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어느 기괴의 죽음

어느 기괴의 죽음




  비행이 늦어졌다. 거대한 보잉-747의 날개가 나를 부둥켜안은 듯했다. 반질한 데스크 너머 항공사 직원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직원의 얼굴엔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문득 지금 이 공항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이 한데 얽혀 이 가엾은 직원에게 던져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자코 티켓을 받아들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뒷사람이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다. 구시렁대는 소리에 뒤통수가 뜨끔했다. 잠시 후 똑같은 상황이 이 직원에게 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그럴 순 없지. 이건 내 것이다. 오롯이 내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사람들 사이를 누볐다.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발을 놀리는 와중에 나는 바다 위 부표처럼 떠 있었다. 아무렴, 부표는 떠 있기라도 하지. 표류라도 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일만 남았다. 한참을 떠다니다 카페에 불시착해 이젠 제법 익숙해진 언어로 커피를 주문했다. 악센트가 과하진 않았을까. 끝이 못내 텁텁했지만, 주문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유난히 쓴맛만 나는 것이 입에 맞지 않았다. 시럽을 짜 넣으며 과연 얼마나 있을지 커피 속 얼굴에 물었다.

  점성 가득한 진한 갈색이 검은 호수에 뛰어드는 것을 보며, 이 여정의 시작을 생각해냈다. 예정에도 없던 비행은 두어 달 전에 받은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됐다. 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 사람들의 몸은 불고, 얼굴은 더욱 굳어가던 날. 하루 스케줄을 끝내고 아파트에 돌아와 책을 펼쳐놓고 화자의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S가 신호를 보냈다. 휴대폰의 진동에 컵 속 검은 호수가 파도치고 있었다. 꿈에 취한 듯 아비를 따르며 물 만난 수초같이 덩실거리는 너의 혼.’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급하게 눈에 담았다. 성화에 못 이겨 무릎 사이의 책 끝을 접으며 전화를 받았다. 귓구멍의 반 틈도 되지 않는 조그만 스피커에서 S의 목소리는 새어 나오듯이 작게 들려왔다.

가슴이 작아졌어.”

  짜증이 난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의 뒤의 문제였다. 가슴이 작아졌다니.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 할지 몰라 대뜸 시계를 바라보았다. 둥근 탁상시계는 새벽을 나타내며 게으른 듯 앉아있었다. 무슨 소리야. 라고 물으며 컵을 집어 들었다. 하얀 자기 같은 머그잔에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을 S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올라오는지 뚜벅이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눈이 오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컵을 입가로 기울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꼭 와야 해.”

  커피는 천천히 혓바닥을 훑으며 미끄러져 갔다.

그럼.”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비행기는 한참을 날고, 새벽이 되어서야 땅을 밟았다. 몇 번을 겪었지만, 이 뻐근함은 적응되질 않았다. 체질에 맞지 않음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가 먹으면 체질도 변한다는 말은 적어도 나에겐 예사말이 되었다. 아니면 내가 나이를 덜 먹었거나. 아니면 먹기 싫은 것. 둘 중 하나이겠지. 마른 침을 삼키자 입안에 희미한 커피 향이 남아있었다. 입안 깊숙이 어딘가 아직 공항의 향기를 잊지 못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흘러가는 캐리어를 낚아채듯 끌어내렸다. , 하고 어디선가 쇠붙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의 근원엔 캐리어 바퀴가 망가져 어쩔 줄 모르는 자가 있었다. 분주한 손길을 보란 듯이 피하며 동그란 바퀴는 저 멀리 도망갔다. 짐을 끄는 어깨가 아파왔다. 애초에 인간은 날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출구로 걸어가며 그렇게 변명해볼 뿐이었다.

  게이트를 나오자 몇 안 되는 사람들 속에 F의 얼굴이 떠 있었다.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 위에 거뭇한 수염만 묻어있을 뿐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피곤한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미리 연락은 했지만, 늦은 시간에 공항까지 와준 것에 대해 놀라움과 고마움은 손을 꼭 잡아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F는 항상 나와 다른 사람에게 열성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자리에 자기 손을 빌려주지 않으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였다. 공항을 빠져나와 짐을 받아준다는 것을 한사코 막으며 차에 올라탔다. F는 조금만 더 늦었다면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차는 공항에서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F는 엑셀을 밟으며 나에게 얼마나 있을지 물어왔다.

글쎄…….”

  일렬로 지나가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F의 물음에 대답했다. 커다란 대교를 지나며 그곳을 걷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밖은 춥겠지. 쌩하니 지나가는 차들과 바닷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칠 것이고. 하지만 멋있긴 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기도로 신고가 들어와 경찰에 잡혀 들어가겠지만. 그리고……. 쓸모없는 생각이야. 문득 커다란 트레일러가 건너편 차선에서 지나갔다. 창문이 모두 닫혀있음에도 시끄러운 파열음이 들려와 고막을 때렸다. 나는 손을 뻗어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귀에 익지 않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F는 아는 노래인 듯 손가락을 까딱이며 가사를 흥얼거렸다. F는 노래를 잘하지 못했다. 듣는 것이 고역이긴 하겠지만. 경유의 폭발음보단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일, 이 아니구나. 오늘 뭐 할 거야?”

  대교가 끝날 무렵 F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고개만 돌려 F를 바라보았다.

글쎄, 일단 씻고 좀 잔 다음 생각해보면 안 될까.”

