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회광반조, 영국 자유당의 몰락

                                  



보수당.png       노동당.png         자유민주당.png


영국 보수당 / 영국 노동당 / 영국 자유민주당(구 자유당)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 변화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체제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17세기 휘그당으로까지 그 뿌리가 거슬러 올라가는 자유당은 1859년 창당된 이래

각종 정치개혁과 복지제도 도입을 시도했고, 토리로부터 이어진 보수당과 함께 영국 양대 대중정당의 하나로 기능했다.

영국 최초의 수상이었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을 비롯해 노예제 폐지를 선포한 찰스 그레이(Charles Gray),

네 차례나 수상을 역임한 윌리엄 아워트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전시수상이자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진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등이 모두 자유당의 전신인 휘그당 출신이거나 자유당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유당의 몰락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1906년, 자유당은 총선에서 지지율 1위에 하원 670석 중 과반이 훌쩍 넘는 397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보수당은 157석을 얻었고 신생 노동당은 30석도 얻지 못했다. 17년 동안 의회 내에서 제1당을 구성했던 보수당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뒤인 1922년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자유당은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줬고 제1야당의 자리마저도 노동당에게 내주었다.

이 갑작스러운 몰락의 흐름은 점점 가속화되어 1924년 총선에서 자유당은 겨우 40석의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1922년을 기점으로 오늘의 자유민주당에 이르기까지 자유당은 다시는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자유당 몰락의 시기가 자유당의 전성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글래드스턴이 마지막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것이 1906년의 역사적 승리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인 1894년이었고

1906년의 총선 승리 이후 수상에 취임한 애스퀴스와 후임 로이드 조지 역시 영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수상들이었다.

(특히 로이드 조지는 2004년 BBC 라디오가 실시한 20세기 역대 수상에 대한 인기 조사에서 윈스턴 처칠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2000년 영국과 미국의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애스퀴스.jpg 로이드 조지.jpg

좌 - 헨리 애스퀴스 / 우 - 로이드 조지


 

그리고 이 10여 년은 자유당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한 때이기도 했다. 자유당은 1906년 승리 후 각종 사회개혁 법안들을 의욕적으로 쏟아냈다.

애스퀴스의 수상 취임 후 연금지급을 명시한 노령연금법, 파업으로 인한 경영손실에 대해 노동조합에게 면책을 부여한 노동쟁의법,

무료 급식을 실시하기로 명시한 교육법, 탄광노동자의 노동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규정한 탄광규제법, 최저임금법, 국가보험법 등이 잇따라 제정되었다.

특히 1911년, 소득세와 상속세의 인상과 토지세 신설 등을 골자로 한 ‘인민예산(People's Budget)’이라 불리는 예산안의 통과와

보수적인 상원이 하원의 결정을 거부할 수 없게끔 명시한 의회법 역시 애스퀴스 임기 중 일구어낸 성과였다.

‘인민예산’을 보수당이 장악한 상원에서 부결시키자 애스퀴스는 하원을 해산하면서까지 예산안을 밀어붙였고

이후 하원이 결정한 예산안에 상원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의회법을 제정하였다.

보수당은 상원 개혁에 반대했으나 애스퀴스가 국왕 조지5세의 동의 아래 자유당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상원에 대거 임명시키려고 하자 마지못해 의회법을 받아들였다. 
 

1910 선거 자유당.jpg 인민예산 보수당 포스터.jpg

 

인민예산에 대한 지지/반대 포스터

"기득권층과 인민들 중 어떤 깃발 아래 서겠는가?"

"줄어든 맥주, 줄어든 담배, 줄어든 고용, 그들은 이걸 인민예산이라 부른다!"

 

 

로이드 조지 또한 역대 영국 수상들 중 손꼽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재무장관 시절 국가보험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 그는 애스퀴스 때 마련된 기반을 토대로 20세기 복지국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역사학자 케네스 모건(Kenneth Morgan)은 로이드 조지에 대해

“영국을 인권, 교육, 복지, 연금, 고용 환경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 국가로 변화시켰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이들이 집권한 그 시기에, 역사학자 폴 아델만(Paul Adelman)이

“20세기에 들어선 영국 정부 중 가장 훌륭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 바로 그 순간에 자유당은 무너져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표면적인 원인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자유당의 분열이었다. 전쟁의 발발은 처음에 자유당 내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다.

전쟁에 대해 한결 같이 강경한 입장이었던 보수당과 달리 자유당 내부에는 전쟁에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쟁 기간 내내 집권당인 자신들 자유당에 대한 반대자로 존재했다.

