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2세기 고려의 여진원정

고려 동북 9성 이야기가 읽판에 잔잔하게 이는데 끼워넣기를 좀 해보고자 함.

우선 본인은 분과가 한국사도 중세사도 아니므로 한국사학계의 현재 논의 수준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료를 읽어 독자적인 판단을 할 능력은 더더욱 없음.

그러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시간순서를 따라 고려와 여진의 관계 변화와 원정 당시 상황을 알아보려고 함.

이건 여진을 단순히 변방 야인들로 인식함으로써 동북 9성 원정과 그 실패 과정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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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자가 된지 수십년.

거란은 고구려의 계승자이자 발해와 동족의식을 공유했던 고려 입장에서는 결코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국가였다.

942년 고려태조 왕건은 거란의 사신들을 모조리 유배보내고 그들이 예물로 가져온 낙타 수십마리를 다리 밑에 묶어 굶겨죽이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이건 상병크짓이라 나중에 후손들한테 왕건이 욕먹기도 했다.)

 

고려와 거란은 그 뒤로 수십년 간 외교적으로는 대립관계였으나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정안국 같은 발해유민국가들의 존재로 군사적인 마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다 985, 986년 즈음 거란은 50년 정도 존속했던 정안국을 멸망시켰고 고려로 그 목표를 돌렸다.  

마침내 993년, 고려 6대왕인 성종 12년 소손녕의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넘으로써 3차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거란 간의 1차 전쟁은 그 유명한 서희의 갓바닥놀림으로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권리를 확보하고 고려만 이득을 취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주 지역은 대북방전선의 요새들로 활약한다.)



강동6주.jpg


1010년 고려 현종 2년, 거란은 고려에서 있었던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수십만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다. 2차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홍화진 등 요새화된 고려의 성들은 함락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으나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주력군이 궤멸되고 강조를 포함해 수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고려는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현종 몽진.png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나주까지 도망가야만 했다. 결국 개경은 거란에게 함락된다.

그러나 이러한 거란의 빠른 진격은 서경(평양)과 같은 중요한 지역들을 내버려두고 내달린 끝에 이룩한 성과여서

결과적으로 현종을 잡지 못하자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후방에 남은 고려군은 거란군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거란 역시 수천단위의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으면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러난다.

거란은 막판에 압록강을 건너 후퇴할 때조차 고려군에게 후미를 공격당해 상당한 병력을 잃어야 했다.

 

그 뒤로도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소규모 충돌이 계속해서 존재하다가

현종 9년인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이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고려를 침공한다.

물론 그 결과는 모두 잘 알다시피 강감찬의 귀주대첩 크리...

거란군은 탈탈 털려버렸고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고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 못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이후 고려는 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에 이르기까지

즉, 992년 현종 즉위 때부터 1122년 예종이 죽을 때까지 장장 100년이 넘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고려-거란-송 사이의 한세기에 달하던 평화의 균형은 11세기 들어 거란이 약화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때가 고려 문종 때인데 어느 때보다 여진족의 귀부요청과 충돌기록이 늘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일례로 문종 27년인 1073년 고려사 기록만 해도 1년 내내 여진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979&categoryId=49629&cid=49629 - 고려사 문종 27년(1073)

 

이 시기 고려는 한 세기만에 처음으로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해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까지 감행해야 했다.


요나라에서 영주관내관찰사 고사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 동여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 문정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석과 병부상서 염한을 병마사로, 좌승선 이의를 병마부사로 임명해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각 방면에서 공격해 적 4백 31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고려사 문종 34년(108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986&categoryId=49629&cid=49629

 

11세기 후반 거란이 약화되면서 여진은 자체적으로 세력을 기른 측과 고려에 귀부하는 측으로 점차 나뉘어졌다.

전자의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만주를 기반으로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다.

거란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반대급부로 여진의 세력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고려로 귀부해오는 여진들도 있었으나 완안부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이 문제였다.

 

금사 본기 세기, 완안아고내(완안아골타의 조부, 금나라 건국 후 경조로 추존)의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曷懶水有率衆降者 갈라수유솔중항자 - 갈라수에 무리를 이끌고 항복한 자가 있었다. 

https://zh.wikisource.org/wiki/%E9%87%91%E5%8F%B2/%E5%8D%B71

 

갈라수는 갈라전에 있다고 추정되는데 갈라전은 오늘날 함경도 일대를 말한다.

완안오고내가 1070년대 초중반에 사망했으니 이미 이 무렵에 함경도 일대 여진족 중 완안부에 항복한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숙종 때 드디어 완안부가 고려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동여진의 남녀 1,753명이 귀부해 왔다.
○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별부의 부내로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이 정주(定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고려사 숙종 9년(110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27&categoryId=49629&cid=49629

 

 

위의 기록에서 오아속이 바로 완안부의 부족장인 완안오아속이며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의 형이다.