지금 생각하기 귀찮은 건 아니고?”

잘 아네. 장시간 비행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잘 알긴, 난 그렇게까지 비행기 타본 적 없어.”

  나는 끊임없이 꿍얼대는 F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오늘 가게는 쉰 거야? 하기야 장사하는 사람에게 휴가란 말은 의미 없으려나.”

그게 장사의 매력이지. 사장님 마음대로.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라 손님도 없어. 알바생도 있고.”

  F는 킥킥 대며 대답했다. 오늘이 일요일이었던가. 문득 오늘의 의미가 기억나지 않았다. 심심하면 가게에 나오란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F는 집 앞에 내려주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나의 다짐을 받아내었다. 손가락이라도 걸까 라고 외치자 그제야 돌아갔다. 차에서 내려 몸이 추워지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 앞에서 천천히 숫자를 눌러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뀌지 않았네, 아직까지는. 익숙한 듯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어색해졌다. 수줍은 손은 추위에 빨개진 몸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짧은 비프음. 흩날리는 커튼. 부서졌다 다시 모여 사라지는 빛 조각들. 닫힌 방문 너머로 옅은 코골이가 들려왔다. 캐리어를 끌고 턱을 넘으려다 문득 제자리에 섰다. 바닥 더러워지잖아. 그래, 알았어. 외투를 벗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익숙했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손끝을 더듬어 담요를 끌어안았다. 옅은 포근함에 몸이 풀리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하루쯤은 안 씻어도 괜찮아. 그런 생각의 끝에 외투 속 휴대폰이 진저리를 쳤다. 반쯤 감긴 눈으로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이 켜지고 잠시 눈이 멀었다. 한 뼘의 강렬한 빛이 고통스러워 한껏 경련이 일었다. 더듬거리며 진동의 근원을 찾았다. 문자가 왔다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메신저도 아니고, 돌아오면서 카드를 긁은 적도 없는데 웬 문자. 차츰 풀리는 눈으로 문자함을 들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형식의 문구가 와있었다.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쓴 듯 딱딱함이 묻어났다. 한글을 뗀 지 얼마 안 된 아이처럼 한 글자씩 곱씹었다. 누군가 씩씩대며 눌러쓴 편지처럼 활자는 시리게 박혀왔다. 나는 가만히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 이십팔 분. 그의 죽음이 나에게 알려진 시간이었다.


  아침이 됐음을 깨달은 것은 커튼 너머로 스미는 빛 때문이었다. 문자를 받은 이후로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피곤했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입안 구석에 자리잡혀 있던 공항의 향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물을 올렸다. 찬장을 뒤적거리며 커피를 찾았다. 구석에 갈지 않은 이르가체페가 조금 남아있었다. 금세 그라인더를 찾아 조심스럽게 갈기 시작했다. 옅은 풀 향기가 코 밑 언저리에서 맴도는 듯했다. ……너무 많이 갈면 안 돼. 이건 드립과는 달라. 향을 살려야 한다고. 너무 갈아버리면 가루약을 물에 타 먹는 느낌일걸…… 굵은 소금 정도로 갈린 원두를 프렌치 프레스에 담고 천천히 물을 부었다. 은은한 향이 퍼져 올 때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어?”

새벽에.”

  S는 기지개를 켜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마치 이제까지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레 찬장에서 머그잔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조심스레 플런저를 내린 후 잔에 커피를 내려주었다. 나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S는 왜 이리 많이 내렸냐며 타박했다. 나는 S의 말을 뒤로 안 채 말없이 잔을 하나 더 꺼내었다.

커피 안마시지 않았어?”

어쩌다보니.”

  풀 냄새, 과일 향 꽃향기. 뜨거운 김을 내는 컵을 나는 입에 가져다 대었다. 과연 S의 취향이 담뿍 담겨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S의 집이니까 당연하지만. 반쯤은 내 집이기도 했었다. S는 꽃을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 말린 꽃을 특히 좋아했다. 이유를 듣자하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죽음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커피가 넘기며 주위를 보면 온통 S의 모습들뿐이었다. 로스팅 한지 한 달 된 건 버려. , 맛 필요한 건 모두 날아가고 잡스러운 맛 밖에 안 나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오래 비웠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묵혀두면,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쓸모없어지거나. 추억이 되던가.

비밀번호 안 바꿨더라. 바꾸래도.”

  문득 생각난 어젯밤의 어색함에 작은 투정을 부렸다. S는 번호가 손에 익어서 편하다고 했다. 컵이 뜨거운지 S는 니트 소매 끝으로 손을 덮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슬며시 웃었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있으려고?”

모르겠어, 무계획이야.”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S는 커피를 마셨다. 알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이전의 사정과 커피로 인해 그 정도는 감내해주겠다.’라는 복잡 미묘한 향. S와 나는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구취 섞인 커피 향을 서로에게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아침의 침묵과 갓 내린 커피의 향은 문자를 받지 않았다면 좋은 하루의 시작점이라 해도 좋았다.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주머니를 짚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감이 느껴졌다. 컵을 내려놓고 원인을 찾으려던 찰나. S가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멋쩍은 듯 슬쩍 웃으며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자 전화가 온 것 같다며 S가 말했다.

전화?”

. F한테서. 급한 일 아냐? 이 시간에 몇 번이나 와있던데?”

