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Jazz and the Stars

Jazz and the Stars

 - 헬하운드 편





0.

 블러드베리 부침개처럼 위장건강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요리를 먹고 자는 날이면 나는 종종 악몽을 꾼다. 악몽 속에서 나는 아직 고양이가 되기 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흐릿하고 불분명하여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기묘한 불신감을 주곤 했다. 아침 안개와 같은 자존감을 느끼고 있노라면, 새하얀 마법사복을 입은 채 연구실 구석에서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무언가를 한참동안 주무르고 쓰다듬다가 손에 오한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나는 그 무언가가 얼어붙은 악마의 알이라는걸 깨닫는다. 그러면 섬찟한 감각과 함께 방 전체가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연출로 뒤집히며 날 넘어뜨리는데, 넘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 굉음이 들리며 악마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알은 시럽 과자처럼 가루를 뿌리며 잘개 부서지고, 마침내 알 속에서는 백색광을 뿌리는 자그마한 악마가 나타나 말하는 것이다.


 "아빠."


 그리고 눈을 뜨면 나는 언제나처럼 작은 검은 고양이인 채 요람속에 둥글게 누워있었다.



1.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고양이카페 고딕포우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고양이인 나는 그 날도 어김없이 사람들에게 갖은 교태와 애교를 부리며 가게의 평판을 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손님들은 내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원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나는 사람의 생각이 가능한 고양이라는 이점을 적극 발휘해 손님들이 원하는 이상적이도록 귀여운 고양이상을 적극 연기하며 가게 장부를 불리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던 시절에도 자존심이 강한 편이 아니었고, 고양이가 되어버린 이래로도 나는 귀여운 척을 하며 빌어먹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실제로도 현장마법사로 활동하던 지난 시절보다 지금이 벌이가 더 좋다. 내 삶에 불만이란 성적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기회가 드물다는 점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고양이 묘생 만만세. 그 날도 평소와 같이 보람차고 행복한 일과를 끝내고 호화로운 식사와 함께 따뜻하게 잠을 청해야 했을 것이다. 정수미에게서 전화만 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데모닉 피스라고?"


 "그래. 멸종 위기의 악마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단체야. 마법고문 한 분이 지금 입원해서 마법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악마라고?"


 "별 일은 없을거야. 그냥 이상현상이 일어나면 조언을 좀 주고, 장비에 마법을 좀 걸어주고, 그런저런 간단한 일들. 와 줄거지?"


 "악마를 보호한다고?"


 "너 자꾸 그럴래?"


 정수미는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야, 야, 잠깐, 나 고양이라고. 마법사 드랑이 필요했으면 5년 전에 전화했어야지. 지금 주문조차 다 까먹었는데..."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앨리스에게 '그걸'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어."


 네 시간 뒤. 나와 내 비서 안드로이드 앨리스는 변두리 우주로 향하는 급행편에 몸을 싣고 있었다. 


 "주인님, 정말 낭만적이에요! 사장님한테 편지 한통만 남기고 급하게 도망치는게 마치 야반도주중인 연인사이같아요!"


 나를 무릎에 앉힌 앨리스는 제 좋을대로 마구 떠들었다. 고양이인 나는 법인으로서 사람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외견상으로는 인간의 행동을 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내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앨리스가 동행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앨리스를 구입 했을 때 허벅지와 무릎의 촉감이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면밀하게 따졌던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앨리스의 무릎 위에 앉을 일이 많았다.


 덱앤데릭 터미널에서 출발해 급행으로 버금그믐은하를 건너 서른 아홉 시간을 내달리면 변두리 우주에서 가장 큰 행성 온바라에 닿는다. 데모닉 피스는 온바리에서 또 다시 예순 시간 거리에 있는 행성 풋바라기에 있었다. 풋바라기는 아직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대륙형 행성으로써, 거의 행성 전체가 야생의 것 그대로 남아있었다. 풋바라기의 공항에서 내리면 바로 데모닉 피스의 본부 건물이 보였고, 그 곳에서 풋바라기에 사는 모든 거주민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데모닉 피스 관계자인 풋바라기의 거주민은 약 스무명으로, 대부분은 다크 엘프였고 다른 종족이 한 둘씩 끼어있었는데, 모두 다크 엘프처럼 피부가 짙었다. 정수미도 그랬다. 기억속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볕에 엄청 그을려서."


