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정의내리기 힘들다는 사실만이 파시즘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든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명제라는 말이 있다. 이는 파시즘이라는 정치철학이 이해하기 힘들며 보다 복잡한 사상적 논의에 기반을 두었음을 의미하는 바다. 한편 파시즘은 20세기에 대부분 종적을 감춘 것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는 파시스트라는 단어를 모욕과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무조건적인 파시즘 찬양은 옳지 않으나 무조건적인 파시즘 배척도 고칠 일이다. 우리는 파시즘을 과거의 잔재일 뿐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끌어내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정치철학의 자양분으로 삼을 필요성이 있어 조금이나마 분석해보고자 한다.
파시즘은 최초에 고도자본주의사회에서 발생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와는 달리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기 때문에 그것의 원초적인 변혁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파시즘적 제도의 도입을 통한 자본주의 사회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개량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경제적으로 파시즘은 개인주의적 고도자본주의단계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단계로의 이행을 요구한다(파시즘이 등장하던 1920~1930년대에 구미 열강이 군사 및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등에 통화 블록을 설치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적 특성을 나타내는 여러 금융과 경제정책을 내놓았음을 그 증거로 삼는다. 뉴딜시대 미국의 AAA법과 근로법 등도 이와 같은 사회적 운동의 산물로써, 민주적인 절차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파시즘과는 다르지만 그 기본적인 의도는 서로 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AAA법은 논란을 거친 끝에 추후 폐기되었으나 그 형태와 목적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미국 농업법과 농민정책의 근본이 되었다.). 1930년대 말의 불경기와 대공황은 파시즘이 이야기하는 사회개혁이 다시금 인기를 얻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 단계에서 기존의 개인주의적 고도자본주의가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유로 파시즘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등장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비단 파시스트뿐이 아니라 대다수의 경제학자와 민중들도 인정했던 것으로, 당시에 대두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것에 있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실현하는 그 방법론은 파시즘 자체가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을 수용한 개별의 정당과 국가가 고안하는 것이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햘마르 샤흐트가 경제에 관한 전권을 획득한 1934년(이 해에 그가 제국경제부장관이 되었다.)이 되면, 독일에서의 파시즘적 경제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국가권력에 의하여 생산성있는 사회적 자원과 비생산적인 사회적 자원을 구분하여 전자는 금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제도의 혜택을 제공하고, 후자는 지원을 일절 중지함과 더불어 여러 제약, 심지어는 폭력까지 동원하여 금절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비상권한을 이용해 살인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치솟는 실업률을 통제하는 한편, 극단적인 보호무역을 실시해 철저히 자국 위주의 관세장벽을 적용하여 무역수지를 흑자로 전환하였다(지금에 와서는 경제제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러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불사위협을 통해 무역에서의 불만을 마음대로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나치당이 보여주었던 호전성은 경제적인 이유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한편 저 유명한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저서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에서 케네디는 이 당시 영국이 독일의 전쟁불사위협이 두려워 초기에 강경대응을 하지 못했던 점이 독일이 차차 힘을 키워 기어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역량을 갖추게 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파시즘적 경제정책은 비협조적인 기업가를 탄압하거나 경제 분야에서 민간 분야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등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였으나 동시에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여 독일이 아우토반 건설, 주택건설, 황무지 개간, 산림녹화, 무엇보다 재군비가 가능하게 한 원동력을 제공했다.
파시즘은 단순히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모든 계급을 하나의 국체(國體)에 속한 일부라고 인식하고 서로 협동하여 국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협동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공산주의에서는 마르크스-레닌 이론에 입각하여 계급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며, 이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절대적인 선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의한 독재를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정치형태라고 여긴다. 이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소련은 평의회(소비에트)를 설치하여 인민대중의 의견을 취합하게끔 했으며, 평의회에서 상등평의회로, 상등평의회에서 대평의회로 의견을 전달하는 식으로 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위적 혁명주체인 당 중앙에서 이를 수렴하게끔 하였다. 유명한 구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이 같은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후일 스탈린주의자들은 여기에 당 중앙과 수령의 무오류성이라는 명제를 첨언하였다.). 반면 파시즘은 계급투쟁 자체를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라고 인식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은 본질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한 자본의 형태와 종류에 따라 분화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간의 협동만이 국익을 창출하고 사회적 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파악하며, 이러한 협동의 방식으로는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합리적 의견수렴과정을 상정했다. 또한 파시즘은 국가는 이러한 의견수렴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권리와 의무를 지니며 강력한 국가권력을 행사하여 비협조적인 일체의 행위(기업의 결정사항 불이행, 기업가의 노동자에 대한 폭력 행사, 결정사항에 어긋나는 노동자들의 파업, 태업 행위 등)를 단속하고 응징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시즘 이론에서 계급간 협조와 노동조합에 대한 국가의 지원 및 의견수렴과정의 개입과 간섭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극단적으로 국가권력은 이것을 위하여 폭력적인 수단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 관점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대등하여 동일한 권위를 가지며,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마치 공산주의와도 같이 파시즘 이론은 주요 생산시설(공장 등)과 생산수단(기술 등)의 국유화에 집착하는데, 이것을 통해 자본가가 자칫 노동자보다 우위에 서 사회에서의 발언권이 비대해지는 상황을 예방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본가가 정치권과 결탁하여 기존 정치기구를 묵살하고 국정운영에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던 19세기 말에 대한 반성으로써, 국가의 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파시즘적 사고를 보존코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치당의 관료들은 도덕적 해이로 인하여 원래의 방침에서 벗어나 기업가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이나 금전적 거래를 통해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전쟁기의 나치당이 보여준 사치향락을 고려하면 이미 당시의 나치당은 제대로 된 파시즘적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파시즘의 정치 및 경제적인 지향점은 강단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파시즘 이론에서 수용한 것이 많다. 실제의 파시즘은 여기에 각 국가별의 특색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 개인에 대한 숭배, 민족주의적 해석이 혼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래서 일부 사학자들은 '파시즘이라는 공통된 정치철학 사조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는 파시즘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각각의 국가상황과 특성을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또한 서술한 바와 같이, 원시 파시즘은 사회주의적인 내용이 굉장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 근본적인 대명제를 제외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공산주의의 그것과 유사한 경우도 많아 모르는 이들의 오해를 살 정도이다. 이러한 이론적 원시 파시즘을 '좌경화된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며, 대기업과 자본가, 지주(융커)들의 입김이 거세진 1930년대 중후반의 나치당이 주창한 반공적, 친자본주의적 색채를 지닌 변질된 파시즘을 '극우 파시즘'이라고 세분하기도 한다. 나치당의 당사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이러한 원론적인 좌경화 파시즘이 나치당의 주류였던 것은 히틀러가 뮌헨 봉기 이후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정계를 떠나있던 1920년대 중반까지이며 그가 복권한 1920년대 후반기에는 급작스러운 우선회가 나타나 극우적 파시즘이 당의 주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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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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