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가깝고도 먼 거리 사이에서

"여기도 오랜만이네."

 

문 앞에 쳐져있는 거미줄을 걷으며, 나는 쓰게 웃었다.

 


지방의 중소기업 회사원인 나는 두달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후, 유산으로 이 집을 물려받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살았던 곳. 대학을 들어가고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는동안의 긴 시간에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들를법도 했었을텐데, 나는 전혀 찾아가질 않았고, 부모님도 그걸 서운해하거나 하시지는 않았다. 이제와서 할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문을 열자, 정원에 살짝 자란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밖에서 놀면서 저런 잡초를 뽑곤 했었는데... 살짝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간의 시간이 있으니 나중에 뽑기로 하고 정원을 지나쳤다.

 

 

현관에 들어와서 신발을 벗자마자 나는 무언가 위잉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둑이라도 들었을까 싶어 살그머니 움직이는 순간, 다리에 무엇인가 부딪혔다.

 

"로봇이잖아?"

 

분명 내가 택배로 보낸 먼지 청소용 로봇이었다. 배터리 잔량이 일정 이하면 자동적으로 충전을 시작하는 기능을 갖고있는데, 이게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나보다.


"전기 아깝게..."


물려받고도 집을 관리 하지 않은 죄책감을 지우려는듯 투덜거리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로봇을 붙잡고 전원을 끈 뒤, 나는 부모님의 방에 들어갔다. 옷장에 들어있는 양복이나 평소처럼 개어진 이불은 곧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의 주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


죽 둘러보다 한구석의 벽에 시선이 박혔다. 차례대로 박혀있는 내 졸업사진 고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초등학교.....


"...?"


뭔가 잊어버린 기분이다. 얼핏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얼굴. 얼굴을 기억하는건 서툴지만, 왠지 모르게 지나쳐서는 안될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잠시 쉬어야겠군."


내 방은 어떻게 남아있을까. 호기심 반, 그리움 반의 감정에 이끌려 나는 나의 방을 살짝 열었다.



"전혀 변한게 없구나."


마치 그때로 돌아간듯한 이 방은 시간이 멈춘듯, 마지막으로 비운 상태 그대로였다. 흐트러진 이불정도는 원래대로 개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아예 변한건 아니네."


방에 하나 달린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저 멀리서 병원이 보이곤 했다. 높은 건물이 학교정도밖에 없는 이 시골에서 그 병원의 존재는 병자들에게는 든든함의 상징이었으며, 어린아이에겐 공포의 상징이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여러 악재가 터지면서 병원은 사라졌고, 그자리에는 공동묘지가 들어섰다.


"예전에 뭘 썼었더라."


창문을 닫고, 오랜만에 서랍을 뒤지니 그때로 되돌아간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처박은 군번줄, 옛날에 많이 갖고놀았던 카드, 지금은 스마트폰에 밀려버린 휴대용 게임기. 떠오르는 추억에 미소지으며 서랍을 닫는 순간,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게 있었나?"


하얀 종이를 몇번 접은것은 딱지라고 부르기도 뭣했다. 애매하게 낡기도 해서 언제, 이것을 갖고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주소네?"


침대에 누워서 종이를 펼쳐보니, 가려진 부분에는 조밀한 글씨로 주소로 보이는 지명이 적혀있었다. 이건 내 글씨도 아니고, 지명 자체도 여기선 꽤 멀었지만, 왠지 익숙하고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졸리네.'


먼길을 차로 달려와서 피곤한걸까? 나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눈이 가물가물 거린다. 지금 자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기에 나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따뜻하네.'

 

요를 펴서 바닥에 깔고 누운뒤, 이불을 덮었다. 오랜만에 덮는 집의 이불. 그동안 몸이 많이 자랐는데, 아직도 이불이 내 몸을 다 덮는다는 사실에 오묘함을 느끼며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욘석! 팔 분질러먹고 잠이 오니?"

 

갑작스레 머리를 때리는 충격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야..."


머리를 맞은곳도 아팠지만, 왼팔이 무지무지 아팠다. 


"다음 환자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잔뜩 찡그렸는지 어머니가 또 뭐라고 잔소리를 하려는 순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어머니의 얼굴에 나도 안도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이 부러졌네요. 어떻게 다친건가요?"


"교통사고에요. 차에 치였죠."


자전거를 타고가다 뭔가에 치인 기억은 나는데 아마 차에 치였던 모양이다.


