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옥수수가 아니란 걸 너도 알아준다면

 

 언제부턴가 왁자지껄한 술자리에 앉아있는 게 힘든 성격이 되었다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앞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안 들리고또 요란한 멜로디로 게임이라도 하는 날엔 집으로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나도 그렇게 어울려 놀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다나는 술의 힘을 빌린 광란의 밤보다 말의 힘을 빌려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밤을 더 좋아했다그냥 소소하게 모여 맥주잔 기울이면서 얘기 나누다보면 그 날 밤만큼은 시간 가는 것이 아쉬웠다안도현 시인이 본인의 책에서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술을 마시면서 당신은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함께 마시는 사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내가 바라는 술자리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술기운 삼아 본인들의 속내도 조금씩 털어놓게 된다그러나 가장 흥미로워야 할 그 시간에 나는 알게 모르게 긴장을 좀 한다나는 쉽게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말 저변에 자기비하의 기조가 깔려있는 편이어서내가 꺼내놓는 얘기들에는 으레 그러한 분위기가 묻어나오기 때문이다예를 들자면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잘 안 된다느니 하면서 자책하는 얘기 같은 것들그러면 몇몇의 예민한 친구들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꼬집는다. “넌 가만 보면 너무 자신감이 없어뭘 그렇게 재고 그래그냥 질러남자답게남자는 자신감이야.” 참 맞는 말이지만 생각해보니 난 왜 이러나 싶고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내 모습에서 자신감 결여가 정말로 큰 문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그러나 친구들의 충고를 듣다 보면 내 반골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와 맘속으로 혼자 이렇게 뇌까리게 된다나도 가끔씩 꽤 괜찮은 구석이 있다는 거 안다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쓰레기같은 인간도 아니지그런데닭들이 그걸 모르잖아난 옥수수가 아닌 걸난 옥수수가 아니야.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감성있는 척 술자리 얘기 하다가 왜 갑자기 옥수수 털어버리고 싶게 헛소리냐 싶겠으나사실 자신감 결핍과 옥수수는 꽤나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 옥수수와 나에는 정신병원에 관한 농담이 하나 실려있다실제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쓰는 농담으로동유럽 쪽에서 많이 알려진 얘기이다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무서워 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그러자 환자는 말했다.

"글쎄저야 알지요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썰렁하지만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이 일화에서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여기서 왜 치료에 실패하게 됐는지가 의미심장하다일단 제일 처음 환자는 자신의 존재를 터무니없이 인식하고 있는 상태다버젓이 동물이면서 자기를 식물이라고 믿고 있다그리하여 의사는 환자의 자기 인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무지하게 애를 썼을 것이다거울에 환자의 모습을 비춰주고그 옆에 옥수수의 모습도 비춰주고또 자기가 옥수수와는 달리 말도 하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결국 환자는 자신과 옥수수의 근본적인 차이점내가 옥수수였다면 절대로 겪을 수 없었던 과거의 기억과 대면하고 지긋지긋한 망상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정립된 자기 인식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닭이다닭은 내가 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내가 옥수수가 아니란 것을 닭은 모른다닭 앞에서 나는 다시 옥수수다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믿음으로 닭에게 항변해본다.

난 옥수수가 아니야말도 할 줄 알고노래도 부를 줄 알고걸어다니기도 해나도 가끔씩 꽤 괜찮은 구석이 있어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쓰레기같지도 않아.”

그러나 닭은 말한다.

넌 가만 보면 너무 자신감이 없어넌 옥수수야그냥 질러남자답게남자는 자신감이야.”

 

 ‘자신감을 한자 사전에 검색해보니 어떤 일에 대()하여 뜻한 대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스스로의 능력(能力)을 믿는 굳센 마음이라고 나온다나는 이 뜻풀이에서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스스로남이 아닌 자기만의 의지로혼자만의 힘으로 나를 믿어야 한다는 말우리는 과연 닭이 쫓아와도 옥수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나보다 조금만 더 자신감에 차있다면 술자리에 앉아있는 닭쯤이야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나 옥수수 아니라니까!” 라고 외치고 맥주 한 잔 뱃속에 털어 넣으면 그만이다하지만 닭들은 술자리 앞에만 앉아있는 게 아니다우리는 내 진심을 몰라주는 짝사랑 앞에서 옥수수가 아닌 매력적인 이성이기 위해 애쓰고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자기소개서를 쓰며 대학에 내가 옥수수가 아님을 증명하고입사 면접에서 왜 당신은 옥수수냐는 질문에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한다나는 분명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며 옥수수가 아님을 알지만 계속되는 철벽과 불합격 통보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짝남/짝녀대학대기업의 모습이 아니어도 내가 옥수수가 아니란 걸 알아주지 않는 닭들은 얼마든지 내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

 

 내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는 내 자신감을 지켜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그런 내게 많은 닭들이 자신감을 가지라고나처럼 닭이 되라고 주문한다나도 가끔은 꿈꾼다어깨 축 처진 사람들에게 조금은 안타까움도 느끼면서 진심 어린 충고도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어떨까지금보다 좋기야 할 것이다그렇지만 닭들에게 반대로 묻고 싶다닭이길 포기해줄 순 없느냐고오히려 닭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옥수수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고물론 모든 짝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니듯 모두가 나를 옥수수라 생각하지 않는그런 닭 한 마리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다그렇지만 닭이 되려고 애쓰는 나를 꿈꾸긴 싫다내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닭이 되는 것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닭이 되지 않아도 나는 옥수수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에 찬 얼굴로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다스스로 성취한 자신감은 과연 뽐낼만하다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고누구에게라도 호감을 살 수 있을테니 그만한 장점이 또 있을까 싶다그렇지만 난 닭이 될 수 없을 것이다이미 옥수수였던 내가 닭이 된다는 건 부끄러운 짓이다그렇다고 다시 옥수수가 될 것인가그것도 아니다나는 내가 옥수수가 아니란 걸 안다나는 그저 옥수수 옆에서 자라는 고구마로 살고 싶다옥수수 옆 고구마로 살면서 닭들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많은 옥수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네가 옥수수가 아니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너는 옥수수가 아니다.

너는 옥수수가 아니다.

너는 옥수수가 아니다.

너는 옥수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