  나는 S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컵을 기울였다. 적당히 식은 따뜻한 느낌이 입안에 감돌고, 목젖을 건너. 잠시 참은 숨을 몰아 내뱉을 때. 풀 냄새, 과일 향. 꽃향기……. 그래 꽃향기.

알 것 같네.”

  컵을 내려놓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S는 머그잔에 얼굴을 가린 채 눈으로 물어왔다. 나는 담담히 몇 시간 전에 누군가 죽었다고 말했다. 놀람과 약간의 흥미가 가미된 눈빛으로 S는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었다. 나는 컵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았다. 마셨으면 물에 담가놔. 완전히 눌어붙지 않게. 불어 터져야 그제서 비로소 떨어지지. 컵 안에 물을 받으면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옅은 흔적은 차츰 사라져 투명해졌다.

.”

?”

그래. 너랑 내가 아는 그.”

  눈이 동그래지는 S에게 문자함을 보여주었다. 짧은 문장을 따라 S의 눈동자가 흘러갔다.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이상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뜻 섬뜩하게 느껴져 손이 굳어졌다. 컵을 들고 유리창 쪽으로 S는 걸어갔다. 성에 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좀 더 놀랄 줄 알았는데.”

  프렌치 프레스를 씻으며 넌지시 화두를 던졌다. S는 내 쪽을 바라보며 뭘 묻고 싶냐는 듯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가락은 까딱거리고 있었다. 행동은 굳혀져, 정형화되기 마련이야. 뭔가를 떠올리고 싶지만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그와 관련된 것임을 분명해 보였다. 플런저를 씻고, 원두 찌꺼기를 모아 버릴 때쯤. S는 까딱거리기를 멈추고 조용히 무슨 말을 하였다. 나를 향해 말하는 듯했지만 잘 들리지 않아 수도를 잠갔다. 물방울이 떨어져 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의 물기를 닦으며 S를 바라보았다.

그가 몇 살 이냐구.”

글쎄……. 서른 살? 그래 서른 살 일 거야.”

  S는 나의 대답을 들으며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그의 나이는 죽음과는 먼 나이였다. 그가 시한부 인생이라도 살고 있었던가. 그런 기억은 머릿속에 없었다. S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S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곤 빈 잔은 탁자 위에 두었다. 내가 다시금 컵을 씻을 동안 S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곱씹고 있었다. 나는 수건에 손을 닦으며 언제쯤 장례식장에 갈 것인지 물어보았다.

어딜?”

  S는 미처 듣지 못했다는 듯이 물어왔다.

어디겠어. 장례식장이지.”

  그 순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S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S는 선택의 기로에 접어든 듯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몇 날 몇 시에 갈 것이다와 같은 대답을 예상한 나로선. 이 순간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지 묻자 잠자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어째서 고민하는지 물어보자 S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지 말라 할 게 뻔하거든.”

  소파에 힘없이 앉아 우울한 듯 내뱉는 그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죽은 자가 오가고 선택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S는 그 선택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언제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심지어 죽은 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날 밤. F는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S는 내가 나가는 와중에도 조용히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밖으로 나섰다. 미처 귀국할 때 정장을 챙기지 못해 그저 검은 옷만 골라 입었다. F의 차에 올라타고 내비게이션과 우리의 머릿속엔 장례식장이 입력되었다. 화면에 출발지와 목적지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앞으로의 행동을 암시했다. 이제 끝이야. 괜찮아. 반 시간쯤 걸리는 거리 동안 F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가는 내내 우리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듯했다.

장례식장은 외곽의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롯이 홀로 적혀있는 그의 이름은, 이곳에 죽은 자는 그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문을 열자 무거운 분위기가 육신을 압도했다. 그의 영정 옆엔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홀로 앉아있었다. 그의 벙어리 누이였다. 영정 앞으로 서자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없으시네. , 묵언 수행 중이야. 뜻 모를 절차 끝에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입으로 내뱉어지는 말들을 그녀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돌아서던 차. 그의 영정이 눈에 밟혔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이었다.

  F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웠다. 입에서도 향을 태우는 듯 코끝이 매캐했다. 유독 향냄새가 코에 맞지 않는 것이 부패한 속을 가리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경사로 난간에 기대어 F를 기다렸다. 딱히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입구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차장은 거의 비어있었다. 휑한 것이 조금 서글프다 해도 괜찮아 보였다. 추위에 괜히 코를 훌쩍였다. F가 꽁초를 버릴 때쯤. 입구에서 차 한 대가 올라왔다. 슬그머니 자리 잡은 차는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내렸다. 조용한 주차장에 따박이는 구두소리가 울렸다.

? G 아냐?”

설마.”

