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화교학살과 배척테러

한국에선 일제강점기를 단순한 대립시도만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절 조선인은 일본에게 피해받는 피해자로만 기억한다. 심지어는 일제강점기 시대를 '대일항쟁기'로 바꾸라는 주장도 나오고 국회에서 안건이 나오기까지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64038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103826

하지만 정말 그렇기만 했을까?

『7월 5일 밤. 그 밤은 진실로 무서운 밤이었었다. 역사로서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있은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미의 도,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었다. 하기는 우리가 인류사를 뒤져서 문야의 별이 없이 피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의 박살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있었든가! 나는 그날 밤 발 밑에 질적어리는 피와 횡재한 시체를 뛰어 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곡하든 그 기억을 되푸리하여(내, 비록 늙어 망녕이 들려도 이 기억은 분명하리라!)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동광 제25호, 1931.9.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1931년 7월.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테러를 벌였다. 그 대상은 화교와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었다. 
이걸 1931년 배화폭동(화교배척폭동, 배화사건, 화교배척사건, 반중국인 폭동)라 한다. 
그리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 평양이었다. 
평양의 조선인들은 화교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어린이, 늙은이, 아기와 아기를 안은 애엄마까지 가리지않았다. 평양 군중들에게 걸리면 어떤 화교던지 학살을 당했다. 
당시 폭력성은 독일국민들이 벌였던 수정의 밤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런 대규모 학살도 일어난 시대였는데 이 시대를 대일항쟁기라 부르는 게 타당한걸까? 
그리고 조선사람들은 여기에서만 주체성이 없는 객체인가?

이런 일은 어째서 일어난걸까. 1920년대부터 거슬러올라가자.

1-1 도시 하층민간의 갈등

도시가 생기면 도시 주변지역들은 도시에 종속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온다. 
도시를 지탱하려면 지탱하기 위한 일들이 생겨나야한다.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런 도시화 과정에서 하층민 사이에서는 갈등이 나타난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3) 

도시가 생겨나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인구가 꾸준히 늘어난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14개부는 평균 87.8%가 증가했다. 대부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온 사람들이다. 증가율로 경성은 59.3%고 인천은 89.8%인데 평양은 140%다. 농촌에서 도시 주변으로 모여 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도시 하층민이 되었고 토막촌을 형성해서 '토착민'이 되었다. 그런 무허가 토막 주택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인천과 평양이었다. (정병욱, 식민지 조선의 반중국인 폭동과 도시 하층민, 역사와 담론 73, 2015.1, 325~326;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3)

이런 배경으로 도시로 인구는 점점 몰려들어왔지만 경제는 오히려 나빠졌다. 1910년대만 해도 군수경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가 부족했다. 
하지만 1920년대로 접어드니 군수경기는 가라앉고 전후공황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제는 1915~1920년 성장 → 1920년~1931년 → 불황/공황, 1931~1937년 성장 이다. 1920년대 경제상황은 불황이었다. 
쌀값 지수는 1919년 100 → 1931년 38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살려고 도시로 떠났고,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세민, 궁민, 걸인은 1926년엔 전체 인구에서 11%였다가 1931년엔 28%로 늘었다. 
실업도 많아져서 1920년대부터 총인구에서 직업이 없는 사람의 비중은 지속적으러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일자리가 많은 곳이 도시와 그 주변이기도 했다. (정병욱, 식민지 조선의 반중국인 폭동과 도시 하층민, 역사와 담론 73, 2015.1, 345~346;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8~139) 
그래서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몰려왔다. 하지만 1920년대 한국에 있는 노동자들중 안정된 직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겨우 10%뿐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계절 요인과 그 때 그때 사정에 따라 고용상태와 실업상태를 반복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임금은 약 100전이다. 여기서 이걸 물가지수로 나누고 실질임금을 따지면 남는 건 91전 정도였다. 
이건 한달 생활도 간신히 이어갈 금액이다. 그래도 독신자는 이정도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가족이 있으면 달랐다.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활은 커녕 빛만 늘어났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3~14쪽) 거기다 실업도 늘어났다. 이런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협한다고 느꼈던 집단이 있다. 화교와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4)

화교들은 1910년대에도 늘어나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한반도)은 지금처럼 산업화가 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노동시장이 그리 넓지않았다.(전우용, 한국 근대의 華僑 문제, 한국사학보 , (15), 2003.9, 393) 1910년대는 산업화와 그에 따른 노동시장이 넓지않으니 심각한 갈등이 있을 일은 없었다. 
일본 '내지' 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군수경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부족한 노동력을 매꾸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정도였다. 
조선에도 딱히 갈등이 없었다.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8) 
1910년대에는 조선이던 일본 '내지'던 심각한 갈등은 없었다. 
식민당국은 1911년 5월에 “관영사업장에서 임금이 저렴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중국인 노동자를 이용한 예가 많았으나 앞으로는 중국인 노동자를 가능한 사용하지 말 것이며, 특수한 기능을 지닌 중국인 노동자를 이용할 필요가 있을 시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해 화교노동자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한 바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생업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러나 위처럼 딱히 갈등도 없으면서도 화교노동자는 일본인이나 한국인보다 품삯이 저렴하면서 힘든 일도 성실하게 해내니 현실을 감안해 1917년에는 관필제7호령(「官秘第7號令」)을 반포하여 화공의 제한된 이용을 허용했다.(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7, 인천학연구 4, 2005.2, 213) 
하지만 1920년대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군수경기는 가라앉고 공황이 오는데 조선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점점 늘어났다. 조선(특히 평양) 사람들에게 화교는 경제차원에서 위협이 됐다. 
화교들은 1920년대부터 점점 늘어났고 도시 하층민들의 노동권을 위협하고 있다.

<표>조선에 있는 화교의 숫자(계절에 따라 오고가는 노동자는 제대로 포함 안 됨)

1910 11818
1911 11837 
1912 15517 
1913 16222 
1914 16884 
1915 15968 
1916 16904
1917 17967 
1918 21894 
1919 18588 
1920 23989 
1921 24695 
1922 30826
1923 33654 
1924 35,661 ~ 36653
1925 46195 ~ 46196 ~ 46,197
1926 45291 
1927 50056 
1928 52054
1929 56672 
1930 67794 
1931 30571 ~ 36778 
참고자료: 
전우용, 한국 근대의 華僑 문제, 한국사학보 , (15), 2003.9, 407쪽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인천학연구 4, 2005.2, 219쪽
손승회, 1931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43쪽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8~9쪽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28쪽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6쪽

1922년 말 기준으로 화교의 62%이상이 노동자였다. 
이후에도 중국노동자 이주는 수천명씩 증가했으니 노동자 비율은 당연히 더 늘어났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0 ,12~13) 그리고 노동자들은 평안·함경지역에 편중되어있었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0, 13) 
1920년부터 산업화가 되며 도시인구가 증가하면서 화교인구도 훨씬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에 23989명이던 숫자는 1930년에 67794명이 됐다. 
거기다 이 숫자는 계절 노동자는 제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토목 종사자나 농공 종사자중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봄에 강을 건너왔고 겨울이면 작업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은자,오미일,1920-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의 華工과 사회적 공간, 史叢79 2013.5.31, 327~328;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6) 
이런 숫자까지 따지면 당시 조선에서 중국 노동자의 숫자는 엄청났다. 

1928년 한 해에 인천항만 해도 입국 중국 노동자 수는 3만을 헤아렸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2)
1920~30년대 당시 중국인 노동자들은 계절에 따른 일정한 이동 패턴이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체로 매년 11월 하순경에 자기나라로 돌아가서 구정을 본국에서 보내고 해비익를 기다린다. 
그러다 3,4월에 2/3이상이 다시 조선으로 몰려왔다. 
그러니 특정 시즌만 되면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으로 들어오는 게 관측됐다.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46~147) 
이런 게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더욱 위기감이나 경계를 느끼게 했을 수 있다.


화교의 남녀성비도 변했다. 1906년 27.8 대 1, 1907년 47.5 대 1, 1908년 25.4 대 1 등 1920년대 전만해도 남성 초과현상이 심했다. 
그러나 1926년 7.3 대 1, 1927년 6.3 대 1, 1928년 5.3 대 1, 1929년 5.0 대 1, 1930년 4.7 대 1이였다. 여전히 남성중심이지만 점점 여성비중이 높아갔다. 
조선에 자리잡고 살던 화교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런 점은 조선인과 화교 사이에서 갈등양상이 일상처럼 되거나 다양하고 복잡해질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5) 
조선인이 중국인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 것에는 이런 거주 공간도 관련되어 있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잡거 하는 상황이었지만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에 분산하면 조선인과 역시 잡거하게 되지만 중심 지역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해서 조선인과는 공간에서 분리되는 양상이었다. 
더욱 화교노동자는 계층면에서는 조선인 민중과 접촉하는 면도 다른 화교들보다 넓었다. 화교 노동자들은 상민, 농민에 비교하면 활동 기반이 취약했고 인구이동도 끊임없이 흘러 움직여서 통제가 어려웠다.  
거주공간면에서 사회적인 접촉하니 조선인은 중국인과 충돌하는 계기가 많아졌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4, 37~38)


화교는 전국에 흩어져서 거주했는데 그중에도 서울, 신의주, 인천, 평양 등 도시와 그 주변 근교지역에 집중됐다. 
1923년 전체 화교 33,654명 중 경성, 신의주, 인천, 평양 등 11개 도시에 거주하는 화교 수는 15,341명이다. 
약 50%가 도시에 집중됐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5) 
1930년 평안북도 화교의 직업현황을 보면 총 4,024 종 상업 1,136호, 공업 294호, 농업 및 목축업 1,205, 잡역노무직 1,282호였다. 
거기다 농업도 주로 도시민의 소비를 위한 채소 재배였다. 
화교의 대부분은 도시와 그 주변에서 도시와 관련된 상업, 공업, 잡역노무직에 종사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5)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데 화교까지 몰려온다. 

