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SF 단편 - 증거

증거


아시모프 지음


프랜시스 퀸은 소위 '신세대' 정치인이다. 물론 여기서 '신세대'는 나이와 별 상관이 없다. 단지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요즘 부쩍 '신세대'란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고대 이집트에도 또 고대 그리스에도 신세대는 있었다.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은 정치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의미에서 '신세대' 라는 말을 쓰지만 이제 오히려 '신세대'라는 말이 붙어 있는 단어에서 더 구태의연한 냄새가 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오늘 그는 알프레드 래닝을 마주하고 있다. 하얀 호랑이 눈썹을 치켜 뜨고 퀸의 말을 듣고 있는 래닝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퀸의 목소리는 짐짓 쾌활했으나 정치가다운 형식적 냄새는 지우지 못했다.
"래닝 박사님, 스티븐 버얼리에 대해 아시겠지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인구에 한참 회자되는 사람아닌가요."
"그건 그렇습니다. 혹 다음 시장 선거에서 그 사람에게 투표하실 생각 이신 지요."
"글쎄요. 정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그 사람이 다음 선거에 출마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래닝의 목소리는 약간 퉁명스러웠다.
"다음번 시장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지금은 일개 지방 검사이지만 말입니다.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래닝이 갑자기 말을 잘랐다.
"저도 그 속담은 압니다. 저를 만나자고 하신 용건이 무엇인지요."
"지금 용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퀸의 목소리는 계속 부드러웠다.
"버얼리가 지방 검사로 계속 남아 있도록 하는 게 저의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되겠지요. 또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박사님에게도 이로울 것이고 말입니다."
"나에게 이롭다고요? 이것 보시오!"
래닝의 호랑이 눈썹이 하늘을 향해 곤두섰다.
"아, 흥분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그 표현이 귀에 거슬렸다면 U.S. 로봇 사에 이로울 것이라고 해 두지요.

그러니 U.S. 로봇 사의 수석 연구원이신 선생님께도 유익한 일 아닙니까? 선생님은 회사의 원로이시니 선생님의 말씀에 다른 회사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그 내용이 다소 엉뚱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래닝 박사는 가만히 퀸의 말을 곰씹어 보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소, 퀸 씨."
"무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용건은 사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실례지만 담배 한 대 피우겠습니다."
퀸은 가느다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의 기다란 얼굴 한편에 지긋한 웃음이 그려졌다.
"사람들은 흔히 버얼리 씨를 다소 엉뚱하고 개성이 강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불과 삼년전만해도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유명하지요. 강한 개성과 탁월한 두뇌를 겸비한 최고의 지방 검사로 아주 대단한 명망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의 친구가 아니라는 점은 다소 불행한 일이지요."
"그러시겠지요."
래닝은 기계적으로 대답한 뒤 손끝을 묵묵히 바라봤다.
"지난 한해 동안 저는 버얼리 씨에 대해 아주 세밀한 조사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진보적 정치인에 대해서는 항상 뒷조사를 해 둘 필요가 있지요. 그러한 조사가 때로는 아주 쓸모가 있답니다."
그는 빨갛게 빛나는 담뱃불을 보며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버얼리 씨의 과거에는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습니다. 조그만 마을에서 조용히 살았고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지요. 자동차 사고로 부인을 잃고 그 자신도 오랜 기간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완쾌한 후 법대에 입학하고 졸업 후 우리 시에 와서 검사가 된 겁니다."
프랜시스 퀸은 머리를 가만히 저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현재 생활은 아주 특이합니다. 이 친구 전혀 무얼 먹는 법이 없거든요."
래닝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뭐라고요?"
"버얼리씨는 전혀 아무 것도 먹지 않습니다."
퀸은 한마디 한마디 끊어서 강조하듯 되풀이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 걸 본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단 한번도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거의 없는 게 아니고 전혀 없다는 겁니다."
"믿을 수 없군요. 당신은 그런 터무니없는 조사를 믿습니까?"
"완전히 신뢰합니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이제껏 술도 한잔 입에 댄 적이 없을 뿐더러 잠도 안자는 같습니다.

다른 특이한 점도 있지만 이 정도면 박사님이 저의 용건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래닝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한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그 노쇠한 로봇 공학자는 한참 후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이 암시하고자 하는 바는 한가지뿐이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가 로봇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듣던 중 가장 얼토당토않은 소리요, 퀸 씨."
다시 두사람 간에는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퀸이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박사님은 U.S. 로봇 사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이 얼토당토 않은 문제를 조사해 주셔야 하니 말입니다."
"퀸 씨,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거요?. 우리 회사는 정치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소!"
"선생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이 사실을 그대로 발표한다 해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어차피 정황 증거로도 저의 의문은 정당시 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 그럴 순 없지요. 이왕이면 물적 증거가 있는 게 낫지요. 또 나는 공인의 입장에서 박사님의 회사가 입게 될 타격도 고려해 드려야 하니 말입니다.

지구에서는 로봇의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물론이오!"
"전 태양계를 통틀어 양자 두뇌를 생산하는 회사는 U.S 로봇사 뿐입니다. 만약 버얼리가 로봇이라면 그는 양자 로봇 일겁니다. 모든 양자 로봇은 U.S. 사의 소유입니다.