  정말로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들어가 버렸다. F가 따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런 F를 끌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는지. F는 차에 들어서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모습을 애써 못 본 척하며 차에 올랐다. 결국, 확인해 보겠다며 다시 되돌아가는 F를 간신히 시동을 걸게 했다. 돌아가는 내내 FG가 맞을 거라며 말을 걸어왔고. 나는 G가 아닐 것이라는 대답이 반복되었다. S의 집에 도착했을 때. F는 심란한 듯 한 잔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무슨 심보인지 짐작이 갔기에 나중에라고 대답하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기 기다리며 왠지 모르게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복도에 옅은 빛이 뿌려졌다. 이제 엘리베이터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올라갈 터였다. 한 발을 내딛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거울에 비친 복도는 서서히 어두워졌고. 휴대폰이 또다시 진저리를 쳤다. 층수를 누르려던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었다. 휴대폰 액정엔 G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F의 가게에 홀로 앉아 기다리는 것은 제법 난처한 일이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번 온다고 한 것이 이렇게 올 줄은 몰랐던 탓일까. F는 나를 가게에 내려놓곤, 셔터마저 반쯤 내리고 가버렸다. 이따금 걸쭉한 취객들이 셔터를 두들겼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주인의 사정 때문에 영업을 일찍 마쳤다고 전했다. 그러자 취객들은 욕지거리를 하며 사라졌다. 그들은 취한 나머지 내가 가게 주인인지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그런 것쯤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술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문득 갈증은 아니지만, 갈증 같은 갈망이 찾아왔다. 나는 조심스레 주방을 흘낏거렸다. 케냐AA, 이르가체페, 하다못해 산토스라도. 내가 떠올린 것들은 이런 주점에 두기엔 너무 귀찮은 것들이었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수기 옆에 믹스커피를 찾아 아쉬운 대로 물을 받았다. 스틱을 뜯어 몽땅 털어 넣은 뒤 휘휘 저었다. 멀건 갈색 위에 침전물 같은 하얀 것이 둥둥 떠다녔다. 물 조절이 실패한 탓인지. 커피 맛은 옅고 니글니글한 당분의 맛만 그득했다. 달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입안이 찐득해지는 느낌이었다. 질척한 것이 꼭 지금 모습 같았다. 안 보인다고 해서, 그게 꼭 끊어진 것만은 아냐. 벽면에 붙은 의자에 앉아 셔터와 지상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도로에 엔진음이 들리더니 곧 사라졌다. F가 돌아온 것일까. 마찰음과 함께 셔터가 열리고 FG가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오랜만이야.”

  나와 G의 짤막한 인사를 뒤로 한 채 F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고. G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어색한 기류에 종이컵만 만지작거릴 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예상치 못한 S의 등장에 나는 무심코 소리를 내뱉었다. G는 반갑게 S를 부르며 다가갔다. 언뜻 보면 살가워 보이지만. S는 불편한 표정을 애써 감추고 있는 듯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S가 이곳에 자처해서 올 이유는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G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불렀다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보겠냐며 대답했다. 나는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물 컵만 만지작거렸다. S가 잠시 머뭇거리다 내 옆에 앉으려던 찰나. 장례식장은 왜 오지 않았는지 F가 부엌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S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며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F의 질문이 유야무야 넘어가려던 차. G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의 의미는 뭐야. 부담스럽게.”

그냥, 옛날 생각나서. 항상 이렇게 모이면 둘이 딱 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기억나서.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네.”

  자리. 듣고 보니 S는 항상 내 옆에 앉아있었다. 내 맞은편에는 G가 그 옆에는 F. 그리고 그는 항상 우리 모두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가로가 아닌 세로. 그는 항상 그 자리를 자처해서 앉곤 했다. 어딜 가든 무리 속엔 각자 나름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G는 그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가 없었다.

, . 먹자. 내가 해준 거 오랜만에 먹지 다들?”

  F는 마실 것과 주전부리를 내오며 자리에 앉았다. G의 옆. 그녀가 말 한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F는 잔들을 채우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G는 제일 먼저 잔을 들었고. S는 주전부리를 집어 들었다. 추모식을 빙자한 유쾌함 속. 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는 어떤 자리였을지 또 이렇게 생각했을지. 예전의 우리도 이 모습 그대로였을지.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나는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S와 빠져나왔다. F는 아쉬워했지만. G도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F의 눈빛을 뒤로 한 채 택시에 올랐다. 겉치레와 같은 인사를 하는 동안 S는 한마디도 없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S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 속, 생각에 침수된 차 안은 고요했다. 택시는 집 앞에서 사라져갔고. 계단에 올라서던 날 S가 붙잡으며 편의점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뭐 살 거 있어?”

  응. 하고 S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한 것인지 아니면 추워서 그런 것인지. 빨간 얼굴이었다. 야밤에 뭘 사려고 하냐며 투덜댔지만. S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별수 없이 뒤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딸랑이는 문을 열고 편의점에 들어선 S는 곧장 맥주가 진열된 냉장고로 향했다. 이럴 거면 거기서 더 마시지 그랬냐며 타박을 주었지만. S는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네가 뭘 마셨더라.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안 나네.”

  S는 맥주 한 캔을 흔들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꿍꿍이인지. 들뜬 것 같으면서도 우울한 쓴맛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S는 빨리 고르라며 나를 재촉했다. 성화에 못 이겨 겨우 같은 것을 하나 집어 드니 빼앗듯이 들고 가 계산대로 향했다. 얼마라는 종업원의 말에 S는 금액을 중얼거리며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종업원의 얼굴을 빤히 보던 S는 아는 체 질문을 던졌다.

전에 일하던 사람은 그만뒀나 보네요.”

, 아르바이트생이 다 그렇죠. . 다 각자의 일이 있으니까……. 담아드릴까요?”

  전에 일하던 사람을 알고 있었는지, 익숙함을 기대했던 듯 S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편의점을 나서 봉지를 덜렁이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나는 잰걸음으로 쫓아가 발을 맞추었다. 어느새 바깥은 입김이 풀풀 나는 찬 공기로 가득했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 신호등을 기다리며 아는 사람이었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S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밤에 일하는 알바생이었어. 인사가 듣기 좋아서 가끔 찾아갔지. 술도 살 겸.”