 "차라리 내가 더 하얀색이겠는데."


 고양이가 왜 코를 맞으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막 그 이유를 몸소 알게 되었다.


 "아무튼 잘 와줬고, 짐은 대충 저기 둬. 곧 출발해야 돼."


 "아니, 우리 방금 백 시간 정도 날아왔거든?"


 "미안하지만 네가 날아오는 백 시간 동안 꽤 많은 일이 생겼어. 당장 오늘만 해도 헬하운드 우리의 온도조절창지가 맛이 가고 있거든."


 보아하니 쉴 틈이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풋바라기에 도착했을 때에 나와 앨리스가 온 것을 반기는 이는 정수미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정체모를 것들이 담긴 박스를 이리저리 나르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박스를 나르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간혹 몇이 나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들에게는 말하는 고양이 따위는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라는 듯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과연 가운데 우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변두리 우주란 이렇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은 장소인 것이렷다.


 "다들 좋은 분들인데, 요즘 워낙 바빠서. 일손이 모자라. 자자, 우리도 가자고."


 전 우주에 헬하운드는 총 열 다섯개체가 있다고 한다. 그 중 데모닉 피스 본부에서 기르는 헬하운드는 총 셋이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은 '라자냐'라는 이름의 암컷 헬하운드가 살고있는 곳이었다. 헬하운드는 더위를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같은 헬하운드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열기에는 민감하여 여러 헬하운드가 뭉쳐서 사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고 한다. 라자냐가 사는 곳까지는 경운기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지옥견이라고도 불리우는 헬하운드는 사막 지방에서 사는 개과 악마의 하나이다. 키가 약 일 미터에 검붉은 가죽이 몸 전체를 덮고 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것 처럼 커다란 흉근과 어깨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위로 목이 빳빳하게 세워져 있어 긴장을 더해, 몸 전체가 살아있는 위치에너지처럼 생겼다. 이야기 속에서 들은 것처럼 숨구멍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눈동자는 과연 불길이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붉었다. 그 덩치에서 주는 위압감이 대단했기에, 굳이 문 밖에 '개조심'이라고 써붙이지 않아도 십 리 밖에서부터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갈 것만 같았다. 라자냐는 그러한 오오라를 풍기며 희끄무레한 돌무더기 위에 앉아 우리를 반겼다.


 "야, 저 녀석 날 엄청 노려보는데." 나는 구제할 방법 없이 기어들어가는 고양이 목소리로 읖조렸다. 우리는 강화 유리가 삼중으로 쳐진 제어실에서 티타늄합급 철창 너머의 녀석을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전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제어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녀석은 나를 죽일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제어실 입구에 '라자냐, 암컷, 5살'이라고 쓰여있던 팻말이 끔찍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아냐" 정수미는 일축했다. "자고 있는 중이야."


 "자고 있다고? 맹세컨데 지금 눈동자가 움직였어."


 "그래? 헬하운드는 자고 있을 때에도 뇌의 일부는 깨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먹잇감을 쫓곤 하거든." 정수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먹잇감이라고?"


 "지금은 배가 부른 상태라서, 그냥 본능적으로 시선이 움직이는 거지, 사냥을 하고 싶어하는 건 아냐. 저기 봐. 발치에 뼈들이 보이지? 오늘 아침에 식사한거야."


 그제서야 나는 자고 있는 녀석 발치의 돌무더기가 돌이 아니라 그녀가 삼켜온 먹잇감의 두개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고무적이군.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일단 우리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 직후 나는 고양이와 안드로이드의 완력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나보다 정수미의 명령에 더 잘 따르는 비서 안드로이드 앨리스는 어떻게든 도망치려는 나를 가슴팍에 안은 뒤 정수미의 뒤를 따라 우리 안으로 향하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제어실과 라자냐의 우리, 즉 현실과 지옥을 구분하는 커다란 철문을 넘어서자, 우리는 정말로 지옥견의 아지트에 들어서게 되었다. 곧바로 후끈한 열기가 우리에게 닥쳐왔다. 단지 뜨거운 기운인 것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서 모래가 섞여 불어올 때마다 뺨을 쳐갈기는 열풍이었다. 우리는 터번과 오토바이 헬멧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괴상한 보호구를 끼고 모래바람 사이를 걸었다

.