U.S. 로봇 사는 자사의 로봇을 항상 임대하지, 직접 파는 법이 없습니다. 고로 모든 양자 로봇에 대한 법적 책임은 U.S. 사에 있습니다."
"퀸 씨, U.S. 로봇 사가 휴머노이드 로봇을 생산한 적이 결코 없다는 사실은 간단하게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의 생산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만들 수는 있지요?"
"가능은 하지요."
"그렇다면 비밀리에 그런 로봇을 제작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회사 기록상에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양자 두뇌에 관한 한 문제가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요소가 개입되어 있고 또 정부의 규제도 엄중한 분야입니다."
"그럼, 로봇이 고장나거나 수명이 다하거나 망가지면 어떡합니까?"
"그런 경우 양자 두뇌는 재활용되거나 폐기됩니다."
"그런 가요?"
프랜시스 퀸의 반문에는 가시가 돋혀있었다.
"혹시 말입니다. 그 양자 두뇌 중 하나가 어떻게 반출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요? 그리고 시험 개발 중이던 휴머노이드 로봇 몸체가 마침 하나 있다면요?"
"불가능한 소리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정부나 국민에게 증명해 보여야 할 상황이 올 지 모릅니다. 그전에 지금 저한테 증명해 보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왜 굳이 그런 수고를 한단 말입니까? 우리 회사가 무슨 이유로?"
"박사님, 서로 편하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로봇이 지구상에서 사용된다면 U.S. 로봇 사가 가장 큰 이익을 볼 것입니다.

이제껏 지구상에서 사용을 금해온 이유는 국민의 로봇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비밀리에 사람들 사이에 로봇을 심어두면 어떨까요?

여기 촉망받는 검사가 있고, 그가 다시 능력있는 시장이 되고,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로봇이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가정용 집사 로봇을 시판한다면? 국민의 신뢰 구축에는 더없이 완벽한 판촉이 되겠지요."
"완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단 그 점을 증명해 보이시는 게 어떨까요. 나중에 국민에게 사실을 증명하려 애쓰기 전에 제게 먼저 증명해 보이시면 그만큼 수고가 덜할 텐데요."
사무실 조명은 약간 어두웠으나 래닝 박사의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안색을 가다듬었다.
"좋습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보지요."
으르렁거리듯 나온 답변이었다.


스티븐 버얼리의 얼굴은 쉽게 말로 묘사하긴 힘든 편이다. 출생 증명서에 의하면 그의 나이는 마흔이고 보기에도 마흔 살 먹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피부가 깨끗하고 혈색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그가 파안대소할 때의 얼굴은 무척 젊어 보였다. 그는 지금 웃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멈추는 듯 하다 그의 폭소는 다시 이어졌다.
알프레드 래닝은 약간 무례한 그의 웃음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동석한 중년 부인에게 무어라 손짓했으나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물고 두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버얼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웃음을 가라앉혔다.
"래닝 박사님... 그러니까 제가, 하하하...제가 로봇이란 말씀입니까?"
래닝은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나도 선생같이 훌륭한 이가 같은 인간이라면 좋겠습니다. 일단 선생은 우리 회사의 제품이 아니니 로봇일 리가 없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워낙 영향력 있는 인사가 제기한 문제라서 우리로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굳이 대실 필요는 없습니다. 박사님의 입장도 십분 이해하니까요. 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그를 프랜시스 퀸이라고 부르고 넘어가지요."
래닝은 갑작스레 말을 뺏기자 잠깐 멈칫했다. 그는 다시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신분은 이 자리에서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닙니다.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고요. 선생님이 이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하고도 간단한 사실은 바로 이번 문제가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이름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실이 아니다 하더라도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자체로도 우리 회사로 봐서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됩니다."
"예, 박사님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 주장 자체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박사님의 입장은 아주 곤혹스러운 것일 테지요.

