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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알쓸신잡 강희제

강희제 1.jpg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의 황제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편에 속합니다. 우선 업적만 해도 삼번의 난 진압, 대만 정복, 준가르 격파, 티베트 복속, 러시아와 국경분쟁 후 네르친스크 조약 등등…… 워낙에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고, 제위 기간도 무려 61년이나 되어 중국 역사상 최대 기간을 자랑하는데다, 또 아들들이 다툼과 후계자 싸움이 딱 드라마 소재로도 적절한 지라 2차 창작물에도 자주 얼굴을 들이매는 유명 인사 중에 한명입니다.


 
그런데 강희제라는 인물의 '역사적인' 업적은 둘째로 치고, 이 사람의 개인적인 면모를 살펴 보아도 상당히 재밌는 점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근대의 왕조인 청나라의 군주이니 고대의 군주들에게는 찾기 힘든 사생활적인 부분에 대한 기록도 많은 편인데, 일단 절대왕권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의 군주다 보니 칭찬할만한 부분에 대해서 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 궁에서 일하던 서양인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도 있고 하여, 상당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시각을 볼 수가 있는데, 
 

다만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은, 강희제를 이상적 군주로 그리고 이에 대비해서 자신들 군주에 대한 비판 혹은 충고 같은 의도가 있는 점도 있긴 합니다.


 
여하간에 개중에 재밌는 부분들을 말하자면 이런 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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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주왕 강희제


 
정확히 말하자면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 코드 입니다만..
만력제 시절에 마테오 리치가 건반 악기 였던 클리비코를 명나라 황제에게 선물한적이 있지만, 이를 과연 쳐본 수준을 넘어 '연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 강희제가 최초로 이를 연주해본 황제가 아닐까 합니다.

강희제는 단순히 피아노를 재미삼아 툭툭 쳐본게 아니라, 그 연주법을 배우고 음표를 보면서 '연주' 했습니다.
 
 
강희제 페드리니.jpg
강희제에게 작곡 등을 가르친 페드리니
2. 작곡왕 강희제


 
강희제는 유럽의 음악이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고, 페레이라 라는 신부에게 직접 음악의 이론적인 강의를 들었고, 서양의 악기를 수집하는데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또, 오르간의 기계장치 작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급기야 작곡까지 하기도 했는데, 직접 기독교 사제와 하프시 코드에 앉아 작곡한 음악을 한 절씩 연주해보고, 그 뒤에 이에 대한 반응을 듣고, 다시 수정을 하고 연주해 본적도 있습니다.
 
 
강희제 계산기.jpg

강희제가 수학 공부를 할때 사용한 계산기

 

 

3. 수학왕 강희제


강희제는 서구를 좀 더 잘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직접 예수회 사제들에게 부탁해서 '과외 수업' 을 받았습니다. 


 
대체로 강희제가 가장 좋아한 서양 학문은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계산법이나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공부에 많이 흥미를 느꼈는데, 황제의 과중한 업무 중에 잠시 짬이 날떄도 직접 기하 도형을 그리고, 연산을 훈련하,고 수학 기구 사용을 연습하면서 여가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황제의 체면도 상관없이 바로 물어보았습니디.

 

강희제는 또 바티칸의 "실용과 이론 기하학"을 공부하고 그것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차이점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반년도 되지 않아 그는 기본적인 기하 지식을 갖추었음은 물론이고, 몇몇 기하 도형의 정리와 증명 과정은 술술 말 할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능숙하게 대수를 이용해 연산을 했고, 또 대수표를 이용해 삼각형을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자신이 "기하학원본"을 적어도 스무 번은 읽었다고 말했으며, 두 세 시간 강의를 들은 후엔 혼자서 그것을 복습하는 열의까지 보였습니다.
 
 
4. 농사왕 강희제


 
강희제는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는 퍼포먼스를 즐겨 했는데, 실제로도 농사에 관련된 책을 여러개 읽고, 서한의 농업 정책을 줄줄히 암송할수도 있었습니다. 강희제가 직접 농사를 지을때, 하루는 비가 많이 오자 걱정이 되어 아침부터 오후 5시가 넘을때까지 황실 내의 논에서 시간을 보내는 적이 있었을 정도로 은근한 취미생활이기도 하였습니다. 