 다행히도 우리의 목적지는 문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다가, 헬하운드 라자냐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이기도 했을 뿐더러, 우리의 안에도 또 다른 철창이 있어 마법진과 라자냐 사이를 가로막아 주고 있기도 했다. 나는 긴장이 한결 풀렸고, 그제서야 주위를 좀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헬하운드의 우리는, 마치 사막 한 가운데를 숟가락으로 퍼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거친 모래알맹이의 언덕 사이로 버섯 모양으로 솟은 바위들이 모래바람의 경로를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바꾸고 있었다. 


 금세 우리는 우리 안의 날씨를 제어하는 마법진이 그려진 벽면에 도착했다. 과연 말한 바와 같이 마법진의 일부가 훼손되어 컨트롤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열풍이 불고 있는 거였구만?"


 "음,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것보다 더 세게 불어야 돼."


 "더 세게요?" 원래도 동그랗던 앨리스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응. 헬하운드에게 뜨거운 모래바람이 우리에겐 산소와 같은거야. 헬하운드는 약하거나 미지근한 바람은 호흡을 못하거든."


 "지금 정도는 괜찮은 거구요?"


 "부족하긴 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야. 아무래도 모래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다 보니깐, 마법진이 훼손될 가능성도 높은가 봐."


 나는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손상된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나는 약하게 빛을 쏘아 앨리스에게 지시했고, 앨리스는 내 지시에 따라 마석 깃펜으로 마법진을 덧그렸다. 고양이가 쓸 수 있는 마법이란 인간 초등학생이 쓸 수 있는 마법 수준과 큰 차이가 없었고, 고양이가 마법 깃펜을 쥐는 능력이란 신생아가 그것을 쥐는 능력과 대동소이했다. 지금의 나는 그저 마법을 좀 아는 고양이에 불과했으며, 그 사실을 뻔히 잘 알고 있음에도 굳이 나를 호출해 마법을 다루게 한 정수미의 존재는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앨리스는 기계적인 정확함으로 내 지시에 따라 마법진을 완성했다. 마법진은 의도했던 대로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제어실로 돌아와 라자냐의 우리를 바라보니, 바람의 세기가 확연히 달랐다. 지금의 저 바람 속이라면 나는 물론이고 기계인 앨리스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은 고딕포우에서 전화가 왔다. 가게 걱정은 말고 앨리스와의 밀월을 잘 즐기라는 것이었다. 분명 가족 문제로 급하게 떠난다고 편지에 쓰고 나왔거늘, 어째서 앨리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는 것인지는 앨리스 본인만이 알 것이다. 밤이 깊었고, 나와 앨리스는 창고 하나를 급하게 정리한 듯한 작은 방 하나를 받았다. 담요를 뒤집어 쓰자 곧바로 수마가 몰려들었다.


 "주인님, 헬하운드가 왜 지옥견인줄 아세요? 헬하운드는 살아있는 동물은 먹어도, 사람만은 죽은 사람만을 먹고, 살아있는 사람은 잡아먹지 않는다고 해요. 그게 꼭, 고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것 같아서, 옛 사람들은 헬하운드에게 삼켜진 영혼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었다고 해요. 그런데 재밌는 건, 정 반대의 이야기도 있다는 거에요. 헬하운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사신이 시체를 발견하기 전에 영혼을 자신의 뱃속에 숨겨주는 거라고도 하더라고요. 주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헬하운드가 죽은 사람만 먹었다는 건 그냥 헬하운드가 살만한 뜨거운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선 사람이 다 죽어버려서 그랬던 게 아닐까..."


 "정말 멋지네요."



2. 

 이튿날. 앨리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해 몇가지 다른 몇가지 문제가 더 있었고, 나는 데모닉 피스의 사람들과 안면을 꽤 익혔으며, 고딕포우에는 다시 연락을 해 복직이 좀 늦어질 것 같다고 전했다. 나를 대신할 마법 전문가를 한 명 구할 때까지, 나와 앨리스는 꼼짝없이 데모닉 피스에 갇혀있을 운명이었다. 한편 고딕포우의 사장 리졸데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 가족이 생기면 심정의 변화가 생기는 일이지."