완안부의 병력이 함경도까지 내려와 고려 동북방 경계인 정주까지 당도한 것이다.


강동6주.jpg 

지도 오른쪽 끝에 위치한 정주

 

 

한달 뒤에는 고려군이 국경 근처에서 여진족에게 패하는 일도 있었다.

 

임간이 여진과 정주성(定州城) 밖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다.

해당 관청에서 임간과 병마사인 좌복야 황유현, 부사인 대장군 송충,

호부시랑 왕공윤, 좌승선 조규가 패배한 책임을 물어 탄핵하자 그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고려사 숙종 9년(110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27&categoryId=49629&cid=49629

 

드디어 고려 예종 때인 1107년 완안부를 비롯한 여진족의 세력확대와 강성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고려는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17만이라는 병력으로 정주성을 치고 나가 여진 정벌에 나선다.

그 기세가 대단해 불과 한 달 만에 윤관은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을 쓸어내버렸다.

 

윤관이 여진을 공격해 크게 이기자 여러 장수들을 보내 국경을 획정케 한 후

웅주(雄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영주(英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복

주(福州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의 네 개 주에 성을 쌓았다.
동여진 요을내 등 3천 2백 3십 명이 귀부해 왔다.

 

고려사 예종 2년(110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33&categoryId=49629&cid=49629

 

 

그러나 알다시피 이 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려의 생각과 달리 완안부와 여진족은 미친듯이 저항했고 고려의 동북 9성은 고립된 채 독자적으로 여진족과 맞서야 했다.

사실 이렇게 된 원인에는 고려의 판단미스도 있었다.

첫번째로 고려는 원정 초기 여진족을 몰아내면서 친고려파 여진족을 가리지 않고 몰살시킴으로써 완안부의 세력을 강화시켜주었다.

둘째로 9성의 지리를 오판했다. 고려는 함경도 일대를 차지한 이후에야 이 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弓漢里)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니,

만약 관성(關城)을 설치하여 작은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이 영구히 끊어질 것이다."고 하였더니,

그것을 빼앗아 놓고 본즉 수륙의 도로가 가는 곳마다 통하지 않음이 없어 앞서 듣던 바와 아주 판이하였다.

 

고려사절요 7권 예종 3년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94A_0080_020_0050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고려사 윤관열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75&categoryId=49632&cid=49632

 

 

결국 평정은 한달만에 성공했으나 마치 현대의 베트남전이나 아프간전처럼 완안부가 이끄는 여진게릴라와의 지리한 전투가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다.

고려도 계속된 전쟁에 슬슬 지쳐갔으나 아직은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는 논의가 대세였다.

무엇보다 여진은 고려에게 오랑캐였고 여진정벌은 예종의 아버지인 숙종의 숙원이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여진이 길주(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를 포위하자 오연총()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대패했다.

 

고려사 예종 4년(110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036&categoryId=49629&cid=49629


 

여진이 다시 원근의 부족들을 모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를 여러 달째 포위하고서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을 쌓아 여섯 개의 목책을 세우고 맹렬히 공격해오는 바람에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하였다.

 병마부사 이관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여러 겹의 성을 쌓고 수비와 전투에 임했으나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형세가 궁해져 많은 사상자가 났다. 오연총이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고 하자 왕은 다시 지휘권을 부여해 파견했다.

도중 공험진(公嶮鎭)에 당도했을 때 적이 길을 막고 기습하는 통에 아군이 대패해 장졸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려사 오연총열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80&categoryId=49632&cid=49632

 


당시 고려가 당한 이 패배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금사에 더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道遇敵兵五萬, 擊走之. 도우적병오만, 격주지.

길에서 적병(고려군) 오만 명과 마주쳐, 그들을 공격해 패주시켰다.

又與石適歡遇敵七萬, 阿里先登, 奮擊大敗之. 우여석전환우적칠만, 아리선등, 분격대패지.

또 석전환(여진 장군)과 함께 적병(고려군) 칠만 명을 만나, 사묘아리가 먼저 나서, 그들을 공격해 대패시켰다.

 

금사 사묘아리(斜卯阿里) 열전

https://zh.wikisource.org/wiki/%E9%87%91%E5%8F%B2/%E5%8D%B780


 

 

사묘아리는 여진 장수로 이후 거란과 북송과의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한다.

한마디로 수만에 달하는 고려군이 두 번이나 완안부의 여진군과 싸워 대패했던 것이다.