제가 함부로 웃어 결례를 범한 게 아닌지요. 박사님의 난처한 입장을 짚어 보지 못하고 잠시 실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제가 어떻게 박사님을 도와 드려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시내 유명 식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드시면 됩니다. 사진을 찍고 맛있게 식사를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말을 마친 래닝은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로서는 난처한 말을 마친 셈이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은 버얼리를 계속 흥미있는 시선으로 바라볼 뿐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버얼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잠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가 다시 로봇 공학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그의 손가락은 책상 위의 유일한 장식품인 청동 서진을 두들겼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그 제안을 따를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버얼리는 황급히 손을 들어 래닝 박사의 항변을 제지했다.
"잠시만요, 박사님. 저도 이 문제에 있어 박사님의 난처한 입장은 잘 이해합니다. 선생님도 어쩔수없이 저에게 와서 이런 제안을 하고 계시다는 점도 압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논의 자체가 아주 우스꽝스럽고 품위 없다고도 느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저의 정치 생명과도 관련된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퀸 씨가, 아니 그 고명한 인사가 혹 선생님을 이용해 정치술수를 부린다는 생각은 못 해보셨습니까?"
"왜 그런 저명한 인사가 정당한 근거도 없이 버얼리씨에 대한 터무니 없는 음해 공작을 펴겠습니까?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퀸 씨를 아직 제대로 모르십니다. 그는 권모술수에 아주 능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조사를 이미 마쳤다고 말했겠지요?"
"어느 정도 충분히 했더군요. 그 조사를 들어보니 그 결과의 신빙성을 문제삼기보다 차라리 선생을 찾아와 이렇게 부탁드리는 게 수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내가 결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십니까? 래닝 박사님, 선생님은 과학자가 아니십니까? 좀더 논리적으로 그 말을 따져 보십시오. 단지 내가 무엇을 먹는 걸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더 논리적인 진술이 될 겁니다. 결국 그 말은 내가 이제껏 대외 선전용 만찬을 열거나 참석해서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사진 몇 장 찍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버얼리 씨는 이번 일에 대해 율사적 해석을 내리고 계신 것 같은데 사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상황입니다. 해법도 간단하고요."
"그 반대입니다. 저는 지금 단순한 상황을 퀸 씨와 박사님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잠을 별로 많이 자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는 법도 없지요. 그리고 저는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일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공공에서의 만찬이라는 것은 아주 형식적인 일 아닙니까?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영양 섭취를 같이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정치인이 새로이 나타난 선거 후보를 음해하기위해 사생활 조사를 벌였더니 여자 관계나 금전 관계 같은 것은 나오지 않고 위와 같은 사실만 나왔다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까 궁리하던 끝에 선생님의 회사를 적당한 대리인으로 보고 그는 선생님을 찾아오겠지요. 만약 그가 선생님께 '아무개는 로봇이다. 그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 일도 없고, 법정에서 조는 법도 없다. 한밤중에 그 친구 방안을 들여 보았더니 그는 잠도 안자고 책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냉장고를 열어 보니 음식이 전혀 없었다. 고로 그는 로봇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한다면 선생님은 곧장 정신병원에 전화를 걸 겁니다. 하지만 이 고명한 인사는 대신 선생님께 와서 '버얼리는 식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절대 잠도 자지 않는다.'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스스로 '아니 그럼 버얼리가 로봇인가?'하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렇게 어려운 걸음까지 하시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버얼리 씨,"
래닝의 목소리는 이제 약간 위압적으로 들렸다.
"선생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계시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해결책은 간단한 것 아닙니까? 사람들 보는 앞에서 무얼 먹기만 하면 만사형통입니다."
버얼리는 옆에 앉아 있는 중년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실례합니다만, 수잔 캘빈 박사라고 하셨던가요?"
"예."
"U.S. 로봇 사에서 심리학자로 일하고 계시지요?"
"로봇 심리학자입니다."
"아,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로봇과 사람이 많이 다른가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로봇이 훨씬 더 점잖지요."
버얼리 검사의 입가에 싱긋한 미소에 걸렷다.
"아이구, 뜨끔한 말씀이시군요. 뭘 여쭤 보려고 하는데요. 부인은 여성 로봇 심리학자이시니 래닝 씨에게 없는 무엇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핸드백 속에 먹을 만한 것을 갖고 다니시지 않습니까?"
늘 침착한 캘빈 박사도 의외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버얼리 씨."
캘빈 박사는 핸드백에서 사과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버얼리에게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던 래닝 박사도 곧 침착성을 찾고 버얼리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스티븐 버얼리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는 가만히 씹어서 삼켰다.
"보셨지요, 래닝 박사님?"
래닝 박사는 그제야 긴장을 풀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안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잔 캘빈 박사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버얼리 씨가 무엇을 드실 수 있는지에 대해 저도 궁금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닙니다."
"그런 가요?"
부드러운 버얼리의 반문에 캘빈 박사가 래닝을 보고 차분히 설명했다.
"래닝 박사님, 만약 버얼리 씨가 휴머노이드 로봇이라면 그는 완벽한 작품입니다. 누가 봐도 사람과 똑같은 외양과 똑같은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로봇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피부며, 자연스러운 얼굴 표정이며... 차라리 저런 휴머노이드 로봇이 우리 회사의 제품이었다면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토록 완벽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작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잠자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정도의 기본 인간 생리 작용도 다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충분히 대비했을 법 하다는 얘기입니다. 즉 사과 한 입 베어 문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잠시만요."
래닝이 항변하듯 말을 막았다.
"두 분은 나를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하고 계시는군요. 나는 버얼리 씨가 인간이냐 아니냐 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우리 회사가 난처한 곤경에 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버얼리 씨가 사람들 앞에서 식사만 한 번 하면 그걸로 우리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 다음에 프랜시스 퀸이 어떻게 나오든 그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나머지는 변호사나 로봇 심리학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요."
"하지만 래닝 박사님은 이 상황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간과하고 계시는군요. 다가오는 선거는 퀸 씨와 마찬가지로 내게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둘 다 선거에서 이기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참, 박사님 방금 무심결에 퀸 씨의 이름을 거명하셨답니다. 제 꾀에 넘어가셨지요?
박사님이 오래지않아 그의 이름을 직접 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래닝 박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이 문제와 선거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흑색선전이란 양날의 칼과 같은 겁니다. 만약 퀸 씨가 날더러 로봇이라 부를 배짱이 있다면 나역시 그만한 배짱은 보여줘야지요.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래닝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버얼리 씨는..."
"예. 그 친구가 밧줄을 꼬고, 그 줄을 서까래에 걸고, 매듭을 묶은 뒤 씩 웃는 것까지 다 지켜봐 줄 작정입니다. 결국 그 밧줄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되겠지만요. 제게는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 될 겁니다."
"무척 자신 만만하시군요."
수잔 캘빈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프레드, 갑시다. 우리가 뭐라한다 해서 저 사람, 마음을 고쳐먹을 것 같지는 않아요."
"후후... 캘빈 박사님은 인간을 상대로 심리학을 하셔도 되겠습니다."
버얼리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버얼리가 지하 차고에 차를 댈 때 그의 얼굴에서 래닝 박사가 지적한 그런 자신감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버얼리가 자신의 집 현관에 들어섰다.
휠체어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웃음을 지었다. 버얼리의 표정 역시 이에 화답하듯 밝아졌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거친 목소리를 내었다. 그의 얼굴에는 심한 화상 흉터가 남아 있었고 입술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늦었구나, 스티브."
"예. 죤. 약간 재미있으면서도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비록 목소리가 쉬었고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으나 죤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너 혼자 해결하기 힘든 일이더냐?"
"글쎄, 확실하게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쩜 도움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당신이니까요. 정원으로 모시고 나갈까요?