 
삼번의 난이 진압된 1681년 6월 말, 강희제는 경작에 열중하다가 우연히 이상한 벼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강희제가 발견한 벼는 다른 벼보다 키도 크고, 이삭이 아주 잘 익은 벼였습니다.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강희는 이것이 혹시 새로운 벼의 품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여 이씨를 받아 보관해 두었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논에 심어보았습니다. 과연 6월이 되자 벼는 가장 먼저 익었고, 이삭도 모두 튼실했습니다. 강희는 이것이 농업생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경작면적을 늘려보면서 10여년 가까이 시범 제배를 하면서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그리하여 10여년 후인 1691년 4월, 강희는 몇몇 대신들을 불러 이를 소개했고, 조생벼의 종자를 외부에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의 논에서 난 벼임으로, 이는 어도(御稻)라고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강희는 어도 재배에 성공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은 식사 때마다 천하의 백성들과 음식을 나눌 것이다."


 
 강희 54년부터 강남 지방에서 어도가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벼 경작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이 이를 담당하자 확실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소주와 강녕 일대에서 벼가 익으려면 145일이 걸렸지만, 어도는 100일 남짓이면 수확이 가능했습니다. 잘만 하면 수확량도 50% 가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결론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퍼진 어도는 이모작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는데, 유명한 청나라의 소설 홍루몽에서도 어도에 관한 내용이 나올 정도입니다.
 
 
 
강희제 머멋.jpg

머멋 떼들

 

 

5. 축산왕 강희제

 

 

북방에 있는 오이라트 준가르부의 수장 가르단이 이끄는 준가르와 군사적 긴장 관계가 극심했고, 준가르와 청나라의 결정적인 전투였던 차오모드 전투 당시에는 강희제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험한 북방으로 진군하기도 했습니다.



 친정을 나선 강희제는 가르단의 도주 가능성, 식량의 부족, 사막을 건너는 원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상당히 심리적으로 몰려있었습니다. 원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치닿았을 때는, 심지어 강희제 본인조차 양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수도에 있는 태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강희제의 편지 등에는 주변 풍경등에 대한 집요한 관찰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물론 군대가 통과하고 나가는 부분에 대한 관심이야 총사령관으로는 당연한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그 상황에서 조차 풀의 종류, 여러 수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막 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기록을 했고, 게중에는 심지어 마멋 굴의 수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중차대한 일대 전투를, 그것도 식량 부족 사태까지 겪으며 앞에 두고도..
 
 1697년, 강희제와 가르단의 지리한 대립은 마침내 강희제의 완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해 3월 강희제는 하미의 이슬람 교도로부터 가르단의 가족들을 압송 받게 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자, 이것은 대 준가르 전쟁에 있어 강희제의 성공을 과시할 수 있는 굉장한 성과 중에 하나 였습니다. 적 수괴의 친가족을 사로잡은 일이니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큰 성과를 베이징의 태자에게 강희제가 이야기하며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미의 이슬람교도들이 가르단 반역도들을 압송하면서 함께 보내준 토산물 중에서 태양볕에 말린 참외가 제일 맛있었다. 지금 답신과 함께 보내주는데, 그 먹는 방법을 모를까 염려되어 특별히 적어 보낸다.


 
 자, 보거라. 일단 먼저 말린 참외를 찬 물이나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잠깐 담그면 참외가 말랑말랑 해진다. 
 

 그럼 이 상태로 식혀서 먹어도 되지만, 뜨거운 채로 먹어도 되는데 그 맛이 아주 신선하고 참외가 우러난 물은 꿀물에 말린 복숭아를 탄 것과 비슷하다.
 

 참외가 차지하고 남은 빈 곳이 있을텐데, 그 곳에는 포도를 넣으면 된다. 이 사실을 여러 비들에게 알려 주어라. 
 

 물건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마음은 먼 곳에서 전하는 것이다. 부디 비웃지는 말아주거라."


 
 지난 수년간 청나라를 곤혹스럽게 했던 대적 가르단을 격파하고, 그 가족을 압송받으려고 하는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강희제 편지에 쓴 내용은 '포로를 데려온 저쪽에서 가져온 참외를 먹어 보니 맛있었고 아주 인상에 남더라. 너희들도 꼭 먹어봐라. 궁궐의 비들에게도 레세피를 알려줘라.' 라는 내용이었고, 황제가 참외를 보내면서 직접 그 조리법을 상세히 작성해서 베이징으로 보냈던 겁니다. 그런 내용을 쓴 강희제 조차 쓰고 나니 무안한지 마지막에 비웃지는 말라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6.  세스코왕 강희제


