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1914년 12월

1914년 12월


장갑위로 떨어진 한송이의 눈꽃이 녹지 않았다. 녹기는 커녕 그대로 얼어붙는 느낌, 반대손으로 털어내자 뭉친 눈들이 뽀드득 소리를 내며 넓게 퍼졌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2달이면 끝날것만 같았던 전쟁은 진창에 빠진 바퀴마냥 어떻게 헤어날 수 없이 더더욱 깊은곳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습한 참호 속, 추위까지 들어닥치자 굴을 파고 시체를 갉아먹던 쥐들마저 대부분 동사해버리거나 추위를 피해 달아나버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전사자들의 몸에서 코트를 벗겨내 한겹이라도 더 둘러씌는 것 뿐이었다. 특유의 시취가 코를 찌르고 스며든 핏물이 얼어붙어 가루처럼 부스러졌지만 그런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버틸 수 있느냐 죽느냐, 두가지 갈림길에서 톰은 술 한모금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싸구려 럼주라도 몸을 잠시나마 데워줄수 있을테니까. 가지고 있는 간식이라곤 말라 비틀어진 비스킷 한조각이 전부였다.


"톰, 소포다."


유일하게 참호에서 위안이되는 것이라곤 비정기적이나마 오는 소포였다. 허겁지겁 뜯어보자 그녀의 사진과 함께 손바닥만한 감색 포장지의 쵸콜렛 한덩이가 딸려나왔다. 빌어먹을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째선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위안과 회한과 원망, 갖가지 감정들이 동시에 휘몰아치며 가슴을 두드려대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밝은 별빛들이 반기었다. 자신들의 상황이라곤 아무것도 모른다듯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휘날리는 눈송이들은 순식간에 죽은듯이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몰아치는게 아닌 하늘하늘 창가의 레이스 마냥 부드럽게 떨어지는 그 눈들을 그들은 모두다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ㄱ...ㅗ요한 밤.... 거룩한 밤......"


어디선가 흐느끼는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평소라면 책망을 할 법도 하지만 다들 그 목소리에 맞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둠에..... 묻힌밤"


톰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것을 알고 놀라선 주위를 한번 쓱 훑어보았다. 자신만이 그런것이 아니었다. 다들 쓴 웃음을 한번 짓더니 눈을 감고선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대체....무슨....'


톰의 눈동자가 잠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 역시 이내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곤 조용히 눈을 감고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절을 따라 불렀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모두가 동참했다. 전장에 캐럴이 울려퍼졌다.


12월 24일.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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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참호 위 목책에 감아둔 철망위에 벌새한마리가 날아들었다. 벌새는 잠시 철망위에 쌓인 눈을 쪼아먹더니 이내 저 멀리 날아갔다. 벌새가 철망에 앉을때 부터 바라보던 톰은 문득 손의 떨림이 멎는 것을 느꼈다. 추위로 손 끝이 떨어져나갈것만 같은 고통도, 공포와 불안감도 어째선지 새가 떠남과 동시에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톰은 어째선지 일생 처음 하지말아야 할 것을 하고 싶은 충동에 갑작스레 휩싸였고 그 충동이 발현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빌더는 오랜만에 편한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툭 튕터나온 돌덩이에 머리를 기대고 눅눅한 참호 바닥과 구부정한 자세였지만 참호에 들어서고 나서 이토록 기분좋은 잠은 처음이었다.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기 전 까지만.


"톰.....? 뭔가 시끄럽......."


반쯤 잠긴 눈으로 옆을 바라보던 빌더는 그 소리가 사다리를 타는 소리라는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을때는 이미 뒤늦은 후였다. 어째선지 톰은 모자를 벗고 높이 든 채로 사다리를 올라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참호 너머에서 총알이 날아와 꿰뚫을것만 같았다. 하얀 설원위에 서서히 올라서는 갈색의 군복은 좋은 표적이었다.


"무, 뭐하는 거야 이 미친놈!"


허겁지겁 끌어내리려 했지만 손이 연거푸 눈때문에 미끄러져 내렸고 톰은 이내 참호 위로 완전히 올라섰다. 두손을 든 채로 뭔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의 표정에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증만 가득할 뿐이었다.


"괘, 괜찮아요. 저쪽에서 아직 쏘지 않았어요."


이른 아침의 미친짓에 참호안의 모두가 깨어나 이 정신나간 짓거리를 잠시나마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다들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는 품에 안고있던 소총을 들어 적진을 향해 겨냥하기 시작했다. 무슨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도 나찌라면 더더욱.

그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는지 소동이 일더니 소총머리가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비무장의 군인이 이렇게 홀로 참호위로 올라오는 것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총구들은 그저 톰을 겨냥만 할 뿐 발포는 되지 않았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처음에 빌더는 자신들 쪽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절반만 맞는 것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쪽 뿐만 아니라 적진에서도 총구가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상대편에서도 한 사람이 두 손을 들고서 서서히 올라서고 있었다. 군복과 모자에 새겨진 나찌문양, 그도 톰과 마찬가지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서로의 소리가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톰은 어째선지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는것만 같았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다.


떨리는 두 발, 금방이라도 미끄러질것만 같은 불안한 보폭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섰다. 서로 절반쯤 나아갔을까, 톰은 뒤를 돌아보았다.

올라온것은 자신 뿐만이 아니었다. 빌더는 물론이고 비딕, 미들턴, 조지, 델렌.... 겨누던 총구를 내리고서 자신과 같은 미친짓에 동참이라도 하듯 사다리를 타고서 올라오고 있었다. 불안함에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들 역시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톰은 침을 삼키고서 앞을 바라보았다. 평상시라면 절대로 오는곳이 불가능한 접경지역, 주위에 널린 시체들이


'곧 너도 이렇게 될껄?'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서 다시금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이내 상대와 만날 수 있었다. 푹 눌러쓴 나찌모자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코트와 당혹감이 서린 눈빛, 마치 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톰은 그런 그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듯이.


"내 이름은 톰이야"

"내, 내이름은 어스라고 해."

"반가워 어스."


마주잡은 손이 너무나도 따스했다. 그 손이 너무나도 따스한 나머지 톰은 할말을 잊어버린 채 그저 웃음을 지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톰은 어스의 뒤를 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총을 내버려 둔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스의 두 눈에 비친 광경도 마찬가지였다. 톰과 같은 사람들이 양손을 내리고서 마치 뭔가에 홀린듯이 걸어오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두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향해 인사를 건네었다. 망설임은 한순간이었다. 이내 서로가 물결치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이는 공을 들고, 사진기를 들고, 의자와 여벌의 옷을 챙겨든 채로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12월 25일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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