달이 아주 밝습니다."
버얼리의 억센 팔뚝이 죤을 휠체어로부터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는 죤을 정원으로 안고 나갔다. 집안의 모든 통로는 훨체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버얼리는 담과 철망으로 둘러싸인 정원으로 죤을 안고 나갔다.
"그냥 휠체어로 가도 되는데 괜히 이러는구나. 날 어린애 취급하는 거냐."
"제가 그냥 이러고 싶어서요, 싫으세요? 사실은 저 답답한 휠체어에서 가끔씩 이렇게 해방되는 것도 좋지요, 뭐. 오늘 어떠셨어요?"
그는 잔디위에 죤을 내려놓았다.
"나야, 뭐, 별일 있겠니. 너의 골칫거리가 무언지 한 번 들어보자꾸나."
"퀸이 벌써 선거 전략을 짰더군요. 제가 로봇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답니다."
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럴 리가?"
"오늘 U.S. 로봇 사의 최고 로봇 공학자와 로봇 심리학자가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퀸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죤은 잔디를 뜯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일단 저는 퀸이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볼 작정입니다. 제게 한가지 생각이 있거든요. 한 번 들어보시고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날 저녁 알프레드 래닝의 사무실에 모인 세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프랜시스 퀸은 알프레드 래닝을 묵묵히 바라봤다.

래닝은 수잔 캘빈을 쏘아보고 있었고 반대로 캘빈 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퀸을 보고 있었다.
프랜시스 퀸이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털어 내려 했다.
"그 친구 허풍치는 겁니다. 괜히 배짱을 한 번 부려 보는 거라구요."
"그럼 맞서 도박을 걸어 볼 생각입니까?"
여전히 무표정한 캘빈 박사의 질문이었다.
"도박은 여러분이 거셔야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래닝의 벽력같은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에서 손을 떼도 되는 걸로 아는데요. 버얼리 씨는 분명 우리가 보는 앞에서 사과를 먹었고 이제 U.S. 사가 할 몫은 한 셈입니다."
퀸이 수잔 캘빈 박사를 향해 물었다.
"박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박사님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래닝이 갑자기 위협조로 나왔다.
"수잔 박사..."
"박사가 말씀하시도록 내버려두시오. 지금까지 30분 동안 아무 말도 없었지 않소? 이제는 캘빈 박사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습니다."
래닝은 완전히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미치기 일보 직전의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요, 좋아.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캘빈 박사.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수잔 캘빈 박사는 래닝을 슬쩍 바라본 후 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버얼리 씨가 로봇이라는 것을 증명할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지금 퀸 씨의 주장은 정황 증거 일뿐입니다. 그걸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버얼리 씨는 그 정도는 간단히 상대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그걸 아니까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겠지요. 하나는 물리적 증거이고 또 하나는 심리적 증거입니다. 물리적으로는 해부나 엑스레이 검사를 해볼 수 있겠지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는 퀸 씨가 고심해야 할 부분이고요. 심리적 증거는 그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나옵니다. 만약 그가 양자 두뇌를 가진 로봇이라면 로봇 3원칙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겁니다. 그 원칙은 모든 로봇의 두뇌에 필수
적으로 입력됩니다. 로봇의 3원칙에 대해 아십니까?"
캘빈 박사는 '로봇 공학 입문'의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그 유명한 원칙을 또박또박 들려주었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요."
퀸의 담담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만약 버얼리 씨가 그 3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는 로봇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로봇임을 증명하기는 힘들 겁니다."
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로봇의 3원칙은 사실 인간의 도덕관과도 일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로봇의 제3원칙이지요. 그리고 모든 선한 인간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며 상사나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로봇의 명령 복종에 관한 제 2법칙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힘닿는 한 서로서로 지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로봇 제 1법칙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버얼리가 로봇 3원칙을 철저히 지킨 다면 그가 로봇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만큼 훌륭한 도덕 군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로봇이라는 증명은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최소한 그가 로봇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요."
"최소한 진실을 밝힐 수는 있을 겁니다. 선생이 무엇을 원하는 지는 선생의 문제지요."

이때 래닝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로봇이 지방 검사가 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인간을 기소하고 중형을 구형한다는 건 로봇 제 1원칙에 어긋나는 얘기 아닙니까?"
퀸이 이 말에 바짝 긴장했다.
"아니오, 그런 식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검사라고 해서 그가 로봇이 아니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의 경력에 대해 모르십니까? 그는 자신이 한번도 무고한 사람을 기소한 적이 없다는 점을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닙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라면 그는 아예 피고에 대한 공소권이 없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게 그의 독특한 일처리 방식입니다."
래닝의 볼이 씰룩거렸다.
"아니오, 퀸 씨. 로봇은 사람의 잘잘못을 가릴 수 없습니다. 로봇이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고요.