화교도 몰려드는 상황에서 한국 노동자들은 경쟁에서 중국 노동자들을 이기기 힘들었다. 중국에서온 노동자들은   조합을 조직하였다. 이것을 방(幇)이라고 불렀다. 
방은 비숙련 노동자인 고력(기술이 없는 일용직노동자), 숙련 노동자 수공업자, 기계 공업에 종상하는 숙련 노동자들 같은 사람들이 조직하였다. 
이 조직들은 체계가 잡혀있었다. 고력두라는 지휘자를 두었으며 십 여명 혹은 수십명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노동자는 조직에 따라 질서가 잡혀있었기에 근면하고 성실했다. (이은자,오미일,1920-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의 華工과 사회적 공간, 史叢79 2013.5.31, 335~336) 당시 조선 노동자는 중국노동자와 비교해 "단체적 훈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 "단체적 훈련"이 바로 방의 노동통제와 관리를 말했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4) 
이런 문제는 조선 노동자의 입금을 낮추고 저항을 사회적으로 하기 힘들게 하였다.(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4)
그런

농가들도 조선인보다 중국인을 훨씬 선호했다. 
1924년 경성부에서 중국인 야채 재배를 조사했는데 조사자가 일본인 농업 경영자에게 중국인과 조선인의 우열을 물었다. 
그러자 "중국인은 경작 기타 일하는 태도에서 다소 일본인에 가깝고 또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근면하다 하지만 조선인 고용인은 좌우간 불평이 많고 재배 기술에서도 중국인보다 열등하며 게다가 급여도 도리어 저렴하지 않은 관계상 중국인을 고용하는 것이 좋다"답변한다. 
1924년 경부터 경성부와 근교에 일본인 농가의 중국인 고용이 현저하게 늘어났다. 
일본인 지주뿐이 아니었다. 경성인근에서 중국인이 소작하는 밭의 상당수는 조선인의 것이기도 했다. 
이건 평양도 마찬가지였다. 
1931년 평양에서 화교학살이 벌어진 뒤 평양 근교 중국인 야채 지배자 200호의 90%이상이 귀국했다. 
그 지주인인 조선인은 소작료와 대여한 농경자금을 못 받게되어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1쪽)

1931년 2월에는 경북 의성군 '안강수리조합'에서는 '궁민구제'라는 취지로 고용했으나 그런 취지와 맞지않게 임금이 싼 화교노동만 고용했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7) 이것말고도 화교노동자들은 여러 공사장을 독점했다. 
「1.신의주 안동현에서는 난리와 전황으로 실직된 화교점원 500명이 들어와,한국인들은 이들에게 모든 노동을 빼앗겼다.『시대일보』1924년 9월 25일.
2.경기도 수해복구 공사장은 수재이재민들이 노동을 위해 몰리지만,겨울이 되면 화교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형편에 놓였다.『동아일보』1925년 8월 7일.
3.황해도 수리조합의 노동자중 한국인은 500여명이고 화교 노동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한국인 노동자들이 배척과 구축을 당하자,화교노동자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東亞日報』1928년 4월 5일.
4.함경남도 신흥군 동상면에 있는 ‘조선수전주식회사’에는 중국노동자들이 만 사천여명이나 있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중외일보』1929년 4월 22일.
5.南朝鮮鐵道光麗線과 麗水護岸工事에서 축항·방파제공사에 화교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고 있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1929년 5월 10일.
6.국경철도공사장에서,외국인 노동자고용규정을 위반해가며 전체 5․6천명되는 노동자 중 에서 80%를 화교 노동자들로 충당하였다. 조선일보(『朝鮮日報』)1929년 6월 23일.
7.災害로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노동자를 고용하겠다던 충남 부여의 鴻山水利組合의 공사에 도 화교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고용주가 도당국(道當局)에 허가서를 제출하였다.『朝鮮日報』1929년 11월 9일.」(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7)

당시 조선의 언론에서도 '중국사람에게 직장을 뺏앗기는 건 완력이나 우연때문이 아니라 조선인의 부정직 나태함과 다르게 화교는 신용과 근면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 148) 
당시 화교들은 몸이 튼튼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집단으로 평가받았다.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교노동자들은 햇볕이 뜨거우나 그늘을 찾지 아니하며 일을 한다.그리고 배고프면 떡 한개를 먹고서 입을 씻을 뿐이다.(중략)노동자들은 하루에 일원 이 십전부터 일원 오 십전까지의 일급을 받는다 하며,조금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구 십전 내외의 생활비를 쓰고,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삼 십전밖에 쓰지 않는다 한다.(중략)그리고 그 남아지는 돈을 모아 저희의 본국으로 돌아간다.』
(「極度로 勤儉한 中國人勞働者」 시대일보 1925년 7월 7일,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6쪽에서 재인용)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민족적 감성에서가 아니라 생존권의 자위』를 위하여 중국 노동자를 배척해야한다고 하였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6) 1929년 10월에 중외일보(中外日報)는 『올 적에는 빈손으로 와서 갈 적에는 큰 돈을 갖고 가는 제비와 같이 오고가는 중국인 노동자군』이라 비꼬았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 147)

한국 노동자들이 노동조건문제와 임근인하문제 때문에 파업을 할 경우 경영자가 화교들을 대신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4) 
예로 원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조선인들이 파업할 때 화교노동자를 모집하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영사는 조중 갈등을 걱정해서인지 화교노동자 모집을 중지하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4) 
화교노동자 문제때문에 직접 파업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인천의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란 곳은 일본사람이 경영했는데 1923년 8월 27일 한국인 노동자 500여명이 동맹파업을 했다. 그러자 정미소 사장 카토(加藤)는 중국 다롄(大連)에 가서 화교 노동자 18명을 데려왔다. 
한국노동자 7명이나 하는 일은 화교 3명이면 충분했고 임금도 한국인보다 쌌다. 카토는 한국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은 화교들보다 일을 못하고도 임금은 그들보다 더 비싸니 임금을 십전씩 깎을 것이다."고 말하며 부조리를 하려했다. 
한국노동자들은 "도저히 이같이 문명치 못한 공장에서는 사람노릇을 못하겠으니 단연코 취업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오후 8시경 전부 기계에서 손을 떼고 돌아가버렸다. 1923년 8월 29일 가등정미소에서 일하는 한국인 남녀 300여명은 다시 동맹파업을 하였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4~15쪽. 사건의 결과가 궁금하면 동아일보 1923년 8월 30~31일 기사 참고)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군수경기는 가라앉고 전후공황이 시작됐다. 
일본제국에서는 노동시장 긴장이 겉으로 드러났고 화교배척 움직임이 드러났다. 이건 일본'내지'의 일본노동자던 한반도의 조선인 노동자던 마찬가지였다. 
1920년 8월 일본 해운노동자들은 중국인 고용을 단속할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9)

한반도에서 1926년 11월 부산 노동단체 간부등 지역 유지들은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의 성장을 우려하며 배척운동을 조직했다. 
1926년 11월 盧相乾 등 부산 노동단체 간부들이 그런 운동을 조직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6;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39)

이런상황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 충돌은 심해졌다. 중국인 노동자 인구가 많던 북방 지역에서 더욱 자주 확인된다. 
신의주에서 조선인 최석순과 중국인이 자전거 문제로 언쟁을 벌이자 양측에서 300명 정도가 가담해서 패싸움을 벌이고 (1924) 조선인과 광부와 중국인 광부 들이 음료수 문제로 패싸움을 벌인 일(1928)이 있으며 주문한 음식을 잘못가져왔다고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인 일(1928) 같이 사소한 일이 원인가지고 두 민족이 충돌을 벌이는 사례들이 많았다. 
1927년 이후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 일어났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인과 화교의 충돌과 갈등은 일상이 됐고 널리퍼졌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4~35;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3쪽)


총독부는 외국인 노동자 규제는 원칙으로 보면 일본 '내지'와 같은 규정으로 관리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내지'처럼 엄격히 시행하지는 않았다. 
1911년 5월에는  「관영사업에 청국인 사용금지의 건(官營事業ニ淸國人使用禁止ノ件)」을 알려서 관영사업에는 가능하면 중국인을 사용하지말고 필요할 경우에만 총독부의 허가를 받으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17년 「관영사업에 중국인노동자 사용에 관한 건(官營事業ニ支那人勞動者使用ニ關スル件)」(保親收第415號)을 내놓아 중국인노동자 사용은 총독의 허가가 아니라 각 사업소 소관 부국서장(部局署長)의 허가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1일 30인 이상을 사용할 때는 소관도 장관의 동의를 얻는 것으로 조건을 내렸다. 
1922년 8월 「관영사업에 중국인사용 금지의 건(官營事業ニ支那人使禁止用ノ件)」(保1068號)에서는 사람 수와 무관하게 도지사가 허용하는 걸로 단계를 다시 낮췄다. 
1927년에는 중국인 노동자의 수를 수요 노동력의 1/3로 정한다고 규정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5~36;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7)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여기에 대체할 노동력이 없다는 문제도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선 중국인 노동자 단속을 단속했으나 일본 '내지'와 다르게 소극적이었다. 
1929년 기준으로 총독부는 중국인 노동자가 한반도에 흩어져 있으니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걸인지했으나 노동력 수급이나 자본의 요구를 감안하면 그 고용 범위와 인원수를 현재보다 제한하는 걸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은 상황이 달랐다.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중국인 노동자가 필요성이 떨어지니 강력하게 규제했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7; 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45)