인사?”

.”

  인사를 받으러 찾아가는 곳.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들을법한 인사를 무엇이 아쉬워서 들을까. 나는 S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S도 굳이 그런 나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 듯 더 말하지 않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저 그런 것이니까. 그런 것일 뿐. 의문은 스스로의 문제였다.

집에 도착하자 S는 곧장 맥주를 꺼내 들었다. 불도 켜지 않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소파 아래편에 앉아 캔을 열었다. 내가 방에 외투를 걸어놓고 나왔을 때. S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S 옆에 앉아 캔을 내밀었다. S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캔 머리를 갖다 대었다. 한결 풀린 표정이 훨씬 보기 좋았다. S는 가슴께까지 무릎을 붙인 채 맥주를 홀짝였다. 그 모습엔 일상 속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그리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나로선. 조금 생소한 모습이었다.

……역시 이게 나아.”

  S는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머리카락이 입가에 붙어 맥주와 뒤엉켜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치워주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힘없이 턱 밑으로 흐트러졌다.

술 별로 안 좋아하더니. 이제 그것도 아닌가 봐?”

나도 너 커피 마시는 줄 몰랐잖아.”

그럼 이걸로 퉁치자.”

  맥주 캔을 잡은 손에서 젖은 한기가 올라왔다. 날카로운 듯, 하지만 둥근 표면이 엄지손가락으로 비빌수록 묘한 느낌을 주었다. 문득 공항에서 보았던 반질한 데스크가 떠올랐다. 그 공항 직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여전히 안 좋아해. 싫어하지 않게 됐을 뿐이지.”

  S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거 아냐?”

달라. 완전.”

  맥주를 홀짝이던 S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쓰고, 따갑고, 냄새나고, 머리 아프고,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따뜻하지도 않고 추워…….”

  S는 흘러가듯 말을 읊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맥주를 마시는 척 장난스레 얼굴을 가렸다. 시시한 장난에 S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냥 싫지는 않아. 참 이상해. 마시고 후회할 걸 뻔히 아는데.”

그래?”

, 그래.”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마시는. 그 뒷모습이 어떨 것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덩그러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까.

꼭 사람 같아.”

  S는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캔의 표면을 문지르면서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S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까.

요즘 들어 그래. 차라리 몰랐으면 싶은 것이 많아. 모르는 것이 약이란 말처럼. 너도, F, G…… 그도. 그냥 내가 아는 게 다 몰랐으면. 그러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문득 지난 아침. 그의 부고를 전해주었을 때 S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죽었다고 하자 대뜸 그의 나이를 물어보았던. 허무맹랑하고, 문맥이 맞지 않았던 질문. S는 어떻게 그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알고 있었다면. .

왜 알려주지 않았어?”

?”
  담담하게. 그렇게.

그가 죽는다는 걸. 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했잖아.”

. 그랬지.”

근데 왜 우리에겐 알려주지 않았어? 하다못해 나에게라도.”

  감정을 누르며 천천히 S에게 말했다. 그렇게 전해지길 바랐다. S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러나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맥주를 홀짝일 뿐. 말을 정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말을 삼키고 있는 걸까. S가 나에게 대답하고 보여준 것은 씁쓸한 미소가 전부였다. 침묵이 흐를수록 관계에 대한 의심은 싹이 터서, 철없는 질투심은 그의 죽음으로 포장되어 S에게 던져졌다. 문득 귀국길에 마주쳤던 항공사 직원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 내 뒤엔 수많은 의문이 줄 서 있었다. 내가 비켜서고 나면 그들은 다시 자신의 것을 던질 터였다. 내 것. 오롯이 내 것인데. 파고드는 생각과 구덩이만큼 박히기 위해 좇아오는 자괴감. 캔을 잡은 손이 끔찍한 땀에 절어있었다.

그만 자야겠다. 내일 출근해야 해. 너도 자. 피곤할 거야.”

  S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벗어놓은 코트만이 그림자처럼 S의 형상을 대신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침묵은 잠시나마 깨졌다. 빈 캔을 버리려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 표정이 구겨진 것인지. 아니면 캔이 구겨진 것인지. 은빛 양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집 안은 S만 없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벗어놓은 코트에, 빈 깡통들이 널브러진 곳에. 나는 잠 들었었다. 모처럼 느끼는 진한 숙취에 머리가 아팠다.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가 원두봉지를 꺼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봉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와르르 내용물을 쏟아냈다. 표정이 굳어지지도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 흩어진 원두를 주워 담았다. 그러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걸 참지 못해 원두에 몇 방울을 흘렀다. 젖은 원두를 골라내어 던지듯이 버렸다. 하등, 젖은 것은 쓸모없어지는 세상이었다.

  저녁, S가 돌아올 때쯤. 나는 집 밖을 나섰다. 여차하면 밖에서 잠을 자겠다며 다짐을 했다. 택시를 타고 F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조금 이른 시간과 평일인지라 손님은 없어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F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F는 어쩐 일이냐며 맞은편에 앉았다. 용건만 물어보고 가겠다며 못을 박자 F의 표정이 조금 불안해 보였다. 작게 숨을 내쉬며, 지난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관해 묻자 회피했다는 점. 가감 없이 말하려 노력했고. F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S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거야.”