선한 인간이든 악한 인간이든 로봇에게는 다같이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래닝의 말에 수잔 캘빈 박사가 제동을 걸고 나왔다.
"알프레드,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만약 어떤 정신병자가 어떤 집에 불을 지르려고 한다면 로봇은 당연히 그를 제지하려들 겁니다.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말해서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건 그렇지요."
"만약 그 정신병자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를 죽이는 것이라면요?"
래닝은 희미한 신음을 토해냈다.
"답은 간단합니다. 로봇은 죽이지 않고 막을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강구할겁니다. 만약 정말 그 정신병자를 죽이게 되었다면 그 로봇은 미쳐 버릴수 있습니다. 일단 로봇 제 1법칙을 어겼으므로 양자 두뇌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다수의 안전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이 되었을 거고 로봇은 할 수 없이 그사람을 죽여야 할 겁니다."
"그럼 버얼리 씨가 미친 로봇이란 말인가요?"
래닝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 묻어 나왔다.
"아니오. 그는 한 번도 직접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사건을 조사해서 사실을 밝혀내는데 주력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범인을 찾아냄으로써 그는 다수 대중의 안전을 보호하게 된 겁니다. 그것은 바로 로봇 제 1법칙에서 규정한 로봇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유무죄 여부를 확정짓거나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은 판사의 일입니다. 형집행 역시 다른 사람의 몫입니다. 버얼리가 검사로써 하는 일은 바로 정의의 구현과 사회 공익의 추구일 뿐입니다."
"사실, 퀸 씨, 선생이 이 문제를 들고나온 후 버얼리의 경력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한 번도 사형 집행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는 사형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있으며 범죄 심리학 연구소에 상당한 기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사법 제도의 처벌적 기능보다는 선도적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특이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캘빈 박사의 말에 퀸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로봇같다는 의심이 들지요?"
"글쎄요. 뭐,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런 행동은 로봇에게나 가능한 것이지요. 아니면 아주 고매한 인격자이거나... 중요한 것은 로봇과 훌륭한 사람과의 구분은 여전히 힘들다는 것입니다."
퀸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래닝 씨, 인간의 외양을 고대로 빼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작하는게 가능한 일입니까?"
래닝은 약간 주저하다 답변했다.
"U.S. 로봇 사가 개발에 성공한 적은 있습니다. 인공 수정란과 호르몬 조절을 통해서 실리콘 플라스틱 골격 위에 인간의 피부 조직을 배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렇게 배양된 안구라든가 모발, 피부 등은 인간의 세포 조직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 인조 신체에 양자 두뇌나 다른 조직을 더하면 휴머노이드 로봇이 완성됩니다."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적절한 기구, 양자 두뇌, 골격, 수정란, 호르몬, 방사능 조사 기구 등이 완비되어 있다면 약 두달이면 제작 가능합니다."
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제는 버얼리의 배라도 갈라봐야 겠군요. 그렇게 된다면 U.S. 로봇 사에게는 타격이 되겠으나 저는 이미 이런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드렸습니다."
래닝은 캘빈 박사와 단 둘이 남게 되자 화난 표정으로 캘빈 박사를 보았다.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캘빈 박사가 순간적으로 말을 끊었다.
"원하는 게 뭔가요? 진실입니까, 나의 사표입니까? 나는 거짓말은 못합니다. 이 정도 문제는 U.S. 로봇 사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레 겁먹지 마십시오."
"만약 퀸이 정말로 버얼리를 해부하려 든다면? 버얼리의 뱃속에서 나사나 기어같은게 나온다면 그땐 어쩌겠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버얼리도 퀸 못지않게 영리하니까요."



그 소식이 터져 나온 것은 버얼리가 선거 입후보를 천명하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이 소식과 동시에 웃음도 함께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우스개 시리즈를 만들기도 하고 서로 로봇이 아니냐고 농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퀸이 집요하게 언론 플레이를 계속하자 사람들은 점차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후보 선출 투표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원래 후보 지명전에 나선 사람이 버얼리 뿐이었고 다른 후보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끝내 다른 공천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버얼리의 당에서는 그의 공천을 주저하고 있다. 모두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이러한 루머가 일반 시민을 표적으로 하고 있더라도 문제는 심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가장 유력한 시장 후보에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버얼리가 후보 공천을 받은 다음날 한 일간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로봇 심리학과 양자 두뇌 분야의 전문가' 수잔 캘빈 박사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바로 '근본 주의자'들이 바라던 사회 환경이 조장된 것이다. 이들은 정치 단체나 정당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종교 단체도 아니다.
이들은 한때 원자력 시대로 불렸던 현대 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을 단순하게 살기를 바라는 자연 회귀론자들이었다.
근본 주의자들은 로봇과 로봇 생산 회사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입장을 취해 왔다. 이제 그들은 퀸의 주장과 캘빈 박사의 분석을 토대로 로봇 반대 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U.S. 로봇 사의 거대한 공장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망이 쳐졌다. 전쟁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버얼리 씨는 경찰의 특별 경호를 받게 되었다.
흔히 선거 때마다 쟁점이 되는 정치적 사안들은 이번에 아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선거전의 양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해져 갔다...