메뚜기를 예전에 달리 부르던 말로 풀무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뚜기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수 없어, 그로 발생하는 재난은 홍수와 가뭄 바로 다음 수준이었습니다. 강희는 메뚜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직접 고대부터 당대까지 메뚜기의 피해등을 다룬 책들을 뒤져 모두 소개하는 한편, 포황설(捕蝗說)이라는 저서에서 메뚜기의 특징과 이에 맞는 포획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메뚜기 퇴치에 관한 학술 논문 수준이라고 하며, 탁상공론식의 내용은 전혀 없고 구체적인 포획방법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강희는 대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이 풀무치의 생장과정을 연구해 보니, 풀무치가 알을 낳기 전에 날씨가 추워지면 풀무치가 모두 동사하여 이듬해에도 다시 생겨나지 않지만, 이미 알을 낳고 난 후에 날씨가 추워치면 풀무치는 동사 해도 그 알이 남아 다음 해에 다시 성충이 되어 피해를 입힌다오."
 

 그리하여 겨울이 늦게 온 이번 해에는, 서둘러 논밭을 갈아버려 풀무치 알 들을 땅속 깊이 묻어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1712년 여러 지역에서 메뚜기의 피해가 보고되자, 강희는 직접 메뚜기 퇴치법을 지시합니다.


 
 "풀무치가 남쪽을 향해 날면 앞부분이 날아오르고, 뒷부분은 그저 따라서 날아오르며, 무리가 흩어지지 않고, 죽을 때에도 서로 붙어서 함께 죽으려고 한다. 따라서 풀무치를 잡을 때에는 뒤에서 따라가면 잡을 수 없고, 어느 쪽에서 날아오르는지 잘 살펴 앞쪽에서 덮쳐서 잡아야 한다."


 
 실제로 지시대로 수행을 하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자만하지 않고 메뚜기는 1년에 두 번 산란을 하기 때문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해도 그 알들이 성충이 되어 나타날 수 있음으로 극히 조심하고 메뚜기 알을 박멸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강희제 사냥.jpg


7. 사냥왕 강희제

학문을 읽혀 스스로를 다스리는것에 큰 관심을 가진 강희 였지만, 무예를 읽히는데도 열성이었습니다. 그의 최대의 취미는 바로 사냥이었고, 활쏘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오른손과 왼손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으며 말 위에서도 활을 아주 잘 쏘았고, 말이 달릴 때에도 자유자재로 무기를 구사했습니다. 심지어 전통적인 중국의 무기가 아니라 서양의 무기도 제법 잘 소화내었습니다.


강희는 사냥을 매우 열성적으로 했고, 이를 군사훈련과 연결이 시키는 동시에, 황자들의 재주를 살펴보는 기회로까지 사용했습니다. 강희는 사냥 도중에는 중원의 황제로 지낼 때와는 달리 매우 격식이 없는 동작을 취했는데, 잡은 물고기나 사냥감으로 간단하게 먹는가 하면, 말을 타고 자신을 발견해도 내릴 필요가 없었으며, 말이나 양의 젖을 발효시켜 이를 마시면서 병사들 사이로 들어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고 술을 따라줄 정도였습니다.


 
8. 요리왕 강희제

강희제는 사냥을 나섰을때, 예수회 선교사들도 대동하고 떠났습니다. 선교사 제르비용은 강희제의 사냥을 따라 나섰는데, 언젠가는 강희제가 직접 잡은 사냥감을 요리해서 자신에게 주었다고 기록했습니다.


 

9. 회화왕 강희제
 

강희제는 라틴어를 선교사들에게 배웠습니다. 또한 7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중국 14개 성의 악센트를 구별 가능 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도 고향이 어디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희제 사냥 2.jpg


10. 전쟁왕 강희제

강희제는 삼번의 난 진압에 있어서, 비록 신하들의 반대로 현장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전역을 주관하는 총사령관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준가르 원정에서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사막으로 출정하여 가르단을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1. 장수왕 강희제

강희제는 61년의 치세로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제위기간을 거쳤으며, 평소에도 폭식등을 하지 않고 건강에 관심을 가지면서 체력을 유지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강희제가 상당히 잘생긴 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강희제의 머리가 희끗희끗 해졌을 무렵, 누군가가 머리와 수염이 검게 된다는 약을 바쳤지만 강희제는 웃으면서 거절했습니다.
 

"역대 제왕들 중에 수염이 흰 사람이 없었지. 그러나 짐은 오래 살아 이제 반백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12. 정력왕 강희제

강희제는 영아 때 사망한 자식들을 빼고도 아들만 24명 이상을 보았고, 딸까지 포함하면 자식들이 엄청난 숫자에 이릅니다. 