 "아니, 뭔 소린지를 모르겠네. 저는 여기서 협박을 당하고 있다니까요."


실제로 정수미는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것 같으면 '그걸' 앨리스에게 다 불어버리겠다는 말로 나의 일탈을 원천차단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 협박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내가 그 협박에 순순히 당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 오고 나서 이틀 사이에 정수미의 공작에 적응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협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틀은 금세 사흘이 되었고, 사흘은 또 금방 일주일이란 시간으로 변했다.


 라자냐의 마법진에 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을까 싶어 라자냐의 우리를 주기적으로 관찰하기로 했다. 라자냐는 우리의 모습이 이제 낯이 익은 모양이었다.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우리의 모습이 눈에 띠면 이제 인사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돌렸고 우리의 걸음걸이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보폭을 맞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강화유리와 철창을 사이로만 두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녀석은 여전히 나를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 눈동자에는 증오와 악의가 서려있다고 내 하늘에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마법진 점검은 녀석이 자고 있을 때에 한해서만 진행하기로 하였고 나는 그 의견에 두손 두발 모아 모두 찬성이었다.


 "주인님이 이렇게 무서워 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콜록."


 "너도 고양이의 키에서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


 사람들은 가소롭게도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다른 행동을 했을 텐데.', '어떻게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담.'과 같은 말을 종종 하지만, 그런 표현은 자신의 자유이성에 대한 과신에 불과하다. 새로운 장소, 돌발적인 상황, 낯선 환경에서 생물들은 이전의 자신이라면 생각치도 못했을 행동과 모습을 서슴없이 보일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 처지에 직접 처해보지 않았으니 '나라면 그런 짓 못한다'와 같이 속 편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영웅심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다. 고양이의 신경과 뇌조직 안에서 강화유리와 철창은 맹수의 눈빛에 대하여 어떤 안정감도 주지 못하는데, 이는 몸이 고양이로 변하는 저주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나를 포함해서.


 정수미는 내 생각에 대해 아주 진솔하고 흥미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개소리 하고 있네." 난 고양이인데.


 라자냐의 우리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한가지 문제가 있노라면 앨리스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인데, 풋바라기에 온지 열흘 째, 앨리스의 기침이 낫기는 커녕 누가 보아도 심해 보이는 종류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헬하운드 우리의 모래바람이 안드로이드인 앨리스에게는 썩 좋은 작업환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 너 필터 걸르니까 아주 모래가 한 소박씩 떨어지더라. 청소기인줄 알았다, 참."


 "헤헤, 죄송해요, 주인님."


 앨리스는 웃고 있었지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태 하루에 한번씩, 그것도 짧은 시간동안만 라자냐의 우리에 들어갔다 나오곤 했는데, 이 정도로 많은 모래가 필터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앨리스의 배기 시스템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행동할 수 없는 나에게, 비서이며 나의 대리인이기도 한 앨리스의 건강은 곧 내 몸의 건강과 같았다. 여느 기계처럼 결코 가벼히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앨리스가 잠든 뒤, 나는 복도 옆의 홀에서 정수미와 함께 금주의 교리를 절찬리 패대기치고 있었다.


 "내일이라도 곧장 수리센터를 찾아가야 겠어." 만드라고라 맥주를 넓적한 접시에 담하 핥짝이고 있으려니 영 폼이 나지 않았지만 고양이 전용 머그컵이라도 발명되지 않는 이상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협박해도 어쩔 수 없어. 내일은 나갈거야."


 "부끄러워 하기는." 잠든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정수미가 속삭였다. "왜 나랑 사귈 적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을까, 그래."


 "좀 닥쳐. 애 자고 있잖아." 


 정수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팔불출이야. 시끄럽긴 자기가 제일 시끄러운데."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좀 했다. 나와 정수미가 같은 마법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던 시절. 그리고 5년 전 내가 고양이로 변하기 직전의 일들. 정수미는 취했는지 곧 앨리스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표현을 남발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야자타임은 쫑낼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는 고양이인지라 정수미를 방까지 데려다 주진 못했고 복도 앞까지만 같이 나가 주었다. 그리곤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앨리스가 누운 곳 맞은 편 담요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밤동안 나도 정수미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 지 횟수를 세어보았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자알 했다."