버얼리는 자신의 집을 찾아 온 작은 체구의 사나이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그 사나이의 뒤에 서 있는 경관들의 모습에도 별 개의하지 않아 보였다. 집밖에는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방송국 취재 팀이 버얼리 검사의 수수한 자택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고, 한 기자가 격정적인 목소리로 현 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키 작은 사내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두터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버얼리 씨, 이것은 에, 로봇이나 기계 인간의 불법적인 사용을 조사 하기 위한 가택 수색 영장입니다."
버얼리는 몸을 약간 일으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는 서류에 무심히 한 번 눈길을 준 뒤 미소를 지으며 되돌려 주었다.
"그렇군요. 일을 보십시오."
버얼리는 가정부를 불렀다.
"이 분들에게 집안을 안내해 주십시오."
해로웨이란 이름의 그 작은 사내는 약간 주저하다가 뒤에 서 있는 두 경관에게 손짓하고 집안으로 향했다.
그의 수색은 십분 만에 끝났다.
"끝났습니까?"
질문이나 답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버얼리의 물음이었다.
해로웨이는 목청을 가다듬었으나 목이 메어 말문이 막혔다. 그는 다시 목을 고른 뒤 화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버얼리 씨, 저는 집안을 샅샅이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금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나요?"
"구체적인 조사 대상에 대한 명령도 받았습니다."
"조사 대상이요?"
"예, 용건을 간단히 하자면 저희는 선생님의 몸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의 몸을요? 어떻게 말입니까?"
검사의 얼굴에는 짖궂은 미소가 그려졌다.
"저희는 방사능 투과 장비를 가져왔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자는 말이군요. 어떤 권한으로 말입니까?"
"좀전에 영장을 보셨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이마가 유난히 번들거리는 해로웨이가 다시 영장을 꺼내 보였다.
"여기 영장 집행 대상이 명기되어 있군요. 제가 읽어보죠. '에반스 트론 지역, 윌로우 그로브 가, 355번지, 알렌 버얼리 소유 저택, 차고, 창고, 기타 부속 건물 포함' 등등... 좋습니다. 하지만 조사 대상에 저의 신체는 포함되지 않는데요. 저는 집안의 부속물이 아니라, 이집 주인입니다. 다만 내 호주머니에 혹 소형 로봇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몸을 뒤지는 것까지는 봐 드리지요."
해로웨이는 자신의 밥줄이 누구에게 달려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잘 처리해 내면 어떤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 보십시오. 저는 집안의 모든 내부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도 현재 이 집안 내에 있지 않습니까?"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저도 집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의 일부가 아닙니다. 저는 엄연한 법적 권리를 가진 자연인입니다. 저는 엄연히 세금을 내는 시민입니다. 고로 저의 신체에 대한 조사는 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그 저택 수색 영장으로는 안되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만약 선생이 로봇이라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 영장을 살펴보면 그 영장은 나를 인간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법적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디에 그런 말이 있다는 거요?"
해로웨이가 영장을 가로채 갔다.
"그 영장에 '알렌 버얼리 소유 저택'이라고 되어 있지 않소? 법적으로 로봇에게는 부동산이나 동산에 대한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서 상관에게 말하시오.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영장을 발부하려 한다면, 명예 훼손 소송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말이오. 그리고 재판에서 그는 현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내가 로봇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이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명예 훼손에 대한 엄청난 액수의 피해 보상을 물어야 할 꺼요. 가서 들은 대로 전하시오."
해로웨이는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정문에 이르러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역시 들은 대로 말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요."
그는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나가며 문밖에 서 있는 기자들에게 득의 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자 양반들, 내일 아마 재미있는 기사 소재가 생길 거요 두고보시오."
그의 지상용 차안에 들어가 호주머니 속에서 작은 기구를 하나 꺼냈다. 면밀히 기구를 살펴보았다. 그가 엑스레이 사진기를 사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기구가 제대로 작동되었기를 바랬다.


퀸과 버얼리는 독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상 전화를 통해 일대일로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화면의 화소 조합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기에 직접 만났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연락을 먼저 해 온 것은 퀸 쪽이었다. 그는 인사치레도 없이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버얼리 씨, 나는 당신이 엑스레이 투과 방지 기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에 알릴 작정입니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선생은 이미 그 사실을 일반에 알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기자들이 내 사무실 전화를 도청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최근 몇 주는 집에서 보내고 있지요."
퀸은 입맛을 다셨다.
"이 전화는 도청 방지 장치가 되어 있소. 이런 전화를 건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일정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거요."
"하긴 그렇군요. 선생이 이 로봇 소동의 배후 조종자라는 사실은 아직 비밀이니까... 하지만 그건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별로 크게 걱정하실 문제도 아닌 걸요. 그래, 제가 엑스레이 투과 방지 장치를 착용하고 있다고요? 당신의 끄나풀이 찍은 엑스레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군요.
노출이 너무 심하게 되었나 보지요?"
"버얼리 선생. 왜 당신이 엑스선 촬영을 꺼리는 지, 그 이유는 누가 보더라도 자명할 것이오."
"퀸 씨의 부하가 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사실도 누가 보더라도 자명하겠지요."
"당신의 프라이버시는 문제가 안되오."
"그럴까요?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양측의 선거 운동에 가장 핵심사안 아닙니까? 당신은 개인의 권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저는 그 반대입니다. 저는 저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엑스레이 촬영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일반 시민의 권리보호가 바로 저의 제1공약 아닙니까?"
"흥미 있는 주장이군요. 하지만 아무도 당신 말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왠지 억지 같지 않소? 그리고 그날 조사 결과에 한 가지 빠진 게 있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퀸은 앞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뒤적였다.
"여기에는 당신 집에 같이 사는 어떤 장애자에 대한 내용이 없소."
버얼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장애자는 나의 은사로써 지금 두 달째 요양차 시골에 내려가 계십니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지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당신의 은사라고요? 혹시 무슨 과학자 아니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변호사 셨지요. 생체 물리 학자로서의 연구 자격증도 있고, 실험실도 갖고 계시지요. 그분이 하는 연구는 모두 합법적 절차를 거쳐 허가 받은 것이오. 대단한 연구라기 보다는 지체가 불편해서 그저 시간이나 보내려고 소일거리 하시는 거지요."
"그럼, 당신의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로봇 제조 기술에 대해 알고 있소?"
"제가 모르는 분야라 뭐라 답을 드릴 수가 없군요."
"양자 두뇌를 입수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건 U.S. 로봇 사에 있는 당신의 친구들에게 물어 보면 알일 아닙니까?"
"용건만 간단히 하겠소. 버얼리 씨. 당신의 그 몸이 불편한 선생이 바로 진짜 스티븐 버얼리요. 그리고 당신은 바로 그가 만든 로봇이오. 우리는 그 점을 입증할 수도 있소. 교통 사고를 당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당신의 스승이오. 기록을 조사해 보면 다 알게 돼 있소."
"아, 그래요. 그럼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그 은사의 집도 수색할 것이오. 아마 수색 결과가 아주 흥미로울 것이오."
"그건 당신 뜻대로 안될거요. 이미 말했듯이 나의 은사는 지금 요양 중이오. 그는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요. 그의 개인 프라이버시 역시 법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오. 만약 당신이 마땅한 이유 없이 그 분의 집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발부할 한다면 환자의 안정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오."
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퀸은 위협적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그의 이마 주름살이 뚜렷해 졌다.
"버얼리, 왜 이쯤에서 포기하지 않는 거요? 당신은 당선될 수 없소."
"그럴까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은 자신이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반 대중 앞에서 증명하지 않는 한 시민의 신뢰를 살 수 없소.
게다가 이 문제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 한다면 당신이 로봇이라는 의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오."
"글쎄요. 그래도 당신 덕에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지방 검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 점 퀸 씨의 공이 큽니다."
"하지만 당신은 로봇이오."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오."
"현재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명한 사실이오."
"그럼 안심하십시오. 선생이 이미 선거에서 이긴거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안녕히 계시오."
퀸이 화난 목소리로 통화 끊었다.
"안녕히 계시오."
버얼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먹통이 된 화면에 대고 말했다.