"단순히 보면 팔이 부러진것같은데, 아직 어린아이라 얼마나 크게 다쳤을지 모르니 한달정도 입원시켜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보니까 사고가 난지는 얼마 안됬군요. 지금 합의가 아직 안됬을텐데, 입원 비용도 사고를 낸 당사자에게 청구하시면 됩니다. 이제 막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으니까. 한달정도는 입원해도 되고요."


이어지는 말에 어머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내 입원이 결정되었다.



"자주 올게."


일단 환자복으로 갈아 입은 뒤, 깁스를 하고 나오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없는 시간을 쪼개어 온 것이며, 내가 퇴원할때도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말없이 최대한 밝은 미소만을 지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가고, 나는 병실로 안내되었다. 병원에 오직 하나뿐인 병실에는 나를 포함해서 두명의 이름이 쓰여져있고, 나머지 네칸은 비워져있었다. 사고날일도 없는 한적한 시골의 병원이다보니, 입원 하는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것 같다. 병실도 하나뿐이고.


"병원 밖을 나가면 안되고, 다른 침대에서 자거나 하는것도 안돼요. 그리고 11시에는 불을 끄니까 그때는 자야하고, 무슨일 있으면 이 버튼을 누르면 돼요. "


간호사 누나는 간단하게 설명을 해준 뒤, 내게 작은 가방을 건네주었다. 그 와중에 또 없는 시간을 쪼개서 어머니가 보낸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할게 있는데, 저 애, 상태가 나빠지면 저기 저 버튼을 눌러줄 수 있어?"


간호사 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좀있다 저녁 갖다줄게."


첫말의 딱딱함을 날려버린 간호사 누나가 가고, 나는 가방을 열어보았다. 일기장 한 권과 필기구, 학습용 놀이도구등이 있었다. 가방안에 다시 물건을 집어 넣은 뒤, 나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침대는 우리집 장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딱딱한 편이었다.


'심심하다...'


한창 밖에서 놀기 좋은 때다. 아직 장마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더우면 근처 강가에 몸을 담가도 되고, 아니면 계곡으로 가도 되었다. 


'쳇.'


밖을 바라보다 왠지 저 너머에 친구들이 노는것이 보이는 듯 해서 나는 고개를 돌리다 반대편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여자아이임에도 나보다 살짝 큰 키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봤을때 나보다 어른일테지만, 멍하게 밖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나는 잡아뜯겨진 잠자리의 날개가 생각났다. 


"?"

 

내 시선을 눈치챈건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별 다를게 없는 까만 눈동자는 약간 지친듯 보였다.

 

"..."

 

그러나 이 상황에서 뭔가 할말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

 

그냥, 아무생각 없이 활짝 미소를 짓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몇살이니?"

 

그렇게 아무말 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힘없는 갸냘픈 목소리는 성숙하진 않았지만, 앳됀 목소리 또한 아니었다. 묘한 울림이 드는 그 목소리가 나는 맘에 들었다. 

 

"13살이요."

 

"아직 초등학생이네."

 

"누나는요?"

 

"나는 17살. 이래보여도 고등학생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잠시 말이 끊겼다.

 

"..누나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다섯달 전."

 

누나의 대답에 나는 깁스한 팔을 만져보았다. 팔이 부러진것도 한달이면 낫는다는데, 다섯달이면 대체 어디가 아픈걸까 싶었다.

 

"많이 아파요?"

 

"... 잘 모르겠어. 너는 착한애구나." 

 

그동안 사고뭉치라는 소리만 들어온 나였다. 그런 내가 처음 누나에게 착하다란 말을 들었을때, 나는 뭔가 어울리지 않은 모자를 쓴듯한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다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저녁을 먹고 잘 시간이 되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인사를 안하고 침대에 눕는건 처음이네.'

 

늘 자기전에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자야했기 때문에 이번 상황은 아직 낯설었다. 처음 누워보는 침대에 적응하지 못한건지 나는 결국 새벽에야 잠들고 말았다.

 


"친구라도 오니?"


다음날,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다시 검사를 받고 와서 밖을 바라보는데, 어제 그 누나가 말을 걸었다. 오늘은 아프지 않은지, 어제보단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아뇨. 안올거에요. 아마 입원한것도 모를걸요."


아무래도 창밖을 바라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고, 그저 나는 좀 졸릴뿐이었다.


"누나는 어때요?"


"나야 뭐..."


내 물음에 누나는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영 아닌 모양이다.


"한번도 안왔어요?"


"응..."


"그러면 저랑 똑같네요."


내 말에 누나는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가 누나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나이로 느껴졌다.


"심심하지 않았어요?"