 그리고 악몽을 꾸었다. 얼어붙은 알 속에서는 악마 대신 앨리스가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꿈 속의 앨리스가 말하려던 찰나 나는 꿈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앨리스가 없었다. 이 방은 물론 복도와 화장실, 정수미의 방에도 앨리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잠에서 깬 뒤 삼십 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런 씨발." 정수미가 이마를 움켜쥐며 말했다. "라자냐 우리 열쇠가 사라졌어."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술을 멀리하라고 하셨군요. 뒤를 돌아보니 정수미가 바닥에 엎드려서 벽을 걷는 기행을 펼치고 있었는 데, 그 꼴을 보아하니 나의 모습이 어떨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라자냐의 우리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3. 

 정수미는 도저히 운전대를 잡을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당직 중이던 체나흐 씨가 도와주기로 했다. 체나흐 씨는 다크엘프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와 정수미를 한 손에 들고 트럭에 쳐박더니 코를 씰룩거리며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지금 당장 토해 둬요. 악셀만 밟을 거니깐."


 나는 자갈길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트럭 위에서 위 속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토하며 앨리스와 라자냐와 라자냐의 우리 열쇠와 모래바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정수미의 상황은 더 나빴는데, 이미 턱 아래와 셔츠가 토사물로 범벅이었다. 그 꼴이 너무도 처량하여 내 몸으로라도 닦아주고 싶었지만 별로 소용이 없는 시도였는데, 이미 내 몸도 토사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밤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빛나는 것이라곤 트럭의 전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조등뿐이었다. 풋바라기는 문명보다 야생에 가까운 행성이었고 우리가 달리는 길은 아스팔트와 가로등의 개념을 몰랐다. 우리가 이 바람같이 달리는 트럭 위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체나흐 씨의 반사신경에 달려 있는 일로써, 행여라도 체나흐씨가 밤이 적적해 와인이라도 한 잔 땡겼다면 우리 일행의 미래는 종잡을 길이 없어질 것이었다. 우리는 그 점에서 체나흐 씨가 독실한 신자라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용키 힘든 끔찍한 질주의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마침내 라자냐의 우리에 도착했다. 라자냐의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제어실을 거쳐야 했고, 제어실에 들어가기 위해선 제어실 문을 열어야 했다. 제어실 문은 잠겨 있었다.


 "다들 물러서요!"


 나는 기억을 되짚으며 문을 날려버리고자 폭발의 주문을 외웠다.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상황에서 마력을 모을 수인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고양이의 상태에서 폭발의 주문을 외운다? 아니나 다를까 마법은 갈피를 못잡고 허공에서 배회하더니 전혀 다른 곳을 강타하였다.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눈을 뜨고 보니 마법은 문짝이 아닌 그 곳에서 몇 미터쯤 떨어진 환풍구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환풍구에 뚫린 구멍은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턱없이 작았지만 고무적이게도 고양이 한마리가 들어가기에는 딱 맞았다. 나는 그 사실에만이라도 한없이 감사하며 환풍구를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제어실 안은 깜깜했다. 광원이라고는 벽면에 붙은 몇가지 기계 설비가 내고 있는 작은 상황등 뿐이었다. 강화유리 너머의 헬하운드의 우리 역시 깜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렴풋이 사막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가 밤눈이 좋다는 것은 빛이 존재할 때나 들어맞는 이야기일 뿐이다. 빛이 없으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양이나 사람이나 차이가 없었다. 나는 숙취상태의 고양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앨리스를 찾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응달은 넝쿨처럼 심장을 옥죄었고 똑딱거리는 시계소리는 커다란 징이 되어 신경 하나하나에 박혔다. 개똥벌레의 빛처럼 희미한 계기판의 상황등에 의지한채 주변을 미친듯이 돌아보았다. 무언가 눈에 띄었다. 앨리스의 머리카락이었다. 제어실과 라자냐의 우리를 연결하는 커다란 철문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 머리카락은 어제, 혹은 그제, 혹은 열흘 전에 떨어져 있던 것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앨리스의 마지막 흔적에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나는 문을 긁으며 앨리스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문 건너편에서 나는 앨리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앨리스의 목소리는 기침에 잠겨 한없이 떨리고 있었고, 또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문을 열고 싶었지만 문 손잡이에는 손이 닿지도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비참했다.