버얼리는 그의 선생님을 선거 일주일 전에 다시 집으로 모셔 왔다. 공중용 차는 그의 집 안마당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여기 계십시오. 혹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에 여기 계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뒤틀린 안면 근육 때문에 가뜩이나 거친 죤의 목소리는 더 거칠게 나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버얼리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다.
"혹시 테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니?"
"근본 주의자들이 그런 위협을 계속하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낫지요. 하지만 큰 말썽은 없으리라 봅니다. 근본 주의자들이 실세를 가진 조직은 아닙니다. 그냥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킬 만한 건수나 찾는 거지요. 여기 계시는 게 싫지는 않으시지요? 여기 계셔야 제가 선생님에 대한 걱정이 좀 덜할 것 같습니다."
"여기 머무르마. 그런데 일은 잘 풀릴 것 같니?"
"확신합니다. 시골에서 누가 귀찮게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 사람은 전혀 없었다."
"선생님 쪽 일은 잘 진행되었구요?"
"응, 문제가 없단다."
"그렇다면 편히 쉬세요. 그리고 내일 TV를 꼭 보세요."
버얼리는 맞잡은 죤의 손을 꼬옥 쥐었다.


렌튼의 앞머리는 긴장감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버얼리의 선거 운동 본부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 하지만 선거 운동 참모로써 그는 지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이렇다할 무슨 득표 전략 하나 짜내지 못했다. 게다가 버얼리는 자신의 전략에 대해 다른 사람과 상의를 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럴 순 없소!'란 말이 늘 렌튼의 입에 붙어 다니게 되었다. 아니 그 말이 자신이 하는 유일한 어구가 되었다.
"스티브, 내 분명히 말하는데, 그럴 순 없소."
그는 자신의 연설 원고를 뒤적이고 있는 지방 검사의 앞을 막고 나섰다.
"스티브, 그걸 내려놓아요. 지금 집 앞에는 근본 주의자들이 소집한 군중이 몰려와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리라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차라리 돌 맞기가 쉬울 것입니다. 왜 군중집회를 고집하는 겁니까? 라디오나 TV를 통한 연설이 훨씬 더 안전할 겁니다."
"랜튼 씨, 제가 선거에서 이기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오, 지금 이 판국에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당선이 아니라 안전이오."
"내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이런... 당신은 지금 저 오만 명의 흥분한 군중 앞에 나가 연설한다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중세 시대의 군주 처럼 연단에 서서 일장 연설을 하면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환호하리라 생각합니까?"
버얼리는 아무 말없이 시계를 보았다.
"이제 5분 남았습니다. 예정된 TV방송 시간이 되면 연설을 시작할 겁니다."
랜튼은 끙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버얼리 집앞 집회 장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나무와 집 지붕에 설화처럼 피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집회는 초음파 중계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되고 있었다. 일개 지방 선거가 전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같은 생각에 고무된 버얼리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관중을 보니 그의 웃음기가 싹 달아나는 듯 싶었다. 그를 비난하는 각종 피켓과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로봇으로서의 정체를 밝히라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연설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근본 주의자들이 운을 맞추어 반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버얼리는 이에 아랑곳 않고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뒤에 선 랜튼은 초조히 주먹을 쥐고 혹시 긴급 사태가 생기지 않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앞자리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한 시민이 연단으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한 경찰관이 그를 저지하려고 몸을 날렸다. 버얼리는 손을 저어 경호 경찰을 제지했다.
마른 체구의 그 사나이는 이제 연단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는 무어라 외쳤으나 그의 말소리는 군중의 소란에 가리어 들리지 않았다.
버얼리가 몸을 기울여 그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약 질문이 있다면 여기 올라와서 떳떳이 하십시오. 기꺼이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명했다.
"저 분을 연단 위로 모시지요."
군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질서! 질서!'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결국 집회장이 조용해졌다. 그 마른 사나이가 이제 연단 위에 올라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버얼리가 물었다.
"후보인 저에게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그 마른 체구의 사나이는 한참을 노려보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쳐봐!"
그는 단호한 몸짓으로 턱을 내밀었다.
"나를 패보라구. 당신은 자신이 로봇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그렇다면 한 번 증명해 봐! 너는 나를 칠 수 없어. 이 기계 인간아!"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겐 당신을 칠 이유가 없습니다."
사나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칠 수가 없는 것이겠지. 너는 인간의 털 끝 하나 다칠 수 없어. 너는 인간이 아니야. 너는 가짜 인간, 바로 로봇이라고!"
입술을 굳게 다문 버얼리는 수천 명의 청중과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그 사나이의 턱에 정통으로 강한 주먹을 날렸다. 그 사나이는 불의의 기습에 나가 떨어져 놀라 눈만 껌벅거리며 버얼리를 올려다보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버얼리가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경호원, 이 분을 모셔 가세요. 혹시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보고요. 연설이 끝나고 정식으로 사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귀빈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캘빈 박사는 조용히 차를 몰고 집회를 빠져 나왔다. 기자 한 명만이 충격에서 정신을 차리고 얼른 캘빈 박사를 쫓아가 질문을 던졌다.
수잔 캘빈이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답했다.