당시 내각에 참여하고 있던 찰스 트리벨리언(Charles Trevelyan)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전쟁에 반대해 내각에서 사임했고 이후 일부는 자유당을 탈퇴하고 노동당에 입당하게 된다.

 

또 그 반대편에는 자유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관해 보수당과 입장을 같이하는 강경한 세력이 존재했다.

애스퀴스를 포함한 대다수 자유당 의원들은 그 중간에서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자유주의적 이념의 훼손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전시에 애스퀴스의 모호한 태도는 점차 불만을 샀으며 ‘두고 보기(Wait and See)’라는 말로 대표되는

애스퀴스의 침착하고 차분한 리더십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지지부진하고 승리가 불확실해지면서 애스퀴스의 전시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설상가상 1915년 갈리폴리 전투가 3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처참하게 실패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음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생기자 애스퀴스는 보수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자유당을 비판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유당을 공격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던 보수당은 연립내각 구성을 받아들였다.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국가의 단결과 애국을 강조해왔는데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전시상황에서 보수당은 집요하게 자유당을 비판하지 못했다.

국가의 단결을 해치고 전쟁수행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연립내각은 전시에 혼란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동시에 자유당 내부에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연합이 일반 평의원들의 동의 없이 당 지도부들만의 합의 하에 이뤄진 내각이었다는데 있었다.

 

또 징집과 관련된 문제가 자유당 내부를 크게 뒤흔들었다.

전쟁은 점차 자발적 지원자들만으로는 끝날 수 없음이 자명해지고 있었다.

자유당이 추구한 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이상과 이념은 ‘총력전’이라는, 처음 경험하는 이 무지막지한 역사의 파도 앞에 무너져 갔다.

자발적 병역 참여를 주창해온 자유주의자 애스퀴스는 보수당의 징집 요구에 대해 최대한 버텼지만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강제 징집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애스퀴스가 마지못해 징집령에 동의하자 이번에는 자유당 내부에서 반대가 터져 나왔다.

내무장관 존 사이먼(John Simon)은 “아무리 온건한 내용이라고 해도 강제 징집 법안에 찬성할 수 없다.”며 항의하고 사임했다.

 

마침내 전쟁 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마찰 끝에 군수성과 전쟁성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로이드 조지와 애스퀴스가 갈라서면서 자유당 분열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본래 징집에 찬성하는 등, 전쟁에 적극적이던 로이드 조지는 애스퀴스의 전시 체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전쟁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애스퀴스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애스퀴스와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보수당이 로이드 조지를 지지하면서 결국 애스퀴스가 사임하고 로이드 조지를 수상으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었다.

 

자유당은 이제 양분되어 애스퀴스를 지지하는 자유당 의원들과 로이드 조지를 지지하는 연립파 자유당 의원들로 양분되었다.

로이드 조지의 내각은 보수당과 자유당의 연립내각인 동시에 120명이 넘는 자유당 의원들을 야당으로 하는 기묘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치러진 1918년 ‘쿠폰선거(Coupon election)’ 에서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478석을 차지하며 대거 당선되었고

애스퀴스파 자유당은 대다수 의석을 잃고 고작 37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1918년 총선이 쿠폰선거라고 불린 이유는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후보들에게 로이드 조지와 보수당이 연립에 참여하기로 했음을 의미하는 증서를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애스퀴스는 이를 ‘쿠폰’이라고 비꼬았다.


쿠폰선거.jpg

 

증서(쿠폰)의 예시

 

 

로이드 조지는 수상직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보수당의 영향력 강화를 불러왔다.

연립정부에 참여한 의원 478명 중 342명이 보수당 의원이었다. 특히 보수당은 쿠폰 없이도 48명의 의원들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지만

로이드 조지의 연립자유당 의원들은 모두 쿠폰을 받은 사람들뿐이었다. 보수당은 거대 정당으로 다시금 부상했지만 그 경쟁자인 자유당은 이제 분열된 정당이었다.

더욱이 전국적인 지지층이 전무한 로이드 조지는 선거구에서의 자파 승리를 위해 보수당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종래에 내각에서마저 보수당의 정책과 충돌한 자유당 각료들이 하나둘 물러나자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고립되었다.

 

독립자유당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유당 내 좌파들은 노동당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남아 있는 애스퀴스를 위시한 의원들은 진취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당이나 보수당보다도 같은 식구들이었던 연립자유당에 더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끝내 1920년 애스퀴스파 독립자유당이 로이드 조지의 연립자유당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면서 자유당은 완전히 다른 두 정당으로 분리되었다.