 뒤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무언가 거칠게 열어젖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정수미와 체나흐 씨가 들어왔다. 둘은 제어실로 달려들어오던 그 속력으로 내 앞으로 달려와 철문을 열었다. 


 앨리스가 보였다. 아니, 사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무언가 커다란 알 같은것을 품에 꼭 쥔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듯한 가녀린 안드로이드의 외곽선이 보였을 뿐이다.


 "죄송해요, 주인님." 그녀의 손은 차가왔다.


 그러고보니 문득 철문 너머에서 뜨거운 바람이 전혀 불어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자냐의 우리로부터 들어오는 것은 느릿느릿한 한기였고, 밤공기처럼 차디 차기 이를 데 없었다. 몸에 돋힌 소름이 이 차가운 대류 때문인지, 아니면 이 비현실적이도록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때문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4.

 다음날 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앨리스의 상태는 나빴지만, 아주 심각하진 않았다. 기침이 심한 몸으로 모래바람 속을 뚫고 들어가 기능이 거의 작동을 멈출 뻔 했지만, 어쨌든 정말로 위험한 순간에 이르기 직전에 몸을 피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다. 앨리스는 본부로 옮겨진 이래 바로 수면 상태에 들어가 데이터 백업을 시작했다. 여의치 않으면 몸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그녀의 정체성은 그녀의 몸뚱이가 아니라 그녀의 기억이 담긴 작은 디스크가 되리라.


 다음 문제는 앨리스가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알과 같은 것이었다. 새벽에 긴급하게 소집된 회의에서 상황을 보고하고 돌아온 정수미는 거의 눈을 뜨지 못한 채 찢어지는 목소리로 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라자냐의 알이야. 라자냐가 낳은 건 아니고. 라자냐가 죽어서 알로 변한거야."


 악마의 전리품이란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아직 지금처럼 악마가 멸종 위기에 들어서기 전의 시대,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악마를 사냥하고 다니던 시대. 악마는 죽으면 알, 혹은 보석과 같은 모양의 형태로 변하는데, 사냥꾼들은 이를 두고 악마의 전리품이라고 부르며 좋은 전리품이 드랍되었다, 혹은 레어한 전리품을 득했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악마의 전리품은 악마의 본질이기도 한 마력이 고농도로 압축되어있고, 언제나 마력과 마법에 굶주려있던 사람들은 그 전리품을 비싼 값으로 거래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 알은 공장으로 들어가 그 원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곤 했다.


 그렇다면 악마의 전리품이란 곧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 세상에 악마를 사냥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지옥이 아직 사람들에게 정복당하지 않았을 때, 온갖 혼돈과 변화가 넘쳐났던 지옥이 악마들의 생태계로 들끓었을 시절에 악마에게 진화한 일종의 생존 기제이다. 악마들은 지옥의 환경이 그들이 생존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급격하게 변화하면, 곧 알과 같은 형태로 다시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환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잠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외부의 환경이 안정되고, 공기중에 충분한 마력이 충만해지면, 그들은 알에서 깨어나 다시 생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밤에 라자냐의 우리에 들어갔을 때, 바람이 잔잔했지? 뜨거운 바람이 멈춰서 숨을 쉬지 못하게 된거야."


 "...어째서?"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지난 밤의 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앨리스의 머리맡에서 요지부동이었고 정수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역시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십 분 쯤이 지나자 서로 울먹인채로 사과를 거듭하고 있어서 뭐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다. 적절한 때에 체나흐 씨가 들어와서 상황을 멈춰주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꾸게될 새로운 악몽이 생겨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둘다 와 봐요. CCTV에 상황이 찍혔으니깐."


 데모닉 피스의 전산실에는 데모닉 피스의 전 직원이 빼곡하게 둘러앉아 화면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정수미가 오기 전에 그들은 녹화된 영상을 한 번씩 본 모양이었지만 당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우선 어제 밤 상황부터 다시 봅시다."