  F는 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냐는 물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말 없이 목을 축이는 F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어두운 것이 사뭇 심각해 보였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그의 대답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아침에 그의 부고를 전해주었더니. S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고. 그날 우리가 헤어진 밤에 물어보았더니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 그 말이네.”

그렇지.”

  본인의 말에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F는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나는 몰랐기에. 나는 그의 고민을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의문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흘린 것을 주워 담을 뿐이었다. 그 작은 조각을 매만지며 추측이라 불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조각들을 주워 담아야 온전한 모습을 찾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일단은 그렇게 알아둬. 그렇다는 것만.”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게.”

  F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하고 싫었을지도 몰랐다. 오롯이 내 것이기에. 그러므로 더더욱. 나는 F의 가게에서 나와 잠시 거리를 떠돌았다. 발을 멈추지 않으며 의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어디선가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새 또 누가 죽었는지 맞은편 방엔 신발들이 그득했다. 텅 빈 신발장에 놓인 하나의 신을 보니 마치 금지된 공간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처음 찾아왔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생각이 바뀌면, 눈도 바뀌어. 조용히 미닫이를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벙어리 누이가 보였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인기척에 그녀가 나를 발견하곤 고개를 올려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옆자린 듯 아닌 듯 모호한 자리에 앉았다.

, 왔네요.’

, 안녕하세요.’

  근처에 있는 티슈를 뽑아 인사를 적자 그녀도 나지막하게 인사말을 적어주었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라고 적자 이어 알고 있었어요. 라는 대답이 나왔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누이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보단. 죽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녀의 초연한 모습이 놀라웠다. 그가 아팠냐고 묻자 그녀는 짤막하게 아뇨 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마침표는 단단하고 굳건하여 나의 의심이 들어갈 틈바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이어서 무언가를 적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 했다고 했다.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이며. 어떻게, 어디서 죽을 것인지. 이따금 집에 찾아올 때면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했다. 그녀가 넘겨준 티슈의 빈칸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는 내 손의 펜을 집어 다시 무언가를 적어주었다.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그래서 오셨을 테니까.’

  검은 소매에서 튀어나온 하얀 손은 침착하고 정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왜 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정했고, 그러길 원했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죽었냐고 물었을 땐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집에 찾아와 같이 밥을 먹고 예전 자기의 방에 들어가 밤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스스로 교살했다고 했다. 왜 말리지 않았냐고 물었을 땐. 그녀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스스럼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항상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목을 매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뒤이어 생각이 드는 것도. 자신이 죽었을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줬어요. 그 말대로. 다시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잠을 잔 뒤, 느지막한 오후쯤에야 구급차를 불렀어요. 사인을 확인하고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쓸 때도 담담했어요. 처음엔 사람들이 내가 동생을 죽였다고 생각할까 봐 잠시나마 무서웠는데, 동생의 유서를 읽어본 경찰들은 다행히 그러지 않았어요.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동생이 유서를 잘 써서 그랬던 거 같아요. 똑똑하고, 글재주가 좋은 아이였으니까. 그때, 동생의 시신을 방에서 꺼내 가면서 사람들이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그랬어요. 벙어리는 눈물도 없냐고. 저도 슬퍼요.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는데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동생이 잘 준비를 해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동생도 그러길 바랬을 거에요.“

  티슈 몇 장에 걸쳐 이어진 말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 의구심은 그녀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탓이라 치부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장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아득히 먼 옛날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책을 보는 기분이었다. 같은 자리에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먼발치서 지켜보는 듯. 쓸쓸한 고독이 스며들었다. 나는 장문의 끝에 감사합니다. 라고 마침표를 찍으며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가 돌아서는 내 손을 붙잡으며 바닥을 툭툭 쳤다. 기다리라는 뜻인 것 같아 발길을 멈추자. 그녀는 장례식장에 딸린 방 안에 들어가더니 열쇠 하나와 하얀 봉투를 쥐여주었다. 이게 무엇이냐는 듯 바라보자. 그녀는 티슈에 무언가를 조금 더 적어주었다.

찾아오거든 주라고 했어요.’

내가 찾아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던가요?’

아까 물어보시던 것도 이야기해주었어요. 내가 죽은 뒤 그가 찾아오거든 이렇게 물을 테니 이야기 해주라고. 신기하네요. 어쩜 그리 똑같이 물어보시는지. 아마 동생이 많이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나 봐요.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죠.’