 

세력을 기른 보수당도 다시 정면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자유당은 약화되었으며 자연히 로이드 조지의 권위도 약해졌다.

그리고 노동당의 부상에 대한 우려로 보수당 내부에서는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결국 1922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독자 출마하기로 결의하자 연립 내각은 무너졌고 보수당의 지지를 잃은 자유당 수상 로이드 조지는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애스퀴스와 로이드 조지가 자유당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보수당에 의해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자유당은 정국을 주도할 힘을 무기력하게 잃어버리고 있었다.

 

로이드 조지의 연립자유당은 국민자유당이란 이름으로 총선에 도전했고 1922년 선거에서는 보수당, 국민자유당, 독립자유당, 노동당의 4파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보수당의 대승과 노동당의 선전으로 나타났다.

보수당은 344석으로 단독과반을 차지에 내각을 구성하는데 성공했고 노동당은 142석을 차지해 명실공히 제1야당이 되었다.

애스퀴스의 독립자유당은 62석, 로이드 조지의 국민자유당은 53석을 얻었다.
이후 1920년대에 자유당 재건을 위한 논의가 계속되었고 실제로 자유당은 다시 합당했지만

1924년 선거에서는 40석만을 건지며 처참한 몰락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이로써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최후의 수상이 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당의 몰락 자체에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예기치 못한 요소와 그에 대한 대응에서 나타난 분열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총력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은 자유당이 추구해온 정치적 이념을 지키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전쟁이 유발한 참전 문제와 언론 통제, 강제 징집, 사회 규제 등은 자유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에게 극심한 혼란을 주었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당이 분열 되면서 자유당은 중요한 전환기에 정치적 역량을 모두 낭비해버렸다.

 

그러나 의문이 하나 더 생긴다. 그것은 어째서 자유당 같은 거대 정당이 재건에 완전히 실패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대한 원인은 노동당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당 포스터.jpg

 

1910년 총선 노동당 포스터 - 노동자들이 의사당 문을 뽀개고 있다.

 

 

애스퀴스도, 로이드 조지도 전쟁상황에서 정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보수당과 손을 잡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독이 든 성배였다.

전쟁 기간 동안 보수당이 점차 정부를 장악했고 우경화된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그리고 보수당에 대항해야할 자유당이 분열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이제 노동당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사실 그동안 노동당은 보수당은 물론이고 자유당에 있어서도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나

1917년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급진적이고 진취적인 좌파정당으로 탈피했다.

노동당은 자신들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임을 유권자, 특히 노동자들에게 각인시켰고 기존의 자유당 선거구들은 점차 노동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정작 자유당의 선거전략은 전통적 라이벌인 보수당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노동당에 대한 견제를 효과적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또 이후 노동당이 추진한 석탄법, 자본세 등의 정책들에 대해 자유당은 당내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제 자유당이 어떤 계급을 대변하는지가 불명확해졌다는 것이었다.

애스퀴스는 전통적 자유주의에 매달려 있었으며 로이드 조지가 제시한 진보적 자유주의는 노동자들에게 그 매력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자유당은 노동당의 사회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들은 보수파도 될 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수상으로 재임시 광산의 국유화를 거부했었는데 이것이 노동자들의 실망감을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1931년 자유당이 노동당과의 연계를 추진할 때는 이에 반발한 자유당 의원 상당수가 국민파라는 이름으로 파벌을 구성해 보수당과 협력했다.

자유당은 계속해서 보수당과 노동당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그 사이 당원들은 계속해서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흡수되었다.

 

이와 같은 일은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프랑스에서도 자유주의 정당으로 제1당을 구성하던 급진당이 우파 정당들과 좌파 정당들의 부상 속에

1920년대부터 점차 자리를 내줘 1970년대에 완전히 몰락해버리는 일이 있었다.

프랑스 급진당 역시 영국 자유당처럼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사회당이 우파에 대항해 더 유연한 정책을 가지고 나오자 급진당내 좌파는 사회당으로, 우파는 중도 우파계열로 모두 흡수되어버린다.

급진당 내 좌파인 급진사회주의 당원들은 사회당의 정책에 공감한 반면 당 지도부를 구성한 급진주의 당원들은 사회당의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1970년대 사회당의 공동정부프로그램에 급진사회주의 계열이 독자적으로 참여하자 당 지도부는 이들을 모두 제명시키면서까지 사회당에게 거부감을 표시했다.

 

기존의 우파정당에 대항해 진보적인 좌파정당 역할을 하던 19세기 자유주의 정당들은

비교적 입장이 확고한 보수정당들에 비해 20세기 새로운 계급과 좌파의 부상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더 확고하고 진취적이며 급진적인 좌파정당에 매력을 느꼈지만 자유당 같은 기존의 정당은 보수와 새로운 진보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다.