 본부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앨리스의 이동경로를 간헐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나열하자 지난 밤 앨리스의 흔적이 일목요연해졌다. 앨리스는 나와 정수미가 회포를 풀고 있었던 것을 자면서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와 정수미가 잠들때까지 기다린 후, 그녀는 정수미의 방에서 라자냐 우리의 열쇠를 가져갔고, 그 길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적외선카메라로 보기에도 깜깜하기 이를 데 없는 밤길을, 앨리스는 익숙하다는 듯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제어실에 도착한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문을 잠갔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흘러서 라자냐의 우리 안이었다. 앨리스는 능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터번같은 헬맷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그녀는 라자냐가 있는 곳을 향해, 모래 바람을 헤치며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었다. 지옥을 구분하는 마지막 철창까지 열어젖힌 그녀는, 그리고 마침내 라자냐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고, 반대편에서는 커다란 헬하운드가 앨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뭘하고 있는거야 저 애?"


 "글쎄, 뭔가 말하고 있는것 같은데."


 그러기를 잠시, 곧 앨리스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더니,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방 안 곳곳에서 조용한 탄식이 흘렀다. 라자냐는 앨리스에게 다가와 커다란 주둥이로 그녀를 몇 번 흔들었다. 앨리스는 움직임이 없었고, 라자냐는 곧 그녀를 물더니 제어실로 향하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놀라운 장면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앨리스를 커다란 철문 앞에 놓아둔 라자냐는 곧바로 방향을 틀더니 마법진이 있는 방향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법진 앞에 다가간 라자냐는 앨리스가 있는 방향을 흘긋 보더니 그대로 앞발을 올려 마법진을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또 다시 터져나오는 탄식.


 곧이어 사막의 바람은 멈추기 시작했고, 수분이 거의 없는 그 안은 금방 식어갈 것이었다. 발길질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던 라자냐는 숨을 헐떡이는가 싶더니, 앨리스의 곁에 돌아와 몸을 누이었다. 잠시후 라자냐는 알이 되었고, 뒤이어 눈을 뜨는 앨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상황의 맥락은 이전 열흘간의 CCTV에 찍힌 앨리스의 모습을 찾아봄으로써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앨리스는 여기 들어온 첫날부터 매일, 이른바 일탈을 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정수미 몰래 라자냐의 우리를 찾아가 라자냐와 목적을 알 수 없는 만남의 시간을 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세번 째 찾아갈 때, 라자냐는 앨리스를 위해 마법진의 일부를 할퀴어 바람의 세기를 낮춰주었고, 앨리스는 우리를 빠져나가기 직전 내 방에서 훔쳐온 마석 깃펜으로 마법진을 덧칠해 다시 바람의 세기를 높혀 놓았다. 똑똑한 아이였다. 안드로이드와 악마의 공조관계는 벌써 열흘째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둘은 친구라도 되었던 것일까?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이제는 텅 비어버린 라자냐의 우리를 둘러보았다. 내가 마법으로 폭파시켜 버린 환풍구와 체나흐 씨가 강제로 열어젖힌 현관문이 을씨년스러웠다. 문득 현관문에 걸린 팻말에 눈이 갔다. '라자냐, 암컷, 5살' 내 마법사 경력이 끝나고 고양이로 변한 것이 5년 전의 일이었고, 공장에서 앨리스와 구매한 것도 5년 전의 일이었다. 앨리스는 라자냐를 보며 또래의 아이를 보는 듯한 감정을 느꼈을까?


 라자냐는 한달 뒤면 깨어날 거라고 했다.


 "이곳 풋바라기는 원시적인 마력이 풍부한 행성이니까, 식생만 잘 맞으면 한달도 전에 깨어날 꺼에요."


 "새로 깨어난 애는... 라자냐가 아니죠?"


 "뭐, 그렇죠. 아예 다른 개체에요. 어미와 새끼가 다르듯이."


 나는 체나흐씨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악마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생명을 경시하는 이들에게서 악마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지, 악마의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앨리스양에게 고맙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악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자연에서 악마가 태어나는 경우는 드문가요?"