또한 근본부터 따지면 조선총독부를 이 노동갈등을 해결할 수가 없다. 
조선총독부도 중국인 노동자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단속방침을 세워 단속을 시행했다. 
1927 6월 총독부 보안과는 거주지가 아닌데 허가없이 노동한 노동자에 대한 단속과 1/3보다 많은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한 고용주에 대한 단속도 실시하긴 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6~37) 그러나 조선 사회와 총독부의 조치에는 중요한 맥락이 무시됐다.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은 주범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좋은 일자리를 독점했고, 거기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점하지 않은 나머지 시장을 놓고 중국인과 경쟁해야했다. 
일본인은 노동시장이 짦은데 조선인, 중국인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았다. 
시간당임금을 따진다면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2.3 배 이상 많은 임금을 받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임금은 격차가 있어도 적었다. 
토공이던, 목공이던  석공이던 성격이 다른 일자리들에서도 일본인의 임금은 2배에 가까웠다. "조선인노동자의 자리를 침식하는 중국인노동자"의 모습 뒤에는 일본인노동자가 숨어있었다. 그러니 식민권력이 총독부는 조선인노동자의 실업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존재가 아니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7)
당시 언론에서도 일본인과 대립하는 구도를 대신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대립구도를 부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일본인과 대적할 수 없으니 중국인은 일본인을 대신 중국인이 조선인의 경쟁 대상으로 지목됐다. 
예로 동아일보 1924.9.22년 한 사설은 조선인들에게 말하길 "처지가 다른" 일본인에 대한 원망에 집착하지말고 중국인 사이에 있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언론의 논지속에서도 조선인은 사회적 공간에서 일본인과 분리되고 중국인과 경쟁해야하는 공간 속에 놓인 것이다. 
저항할 희망은 버려 단념하고 대상을 중국인으로 돌린 것이다.(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 38~39)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외교적 문제도 이유중 하나였다. 
그 예가 미국에서 통과한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문제였다. 미국에서 일본배척이민법이 통과하려하자 일본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 바로 중국인 노동자 입국 규제에 대한 것 이었고 대립주체는 외무성과 내무성이었다. 
내무성은 일본내부의 노동문제를 고려해 규제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재미(在美)일본인의 이민문제를 우선해서 중국인노동자 규제를 완화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1924년 5월 15일 미국 의회에선 배일이민법이 통과됐괘 7월 1일에 시행됐다.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 정부가 제일 중국인노동자를 강제로 퇴거한 탓에 미국과 교섭할 때 입본의 입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이 커졌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6~107)
이런점에서 조선은 일본보다 문제가 훨씬 컸다. 
왜냐면 조선인의 만주 이주문제가 미국의 일본 이민문제보다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륙팽창을 위해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켰다. 
이건 중국이 조선인의 이주를 용인해야 가능했다. 
중국 동북지역에 거류하는 조선인수는 1919년에는 43만 1,198명이였다가 1931년에는 63만 982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1931년 화교의 수는 36,778정도일뿐이었다. 외교문제에서 일본은 조선화교를 강력하게 규제할 처지가 아니었다. (강진아, 이주와 유통으로 본 근현대 동아시아 경제사, 역사비평 , 2007.5, 134,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7)
실제로 광저우의 중국국민당은 1924년 8월 7일에 다음같은 선언서를 발표해서 일본을 비판했다.
『일본이 미국의 신(新)이민 조항에 대해 거국일치로 반대하면서,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중국에 대해서는 엄혹한 노동자 단속을 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일본은 같은 종족(種族)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취하지 말고, 아세아(亞細亞)인종의 대단결(大團結)을 위해 노력하라』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6)

지리문제도 규제하기 힘든 이유중 하나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한반도 북부의 국경 지역과 서부 해안 지역을 통해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활동할 수 있었다. 
1930년 신의주 영사관의 기록을 따르면, 관할 구역인 평안북도와 중국 요령성 간에는 안동-신의주 간 철교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배, 겨울에는 얼음을 통해 검사도 받지않고 여권없이 자유롭게 한반도와 중국을 오고갔다. 
이동 및 거주 등록이 되어 있지않은 인구 이동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지역에만 한정된 상황이 아니다. 
1931년 中國 總領事館의 보고에 따르면 해로로 산동의 연대(烟臺), 위해위에서부터 인천, 경성으로 이동하는 중국인도 마찬가지였다. 
연태, 위해위에서 인천까지는 여권이 없어도 "하루 밤낮"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여권을 소지하지도 않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그 수와 동선을 파악하기 어려운 유동인구다. 중국인 '자유' 노동자들에겐 한반도는 자유롭게 오가며 노동할 수 있는 한 노동시장 중 하나였다. 그러니 총독부가 중국인 노동자 입국을 봉쇄할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근본부터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28~29;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47)

1-2 계급 갈등
1931년 화교배척폭동과 학살 당시 중국 공산당은 동아시아 삼국 근도대중과 노동자연대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피압박 노동자의 단결강조는 혁명사관에 충실한 중국학자의 저술에도 나타난다. 
근데 사실과 비교하면 이런 해석엔 문제가 있다. 왜냐면 배화폭동과 학살의 배경에는 노동간자 갈등뿐만 아니라 '부유한 화교와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간의 갈등도 강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론으로 노동자계급 대동단결, 제3세계 피압박민족 대동단결을 외쳤다. 
그러나 조선내 많은 사회주의 경향 청년들은 화교를 자산계급이란 점에서 분노하고 증오했다. 
노동자계급 간 경쟁뿐만 아니라 부의 불균등에서 나오는 계급모순도 민족모순을 깊게만들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5~116)

당시 화교상인들의 영향력은 이 글에서도 간접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에서 1926년 또는 1927년까지 조선 화교경제는 튼튼한 기초를 지녔다. 이 시기 한성, 인천에서 수입무역에 종사했던 소위 '팔대가'(‘八大家’)의 활약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저장(浙江)의 주단(綢緞), 쓰찬(四川)ㆍ장시(江西)의 하포(夏布), 화북(華北)의 면화, 식량, 마늘, 고추 등 토산품을 수입하였다....이 시기 조선의 전국 시장에서 5곳의 상점 가운데 화교의 것이 반드시 3곳 이상을 차지하였고, 조선에서 화상의 신용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 또한 이 시기 조선 전체 경제력의 70%를 화교가 차지하였고 화교는 당시의 물가를 장악하였다.』
盧冠群, 韓國華僑經濟, 海外出版社, 1956, 53-54쪽,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6쪽에서 재인용

여기엔 어느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화교상인들의 영향력이 컸던 건 분명했다. 실제 화교상인은 중국과 하는 무역업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조선→중국보다는 중국→조선이 압도적이다.
지수비교:
조선→중국(수출)/중국→조선(수입)
1924: 326.2 / 452.9
1925: 284.5 / 510.5
1926: 355.9 / 680.7
1927: 446.5 / 878.1
1928: 457.3 / 712.9
1929: 444.1 / 583.9
1930: 397.9 / 648.4
1927년 말 일어난 화교배척으로 교역액수가 감소했지만 화교상인의 영향력은 1930년까지 여전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6~147쪽)

또한 화교농민들도 짧은 시간에 조선에 강력한 경제적 지위를 쌓아올렸다. 
조선화교는 일반노동자 말고도 농민의 이주가 많은게 특징이다. 
1910년 1,571명이던 농민은 1928년에는 11,080명으로 늘어났다. 
화교농민은 처음에는 도시근교에 땅을 임대하여 가작 노동력으로 주로 채소를 경작하고 시장에 팔았다. 
그러다 점점 고작규모를 늘려갔고 고향인 산동성에서는 계절성노동자를 고죵하여 자본가가 된 사례가 다수 나타났다. 
1924년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는 324명의 중국인 채소 농가 98호가 18만 2,592평을 경작하면서 해마다 도매 시세로 7만엔 이상 매출액을 올렸다. 
1927년 인구 15,000 명 구모의 평북 선천(宣川)에는 중국채소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그 발단은 화교농민이 채소 공급을 독점하고 담합했기 때문이다. 1929년 함경북도 회령(會寧)의 약 15,500여 시민의 채소를 공급하는 곳은 모두 중국인 채소 농가였다. 
이들 농민 57호의 연 총수입은 4만 여원에 달했고, 그중 절반이 고향인 산동성으로 송금됐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5~116)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는 “주기만 하고 가져오는 것이 없는 조선 사람의 주머니에서 중국인이 빼앗는 돈이 京城府에서만 일 년 에 876만원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7)

1931년 화교배척폭동의 원인에는 계급갈등도 있다는 건 당시 상황전개를 봐도 알 수 있다.

물적 피해을 따져볼 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돌을 던져서 파괴하는 것이었고, 주된 공격대상은 도시나 읍내의 상점과 점포였다. 
"평소 도시 하층민의 중국인 상점 및 점포에 대한 선망과 시기가 담긴 범행"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정병욱, 식민지 조선의 반중국인 폭동과 도시 하층민, 역사와 담론 73, 2015.1, 332~333) 
경성의 경우만 봐도 가진자에 대한 불만을 알 수 있다. 
예로 신설리 패는 7월 4일 밤 경마장 중국인을 습격하러 안암천을 따라 내려갔다. 
그 때 천변의 점포에서 축음기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니 일행 중 한명이 "중국인과 조선인이 충돌하고 세상이 불안한데, 이곳 놈은 축음기를 틀고 즐기고 있다니 괘씸하다"고 야찬을 쳤고 주인은 축음기를 껐다. 
이 축음기는 도시의 모던 문화('스위트 홈')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인 상점 및 점포에 대한 투석하는 행위는 중국요리집을 드나드는 신사들에 대한 행패와 함께 하층민의 선망과 질시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9)

1931년 화교배척폭동이 끝난 뒤 상황에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10월 27일 평양 학살이 일어난지 4개월이 안 됐을 때 만주 마적에 대한 영화광고지가 배포됐다. 
1931년 윤봉춘 감독, 엑스키네마 제작인 조선영화다. 흑백 무성영화로 인천에 있는 한 중국인 자본가의 공장을 배경으로 해서 노사갈등과 민족갈등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정의감 넘치는 조선인 공장 감독인데 중국인 공장주와 대립하다가 공장주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알고보니 중국인 공장주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서 조선인을 죽이고 약탈했던 만주마적이다. 
주인공 가족도 당시 현장에 있었다. 
공장주의 딸은 그 때 마적었던 공장주가 데려간 주인공의 여동생이다. 
여동생은 아버지로 알던 중국인 공장주를 칼로 찌르고, 주인공은 만주로 가서 총을 든다. 
재만 조선인 문제 그리고 조선 땅에서 부유한 화교 자본가와 조선인 노동가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조선의 중국인 공장주 = 재만조선인을 학살하던 만주 마적 이라 설정한 것이다.
이 영화광고지에는“在滿 백여만 동포는 가는 곳마다 수난을 당해”, “동포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제부터 (조선인의 만주)입국을 막는다[( )는 인용자]”같은 문구가 있었다. 중국 총영사관은 이것이 호외를 날조한 것처럼 보인다며 당연히 검열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92-294;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7)