 
13. 검소왕 강희제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국가였지만, 강희제 본인은 대단히 검소한 생활 습관을 유지했습니다. 선교사 조아심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하는 보고에서 강희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할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두 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곷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 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작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 마포로 만든 홑 마고자)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 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14. 인권왕 강희제

1668년 - 35명
1706년 - 25명
1712년 - 32명
1715년 - 15명
 

강희제 시기 전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이 정도 숫자였습니다. 강희제는 자신이 어지간하면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도, 목숨은 구해주기 위해서 판결 기록을 여러번 꼼꼼히 읽는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강희제는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되는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아프지 않도록 의원을 보내주고, 죄수들이 덥지 않도록 감옥을 시원한 상태로 유지하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있습니다.


 
15. 배려왕 강희제

앞서 말했듯이 강희제는 사냥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하지만 사냥하기는 좋으나 물을 얻기는 어려운곳과, 물을 얻고 야영하기는 좋으나 사냥하기에는 그저 그런곳이 있다면, 일부러 후자를 택했습니다. 병사들의 고생을 줄이려던 것입니다. 

또, 언제는 밖에서 식사할때 일하는 사람의 실수로 밥 대신 고기만 온 적이 있었는데, 주위에서 처벌을 내리려고 하자 강희제는 그만두게 하고는 고기만 먹었습니다. 또, 준가르로 원정을 떠났을 무렵 천연두에 면역이 약한 몽골 어린이들이 이에 힘들어하자, 불쌍하게 생각해서 기초적인 방식의 예방 접종(환자의 귀에서 살짝 긁어내거나 상처를 이용해서 약하게 천연두를 앓게 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16. 포용왕 강희제

 강희는 정호와 정이, 주희의 성리학을 가장 뛰어난 가르침으로 받들며, 주희와 공맹을 최대한 연결시켜 공자와 주희를 함께 숭배했고, 경서에 주석을 달고 보급한 주희의 공적을 치하하고, 성리학을 경세치용의 수단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웅사이, 이광지 등 제국 최고의 학자들에게 관련된 책을 편찬하도록 하고, 평생도록 유가 경전을 탐독했습니다. 그러나, 강희는 스스로 성리학자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리학 경서들은 입신의 근본이니, 읽지 않으면 아니 되고, 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성리학은 스스로의 사상만 옳다고 생각하니, 이것은 폐단이다. 고서에서는 무턱대고 믿고 따를 수 없는 점들이 있다. 경서를 읽으면서도, 스스로의 주관을 뚜렷하게 세워야 한다."

 

17. 종교왕 강희제

강희제 시기, 바티칸에서는 중국내 기독교도들이 제사 등의 '우상숭배'를 벌이는 점에 대해 지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래서 존경받지만, 행복이나 벼슬, 재물을 얻으려고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는 않는다. 조상숭배는 사랑과 추모의 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조상의 은덕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한다고 믿진 않는다." 

"우리가 공자를 존경하는 이유는 덕을 숭항한 그의 원칙과 교육체계,윗사람과 조상을 공경하라는 가르침 때문이다. 너희들이 너희의 성인들을 존경하는 것도 그들의 고귀한 행위 때문 아니던가?" 
 

나중에는 이런 소리까지 했습니다.
 

 "서양인들은 날개 달린 사람(천사)를 그려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마치 날개 달린 것처럼 민첩한 하늘의 영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 날개 달린 사람은 없지만.'"

강희제 암기.jpg



18. 암기왕 강희제


 강희는 상소가 올라오면 언제나 신속하게 처리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전역에서 매일 수많은 비답이 도착하는데, 황제가 너무나도 이를 빨리 처리하는 바람에 신하들은 과연 존엄한 천자가 이 자질구레한 상소를 제대로 읽기는 하는지, 혹은 그저 적당히 답장만 보내는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신하들의 의심을 눈치챈 강희는 대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은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보니 글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오. 한번은 상소가 올라온것을 짐이 순식간에 모두 읽으니, 당시 상서였던 목화륜이 짐에게 자세히 읽어 달라고 몇 차례나 말한 적이 있소. 그래서 짐이 목화륜에게 상소의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했더니, 목화륜은 묵묵히 돌아갔소이다."