"스티븐 버얼리 후보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기자는 속보 작성을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나머지 연설에 귀기울이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캘빈 박사와 버얼리는 버얼리의 시장 취임 1주일 전에 다시 만났다.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이었다.
캘빈 박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군요."
시장 당선자는 웃음을 지었다.
"잠을 별로 안자는 데도 그렇지요. 퀸 씨에게는 일러주지 마십시오."
"그럴 일없을 겁니다. 하지만 퀸 씨한테는 좀 안되었군요. 그 사람의 전략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 정도요."
"상당히 극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스티븐 버얼리는 젊은 검사이다. 명연설가에다 이상주의자이다. 약간 재미있는 것은 너무 건강하다는 것이다. 버얼리 씨, 혹시 로봇 공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법에 관련한 부분만요."
"원래 스티븐 버얼리 씨는 로봇 공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불행히도 사고를 당했구요. 부인을 잃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게 되었지요. 그는 두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큰 흉터가 남았고 그는 목소리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약간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성형 수술을 받으려 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세상을 등지고 칩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사고를 당했지만 그의 두뇌는 여전히 천재적이었습니다. 두 팔도 멀쩡했구요. 어떻게 그는 양자 두뇌를 하나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고급 제품으로 말입니다. 도덕적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최고급 양자 두뇌였습니다.
그는 그 두뇌에 신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로봇에게 자신이 잃어버린 삶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 로봇에 스티븐 버얼리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불구가 된 스승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았습니다."
시장 당선자가 입을 열었다.
"불행히도 그러한 주장은 모두 제가 사람을 치는 순간 도루묵이 되어 버렸지요. 신문을 보니 제가 로봇이라는 의혹은 캘빈 박사님이 공식적으로 제가 인간이라고 인정한 순간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지요? 제게 이야기하는 게 싫은 가요? 그게 과연 단순한 사고였습니까?"
"완전히 그렇진 않습니다. 퀸의 공이 크지요. 제 쪽에서 소문을 은밀히 퍼뜨렸습니다. '버얼리는 로봇이기에 사람을 팰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저는 대중 집회를 열었지요. 아마 어떤 바보가 제게 도발해 오리라 확신했지요. 그 작전이 적중한 겁니다. 분위기만 제대로 무르익으면 누구든 그렇게 나서 자기를 패 보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상태에서 그런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이상 저에 대한 모든 의혹은 유언비어로서 눈 녹듯 사라지고 저의 승리가 분명해 졌지요. 적의 허를 찔러 쉽게 당선될수 있었던 겁니다. 퀸의 공이 크지요."
로봇 심리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리학은 제 전공인데 버얼리 씨가 더 잘아시는군요. 하지만 저는 일이 이렇게 끝이나 약간 서운하기도 합니다. 저는 로봇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저는 사람보다 로봇을 더 좋아합니다. 저는 만약 로봇이 공직에 오른다면 최고의 공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로봇 3원칙 때문에 로봇이 인권을 침해하거나 독재를 부리거나 뇌물을 받거나 실정을 할 염려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임기를 훌륭히 마친 뒤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로봇이라고 알리는 일 없이 조용히 정치 무대에서 퇴장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로봇을 지도자로 섬겼다는 것이 인간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죠. 인간의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해 그 로봇은 조용히 은퇴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로봇은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로봇이라 할지라도 결점은 있는 법 아닙니까? 최고급 양자 두뇌도 인간의 두뇌를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능력 있는 보좌관을 두면 되지요. 어차피 아무리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도 실수는 하게 마련이고 보좌관이 필요한 법이지요."
버얼리는 수잔 캘빈 박사의 얼굴을 흥미있게 쳐다봤다.
"왜 미소를 짓는 겁니까, 캘빈 박사님?"
"왜냐하면 그 똑똑한 퀸 씨도 실수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가 생각못한 부분이 있다는 겁니까?"
"예, 아주 작은 부분을 놓쳤지요. 선거가 있기 전 3개월 동안 퀸씨가 원래의 스티븐 버얼리라고 주장한 당신의 불구자 선생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골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는 당신의 그 유명한 연설직전에 다시 돌아왔지요. 하지만 워낙 주어진 시간이 촉박해서 그가 만든 두 번째 제품은 첫 번째 것과 비교했을 때 아주 단순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캘빈 박사는 일어나 옷매무새를 만졌다. 박사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 말은 로봇이 로봇 제 1원칙을 깨뜨리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경우가 하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수잔 캘빈 박사는 문가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매를 맞는 상대방이 똑같은 로봇일 때지요."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녕히 계세요. 버얼리 씨. 5년 후 대통령 선거때 기회가 된다면 꼭 선생에게 표를 던지고 싶군요."
스티븐 버얼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당치도 않는 말씀이십니다."
수잔 캘빈 박사의 뒤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9개의 댓글

2017.07.28
아시모프 센세 단편 느무 좋은것
0
2017.07.28
아 존나 좋다. 좋은 글 올려줘서 고맙다.
0
2017.07.28
엇 이거 어렸을때 봤던 소설책 내용인데. 제목이 로봇 어쩌구였는데 추억돋네
0
2017.07.28
가지않은 길 후속편도 올려주실 수 있나영
0
2017.07.29
@Lv NoYeah
허빅-하로는 번역된게 없음

영문으로 읽고 싶으시면 https://pastebin.com/rT1Aq8pr 여기서 읽어보시길
0
2017.07.29
@피빛여우
워 가볍게 보려고 했더니 의외로 기네. 링크 감사합니당!
0
2017.07.29
꿀잼이네
0
2017.07.30
진짜 좋다
0
2017.08.01
갓이작 갓시모프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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