경북도 명천군(咸鏡北道 明川郡)에 있는 상고면 중평동(上古面 仲坪洞)에선 1931년 12월 6일-7일 이틀간 테러가 벌여졌다. 
잡화상 가게인 원팔성호(源發盛號)(점주 임서방林書芳)를 향해 조선인들이 테러한 사건이다. 명천군 상고면 중평동에는 화교농민과 화교상인이 여럿 있는데 배화폭동과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대다수 화교는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떠나거나 귀국했다. 
그러나 잡화상 임서방은 남아있었다. 외상값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임서방은 빨리 귀국하기 위해 외상값 회수를 심하게 독촉했다. 당시 지역은 큰 흉작이 들어 겨우 사는 것 도 막막한 가구 많았는데 이런 독촉을 하자 임서방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과격단체가 주도해 임서방 가게에 테러를 벌였다. 
테러에 가담한 자는 모두 18명이다 그 중 4명은 명성소년회(明城少年會)였고, 다른 3명은 천청년동맹원(川靑年同盟員)이었다. 
두 단체는 과격한 사상단체였다. 
특히 명성소년회는 “관(官)의 시설에 관해서는 선악을 묻지 않고 비난 공격에 가담하며, 늘 항쟁적 태도를 보이고 주의운동(主義運動)을 위해서 육친 도 맹우도 없다고 호언하고 다니는”과격 단체였다. 
사건 주모자인 유창범(劉昌範, 19세)에 명성소년회원 회원이다. 
유창범은 어느날 신문을 보더니 '중국관헌이 만주의 조선인 농민을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압박한다'는 기사를 보고 몹시 분노했다. 
그 보복 수단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몰래 습격해서 쫒아내자는 선동을 했다. 
그러자 1931년 11월 이후 이 지역 중국인 대부분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임서방은 남아있었다. 유창범은 "소위 대중획득운동(大衆獲得運動)에 일조(一助)를 할 것이며 장래 사상운동(思想運動) 전개에서도 억을 것이 많다"고 믿고 한구범(韓九範)과 함께 12월 7일 오후 6시 경 어부 현일봉(玄日奉, 35세)도 데려와 임서방 가게 습격했다. 
가게 문을 부수고 주먹 크기 돌과 킨 4척 가량 장작개비를 던져 퇴거를 하도록 독촉했다. 
그러나 임서방은 퇴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 8일 오후 5시 경에 명성소년회원등 더 많은 인원을 모아 전날과 마찬가지로 돌은 던지고 파괴했다.
그 뒤 이들은 이 지역 면협의회원(面協議會員)인 현만복(玄萬福, 38세)이란 자의 집에 갔다. 
현만복의 집에는 7명이 부민집회를 하던 중이었다. 
현만복은 상고면협의회(上古面協議會)위원이기도 했다. 
현만복은 당시 상업에 실패하고 남에게 1500엔을 빚을 지고 상태여서 빨리 갚으라는 독촉을 심하게 받고 있던 차였다. 
그런 차에 유창범 무리가 습격하고 테러하는 걸 보니 즐거워했다. 
현만복은 '중국인의 재만동포에 대한 압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고 부녀자는 전부 강간당하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이번 임서방을 습격하여 그를 국외에 내쫓으면 그가 현재 소지한 상품은 습격의 혼잡을 틈타 탈취하고 집에 불을 지르자, 만일 경찰에 검거되어도 중평 주재소 수석과 자신은 각별한 사이니까 염려마라. 경찰 측에서도 재만동포의 보복이므로 관대하게 처리할 것”, “임서방은 현재 상고면민(上古面民)에게 외상 2천여 엔을 지우면서, 옛 날부터 부당한 이익을 탐해온 자로, 지금 (그를) 외국으로 쫓아내면 그 돈 은 안 갚아도 된다”고 선동했다. 
유창범 무리는 그 선동에 찬성해 17명을 모아 오후 7시경에 다시 임서방 집으로 달려갔다. "죽여", "해치워버려"라고 소리치며 약 5분간 돌을 던지고 돌아갔다.
임서방에 대한 테러행위의 계기는 재만조선인 문제라는 민족 감정이다. 그러나 배경에는 지역 내 금전관계, 화상의 부에 대한 질시 같은 계급적, 경제적 모순이 크게 작용했다. 경찰의 의견에 따르면 "부민(部民)은 누구나 그의 행동에 시달리고 있던 차여서,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쾌재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97~299;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7)


1931년 11월초 경상북도 영천군 자지방(慶尙北道 永川郡 慈川地方)에 있는 중국인 상점 덕취상(德聚祥)에 한 조선인이 오더니 점주 손일신(店主 孫日新)에게 외상구매를 강요했고 경찰은 말려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가게 문을 닫으려는 갑자기 1~2백 여명의 조선인이 상점으로 몰려와 화물을 마음대로 가져가려 했다. 
손일신이 이걸 막으려하자 구타를 당했다. 
경찰은 현장에 왔으나 "수수방관할 뿐 아니라, 자기도 장갑 하나를 집어 끼기까지 했다." 때마침 영천군 경찰서장이 도착했다. 손일신은 영천군 경찰서장을 따라 위험을 벗어났다.
931년 11월 26일 군산중화상회(群山中華商會)는 경성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전라남도 임곡송 정리(全羅南道 林谷 松汀里)에서 이 지역 조선인들이 화교상인 주백괴 周伯魁를 찾아와 영업을 정지하고 귀국하라고 협박했다고 보고했다. 주백괴는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게문을 닫고 근처 장성군(長城郡)으로 피난가 군산중화상회에 피난을 갔다.
(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95~296)

1931년 12월 8일 저녁 평양부내 화교상인 요리점들인 홍승루(鴻陞樓), 동화원(東華園), 동승누(東昇樓) 세 요리점에 한글로 써진 협박장이 우송됐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東華園主人 殿 精神없는 자들아 아직도 조선 내에 거류하는가. 빨리 환국해라. 이번 12월 내에 또 대사변이 생길 터이니 참혹한 귀신이 안 되려면 빨리 귀국해라.
府內 COS軍會 主席一同
2) 東昇樓主人 殿
목하 형세가 극히 위험하니 즉시 영업을 폐지하고 귀국하라. 만일 지체되면 지난 7월 사변보다도 심한 변을 만나지 않으려면 귀국할지어다. 府內靑總一同 12월7일
3) 지금 형세가 심히 위급함이니 빨리 영업을 폐지하고 환국하여 만일 연연하면 지난 7월 사변보다 극히 맹렬한 변을 만나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속히 귀국하라. 
鴻陞樓主人殿 府內刀棒同盟 12월 7일』
(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96~297)


1931년 조선배화폭동이 일어난 원인에는 계급적, 경제적 문제도 있던 것이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7)

1-3 조선인 경찰과 화교 간 갈등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읍내리( 忠淸南道 瑞山郡 海美面 邑內里 ) 시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폭력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인 행상인 조대현(曹大鉉, 23세)과 신모성(申模聲, 28세)이 중국인 陳守璿(진수선)과 조계주의 가게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구타한 사건이다. 
경찰은 부근을 수색해서 가해자 두 사람을 발견하고 주재소에 데려가 취조하였다. 
엄중 훈계한 뒤 돌려보냈다. 그러자 조계주는 상해죄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사건과 관련된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대질심문을 했다. 
중국인인 조계주는 조선말을 못했기에 조선말을 잘 하는 통역을 데리고 경찰서에 갔다. 
그러자「조선경관은 통역인을 보고 소송을 교사하여 부추긴다고 심문 질책하여 내쫓고, 다시 조계주에게 괜히 일을 만든다고 문책하면서 안건을 끝내게했다.」고 한다. 
그 뒤로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은 6월 24일에 조계주에게 상해죄로 벌금 20엔을 언도했다. 
경찰 측은 이정도 상해사건은 훈방에 그치거나 중해도 기소유예처분인데 "오히려 너무 과중하게 처벌을 논했다고 할 만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조계주 측이 제기한 민사소송도 민사소송을 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리고 외사과도 같은 내용으로 총영사관에 답장을 보냈다. 
경찰은 고소가 들어보면 일단 법률적 절차를 수행했지만 소송과 탄원을 거듭하는 화교상인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78~280)


1931년 1월 24일엔 경성화교소학생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인 학생들이 지나가던 화교학생을 구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31년 7월 배화폭동이 일어나기 넉 달 전쯤에 일어났다. 
중국 총영사관이 외사과에 한 주장에 따르면 이렇다. 화교학생들이 봉래정교(蓬萊町橋) 부근을 지나가는데 조선인 학생 5-6명이 화교학생들을 구타해 한명(하정란)은 앞니를 다쳤다. 
다른 화교학생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 피해자 가족에게 달려간 뒤 바로 경찰서에 달려가 신고했다. 
그러나 조선인 경찰관은 가해자가 「아직 한 사람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잡지를 않았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각 파출소의 조선인 경찰관이 우리 국민이 달려가 신고한 사건에 대해 매번 그 직책을 제대로 다하지 않으니,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貴府內各處派出所鮮警, 對於國僑民馳報事件,每不本其職責, 迅爲持平處理, 良爲感事)」고 따지며 「조선의 불량청년들이 왕왕 도로를 가로막고 싸움을 건 것이 이미 수차례였다(朝鮮不良靑年往往路尋毆已有數次)」는 점도 강조하였다.
그러나 외사과장의 주장은 총영사관측 주장과 달랐다. 
외사과장은 경찰기록에 근거한 것인데 경찰은 조선인 순사 이봉천李奉天의 보고를 화교학생들의 증언과 합치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기록에 근거해 말하기를 "앞니"를 다쳤다는 하정란은 사실 조선인 음식점으로 도망간 상태였고, 조선인 음식점주 김춘식(金春植)에게 보호를 받으며 함께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그 후 경찰은 신고를 받고는 조선어를 아는 파출소 부근 거주 중국인 임종운(林從運, 24)과 함께 가해자가 도망간 곳으로 보이는 중임동(中林洞) 184번지 도착했다. 
그러자 가해생도를 쫒아가던 화교측이 말하길 가해자들이 이미 흩어졌다고 전달했다. 
그 말을 들은 경찰은 철수했다. 그리고 중국인측은 싸움 직후 바로 경찰서에 바로 신고했다고하지만 당번 근무자들(홍순태洪淳泰, 유인현柳寅顯, 안기승安基承)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신고를 들은 일이 없다고 한다. 
또한 한 화교학생(하정란)이 앞니를 구타당했다지만 출혈 및 전치 손상같은 외부 상해흔적이 없어 의심스럽다고 한다. 
그렇기에 가해자가 "아직 한 사람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사실을 완전히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사실관계가 명백히 갈리는 부분은 "조선인 경찰관"(“鮮警”)의 증언이었고, 중국 총영사관이 지적한 대상도 "조선인 경찰관"이었다. 경성화교소학생 폭행사건의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조선에서 화교가 민족갈등을 빚어내는 관계는 일본인 사이에 있는 관계보다는 조선인 사이에 있는 관계라는 점이다.
(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80~282)

형사, 민사사건에선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나는 사례는 물론 대부분 조선인과 중국인었다. 
그뿐 아니라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현장에서 경찰과 행정 실무를 담당한 주체도 조선이었다. 
그렇기에 중국인 처지에서 차별을 느끼게 된 주체는 조선인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총독부의 통치구조에는 상급관료는 일본인, 하급관료는 조선인이라는 구조적 차별 구조가 있었다. 이 구조에 따라 현장에서 중국인과 부딪히던 주체는 주로 조선인이었다.(강진아, 만주사변 전후 재한화교 문제의 양상- 朝鮮總督府 外事課와 在韓中國領事館 간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0,2012.9, 286, 300) 

1-4 언론
언론도 원인중 하나다.