 강희 46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 신하들의 의심이 일어나자, 강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방금 형부에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에 틀린 글자가 있어 짐이 붉은 먹으로 틀린 글자를 고쳐서 내리 보냈소이다. 내용이 아무리 많아도 짐이 그것을 모두 읽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마시오. 짐은 상소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틀린 곳이 있으면 모두 수정해 주고 있소. 한문을 만주어로 번역하다가 틀린 부분이 있어도 모두 고쳐 주고 있단 말이오. 전쟁 때에도 하루에 3,4백건의 상소를 일일히 처리했는데, 이제 나라가 태평해 상소가 하루에 4, 50여 건 밖에 되지 않거늘, 그것을 처리하는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소?"


 그리고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짐은 읽는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한 번 읽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소."


 이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나이가 들어 노화 현상을 겪기 전까지, 어떤 일이던지, 혹은 어떤 지방을 지나가면서 만난 어떤 사람의 이름이던지 잊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강희가 페르비스트와 배를 타고 여행할 때, 강희는 어떠한 새의 이름이 벨기에 말로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페르비스트는 자신이 그 새의 벨기에 말을 과거 강희에게 직접 가르쳐 주었다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본인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강희는 오히려 자신이 새의 벨기에 말을 페르비스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9. 현실왕 강희제

강희제는 죽기 전에 남긴 상유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덟 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20. 예언왕 강희제

 강희제는 강남 지방을 남순하면서 서양인들의 여러 모습을 보았고, 연해지방의 총독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이는, 짐의 예측이다."
 
 

 물론 강희제의 여러 관심은 물론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의 지식에 대한 욕구나 수학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어디까지나 '취미생활' 으로서 개인의 '흥취' 였기 때문에, 무슨 국가 전체의 지식을 증대 시킨다던가 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고, 또 강희제 본인도 여러 선교사들의 말에 따라 일종의 '잡지식' 처럼 지식을 쌓아 올렸기에 '계통적' 이다고 할만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정도로 저 먼치킨을 인터넷 유행어 '조ㅇㅇ' 로 폄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마지막줄은 퍼온 본인이 추가한거, 특정 직업 폄하 의도 없음)

 
내용 출처 : 

조너선 스펜스 ─ 강희제
부베와 라이프니츠 ─ 안종수
수신제가 ─ 등예쥔
강희제 평전 ─ 장자오청
 
 
 
 

39개의 댓글

2017.09.14
와 A4 몇 장짜리야 이거ㅋㅋ 읽판가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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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더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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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황제복은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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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오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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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효종이 저시대임.
북벌 했으면 지금쯤 차오센성 됐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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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핫챠이거야원
푸지오밴도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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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핫챠이거야원
으으 역시 사람 은 각을 잘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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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초인적인 지도자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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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캬 좆쩌네
17번 저건 우리나라 종교인도 읽어봐야 함직한 말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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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진짜 수입품 가격이 확 체감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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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플라톤이 만났으면 눌러앉아 찬양하면서 살았을 군주임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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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이 아재가 지금 중국 영토 만들어놓은거 아닌가?? 우... 아재요... 그건 하지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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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문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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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코망코페로페로다이스키
강희제 시대에는 대놓고 정부에 반항하는 인간들만 잡아 족쳤음
그러다가 그 손자 건륭제 똘츄새끼가 지랄을 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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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긴데도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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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추가 : 당시 강희제의 수학지식은 상당해서 삼각함수를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알았다고 한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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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왕은 아니였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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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책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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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개쩌는 양반
그 아들도 미친 양반이지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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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할아버지 업적 유산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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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ㅎ호ㅗㅗㅎ
그건 강희제가 아니라 건륭제임... 건륭제 똘츄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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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강희제가 있다면 우리에겐 변희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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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조땡땡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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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존트존예
강희제 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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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존트존예
선교사한테 얻어들은 지식들로 취미삼아 얇고 넓게 공부하긴 했지만
조무사라고 비하하기엔 저사람이 너무 괴물같다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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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존트존예
조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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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왕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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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겟앰프드 선수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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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N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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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이양반이 중국 역사상 길이남을 성군이라하더만 묘호도 성스러울 성자 써서 성조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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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조선에 있었으면 세종처럼 과로사하기 딱좋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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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중국의 세종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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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저시대에 저정도식견이니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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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우리나라 정력왕은 왕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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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천명제부터 건륭제까지 청나라 황제는 버릴게 하나도 없음

물론 이후엔 영국에 패배하고 몰락하긴 함

수천년동안 유목민족인 만주족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왔는지 미스테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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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저 새끼 인생 몇 회차였는지 조사해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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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사실 회귀자임 ㅇ_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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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4
몇 안 되는 진짜 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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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중국사에서 천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라고 공식 인정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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