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백합 귀족

 바냐는 흑발의 아름답고 한참 성숙해가는 빛나는 시기의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그녀가 항상 불만으로 가득차 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다소 짜증섞인 얼굴로 항상 먼 곳을 보며 생각하는 건 미녀의 양식미 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비록 시골이지만 영지를 가진 귀족의 집안 사람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분명하게 인생에 대해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배불러 터진 이야기지만, 바냐는 이런 시골의 귀족인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고 있지 않다. 이런 시골 귀족이란 것은 왕국의 수도에 사는 진짜 귀족들에 비하면 평민이나 다름 없는 보잘 것 없는 지위에 불과 하다. 바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런 지위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이런 지위로는 베라가 있는 왕궁에 발도 딛을 수가 없다.

 그녀가 좋아하는 상대가 여왕 후보 였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유년 시절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어릴 적 항상 같이 놀던 친구 베라가 왕족이었다니 그건 손 댈 수 없다. 바냐는 실연 아닌 실연으로 몇 날을 방안에 쳐박혀 울었다. 베라가 바냐의 영지를 떠나는 날도 우느라 배웅 나가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 그러는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상냥한 어른들은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린아이 일 때야 말로 계급을 떠나서 인간과 인간이 어울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라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한 그런 사실을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왕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 부터 바냐는 베라에게 푹 빠졌다. 그렇게 예쁜 붉은 머리 여자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시골 영지의 허접한 장미 정원이 그녀가 있는 것 만으로 화려한 고대의 정원 같이 반짝였다. 햇빛은 베라를 반짝이기 위해서 만들어 졌고 바람은 베라의 향기를 퍼트리기 위해서 꽃들은 베라를 받들어 주기 위해서 존재했다. 바냐는 분명하게 사랑이라고 느꼈다. 상대가 여자면 또 어떤가? 아무도 베라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베라가 여왕 후보란 사실을 조금만 늦게 알았어도 바냐의 목은 차가운 처형장에 있었을 것이다. 베라의 침실에 들어가 덮쳤을 테니까.

 그런 음흉한 바냐와 달리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닌 베라의 편지가 바냐의 책상에 쌓였다.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마지막에 마중 나오지 않았던 건 베라는 너무 슬퍼.]
 [그렇게 딱딱하게 대답하지마, 난 아직 여왕도 아니고 우린 어릴 적 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잖아.]

 베라는 모르겠지만 바냐는 그녀를 그렇게 까지 여왕으로 대접하고 있지 않았다. 허구한날 편지를 붙잡고 코를 맡대 킁킁대면서 혹시나 베라의 향이 날까, 베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베라와 함께 놀던 시절의 무방비한 베라의 모습을 끝도 없이 망상하며 자위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여왕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바탕 하고 나면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편지를 적시는 것이다.

 "난 어째서 이런 시골에 쳐박힌 시골 귀족인 건데……. 베라는 왜 여왕인 건데…."
  
 부모님은 베라가 떠난 이후로 바냐가 너무 슬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통적 세계관에 빗대어 생각해 보건대 바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친구가 떠나 생긴 슬픔은 남자로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바냐의 나이야 말로 남자를 만날 최적의 아름다운 시기라고 생각했다.
 "싫어요! 저는 결혼 따위 하지 않을 거니까!"
 바냐가 저항했다. 친절하고 상냥한 부모님은 자신도 어릴 적에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방에서 조용히 눈물을 닦던 시절을 떠올려 바냐를 따듯하게 설득했다. 바냐는 그러면 또 참을 수 없어져서 있는 힘껏 반항하고 방을 나가서 베라를 떠올려 한바탕 하는 것이었다. 사춘기는 분명히 사춘기다. 
 "이런 시골 귀족 따위 저는 싫다구요!"
 바냐는 아버지의 출신 성분을 비난하느라 바빴다. 마음씨 고운 아버지는 봉건적 세계관에 빗대어 생각햅보건대 바냐는 신분 상승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건 곰곰히 생각해 보건대 여태 남자를 만나보라는 설득을 거절한 이유와도 맞닿은 것 같았다. 시골의 남자들은 시시하며 신분상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테니까. 아버지는 흐뭇하게 생각했다. 우리 딸이 꿈이 꽤나 크다고. 아버지로서 딸의 꿈을 지지하겠다고.
 
 어느날 아버지는 바냐를 앉혀 놓고 제안을 했다. 아버지라면 이제 대화도 하기 싫은 사춘기의 여자아이는 흥흥 대면서 듣지 않을 참이었다.
 "혹시 왕자님이 외국의 군사 유학을 끝내고 귀국 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니?"
 "몰라요, 그런 거 알게 뭐에요."
 "그 왕자님이 결혼 상대를 공개적으로 찾는다고 하던데, 너도 가서 입후보 해보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남자? 남자라면 소름이 끼친다.
 "제가……, 아니."
 바냐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왕궁에 들어갈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저기 혹시 왕궁에 들어 갈 수 있는 건가요?"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 것이 기뻤다.
 "당연하지, 왕궁이 궁금해?"
 바냐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가겠어요!"
 그곳이라면 베라를 만날 기회가 잡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냐는 아버지에게 왕궁에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바냐가 남자에게 흥미를 갖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야심이 있는 것이 기특하기도 해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도 베라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바냐는 굳이 답장하지 않았다. 몸으로 답장해주고 싶었으니까.

1개의 댓글

2018.03.13
호곡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조회 수
32479 [그림] 걸판 로즈힙 그려옴 UHwa 0 26 분 전 8
32478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나인즈 전용 프랑크스 9식 5 뿔난용 3 22 시간 전 58
32477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나인즈 전용 프랑크스 9식(스케치) 2 뿔난용 2 1 일 전 34
32476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양산형 프랑크스 3 뿔난용 3 2 일 전 131
32475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양산형 프랑크스(스케치) 뿔난용 2 2 일 전 63
32474 [그림] 이터널리턴 3 랄부 2 2 일 전 116
32473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스트렐리치아 5 뿔난용 3 3 일 전 69
32472 [그림] 브로냐에요 17 2049 12 4 일 전 205
32471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스트렐리치아(스케치) 2 뿔난용 2 4 일 전 81
32470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클로로피츠 3 뿔난용 2 5 일 전 94
32469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클로로피츠(스케치) 뿔난용 2 5 일 전 93
32468 [그림] 이터널리턴 4 랄부 5 6 일 전 149
32467 [그림] 몬헌 진오우거 7 털박이협회원 7 6 일 전 172
32466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델피니움 2 뿔난용 4 6 일 전 100
32465 [그림] 램리썰 3 구파 5 7 일 전 145
32464 [그림] 이터널리턴 5 랄부 6 7 일 전 156
32463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델피니움(스케치) 2 뿔난용 3 7 일 전 99
32462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아르젠티아 4 뿔난용 3 8 일 전 135
32461 [그림] 달링 인 더 프랑키스-아르젠티아(스케치) 뿔난용 2 9 일 전 107
32460 [그림] 벤티 8 2049 11 9 일 전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