조선인이 화교를 향해 보여준 멸시하는 태도는 기원을 청일전쟁 이후까지로도 볼 수는 있다. 
1896년 5월 21일 독립신문에선 중국사람을 거머리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 때 있던 멸시의식은 주로 상층 개화파 지식들한테도 국한됐을 뿐 민중에게 넓게 퍼진 건 아니다. 
그러나 1920년부터는 화교노동자와 조선인노동자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사회전반에 퍼져나갔다. 
그러니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상층 개화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게됐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0)

당시 언론에서는 중국인을 ‘흉악한 중국인’, ‘가증스런 중국인’, ‘수상한 중국인’ ‘無道한 중국인’, ‘살기 있는 중국인’, ‘잔인한 중국인’, ‘무지한 중국인’, ‘음흉한 중국인’같은 말로 표현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每日申報는 물론 時代日報ㅡ 中外日報 에서도 이렇게 묘사하였다. 1920년대에도 반일연대 시각이 없던건 아니지만 친일매체를 떠나 전체적인 인식은 저러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2) 
잡지 동광(중국민성격의 장처단소, 1927년 동광 12호)에선 중국인을 '금전이나 명예를 위해서는 벗(붕우朋友)과 친척 간의 신의조차 헌신짝처럼 버리는 민족'으로 묘사했다.(전우용, 한국 근대의 華僑 문제, 한국사학보 , (15), 2003.9, 400쪽) 
언론에선 중국인거리를 '중국인거리 = 아편굴 = 악마의 소굴'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했다.  
그런 이미지는 매일신보같은 식민주의적 언론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같은 조선인 언론이 만들기도하였다. 
언론들은 평범한 경제활동을 하는 중국인도 많은 거리라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서  과장했다. 
중국인 거리에 사는 중국인들 중 일부를 근거해 "대개" 모르핀 중독자로 과장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거리는 음침하고 충중하고 마굴과도 같은 기분이 들고, 그들의 말소리나 음흉한 음성은 어디로 보든지 음모적 민족이다.』, 『중국인의 국민성은 본시 음흉한 것』따위 국민성이 종족성을 논하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중국인거리=마굴'이란 표현에는 이 곳을 청소해야하거나 제거해야할 대상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오미일, 일제강점기 경성의 중국인거리와 "마굴" 이미지의 정치성, 동방학지 163집, 2013, 26~27쪽)

1-5
조선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관점을 복사했다. 
중국을 근대문명 경쟁에서 떨어진 국가로 봤고 그에 따라 우월의식을 일본과 같이 나누었다. 
조선에 사는 화교도 그런 관점으로 봤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조선에서 중국인들은 부, 일자리, 시장경쟁력에서 조선인보도 우위에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인식한 화교와 실제 화교를 달랐다. 
그러니 조선사람들은 박탈감을 느꼈고 그런 상황에 분노했다. 
그리고 화교를 상대로 열등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비인도적이고 야만스런 테러와 학살로 터졌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8)

2. 1927년 화교배척폭동과 테러

2-1

중국 노동자는 시장경쟁력이 높았다. 
낮은임금에 강한 체력, 인내심, 근면성, 장치적 조합제도라는 점 덕분에 일본인 고용주들은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다. 
이러니 조선인들이 중국인노동자를 경계하는 심리도 강해졌다. 
조선사회의 불만이 높아지니 조선총독부도 화교 노동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1927년 경기도와 관내 각 경찰서는 공사장에서 측에세 중국노동자가 3분의 1 이상을 초과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10월에는 경기도내 경찰서장 회의가 열렸다.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입국금지안을 논의한 것이다. 
실제 이 해에는 주거제한규정을 위반한 중국인노동자 검거 퇴출이 이루어졌다. 
중국인 노동자를 적극 규제한 것이다. 
이런 규제에는 한중노동자간의 마칠이 오래된 점도 배경이유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중국인 노동자를 규제할 것을 요구하며 꾸준히 청원운동을 했고 이 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0~111)

이러자 화교들은 항의 운동을 하며 맞섰다. 
1927년에 열린 북경관세특별회의(北京關稅特別會議)에서 중국전국상회연합회(中華全國商會聯合會)가 건의문을 제출했다. 
건의문에는 조선원산중화상회(朝鮮元山中華商會)가 내놓은 안건이 있었다. 
그 내용은 화교입국 제한을 철폐하라는 것이다. 
일본인과 한인은 만주에 해마다 수만 명 씩 이주하면서 조선의 화교를 규제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비판하며 『이번 우리나라와 일본이 새로 조약을 개정할 때는, 마땅히 양국 인민의 왕래 거주에 대해서 명백한 호혜평등의 조문을 규정하여』화교의 신분을 보장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1) 결국 이런 대립이 격렬해지다 1927년 말에 배화폭동이 터져버렸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1)

2-2
2-2
일본은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중국 각지에 총영사관과 분관을 설치하고 영사관 경찰을 상주시켰다. 
중국 관민이 반대하는데도 그런 일을 했다. 
그리고 재만 조선인을 자기네 관할에 뒀다. 
그리고 만주의 국익을 확대하는데 이용했다. 조선인들은 직접이던 간접이던 일본과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일본의 만주침략에 한부분을 맡았다. 
그리고 재만 조선인중 일부는 일본의 만주침략에 동조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으며 고의로 중국에 귀화한 후 도지소유권을 얻은 뒤 일본의 토지저당화사에 양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의 중국당국에겐 재만조선인은 점점 부담이 됐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08~109)

1924년 일본의 외무대신에는 시데하라 기주로 라는 사람이 취임했는데 시데하라는 장개석의 북벌이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불간섭정책을 하였다. 
대신 일본인의 주거 문제나 무역 문제를 중시하였다. 
이런 방침을 일본 여론과 정계에선 '연약한 외교'라고 비판하였다.(김영숙, 일본관료, 일본사학회 - 네이버 지식백과) 만주몽고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927년 4월 20일엔 이전 내각이던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을 대신해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했다. 
다나카는 1927년 6월 29~7월 4일 동방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선 일본의 중국 내 권익을 지키겠다면서 시데하라가 승인한 불간섭주의 대신 무력 간섭도 불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데하라 외교가 인정한 '만주가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버리고 '만몽 분리'정책을 확립했다. 
당시에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장작림은 중일친선을 표방하려면서 일본이 남만주철도를 이용하여 동북의 재부를 약탈하려는 것은 제한하려했다. 
이때문에 불간섭정책을 버린 일본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됐다. 
일본의 이런 정책은 동삼성에서도 전해졌다. 
동삼성에서는 1927년 8월 "다나카 내각의 만몽정책을 저지하자"는 일본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장작림은 만주 권익을 확대하려는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봉천선상(奉天省長)은 동변도(東邊道)에 훈령 1284호를 내린다. 
이것은 이주 조선인은 점점 몰아서 쫒아내며 귀화희망자는 국적법에 따라 귀화시키고, 법을 어기면 취소하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봉천선장은 11월 1일에 밀령을 내려서 개방지는 신속히 거두어들이고 미개방지는 외부인이 토지와 가옥을 빌릴 수 없게 없게 하라 지시했다. 
재만조선인들을 쫒아내기위해 중국관헌은 귀화를 압박하기, 출경 권고, 토지 임대차 계약 파기, 농사 거주 방해, 교육기관 압박, 가혹 압박을 하고 아예 몰아서 쫒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중국관헌이 폭행을 하거나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09~111)

재만조선인에 대한 박해와 구축이 심해지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람들에게 직접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1927년 12월 9일에 
『만주 일대에서 비할 수 없는 학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하등의 대책이 없다면 이는 조선민족이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족이 지척에서 이와 같이 생명과 재산의 위해를 받아도 그대로 좌시한다면 이는 분명히 정신적으로 조선민족의 멸망을 세계에 폭로하는 것』
이란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는 1927년 12월 6일 사설에서
『민족 단일당의 준비과정에 있는 신간회가 응분의 노력을 함이 옳다. 그러나 반드시 신간회 독자의 힘에 한하지 않고 각 사회단체와 중요한 민간 측의 언론기관이 연합하여 재만 조선인옹호동맹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임시기관을 만드는 것이 더욱 옳다. 각 방면의 총역량을 결집하고 보폭을 일치하여 이 문제의 해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조선 통치의 당국자는 이에 대해 솔선 노력해야지 저해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장작림을 중심으로 한 만주의 당국자들도 합법적인 조선인의 요구에는 해결에 응해야 한다. 문제가 시급하니 조용한 토의에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라 궐기를 고대한다』
고 하였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1~112)

각지에서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만들었다.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신간회 지부를 창립하거나 창립준비를 하면서 만든 것이다. 
신간회 지부 활동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재만동포를 지원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2)


1927년 당시 조선인이 공격했던 조선 화교는 만주 조선인을 배척했던 중국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국경을 넘은 초국적 존재인 화교들은 본토의 중국인과는 입장이 다른 독립된 행위자였으나 이런 점을 당시 조선인들은 섬세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40, 42)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좌우합중운동 단체인 신간회 결성과 관계가 있었다. 
1927년 신간회가 생겨나고 1927년 6월 이후 각지에서 지회가 결성됐다. 지회는 각지의 청년단, 농민단체, 노동운동 단체가 포함되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였다. 
이렇게 모여서 지회를 결성하던 당시에 신문을 통해 재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청년단을 중심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이 결성됐다.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신간회 지부의 중요한 활동중 하나였다. 
또한 이런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책임소재를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돌리고 있었고 재만조선인 지원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이라는 성격도 있었다.  
재만동포옹호동맹의 활동은 전국으로 퍼져갔고 지회가 각지에 결성됐다. 
이런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오전에 재만동포 박해 규탄대회를 열고, 저녁 때는 군중들이 화교와 화교상점들을 테러했고 이런 테러는 경찰이 막아서 강제로 해산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강하게 단속하자 집회는 금지됐다. 
하지만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은 각지에서 계속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각지에서 청년회를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단체가 연합하여 신간회 지불르 결성했다. 
신간회 지부는 1928년 2월까지 143개로 증가했다.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신간회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간회는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신간회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하여 신간회 차원에서 적극 지원했다.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신간회와 지회를 중심으로 결성됐고, 이런 대만동포옹호운동의 구성원은 거의 신간회의 구성원들이었고, 전국 조직도 신간회의 구성원들이 주축을 이룬다. 
12월 11일 경성에서 열린 신간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는 신간회가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적극 후원하자고 결의했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8~119) (다만 이것은 신간회의 중심급 최고지도자들이 선동하거나 조직해서 일으킨 건 아니다. 재만동포옹호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인 안재홍 선생은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났던 지방을 순회한 후 12월 15일 결과를 발표한 후 '과장된 풍설에 흥분하지 말고 재만동포 문제를 우호적으로 해결하고 조선에 있는 중국인 공격을 중지하라고 하였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6))