"저기 너머엔 고등학교가 있어. 그래서 방학 전에는 아침에 이쪽으로 애들이 등교하곤했거든. 그런걸 지켜보면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어." 


말은 가벼웠지만 내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는 누나의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럼, 누나. 저랑 친구할래요?"


"초등학생이랑?"


내 말이 하도 어이없었는 모양이다.  


"그런건 상관없잖아요. 저는 심심하거든요."


나는 당돌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평소에는 핀잔만 듣고 끝날 일이었는데, 뜻밖에도 누나는 재미있다는듯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하지만 누나라고 불러야된다?"


"네, 누나."


그 후 뭔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점심시간이 되어, 대화의 장은 조금 뒤로 미루어졌다.



"보통 친구가 되면 뭘 하니?"

"저같은 경우엔 밖에 나가서 놀죠. 카드게임을 할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지금은 밖에 나갈 수 없다. 그리고 카드는 갖고오지 않았다. 애당초 산것은 부모님에겐 비밀이다.

"누나는요?"

"같이 쇼핑을 하거나, 아니면 집에 놀러가지."

하지만 그것도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한숨을 내쉬며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보면 기분이 맑아지는것 같아서 좋아. 너는 어떠니?"

"저는 지금 밖에서 놀고있을 애들에게 장맛비가 내린다면 그 표정이 얼마나 볼만할까 생각하고 있는데요." 

"심술궂은 아이구나."

내 말에 누나가 어이없다는듯 중얼거린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누나의 시선이 매섭다.
 
"제가 내리라고 해서 내린건 아니잖아요. 원래 입원하기 전 뉴스에서 이때쯤 장맛비가 내린다고 했어요." 
 
누나의 시선을 피하며 말하긴 했지만, 밖에서 놀고있을 애들이 비에 맞는걸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까만 희열이 솟구쳐나왔다.
 
"기분이 우울해졌어."

말은 그렇게 하고 실제로도 축 쳐지긴 했지만, 어제보다는 텐션이 높아보였다. 마치 아픈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것처럼...
 
"앞으로 한달간은 줄기차게 내릴거래요."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 오늘만큼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오늘 오든 내일 오든간에, 어차피 언젠가는 오게 되어있는거에요."
 
그렇게 말했지만 축 처진 분위기는 다시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잘 안들리는 소리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누나를 보며 나도 어제자 일기를 쓰려고 했지만, 20xx년 7월 xx일 맑음 에서 더 쓰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물에 흐릿해진 바깥풍경. 나는 더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
 
너무 할게 없어서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이 든 나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자리와 크게 들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가왔음에도 아까까지는 더웠는데 지금은 에어컨을 튼것처럼 서늘했다.
 
"안녕."
 
어느새 다시 잠든 모양인지, 눈을 떴을때는 이미 아침이었고, 약간 흐릿한 풍경에 눈을 비비고 있었을때, 다시 밝은 얼굴을 한 누나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 후로 몇주의 시간이 흘렀다. 비는 여전히 오고 있었고,  누나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지만, 밤에는 가끔 혼자 중얼거리곤했다. 낮시간의 우리는 내가 가져온 게임으로 게임을 하거나(십중팔구는 팔 하나를 못쓰는 내가 지곤 했다.), 가끔은 내 방학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다 누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건 장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기침이었다. 그러다 점차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버튼을 눌러서 의사선생님이 오고, 누나에게 약을 주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점차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어날때는 오직 식사시간때 뿐이었다. 그마저도 흔들지 않으면 잘 깨어나지 않았다.
 
'내일이면 퇴원이네.'
 
어느덧 한달도 다 채워가서, 이틀 후면 퇴원할 날짜가 되었다. 팔도 다 나아서, 지금은 깁스를 푼 상태였다. 그래도 한동안은 격하게 움직이지는 못한다고 했다.
 
"누나..."
 
오늘도 누나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 느꼈던 심심함이 다시 몰려오는것이 느껴졌다. 문득 일기가 생각나서 일기장을 펼쳤다. 날짜와 날씨만 쓰여있는비어있는 일기. 그동안 쓰지 못했지만, 오늘은 왠지 쓸 수 있을것 같았다.
 
20xx년 7월 xx일 맑음.
 
 쓸쓸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그동안 어질러놓은것을 다 치우고 있는데, 누나가 눈을 뜨는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늘은 좀 괜찮아요?"  
 
"안녕. 그런데 정리를 하는건 처음보네."
 
그동안 정리를 하지 않았던것을 정리하니, 누나도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내일 퇴원하거든요."
 
