는 평론가들이 대개 강단 평론가이고,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지속적으로 퍼뜨리게 된단 말이죠. 그 평론가들에게 배운 제자들, 가까운 동인, 충성 독자층까지 굉장히 강한 수직전파성을 형성해요. 특정한 작가가 문학적인 논의영역 안에서 얼마나 언급될 가치가 있느냐는 각각의 수직전파력의 경합을 통해 결정된다고 보고요.”16
2015년 가을에 있었던 문학동네 주관의 좌담회에 참여한 소설가 손아람의 말이다. 공모 문학상과 이에 뒤따르는 비평의 구조가 문학이라는 상품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가 절대적인 시장에서 과연 ‘거대문학 제도가 내세우는 문학적 척도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형성되고, 뭇 사람들의 인지 영역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논의이며,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시장에서 생산되는 무수히 많은,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문화 생산물들은 이미 사회에 치열하게 소통하여 얻은 담론들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글이, 문학이 사람들에게 소비되었고 중요한 담론을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나 문학이 제도를 통해 철저하게 사유화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역할을 웹툰, 영화, 드라마 등의 매체가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 하지만 문학은 제도에 발목 잡혀 그러한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지는 못하고 있다.
結
‘문학적 척도로부터 자유로운 문학’, “그 신뢰의 회복은 문학이 상업적으로 대중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사회적·정치적 삶에 내재해 있는 잠재력을 길어 올릴 때 가능할 것이다.”, “문학예술작품은 그 시적인 것을 잠재적으로 보존하고 때로는 촉발하기도 하는 연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등의 진술이 현실적인 힘을 가지기 어려운 이유는 유야무야 넘어간 문학의 제도화, 권력화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대안적으로 주창한 이 모든 의견은 이미 시장과 독자가 선택한 무수한 작품에서 실현되는 중이다. 다만 그것이 ‘문학’이 아닐 뿐이다. 매스미디어라는 껍질을 쓰고 있는 무수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시적인 것’이며 ‘시대의 흐름에 접속’하는 문화예술작품을 모두 일컫는다면 그가 바라는 문학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소설의, 비평의, 시의 껍질을 쓰지 않았고, 그럴 수 없었을 뿐. 그것은 메이저 카르텔에서는 읽을 수가 없다. 메이저 카르텔이 읽지 못하는 것은 주류 비평가들도 읽을 수 없다. 문학장에 매인 모두가 이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폐쇄적인 구조를 부수고 나가야 한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장은 세계가 부서진 후에나 가동할 수 있으리라.
1 한혜원, 함초롱, 「한국 웹툰에 나타난 스노비즘 연구」, 『애니메이션 연구 11(5)』, 한국애니메이션학회
2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한국사회학 49(1)』, 한국사회학회
3 김홍중, 위의 글, 191쪽
4 yes24.com, 2018.05.09. 검색.
5 도정일, 『문학동네』 84, <비평은 무슨 일을 하는가?> 2015.09.01. 41~42쪽
6 이명원, 『주례사 비평을넘어서』,<‘마녀’는 어떻게 부드러워지는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2.08. 123쪽
7 위의 책, 168~169쪽.
8 로런스 레식, 이원기 역, 『IDEAS: 아이디어의 미래』 민음사, 2012. 182쪽.
9 위의 책, 43-44쪽
10 장은수, 『문학동네』 84, <무엇을 표절이라 할 것인가> 2015.09.01. 55쪽
11 장정일, 「표절을 보호해야 한다」, 『시사인』 410호
(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3932), 2108.05.10. 검색
12 『한겨레 21』 1091호,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연탄>, 2015. 12. 18.
(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849.html), 2018. 05. 10 검색
13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146a, <글 잘 쓰는 사람이 글 쓰는 직업을 갖기 어려운 이유>, (업로드일: 15.09.10), 58:00~1:01:10, (https://youtu.be/U_bkhSSwLwg) 18.05.07 검색
14 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1997년의 해법, 그 남자의 해법>, 코난북스, 2017.11. 77-78쪽
15 위의 책, 코난북스, 2017.11. 105쪽
16 『문학동네』 84, <특집-좌담 한국문단의 구조를 다시 생각한다> 2015.09.01. 125쪽
한국에서양을안키우는이유
고양고양123
셲쓰
문학 권력이 작동하면서 대중들에게 시각을 강제하고 이것이 폐단을 불러온다는 게 이 글의 논지인 거 같은 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함.
문단이 힘을 잃은 건 솔직히 벌써 10년 이상 된 거 같고, 그러니 문단에 비판을 해봐야 썩은 시체에 대고 소리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함
그냥 한국 문학이 망한 이유는 내 생각엔 대체재가 너무 많고 이를 이길 수 있는 특별한 강점이 없어서 그런 거 같음.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복합 매체가 시장에 나왔는 데 꼭 책을 읽어야 할까. 고정적인 팬층이 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 라노벨처럼 일종의 시나리오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과거와 똑같이 소설로 남아있으려고 하는 거 같은데 말야..
김지영? 그 소설도 내가 느끼기엔 그냥 이념의 대표적인 일종의 바이블로 남은 거 같고 문학적 가치나 예술성을 끌어올렸다고 보진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사회적 계급에서 읽혀야 한다고 봄. 개드립 내에도 김지영 그 책 읽었다고 싫어하는 애들 있고.
파란얼굴
에 또 이게 단순히 래디컬 페미니즘의 바이블이면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가 없죠. 래펨 한줌도 안 되는 인간들... 수기형식을 빌려서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고 봐야죠. 작가도 방송작가 출신이기도 하니 그런 것에 능한 측면도 있고
대체제가 많다는 부분에는 굉장히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글에도 계속해서 서구의 장르문학과 웹툰, 넷플릭스-왓챠의 드라마들을 예로 들면서 비판을 풀어나갔어요.
하지만 읽는 소설로써의 가치를 가진, 도서 상품이 분명히 시장에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비평, 시, 소설을 만들고 이야기하는 문학판은 이런 작용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원 글에서는 7년의 밤도 상업적이라고 비판을 하더라구요. 문학 권력 논의에서 권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 논자마저도 상업주의를 대놓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지점에서 문학장이 고사하는 이유는 설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셲쓰
그런데 문단의 입장도 약간 이해가 되는 점은
상업 문학에 개방적이라면 한국 문학을 잃어버리는 거 때문이라고 생각함.
내 편견이지만, 한국 근대 문학은 일제강점기란 제한된 상황과 약자에게 국가를 침탈당한 한이 결합된 식민지 시절 문학과 민족 분열의 아픔과 민주주의에 국민의 갈망이 어우러진 독재시절 문학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함.
하지만 현재 한국만의 문화 저변이 없는 상태에서 상업주의 흐름에 따라 문단마저 서구식 문화에 개방을 택한다면 한국 문학이 정의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생길 거라고 생각함. 예를 들어 미국은 세계 경찰이란 영웅문화와 아메리카 드림으로 정의되는 개척 문화가 아직까지 문학에 영향을 미친다고 봄. 일본은 사무라이 정신 그리고 80년대 버블로 인한 사토리 세대의 문화가 현재 문학을 정의하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은 많은 면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는 축소되고, 더 이상 한을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강해졌잖아. 지금 한국을 정의하는 문화가 생기기 전엔 문단도 쉽게 결정을 못내리지 않을까.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폐쇄하는 가 에 대해선 흥선대원군의 척화비처럼 개방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라 생각함
월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