2-3 전국 폭동과 테러
화교배척폭동 이전 1927년 5월 경성부 태평통이나 용산등지에서는 화교가 조선인에게 구타당해 부상 입는 사건들이 생겨나서 중국총영사관과 화상총회에서는 주의를 기울이던 상태였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5)

전라남북도 등지에는 '김림의 조선 농민중 지주가 토지를 거두어 출경을 핍박받은 자가 모두 2만여명에 달한다'는 말들이 전파됐고 전북 이리에서서 처음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이 활동했다. 1927년 12월 7일, 이리에서는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대회를 열고 해산했다. 그리고 저녁부터 중국인 상점을 습격했다. 
어린이 수십명이 소동을 일으키고 그 뒤에 청년 수백명이 중국인 상점을 공격했다. 폭동은 8일과 9일에 군산, 전주, 서천, 김제 등지로 퍼졌다. 10일에는 또 군산, 함열, 이리, 장성, 부안, 김제, 삼례, 강경, 서천 등지에서 화교배척폭동과 테러가 일어났다. 
이러한 테러들은 신간회 지회 나 조선청년단 관련자들이 관련되어있었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왕수선(王守善) 중국총영사는 조선총독부 마츠무라 마츠모리(松村松盛) 외사과장을 만나 각자의 화교배척폭동을 막고 경찰이 화교를 보호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했다. 
조선총독부는 12월 10일부터 단속을 적극적으로 하여 신간회 지회,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과 집회를 금지하고 시위의 대표자를 검속했다. 전라도 지역의 시위와 폭동을 잦아들었다. 그러다 12월 15일 시위는 인천까지 번졌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12월 7일. 이리는 중국 당국의 만주 거주 조선인 구축과 압박에 대한 여론이 끊어오르고 있었다. 12월 6일 밤부터 7일 오전 11시까지 시민대회를 개최할 준비하고 화교 상점에서 일체의 상품을 사지않겠다는 '비매동맹'을 결성했다. 
7일 11시에 이리의 한 한 유치원에서 시민들이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진행을 중지시키고 趙明熙, 金匡宇, 鄭吉善, 鄭瀚朝 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4명에게 화교 배척은 '국제문제'라는 이유로 시민대회 개최를 못하게 했다. 
시민대회는 무산됐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0)
그날 저녁 소년 수십명이 주택과 상점에 돌을 던졌다. 
그 뒤 군중 수백명이 화교 상점으로 몰려와 상점의 문과 창문을 떄리고 부수면서 상점을 폐점하고 떠날 것을 강요했다. 
각 상점들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교외의 야채재배 농민은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사방으로 피신했다. 
경찰은 당일 미리 엄격한 경비를 하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서야 군중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7일 이리에서 일어난 화교습격사건은 다음날 이리 시내는 물론 익산군 전체로 퍼졌다. 
8일에도 군중들은 화교 주택 및 상점을 부수거나 돌을 던졌고 화교들을 폭행했다. 
가만히 걸어가던 체문업(遞文業) 씨와 이리역 대합실에 있던 진학모(陳學謨)씨는 군중들에게 걸려 폭행을 당했다. 
익산면의 동산리(銅山里)에서는 주민 30명이, 마동리(馬洞里)에서는 20명, 익산군 황등포(黃登浦)에서는 70명이 집단으로 몰려가 화교 주택에 돌을 던지거나 화교를 구타했다. 
오산면(五山面)에서는 주민 50명이, 남전리(南田里)에서는 30명이 화교주택을 습격하고 화교를 폭행했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290-291)

함열면(咸悅面)의 와리(瓦里)에서는 주민 200명이 화교주택을 습격하여 화교들을 폭행했다.
함열면에선 화교상인 점포가 4-5개 있었다. 
8일 폭동시 군중 4-5명이 소리를 지르며 화교를 구타하자 화교는 경찰 주재소에 보호를 요청했다. 
주재소의 경찰은 겨우 4명이었고 이중 조선인 경찰 2명은 수수방괂며 군증들을 진압하지 않았다. 
경상자 수명, 중상자4명이었고 중상자 중 1명은 위중했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0-292)
함열(함열면과는 약간 다른걸 가르키는 듯 한데 정확히는 모름)에선 폭동이 일어났을 때 주재소에서는 경찰이 1명뿐이었다. 
경찰은 폭동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해당 지역 면장과 작당하여 화교상인들에게 강제하여 물건을 헐값으로 샀다, 두계에선 경찰주재소가 아예 없었고 조선인 면장 김택수는 폭동 당시에 화교를 핍박하고 학대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

9일에는 익산군과 닿아있는 전라북도 군산부, 전주군, 김제군, 옥구군으로 퍼졌다. 군산부는 전라도에서도 화교의 인구가 가장 많고 화교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이곳에 화교배척테러는 8일 오후 7시에 시작했다. 
조선인들은 지나가던 화교를 구타했고 화교들을 습격했다. 
4명이 중상을 입고 10여명이 경상을 입었다. 
화교상인들은 이리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기도 했고 공황상태에 빠지기도해 가게를 닫았고 경찰서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걸 요청했다. 
9일 군산중화상무회(群山中華商務會)는 직원을 경찰서에 파견해서 피난처를 찾다아니고 화교(농촌 벽지의 소점포와 채소밭에 일했던 중국인) 500여명을 시내 전주통(全州通) 일대로 이동시켜 보호했다. 
그러던 중 10일 군중 천여명이 모여들더니 고함을 지르며 중화상무회 건물 주변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포위공략 형태로 몰려왔으며 주변에 있던 화교상인 점포의 문과 창문을 파괴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군산경찰서는 무장경찰과 소방대를 급파해서 해산시켰다. 
조선인 100여명을 체포하니 점점 평점을 되찾았다. 군산 화교상인들은 12월 15일에 영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거래는 한산했고, 물건은 헐값에 처분해서 손실이 컸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

전주는 군산부, 김제군에 이어 거주자가 많은 곳이다.  
전주에서는 화교상인 점포가 이리에서 폭동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을 만나서 보호를 요청했다. 
그래서 시내에서는 큰 피해를 없었으나 시외에 있는 화교들은 테러를 당해 화교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주군 12월 9일과 10일 전주읍, 高山, 伊藤面 에선 화교 손문지(孫文持) 등 총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지역 조선청년단은 화교들에게 '이틀 이내 조선을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293)

8일 참례의 화교사회는 8일에 군산한텐 전화를 받고 형세가 매우 위급한 걸 알고 당지의 경찰 주재소에 연락하여 보호를 요청했은 헛수고였다. 
8일 저녁 무렵 군중 수백명이 철도국에 고용된 화교 노자저 백여명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화교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거리로 피하려했다. 
군중들은 凌恒益(산동성 黃縣출신, 27세, 謙益成 포목상 근무)과 郝珍山(산동성 牟平縣 출신, 56세, 만두집 경영)를 (화교 2명) 살해했다. 
7명은 중상 입고 경상은 10여명이었다. 3명은 상태가 심각했다. 
당시 경찰 주재소 경찰은 4명뿐이라 제지하지 못했다. 
한 일본인이 전주에 긴급히 연락하여 무장경찰 6명이 도착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차여열(車汝悅, 17세)은 머리와 양손 및 양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차학시(牟學時, 32세)는 왼쪽 허벅지와 무릎 및 부상, 이위승(福山縣 출신, 25세) 머리 및 손에 부상을 입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114;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293)

밀양에서는 화교배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 경찰 대부분이 방관했다. 
해산은 일본인 경찰들이 출동하여 하였다.  
전남북도 남포에서는 경찰이 중국인을 주재소에 불러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면서 '중국인은 맞아 죽어도 된다'는 말을 퍼부었다. 
피난 갔던 화교노동자가 돌아오려하자 경찰이 뺨을 때린 일도 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

대도시와 가까운 작은 도시인 화령, 농암, 중모, 보은 에서도 폭동이 격렬했다.
청년단과 각 단체가 연합하여 거리에서 집단을 이루고 손에 목봉과 큰 돌멩이을 쥐었다. 
중국인을 만나면 구타하고 상점에 있는 물건을 약탈했다. 화교상인을 압박해서 화물을 일정 시간 내에 덤핑을 팔 것을 강요한 일도 일어났다. 
화녕의 한 마을에서는 2000 원 가치 물건을 800원에서 팔게하고 농암의 한 마을에서는 700원 가치 화물을 50여 원에 팔게하고 침구를 압류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115) 

1927년 조선화교배척은 총독부 기준으로 전국에서 총 702건이 일어났다. 
경기도는 전체의 36%. 충남이 23%, 전북은 14%,  그다음이 전남, 황해, 경북 38건, 강원 22건 순이다.(5인 이상의 군중이 벌인 습격 건수는 전북이 36%였고, 충남이 26%, 경기 15%였다. 3개 도가 전체 발생 건수의 77%이다.) 충북, 경남, 평남, 평북, 함경도는 다 합쳐도 약 10건이 안 된다. 전라도, 충남, 경기도가 전체 사건 건수의 7할 이상을 차지했다. 북부지역보다 남부지역이 사건의 중심지였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5)
1931년 화교배척 사건은 13개도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평남 746건, 경기 308건, 황해 142건, 평북, 98건, 함남  62건 순으로 이들 지역이 중심이었다. 
1931년의 조선화교배척은 1927년 화교배척고 비교하면 전국으로 광범위하게 골고루 일어났으며 1927년 경우는 남부지역이 중심이라면 1931년은 북부지역이 중심이었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5~296) 


화교배척폭동이 퍼지자 조선총독부는 적극적으로 재만동포옹호운동을 단속했다. 
이리에서는 폭동 뒤 경찰이 80여명을 검속했고,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참례에서는 경찰이 70여명을 검거했고, 전북 정읍에서는 각 사회단체가 작성해서 배포하려던 선전문을 인쇄 도중 압수했다. 
전남 나주에서는 12월 10일 나주장날에 아침부터 청년회원과 노동조합원들이 배중운동을 일으키려했다. 
나주경찰서는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일찍부터 각 중국인 상점을 지켜며 비상경계를 했다. 
청년회가 배중연설을 시작하자 경찰은 청년회원 박영목 외 노동자 5명과 학생 1명을 검속했다.(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6)