 "네, 드뭅니다. 악마의 탄생은 옛날의 지옥처럼 마력이 정말로 소생하던 시절에나 가능하던 일이에요. 지옥이 정복당한 지금에는, 악마를 만들어낼만큼의 자연 마력을 품은 곳이 매우 드뭅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람들에게 개발되어있겠죠."


 체나흐씨의 눈빛은 읽기 어려운 빛을 뿜었다.


 "이것들이 우리 우주의 마지막입니다."


 앨리스의 상태는 썩 고무적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소생 불가능 판정을 받았고, 나는 그녀의 데이터가 백업된 디스크를 들고 그녀의 새로운 몸을 찾아 헤맸다. 지난 5년간 고양이 카페에서 벌어온 모든 돈을 탕진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외향을 내가 알던 모습으로 개조하고, 또 데이터를 새로 이식하는데 걸리는 데에도 시간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몸의 앨리스가 나에게 돌아왔을 때는 사건이 터진 날로부터 딱 한달이 지난 후였다.


 "저 왔어요, 주인님."


 울먹이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지난 한달간 앨리스의 무릎 대신 정수미의 무릎을 이용해 본 결과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딱 한 군데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으니까. 라자냐의 알에서 깨어난 것이 라자냐가 아니어도,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였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다행이고 또 행복하였다.



5. 

 생명의 탄생이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아무것도 아닌 단백질 덩어리, 혹은 마력의 덩어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 경외에 놀라움을 헌화하는데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경외를 악마에게도 나눠주기 시작한 것은 몹시 최근의 일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우주는 악마에게도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외면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 인류의 손에 남은 악마는 불과 한 줌도 채 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사냥감이 아니며, 또 그들의 생명은 우리가 습득해야 하는 전리품이 아니다.


 "와, 주인님, 주인님! 저것봐요! 깨어나려고 해요!"


 이제는 기운을 완전히 되찾은 앨리스를 나는 데모닉 피스에 다시 데려갔다. 라자냐 2세의 탄생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앨리스는 깨어난 뒤 약 이틀 정도, 자신이 라자냐를 죽인 것이라며 자괴감에 빠져있었는데, 곧 좋아하는 특제 딸기 우유를 사다주니 힘을 되찾았다. 물론 그 전에 모든 상황 설명을 정수미의 전화로 다 전해듣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들은 라쟈나의 제어실에 모여, 강화유리 너머로 라자냐의 알이 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알은 마치 국지성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다가, 마침내 알의 한쪽에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검고 붉은 빛이 그 속에서 부터 새나오기 시작했다. 앨리스는 양손을 얼굴 앞에서 꼭 쥐고 빛나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알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광휘가 사막 전체를 덮었다. 


 눈이 부셨다. 라자냐의 알이 내뿜는 빛 때문인지, 혹은 앨리스의 빛나는 눈빛 때문인지.


 이날 저녁은 모두가 거하게 취했다. 블러드베리 부침개를 잔뜩 펼쳐놓고 모두가 만드라고라 맥주에 흠뻑 빠졌다. 


 "수미언니, 수미언니. 이제 알려줘요. 저에게 알려주면 안되는 '그거'란건 뭐에요?"


 "아, 그거?" 정수미는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거 말해줘도 되나~."


 "야, 왜 '그게'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는거야!"


 "저는 뭐 귀가 없나요."


 "아, 뭐, 그냥 알려주지 뭐! 그럼 너도 더 이상 협박당할 일 없고 좋잖아!"


 "에라이, 그래! 그냥 말해 버려라."


 정수미는 몹쓸 작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키득였다.


 "사실 나랑 얘 사이에 애가 있거든."


 "네? 아기요?"


 "아니, 아기는 아니고. 수정란인데. 막상 임신하고 나니까 무서워져서 수정란을 뽑아서 냉동시켜뒀어."


 "아하, 수미 언니와 주인님이 사귀었을 적의 이야기로군요! 그런데 그게 왜 저한테는 비밀인데요?"


 정수미는 더 대답않고 괴상한 톤으로 키득이기만 했다. 나는 내 얼굴이 뜨거운 것이 술 때문이라며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였다. 


 이날 밤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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