  나는 더 말을 적지 않고. 짧은 묵례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랫동안 입을 닫고 있어서인지 단내가 났다. 올록볼록한 티슈의 감촉. 매끈한 봉투, 차가운 열쇠. 낯선 이물감만이 손안에 그득해 화장실에 들러 한참 동안 손을 씻었다. 비누로 문지르고 소독제로 한참을 문질러도 그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동안 가방에 그것을 박아둔 채 한순간도 거들떠보거나 건드리지도 않았다. 알 수 없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 온몸을 핥았다. 무작정 택시를 불러 장례식장에서 멀어졌다. 어디까지 가시냐는 기사의 물음에 우선 달려달라고 말했다. S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기사는 백미러로 힐끗 나를 보더니 말없이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주황빛이 쏟아졌다 사라지는 것이 반복됐다. 얼마 쯤 달렸을까. 옆 좌석에 던지듯 내버려둔 가방의 입으로 흰 봉투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봉투를 집어 들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흰색의 봉투임이 틀림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뼈의 색깔을 보는 듯했다. 봉투의 겉면 한쪽 귀퉁이에는 어느 곳의 주소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주소가 그가 자살한 장소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택시기사와 나의 목적지가 생겨난 것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밤을 새운 뒤 나는 첫차를 타고 봉투에 적힌 주소의 지역으로 내려갔다. 두 어 시간의 흐름 동안 나는 잠을 자지도, 노래를 듣지도 않았다. 그저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창밖에 흘러가는 풍경만을 바라보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커피를 마시기 전. 카페에 앉아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던 그는 무작정 갈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고 그의 집으로 데려갔었다. 처음엔 그의 자취방을 갈 줄 알았지만. 내가 도착 한 곳은 낯선 집 앞이었다. 그는 자기의 본 집이라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무작정 나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그때 그의 누이를 처음 만났다. 그의 누이는 옆 동네의 과수원에서 일을 하며 품삯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농부의 모습과는 반대로 창백할 정도로 하얀 모습이었다. 흙과는 거리가 먼 도시의 사람과도 같았다. 그런 나에게 그는 자신의 누이가 그저 피부가 잘 타지 않을 뿐이라고 했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하고는 바닥에 눕게 했다. 그리곤 무언가를 한참인가 설명했는데. 그 부분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너무나도 팽팽해져 툭 끊어진 끈처럼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단상들. 그 끝 무렵 나는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시선이 비로소 자의를 찾았을 때. 눈앞에는 커다랗고 푸른 양철 대문이 놓여있었다. 나는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를 비틀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야트막한 텀을 넘어 마당에 들어서자 흙바닥에는 드문드문 풀뿌리가 솟아 있었다. 기왓장을 흉내 낸 색 바란 파란 플라스틱 지붕 밑에 네모난 유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미닫이문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 사이 통짜 파이프를 반으로 갈라 철사로 얼기설기 엮어 빗물받이를 해놓은 것이 인상 깊었다. 마무리가 좋지 못해 연결된 철삿줄이 동서남북으로 뻗쳐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의 옷자락을 붙잡을 듯했다. 나는 마당을 건너 조심스레 미닫이문을 열었다. 부엌 겸 거실에 깔린 비닐장판은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쓸고 닦은 흔적들이 남아 사람이 살고 있음을 부르짖고 있었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그의 방문 앞에 섰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그의 방문만이 굳게 닫혀있었다. 손때가 그득한 손잡이를 보며 문을 열면 그가 방바닥에 누워있을 것만 같았다. 그와 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가 아직 살아있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만약 정말로 그가 방바닥에 누워있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나는 상상 할 수 없었다. 그저 맞닥뜨리는 일 만이 남았다. 나왔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내가 S의 집에 도착했을 땐 막 자정이 넘긴 시간이었다. S는 우두커니 소파에 앉아 불 꺼진 티브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S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없이 외투를 정리하고 있자 S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갔다 왔어?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

어디 좀 다녀왔어.”

  바깥에 오래 있어선지 내뱉는 목소리마저 차가워진 듯했다. S는 그런 나를 말 없이 바라보더니 내 뒤로 와 허리를 손으로 감으며 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S의 숨결이 어깨너머로 느껴졌다. 이어 S의 손이 마치 거미처럼 나의 고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외투를 마저 걸어놓으며 S의 손을 잡아 풀었다. S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듯했지만 금세 풀어짐을 느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소파로 향했다. 등 뒤로 S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서랍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옅은 진동 소리와 함께 S의 신음이 방에서 새어 나왔다. 그것은 일종의 항의며 투쟁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외투를 챙겼다. S의 소리는 신음에서 비명으로 바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휴대폰으로 G에게 전화를 걸었다. G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내가 다른 말 없이 어디냐고 묻자 어디로 갈까 라는 대답이 자연스레 나왔다. 나는 집 근처의 카페를 생각해냈고, G에게 장소를 알려주자 알고 있다며 곧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카페로 발을 옮겼다. 카페에 들어서자 커피 향과 함께 종업원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 G가 모습을 드러냈다. G는 집에서 곧장 나왔는지 수수한 차림이었다. G는 간단히 주문한 후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인사 대신 씁쓸한 미소를 전했다. G는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별일이네. 네가 나한테 연락을 다 하고. 솔직히 그때 F랑 같이 만난 이후로 못 볼 줄 알았거든.”

그러게.”

  그때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들고 나왔다.

커피? 너 커피 안마시지 않았어?”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나는 어쩌다 보니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 이제는 나도 모르게 된 것 같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까맣게 녹아 이 잔에 담긴 듯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된 거야?”

그런 것 같아.”

그럼 가자.”

  G는 커피를 채 다 마시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커피를 들 고 밖으로 나왔다. G는 그런 내가 우스운지 잠시 웃었다. G와 나는 곧장 모텔로 향했다. G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나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저 마셨다. G가 샤워를 마치고 내가 들어가려 하자 G는 날 그대로 침대로 끌어당겼다. G의 입술이 나의 입술과 포개지고 진한 커피 맛이 났다. 문득 G와 내가 다른 커피를 주문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G의 혀가 내 입안을 맛보듯 훑어내더니 얼굴을 떼어냈다.

너한테서 커피 맛이 나니까 이상하네.”