폭동이 진정된 뒤에도 크고 작은 화교배척은이 여전히 각지에서 일어났다. 
주로 지역 청년회가 주도해서 선전선동하고 불매동맹을 맺어 조선인이 화교상점에 가지 못하게 막고, 화 상점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거나 발로 차고 욕을 한 뒤 도망가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7)

조선총독경무국은 1927년 화교배척폭동에 대해 책임을 회피했다.
『(중국관헌의: 저자) 조선인에 대한 압박 약간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만주 및 조선 내 각 신문에 조선인 압박의 기사가 게재되자 재만조선인과 직접 관계있는 조선내 조선인에게 오른쪽 사실(압박 사실: 저자)의 과장적 정보 등이 제공되었다. 조선인 일반은지나인에 다대한 증오와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근년 조선내 모든 사업의 융성과 지나 내지의 시국의 영향으로 도래하는 지나인이 매우 많고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잡화상, 포목상, 음식점등 각 방면에서 조선인 동업자를 압박하는 상태로 인해 일반적으로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은 때, 재만조선인 압박 상황의 선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보복적으로 조선 거주 지나인을 박해하는 폭거가 초래되었다.』
(駐朝鮮中華民國總領事館, 「仁川鮮人暴動華人被害報告書」(상동).,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에서 재인용)
조선총독부는 이번 사건의 직접 원인을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이며 간접 원인은 조선 내 화교경제가 발달해서 조선인이 악감정을 갖게된 것이라 주장했다. 
중화민구외교부가 북경의 주중일본공사관에게 주조선총영사관의 보고를 근거로 이번 사건에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하니 일본공사관은 12월 24일 사건의 원인은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에 있다면서 책임을 떠넘겼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299)

2-4 인천과 인천의 화교 배척폭동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노동자들은 대체로 인천항을 이용했다. 
1923년 1월부터 3월까지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는 만명에 달했다. 
1924년에도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들이 6개월에 2만 여명으로 집계됐다. 
1925년에는 3월중에만 5천여 명이 들어왔다.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9~10

인천항은 한 때 한국의 현관이라 불렀다. 
다만 경부․경의선이 완전 개통하자 그뒤로 인천항은 한국의 현관(玄關)이라는 기능은 부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리에 따른 이점으로 여전히 대중국무역의 중요거점이라는 기능을 유지하였다. 
인천항의 수출입은 1차 세계대전기의 호경기와 인천항 선거(船渠) 준공에 따른 항만의 확충과 해륙연락 설비의 개선이 힘있었다. 
수출입액 총액은 해마다 늘어나여  1919년에 9,098만원을 기록했는데 1909년 1,667만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1920년 불황이 있어서 전년보다 감소했지만 대외교역 총액은 1922년에 1억 원을 돌파했다. 
인천의 대외교역은 1928년까지 꾸준하게 성장했다(다만 세계적인 대공황의 영향으로 1929년 전년보다 1할 가까이 감소하였고 이 현상은 1931년까지 이어졌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16, 인천학연구 4, 2005.2,  222)

1924년 8월 법률 제24호 「사치품 등의 수입세에 관한 건」67)이 공포되어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관세율이 배나 인상되고 중국산 견직물의 주된 수입항이던 인천항의 대중수입 총액은 전년과 비교하면 감소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견직물 상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화교상인의 경쟁력은 여전히 위력이 있었다. 
수입무역에선 중국산 마포 및 견포 등이 독점수입되다시피했다. 
그리고 화교상인들은 중국 본국에 본점 혹은 지점 내니 유력한 자본가를 배경으로하여 자본이 풍부해서 다른 타국상인들은 쉽게 지위를 넘볼 수가 없었다. 
일본제품인 면포 및 잡화류 등이 이전에는 재한일본인 상점에서 취급했으나 인천지역 화교상인들은 한신(阪神)지방에 머무르는 중국상인에게 위탁을 받아 직접 일본에서 수입하여 팔았다.(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 인천학연구 4, 2005.2, 227)

인천화교상인들이 1930년까지 무역활동을 할 수 있던 배경은 또 있다. 
인천에는 인천의 산동 출신 화교들로 구성된 북방(北幫)이 기선을 소유하여 인천과 연태간에 화물과 승객의 운송에 편리를 제공했다. 
종래 인천-연태간의 해운권은 일본 阿波國共同汽船株式會社가 장악했다. 
이 회사 소속의 공동환(共同丸)은 조선총독부와 관동청의 보조를 받고 인천-연태(芝罘, 기항지)-대련간을 운항하였다. 
이 항로의 여객과 화물은 거의 전부 중국과 관련됐으나 공동환은 중국인 승객과 화물에 대해 수시로 차별을 가하였다. 
일본의 항운업 독점에 화교상인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다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교상인 중 재력이 있는 몇몇이 공동출차하여 즈푸(芝罘)에 본점(本店)을 둔 윤선회사(輪船會社)를 섭립하고 일본한테 구우선 살마환(舊郵船 薩摩丸)을 사서 이통호(利通號) 이름을 바꿔서 1922년 9월 대련-지부-인천간을 운행하였다. 
이통호는 인천-연태간을 매주 한번씩 왕복하면서 화인(華人)의 여객과 운송에는 우대조치를 하였고 운항 뒤 영업상태로 양호했다. 이통호는 정부의 보조곰은 한푼도 받지 못했으나 화교들에게 적극으로 후원을 받았고 공동환과 경쟁할 수 있었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22, 인천학연구 4, 2005.2, 227~228;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화교의 상업에는 크게 직물류수입․서양잡화․잡화소매․약재․양복점․음식점․환거래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영업을 진행하고 있던 대형 직물류수입상은 德順福․永來盛․和聚公․協泰昌․人和福․和泰號․三合永․聚源和․協興裕․東和昌 등 11개 상점으~30명의 점원을 두고 직접 수입한 직물류를 전국 각지에 팔았다. 
면포(夏布)는 한인의 옷감으로 애용됐는데 1924년 일제는 이것을 사치품으로 규정해 제재하여 중국산 하포 수입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한국산 하포는 질이 낮고 생산량도 많지않아 세금을 무섭게 매긴 뒤에도 중국산 하포 수입은 늘어났다. 인천에는 화교상인이 운영하는 면포점이 적지 않은데 源生東․和聚公 등은 전국적인 판매량을 확보한 대규모 면포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화교상인이 운영하는 잡화소매상, 음식점, 이발관(이발소) 등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도 상대하였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2, 인천학연구 4, 2005.2,  228)

화교상인들의 인천상권 장악 현상에 대해 인천상공회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소화 2년(1927) 인천항의 수이출입 무역액 가운데 중국상인의 취급액을 보면 합계 1천 8백만 원 이상으로 당항(인천) 총무역액의 1할 4분에 상당한다. 더구나 이출무역의 대부분은 미곡에 집중되어 있는바, 이를 제외한 기타 수이출입 합계 7천 9백만 원에서 다시 홍삼․엽연초․석유․철도건설제료 및 기계류 등 전매품 및 특허품 합계 1천만 원을 공제한자유상품 대비 비율은 3할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중무역은 수입에서는 8할 5분, 수출에서는 6할이 중국상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천의 내선상인들은 밖으로는 상권의 황폐화, 안으로는 중국상인에 의한 상권잠식에 시달려 앞뒤로강적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인천상권을 장악하여 많은 경제적이익을 얻은 화교상인들은 해마다 엄청난 돈을 물품 대금 혹은 여타 명목으로 본국에 송금했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3, 인천학연구 4, 2005.2,  229)

인천은 농민들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안정된 활동을 유지했다. 
인천의 농민 인구는 상인 운구보다 많았다. 이 농민들은 1911년부터 인천농업공인회(仁川農業公議會)라는 공동판매기관을 설립하고 인천과 그 주변에서 야채 생산에 종사해오며 그 유통과정에도 개입하며 야채지배업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점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34) 이런 한국화교사회는 다른 지역 화교사회와 다른 모습이. 
예로 미국과 유럽지역 화교들은 노동자들이 다수인데 한국은 농업종사자도 적지않다. 
인천지역은 개항 직후부터 화교가 빽빽하게 모인데다가 일본인들까지 화교농민들이 만든 소채(蔬菜)를 좋아해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농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지역이다. 농업생산을 통한 소득또한 상당했고 인천의 소채재배업은 종래 중국인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인천과 인근지역에 머물러 살던 화교상인들은 인천지역 채소시장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1911년 공동판매기관 성격인 어촌농업공의회仁川農業公議會를 만들었다. 화교상인의 생산은 주로 인천부근 부평군(富平郡) 주안면(朱安面)에 집중됐는데 생산액은 연 8~10만원에 이르렀다. 주된 소비자는 인천지역 화교지만 다른 지역에도 공급해서 한국인과 일본인도 주된 소비층이었다.
인천지역 화교 소채재배농은 1호당 평균경지면적이 한국평균 1호당 경지면적의 절반정도일뿐이었다. 
화교들은 이런 좁은 땅에서 봄·여름·가을·겨울에 각각 제철 채소를 재배했는데 좁은땅에서 봄부터 겨울채소를 돌아가면서 재배했다. 
그리고 화교농민들은 채소재배에서 수요와 공급 관계를 면밀히 연구했다. 
예를 들면 겨울철 채소값이 뛰어오를 때는 배추나 무 등을 밭에서 땅을 파고 저장하여두었다 다음해 1월경에 시장에 내다팔았다. 
인천은 개항 뒤로 해항도시로 발전해 시가지로 넓어져서 부내(府內)에 농경지가 많지않아 다른곳과 비교해서 농업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대신 그 주변인 부평 등지를 중심으로 과수원이 발전하는 상태였다. 
인천지역 농업생산은 적고 부진했는데 중국인들은 농업생산에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화교농민들은 농작물을 팔때는 이랬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재배농이 자신들과 같은 상품을 팔 대는 엄청난 염가로 팔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익을 독차지해서 수입을 올렸다. 인천부에서는 필요한 채소의 7할은 화교농민이 공급했고, 이런 채소를 팔고사는 일도 화교농민이 스스로 공동경영하는 시장에서 하였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6, 인천학연구 4, 2005.2, 230~232)