더욱이 영국 자유당은 가장 적절한 대응을 필요로 할 때 분열되어 있었다.

 

자유당의 빈자리는 이제 노동당의 몫이었다.

 


 


참고 문헌

 

Kenneth Owen Morgan, 영국사학회 역, 옥스포드 영국사, 한울아카데미, 2012.

William Arthur Speck, 이내주 역,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 개마고원, 2002.

강원택.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영국 보수당의 역사, 동아시아연구원, 2008.

강원택. 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 영국 자유당의 역사, 오름, 2013.

박지향, 클래식 영국사, 김영사, 2012.

홍석민. "영국 자유당의 몰락, 우연인가 필연인가? -계급정치의 한계를 넘어서, 1900-18." 영국연구(20), 2008, pp271-298.

오인영. "영국의 신자유주의와 자유당의 사회개혁입법 ( 1908 - 1914 )." 영국연구(5), 2001,  pp.43-65

민유기. "서양 현대 민주연합 ; 68혁명 전후 프랑스 좌파연합과 공동정부프로그램." 서양사론(109), 2011, pp.172-203.


채인택. ‘두고 보기’로 개혁 관철, 복지국가 기틀 다지다. 중앙SUNDAY. 2013. 4. 28.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006

채인택. 결단·추진력으로 1차대전 이끈 '전쟁 승리자'. 중앙SUNDAY. 2013. 5. 5.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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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ogdrip.net/105755067 - 간도영유권, 대한민국판 제국주의

http://www.dogdrip.net/119427956 - 다이쇼 데모크라시, 대일본제국의 봄 - 1

http://www.dogdrip.net/120026247 - 다이쇼 데모크라시, 대일본제국의 봄 - 2

http://www.dogdrip.net/120486460 - 뮤지컬을 통해 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두 시선

http://www.dogdrip.net/138029898 - 한 노인의 최후변론

http://www.dogdrip.net/138575537 - 자유, 평등, 우애, 그리고 방데

http://www.dogdrip.net/149396330 -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가?

http://www.dogdrip.net/160514756 - 조국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1
http://www.dogdrip.net/160557247 - 조국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2


 

18개의 댓글

2018.04.24
노동당의 왕 코빈이 미소짓습니다.
0
2018.04.24
@문틈
코빈 망한 줄 알았더니 메이가 똥을 싸서 요새 다시 살아난다는 소문이...
0
2018.04.24
@Basileus
이제 곧 여왕에게 뻐큐를 날리는 노동자들의 총리를 보게 될
0
2018.04.24
휘그당 자유당이 빨갱이들한테 먹힌걸 볼때마다 능물이 ㅠㅜ...
0
2018.04.24
@lambnatiom
한잔해 그래도 대처가 있자너?
0
2018.04.24
@Basileus
대처가 낫긴 나았지 폴 택스 같은건 괜찮았음
0
2018.04.25
@lambnatiom
똥가렛 똥처
0
2018.04.24
끝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정당도 인기가 없는 이유가 그런 이유인가.
0
2018.04.24
@시카고
미국은 상황이 다름.
그리고 미국 자유주의정당은 리버테리어니즘 말하는거 아님?
0
2018.04.25
@시카고
그래도 저번 대선때는 0.5프로도 안되던거 지지율 5퍼센트나 먹었음

트럼프만 아니었어도 10프로는 올랐다고 장담함
0
사회자유주의자는 오늘도 광광 웁니다 8ㅂ8
0
2018.04.24
197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우파의 부상은 복지의 확대로 인한 부작용(영국병으로 대표되는)인 재정악화때문이라고 본다. 대처 대신 노동당이 당선되었어도 똑같은 정책을 펼쳤을거임. 최소한 애들 줄 우유를 뺏지는 않았겠지만 비슷하게 욕먹었겠지
0
21세기의 자유노동당은 어떤데? 아직도 병크짓함?
0
2018.04.24
@별거아닌데그만들싸워
자유노동당이 아니라 자유민주당. 걍 군소정당임. 규모로만 치면 우리나라 정의당 포지션.
0
@Basileus
앗 실수했당 ㅋ
0
2018.04.24
@별거아닌데그만들싸워
사실 영국 선거제도가 군소정당에게 불리하다는 문제도 있긴 함.
0
2018.04.25
엥 여기가 유익한 사이트였나
0
2018.04.27
호곡 개꿀잼 ㅊㅊ
영국정치 이야기 앞으로 더 써주시요 아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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