"아. 그렇구나. 축하해."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해서 내가 퇴원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마워요, 누나. 누나도 내일 수술한다면서요."
 
"그래? 그렇구나." 

내 말에 누나는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잘 됬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저기, 잠시 종이좀 줘볼래?"

내 말에 누나는 뭔가 생각난듯 내게 말했고, 나는 그냥 적을게 있나보다 해서 아무생각없이 일기장을 찢어서 펜과 함께 건네주었다. 
 
"자, 이거 선물이야."
 
"이건 뭔데요?"
 
누나가 돌려준 종이에는 알지 못하는 지명이 쓰여있었다. 적어도 여기 근처는 아닌데...
 
"내 집 주소. 힘들면 나중에 편지 써봐. 읽어줄게."
 
"답장은요?"
 
"누가 힘든걸 알아준다는게 중요한거야."
 
"가는게 있으면 오는게 있는거죠."
 
"많이 늘었네?"
 
"누나 덕분에요."

내 말에 누나는 씩 웃었고, 나도 그 웃음에 씩 웃었다. 쏟아지던 비도, 오늘은 한풀 꺾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누나는 끝까지 내게 주소를 물어보지 않았다. 마치 그런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듯이. 그랬기에 나 또한 주소를 억지로 가르쳐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때는 이미 누나는 자리에 없었다. 먼저 수술실에 들어갔겠지. 작별 인사는 어제 했기에 나도 정리하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 누나의 안내를 받아, 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 후에도 부모님은 오지 않았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리라는 간호사 누나의 말이 있었지만, 나는 묵묵히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비를 맞은게 원인이 된건지 감기로 하루를 쉬었다. 그것은 정말로 그리운 추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쪽지에 적힌 주소도, 누나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정말로 긴 꿈을 꾸었어."

낮이었는데, 어느순간 새벽이 되었다. 장맛날에 있었던 어느 누나의 이야기. 왜 지금까지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다시 병원의 터가 있던곳을 바라보았다. 병원은 내가 중학생이 되서 의료진 하나가 다리에 떨어져 투신하는 바람에 망하게 되었다. 어른들의 수근거림 속에선 그 병원이 터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오르내렸다.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던 폐건물은 내가 진학을 목적으로 이곳을 떠나고 나서야 허물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봐야 뭔 소용이겠어. 이미 다 끝난일인데."

이제는 무너진 추억이다. 묘지에 자라난 잡초보다 못한 흔적도 남지 않은 추억이다.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는데, 무언가 있었다.
어둠에 가려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

익숙한 목소리. 꿈에서 들어서 생생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누나?"

내 물음에 그것은 쿡쿡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쏟아지는 별빛이 어둠에서 그 모습을 비춰주었다. 역시나 누나였다. 그 옛날에 보던 그대로의 누나였다.

"많이 컸네. 정말 오랜만이야."

손이 안닿는지, 까치발을 하긴 했지만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며, 누나는 미소를 지었다.

"누나는 그대로네요. 그래도 안 아파보여서 다행이네요."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때와 전혀 변함이 없다. 건강해보여서, 그나마 다행일까. 

"죽은 사람은 변하질 않으니까. 아프지도 않고." 

하기야 모습이 변하지 않은 그대로니까. 유령이라는 생각은 했다. 신기하게도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원망스럽지 않아요?"

나였다면 많이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제멋대로 수근대고 있을 친구들을, 병에 걸린 내 몸을, 그리고 그때 옆에서 지껄이던 꼬마도.

"이렇게 될거라고 예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만족하고 있어."

"어째서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고, 마지막 순간까진 즐거웠었으니까. 다 네 덕분이야."

"..."

"울려고 하네."

"솔직히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이왕이면 다 낫고 살아있다! 라는게 더 좋잖아요."

"그렇긴 하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가지는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누나는 나를 지나쳐 창문 너머로 빈 터를 보았다. 이제는 무덤이 되어버린 빈 터에는 어쩌면 누나의 무덤도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편지도 못쓰겠네요."

그동안 편지를 쓴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아. 언제나 지켜보고 있으니까. 사실은 편지를 한 번도 쓰지 않은것도 알고 있어." 
  
"그건 좀 무섭네요."

"그러니 편지를 쓰도록. 알겠지?"

내 말에 쿡쿡 웃는 누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점차 흐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손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잘가요, 누나."

누나가 가고난 뒤,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건강한 누나가 구김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가깝고도 먼 거리 사이에서 나 또한 미소지으며 보고 있는 그런 행복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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