  나는 그런 G를 뒤집어 내 밑으로 둔 다음 G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G의 몸에서 옅은 물비린내와 샴푸의 향기가 입안의 커피 향과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G의 성기를 입으로 핥았고 동물적 신음을 내며 G는 몸을 움츠렸다. 나는 황급히 바지를 벗고 G의 성기에 고간을 삽입했다. 문득 벽 너머로 S의 비명 같은 신음이 들리는 듯했다. 나는 S의 자위행위를 본 적이 없지만 마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하지만 S가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손이나 도구가 아니었다. 내 눈앞의 S는 죽은 그의 머리로 자위를 하고 있었다. S의 성기에 그의 머리가 왔다 갔다 하며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었다. 곧이어 S는 절정을 맞이했고, 나 또한 절정을 맞이했다. 짧은 사정 끝에 나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하기 그지없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아래엔 G가 누워있었다. 내가 옆으로 비켜 눕자 G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로 자신의 성기를 닦았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G는 내가 사정한 것들을 닦아내고는 내 옆으로 와서 누웠다. G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거친 숨이 잦아들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너도 알고 있었어?”

?”

  G는 손으로 머리를 기댄 채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멍하니 붉은 천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죽을 것이란 걸.”

  나의 물음에 G는 잠시 말이 없더니 한숨을 쉬며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G의 대답을 기다렸다. G는 옷을 다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마친 후에야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동정도, 사랑도, 증오도. 난 그래서 커피가 좋아. 그저 한 잔의 커피 같이 새카맣기만 했다. 그런 눈으로 G는 나에게 말했다.

너 말고는 다 알고 있어. 그가 왜 죽었는지. 언제 죽을 것인지. 그리고 누가 죽였는지.”

  G는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이어 나갔다.

너만 모르는 게. 그게 제일 좋은 거야. 적어도 넌…….”

  G는 마치 전언하듯 나에게 말을 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그 말을 곱씹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은 여전히 새카맣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G는 어느새 돌아가고 없었다. 나는 다시 S의 집으로 돌아갔다. 불 꺼진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S의 자위행위도 끝났는지 더 이상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S의 방문을 열었다. S는 알몸으로 침대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S의 가랑이 밑에 머리를 대며 누웠다. 땀 냄새와 말린 꽃의 향기가 어우러져 미묘한 향이 났다. 그때 S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섯 개의 촉수는 검은 머릿속을 놀아댔다. 나는 가만히 그 행동을 받아들였다. S는 내 머리카락을 감고, 휘저으면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 기억나?”

?”

가슴이 작아졌다고 했던 거.”

두어 달 전이였던가. 기억나.”

  나는 그때의 통화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아파트에 돌아와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치고 상념에 빠져있던 날. 겨울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고. 지구 반대편에서 S에게서 신호가 와 검은 호수에 파도가 쳤던 날.

그게 사실 작아진 게 아니었어.”

그럼?”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가슴이 움푹 파여 있었어. 마치 누군가 삽으로 퍼간 것처럼.”

  가슴이 움푹 파였었다. 나는 S의 가슴을 올려다보았다. S의 가슴은 멀쩡히 솟아있었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S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놀라서 바로 그에게 전화했어. 왠지 그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더니 그가 대뜸 자기가 죽으면 다시 가슴이 솟아오를 것이라 그랬어. 그래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그랬지. 장난치지 말라고. 하지만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기만 하는 거야. 그래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어.”

그래서?”

그러고 나서 문자가 하나 왔어. 너무나 이상한 말이어서 뜻을 알려달라고 해도 답장이 없었어. 그 뒤로는 그와 연락을 하려고 해도 연락이 되질 않아.”

뭐라고 왔는데?”

글쎄…….”

  S는 그 말을 끝으로 머리카락을 놀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S의 뒤를 따라 나갔다. S는 커튼을 젖히고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싸늘한 한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휘저었다. 창문을 열자 S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려 사방팔방으로 감겼다. 마치 그것은 살아있는 듯 S의 온몸을 훑고 있었다. S는 마침내 난간에 걸터앉았고 나를 향해 눈을 떼지 않았다. 까만 눈을 덮고 있는 껍데기를 겨울의 시린 하늘이 더욱 희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통화를 다시금 기억했다. 겨울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스케줄을 마치고 아파트에 돌아와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치고 상념에 잠겨있을 때. 탁상시계는 게으르게 앉아있고, 지구 반대편에서 신호가 와 검은 호수에 파도가 쳤던 날…….

바람이 불고 그렇게 눈이 내렸다.

  돌아가는 공항. 눈이 조금 쌓였지만 딜레이 없이 비행기는 이륙한다고 했다. F에겐 혼자 출국하겠다고, 마중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티켓팅을 하며 항공사 직원이 즐거운 비행이 되라며 인사를 건넸다. 출국장을 넘어 좌석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내다봤다. 조금 흐리지만 괜찮은 날씨였다. 이륙하기 직전, 승무원들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안전수칙을 보여주고, 기장의 인사가 이어졌다.‘'즐거운 비행 되십시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정된 고도에 다다랐다. 옆 좌석의 남자는 이어폰을 낀 채 벌써 잠들어 있었다. 소리를 크게 했는지 이어폰 너머로 작게나마 음악 소리가 들렸다. 뒷좌석에선 누군가 비행기 창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건너편 좌석에는 아기가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창밖은 고요했고 도착까진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들고 온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가고 있기에 너무나도 목이 말랐다.’ 그러자 승무원이 나에게 물었다.

음료는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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