특히 사묘아리 전에서는 이 당시 하루동안 사묘아리가 세번이나 돌격해 고려군을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전투가 매우 치열했음을 말해준다.

이 대패로 고려는 동북방을 유지할 여력을 상실했고 결국 동북 9성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된다.

이로써 1107년부터 1109년까지 이어진 3년에 걸친 고려의 여진정벌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다만 이것이 완전히 실패인가 하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1070년대 이미 여진 완안부는 두만강, 함경도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7만이라는 대병력을 동원한 고려의 여진정벌은 예종 2년인 1107년에 시작되어 예종 4년인 1109년 실패로 끝났다.

1115년 형이 죽고 완안부를 계승한 완안아골타는 금나라를 세웠고 1125년 금나라는 거란을 멸망시켰다.

1126년 금나라의 병력은 북송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시키고 북송을 멸망시켰다.

고려의 여진원정이 시작되고 불과 20년만에 완안부는 금을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키고 북송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한 마디로 고려의 여진원정은 100년이라는 전성기를 누리며 역량을 쌓아온 고려와 북방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여진족 간의 사투였던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던 예종 대의 고려와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로 고려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다시는 서로 창칼을 맞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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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댓글

저때 시묘아리 죽이고 완안부 복속 시켰으면 지금 우리도 중국어 각인가
0
2018.04.26
@ㄴㄴㅇㅀㄳㅎㅅㅎㅍㄿ
성시옌라!
0
2018.04.26
앙~
0
나무위키 같은데서는 척준경을

무슨 척준경이라는 한 사람때문에 여진족이 쳐들어오기 껄끄러워했다고 하던데 그건

솔직히 좀 구라같죠?
0
2018.04.26
@년차 호그와트 대의원
그건 저도 잘....
0
@년차 호그와트 대의원
ㅇㅇ 사묘아리 사 있는데 어디 척준경을 붙이냐. 사묘아리는 금나라 이순신인데
0
@ㄴㄴㅇㅀㄳㅎㅅㅎㅍㄿ
아 둘이 한번 붙어봤어야하는건데

기껏 동시대 인물이건만
0
@년차 호그와트 대의원
ㅇㅇ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네임드 대전이 잘 일어나지 않음 아마 마지막 네임드 대전이 당나라와 고구려 정도 일듯
0
2018.04.26
@년차 호그와트 대의원
둘이 서로를 알고는 있었을 수도 있고 정황상 그렇게까지 의식한 것 같진 않지만 느낀 바가 있었는지 이후 금나라는 고려가 먼저 탈주 부대의 선빵이 있었는데도 이꽉물고 참고 들어가고 묘청의 난 때도 고려를 칠 절호의 클레임 기회였는데도 기껏 고려 조정에 점수 따려고 조정 편 든 거 보면 고려를 함부로 정복할 수 없는 나라라 인식했던 듯하고(근데 이거 말고도 원래 누르하치 거병 전까지 여진은 고려를 자기보다 더 센 형님나라로 인식하고는 있었음). 고려도 고려 나름대로 금나라에 안 개길려 노력함 척준경부터가 금나라라랑 더 이상 전쟁 ㄴㄴ하자고 했음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한 언사였다 봄
0
2018.04.26
@qubqub
+ 완안부가 척준경을 몰랐을 리야 없지만 척준경 한명만으로 고려에 대한 개전 의지를 접진 않은듯
0
2018.04.26
당시 고려가 송나라한테도 쎄게 나갈정도여서 여진도 함부로 행동하진 않은듯. 근데 나는 거란이나 여진의 역사를 들어보면 고대국가 부여 고구려랑 계통을 같이하는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확실히 아는 사람있음?? 만주족에서 말갈애들 중에 거란이 되고 여진이되고 한거 아님?
0
2018.04.27
@사장바지
거란은 선비에서 갈라져나왔고

말갈애들이 여진족이 됐고

여진족 중에서 건주여진이 만주족으로 이름 바꿨다고 알고 있음
0
2018.04.27
@붉은제로
우리도 북북공정해서 부여계의 피를 이은 여진족 그 피를 이은 청나라 해서 사기칠 수 있는 각이야?
0
2018.04.27
@사장바지
그런거라면 환단고기라고 이미 본좌급이 있어서...
0
2018.04.27
@붉은제로
앗...아아
0
2018.04.27
완안부도 하도 호되게 맞아서 그런지 고려 안건든거 같음.
0
2018.04.27
@문틈
하도 지랄맞게 싸우다 보니 여진 애들도 질려서...
0
2018.04.27
@Basileus
그런데 ..어? 북송은 좆밥이네? 존나 물렁하네?
0
2018.04.27
@문틈
이게 다 연운 16주 때문이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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