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나는 시를 쓸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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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는 오브제를 선택하고, 시어를 고르고, 감정을 실어야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씨, 나는 감정을 실을 줄 몰라서 시 쓰기를 못해요. 가장 중요한 일이, 그러니까 시를 시로 만드는 요점은 오브제와 시어를 꿰고 알맞은 자리에 놓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떤 감정이 그 안에 진실로 담기느냐에 있잖아요? 그런데 시에 담길만큼 깊은 감정을 갖는 걸 두려워해요. 감정이 풍부해지고, 깊어지는 걸 강박적으로 두려워한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래요. 일종의, 그러니까 심리적인… 그 말이 뭐였죠?… 아,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거죠. 분명히 제게도 시를 쓰기에 좋은 감정이 찾아왔던 때가 있긴 한데요, 발갛게 익어 타거나 혹은 푸르게 멍들어 가라앉은 마음을 가진 때가 있긴 있어요, 짧게나마. 하지만 그 감정을 제대로 느끼거나 글로 담아내기 전에 나는 나로 돌아와 버렸어요. 아, '나'라는 말은 좀 이상하네요. 정중동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짝사랑에 들끓을 때 나는 내 마음이 보일러실 같다고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죠. 미안해요. 표현이 조잡하죠? 여하튼 그렇게 말했지만 사랑은 반지성이라고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열심히 침을 내뱉고 내 마음을 자꾸만 데우려 드는 것들을 쳐냈죠. 마음의 불씨에 자꾸만 장작을 퍼 나르는 그 사람의 모습, 습관, 취향, 몇 마디 말… 계속 그러지 말라고 다독였어요. 그 거짓된 마음에서 시어를 피어 올릴 수나, 어디 있겠어요? 안 될 일이지. 튀어나가려는 것을 계속 붙잡았죠. 아니라고, 그 마음은 가지면 안 된다고- 그러지 말자고.
그런데 운이 좋아서 연애를 하긴 했어요. 그리고 곧 이별을 했죠. 아니, 당했나? 짝사랑과는 정반대의 마음인 이별의 별에서도 나는 되돌아가고자 애썼어요. 중립병, 중립강박… 요즈음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정치용어로 표현하면 그렇게 볼 수 있겠죠. 관성을 지우지 않고 또 같은 짓을 해버렸죠. 이별의 순간은 무척 신기했어요. 그 친구는 한참 껌을 씹다 이제 만나지 말자 하는 말을 뱉었죠. (그 말이 어려웠는지 쉬웠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만 만나자는 말을 들으니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마음 속 글줄이 무색하게도 혈관에 차가운 피가 잠깐 흐르고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죠. 아주 짧은 순간에 머리가 차가워졌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말을 했어요. '그래, 그럴 것 같더라' 하고 말예요. 그리고 말없이… 말없이… 무언가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기다린 것은 찾아오지 않았고, 그 사람은 10초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나서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사라졌죠. 나는 울고 싶었는데, 울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을 삼키고 생각했었죠. 집에 가서 울어야겠다고. 감정이 그토록 요동치는 걸 처음 겪어보는데도, 나는 어리석게도 그냥 집에 들어가서 울어야지, 해버린 거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한숨 잠을 자고 그 새벽 방에 기어들어와서 나는 울지 못했어요. 울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안 되더군요. 그냥 렌즈를 긁어내자 안구가 건조하고 쓰라렸어요. 그게 다였어요.
이 따위 마음들은 분명히 시적 상황이지만, 마음이 그토록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서 길게 잡아본 적이 없으니 저는 영영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까봐요. 멋진 시인들은 이런 한 두 가지의 충격적인 일을 두고 천 가지 말을 쏟아내기도 하던데, 저는 그 충격에 내가 부숴질까 무서워서 감정에 고무줄을 달아 붙잡아두기만 하죠. 실비아 플라스처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릴까봐 무서워한다니, 좀 웃기네요."

A는 당신이 만나준다면 그래도, 라는 말은 주워삼켰다.

10개의 댓글

2017.12.16
본인이 쓴거야?
0
2017.12.16
@착불
ㅇㅇ...
0
2017.12.16
@파란얼굴
재밌게 잘 읽었어.글은 그냥 취미로 하는거?
0
2017.12.16
@착불
응 취미긴 해 그냥 아 쓰고 싶다 하면 쓰는거라
문창 학부생이야
0
2017.12.16
@파란얼굴
[삭제 되었습니다]
2017.12.16
@착불
그날 정치판에서 그 단어를 봤나봐요. 강박에 가까운 중립, 아닌 척 애쓰다 죽쑤는 마음.
저런 글은 그냥 쓰고 싶을 때 쓰는 거라 계획 없는 단어들이 스밀 때가 있죵
0
2017.12.16
@착불
존나 쓰고 보니까 뭔가 번역체 같아서 ㅈ같네. 어쨌든 그냥 개인적인 감상이구 혹시 개드립말고 너 글 같은거 올리는 곳 있으면 링크 주라.너가 쓴글들 더 보고싶어. 작가 해라 꼭. 책 내가 5권 사줌.
0
2017.12.16
@착불
음 격찬 감사드려요...
소설 등은 잘 안 쓰고 잡문 쓰는 용도로 블로그 하고 있어여..
blog.naver.com/guicyana
0
2017.12.19
널 만났으면 분명 사랑하게 됐을거야
0
2017.12.22
ㅇㄷ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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