이런 이유로 경쟁하던 조선인들은 화교들에게 좋지않은 감정을 느꼈다. 인천에서 좋지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오대 인천영사는 인천에서 폭동과 테러가 벌어지기 3일전인 12일에 인천경찰서를 방문하고 경찰서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대 영사는 서장에게 "특별 경비를 펼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장은 "특별히 주의하여 경계를 하고 있으니 결코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오대 영사는 15일 폭동과 테러가 벌어지기 1시간 전인 오후 3 전화로 다시 경찰서에 연락해 "귀관(貴館)은 곧바로 총독부에 군경 파견을 청구할 것"을 요청했다. 
경찰서의 경보부(警部補)는 "모든 순경은 이미 출발하여 배치되어있으며 준비가 완료된 상태로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회답했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9~310)


13일 인천에서 멀지 않은 고양군 아현리에서 주민 5명이 화교주택을 습격해서 퇴거를 강요했다. 
14일엔 경성부 漢江通에서 노동자 20명이 화교 馬謂南을 습격하여 폭행했다. 
같은 날 경성부 숭일동에서 노동자 8명이 화교 楊承之를 습격하여 폭행했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0)
화교배척이 전라도에서 점점 북상해서 경기도로 올라오는 조짐이 보였다. 
인천경찰서고등계는 13일 오전 11시에 이번 조선화교배척의 주동세력중 하나인 청년동맹 인천부의 간부인 고익상(高翊詳), 진해룡(陳海龍), 고일(高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이 다음부터는 청년동맹상무집행위원회가 결의한재만동포옹호문제에 절대 관계하거나 참여하지말고 인천 각 사회단체한테도 재만동포학대문제에 대한 집회를 금지시키라고 명령했다.(이때문에 인천에서는 재만동포옹호집회가를 개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이상 대책을 세우지는 않았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1)

12월 14일 청년 7명이 인천부 지나정(支那町)(현 선린동 인천차이나타운) 근처의 송판정1정목(松坂町1丁目)(현 북성동1가)에서 화교 손수흥(孫壽興)을 습격하여 폭행했다.
 
인천은 불길한 분위기에서 15일을 맞았다. 
오후 4시~오후 4시 30분 인천부 외리(外里)에서 소년 수십 명이 화교가 경영하는 만두집을 테러했고 화교를 경멸하며 폭행을 가했다. 
오후 6시경 내리(內里)와 외리 일대에 군중 2-3천명이 갑자기 늘어났다.무기를 든 군중은 화교 주택과 상점을 무자비하게 습격하고 화교를 폭행했다. 이런 상황은 내리와 외리 인근 부근인 인천역(仁川驛)(현 동인천역), 용강정(龍岡町), 시정(寺町), 본정(本町), 중정(仲町), 화정(花町), 신화수리(新花水里), 송임리(松林里) 등지로도 퍼져갔다. 이런 사태는 야채재배를 하는 화교농민이 많이 거주하던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多朱面) 지역에도 퍼져나갔다. 인천의 화교들은 주로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에 이 지역에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경찰 수십명은 군중들을 탄압하지 않고 군중해산을 맨손으로만 시도했다. 화교는 각지로 흩어져 지나정과 인천경찰서로 피신했다.
오후 8시경 군중 700-1000명은 무기를 가지고 지나정을 습격하려 했다. 당시 지나정 입구는 경찰 3-4명이 경비하는 상황이라 위험했다. 
지나정의 호교 상인 300명과 이곳으로 피난 온 화교 500명이 무기를 들고 지나정에서 입구에서 군중의 습격을 막았다. 
그 뒤에도 군중의 지나정 습격 시도는 7번이나 됐으나 화교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밤 11시경 쯤 군중은 완전히 해산했다. 
주인천중화민구영사관과 인천중화총상회는 16일 인천경찰서와 교섭하여 화교 보호를 요청하고 인천경찰서에서는 무장 경찰 60여명을 파견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자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6일 아침 영사관과 중화총상회는 자동차를 급히 조달해 인천지역의 화교를 영사관 부지와 인천화교소학교로 수송해 피난시켰다. 그날 밤에는 지나정 근처의 주인천영국영사관에 부녀자 및 아동 700여명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고 그곳에 피난시켰다. 
인천중화총상회는 각지에서 지나정에 피난 온 화교를 인천화교소학교와 중화회관 그리고 피해를 당하지 않은 상점에 흩어지게해 수용하고 사상자와 부상자를 조사하고 이런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무술에 능한 화교 60명을 뽑아 지나정 입구에 비채했다. 
그리고는 인천의 조선인 사회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고 중화민국 정부에 일본정부오 교섭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12월 16일 이후 인천에서는 화교습격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천화교배척은 15일오후 4시경부터 오후 11시까지 약 7시간이라는 시간동안 벌어진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인적 피해는 중상 7명, 경상 18명, 총 25명이었으며 이들 피해자의 피해 장소는 내리 10명, 외리5명, 용강정 4명, 화정 2명, 사정ㆍ우각리(牛角里)ㆍ송현리(松峴里) 각 1개소, 기타 1개소였다. 인천부 거의 전 지역과 인천부 인근 부천군에서 화교 주택 및 상점의 피해가 발생했다.

장학보(48, 농민, 산동성 榮成縣 출신)는 15일 오후 5시 상인천역 앞에서 야채행사를 하다 습격을 당해 제8늑골이 부러졌다. 12일간 입웒여 30원의 병원비가 들었고 상태가 심각해 약 반년간 휴양이 필요했다. 
유씨(35, 만두제조, 榮成縣)는 15일 오후 6시 용강정 27번지 자택에서 얼굴 찰과상과 다리 타박상이란 중상을 입었다. 유씨는 14일간 입웒여 입원비로 41원이 들었고 약 반년간 휴양기간이 필요했다. 
유씨의 딸 이축녀(5)는 이마에 큰 중상을 입어 14일간 입원하고 42원의 입원비가 들었다. 아들 李孟子(7)도 이마 타박상의 경상을 입었다. 이춘정의 주택은 군중에게 습격을 받아 만두제조 원료인 밀가루, 쌀, 설탕, 유리상자까지 피해입었다. 
何文東(41, 상업, 牟平縣)은 寺町55번지의 자택에서 오후 7시 습격을 받고 배 부위 찰과상 및 타박상이라는 중상을 입어 24일간 입원을 했고 입원비는 7.35원이 들었따. 퇴원 후 20일 간의 치료비로 12원의 추가비용이 들어있다. 
경상 피해자중에는 인천부내의 상업 종사자뿐만 아니라 농민도 있으며 인천부와 인접한 부천군 다주면 일대의 화교농민들도 테러를 당했다. 
인천부와 부천군 일대에서 화교농민들의 피해가 많은 원인은 이 지역에서 야채재배하는 화교농민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천군 내부에서도 인천부와 인접한 다주면에 화교농민이 집중거주했다. 
화교 주택과 상점중 물적피해가 제일 심했던 것은 桃山町17번지에 위치한 양말제조공장 덕취항(德聚恒)이였다. 
덕취항은 15일 습격당해 공장 제조의 양말, 모자, 양말재조 원료가 군중에게 도둑질 당하거나 파괴되었다. 
피해물품은 114 종류였고 피해액은 4,154.5원이었다. 
이 공장의 경영자인 선동신(孫棟臣 29, 상업, 봉천성 安東縣)은 오후 5시 우각리에서 습격을 받아 머리를 얻어맞았다 부상을 당했다.
조선화교의 양말제조업은 굉장히 번성했다. 
1920년대 평양의 양말제조업을 위협할 정도였다. 
신의주가 화교 양말제조업의 중심지였꼬 인천이 그 다음으로 발전한 곳이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5)
같은 양말제조공장인 龍里238번지에 위치한 永盛東도 습격을 당했다. 
이 공장은 양말제조공장중에선 생산액, 판매액 부문에서 두번째로 많았다.1928년의 연간 매상액은 도매 3만6,000원, 소매 6천원으로 총 4만 2000원에 달했다. 
이 공장은 공장자체가 아닌 양말 소매상점을 습격당했는데, 그 때문인지 피해액은 덕취항과 비교하면 경미했다.(피해액은 376.05원) 영성동은 15일 습격당한 뒤로는 29일까지 13일간 휴업햇다. 
외리 234번지에 있는 덕원성(德源成)도 습격당해 기계 손상, 현금및 양말제조 원료 도난 같은 일로 3,351.1원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내리 188번지에 소재한 잡화점 취화성(聚和成)은 97개 품목에 피해를 입어 3,463.62원을 피해입었다. 취화성은 피해정도 심각해서 테러를 당한 뒤 31일까지 16일간 영업을 하지 못했다. 
취화성에 와있던 사람들도 군중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이광화(李廣和20, 상업, 牟平縣)은 좌측 뺨을 다쳐 살갗이 벗겨졌다, 왕의선 (王義善 30, 상업, 牟平縣)은 뒷머리와 팔 얻어맞아 부상을 당했다. 
손일분(孫日芬 42, 상업, 牟平縣)은 손가락과 머리를 맞아 부상당했다, 진상통(陳祥通20, 상업, 牟平縣)은 손가락을 다쳐 살갗이 벗겨지고 무릎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취화성에선 일하던 직원들은 더욱 심한 부상을 입었다. 
왕보인(32, 상업, 산동성 牟平縣)은 15일 오후 6시 내리의 聚和成에서 근무하다 습격을 받고 다리 관절 타박상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왕보인은 26일 입원했고 입원비는 65원이 들었고 역시 상택 심각해 1년간의 휴양이 필요했다. 
임헌지(58, 상업, 牟平縣)도 같은 취화성에서 일하다 오후 5시에 군중의 습격을 받고 왼쪽 눈과 얼굴에 찰고상이란 중상을 입었다. 6일간 입원하여 입원비 15원이 들었다.
인천부 내리 200번지에 소재한 덕성관(德盛館)도 15일에 습격당해 27.12원을 피해당했고 투숙객들도 테러를 당했다. 
송서윤(宋書潤 28, 상업, 牟平縣)은 코를 얻어 부상을 입었고, 송서보(宋書寶43, 상업, 牟平縣)는 얼굴을 얻어맞아 부상을 입었다. 
가장 부상이 심한건 왕보전이었다.  왕보전(32, 상업, 牟平縣)은 내리의 客棧인 德盛館의 객인으로 머물러있다가 당일 오후 5시에 군중의 습격을 받고 머리와 손가락에 타박상을 입고 10일간 입원했고 입원비 35원이 들었다.
인천 외리 167번지에 소재한 이발관(이발소)인 경운당(慶雲堂)도 피해를 입어 회전의자, 이발도구, 거울, 수건 등 48개를 물품이 파괴되거나 사라졌고 피해액은 1,545.15원이었다. 
경운당은 15일 습격당한 뒤 28일까지 14일간 휴업했다. 
화정 50번지에 소재한 만두집 영빈루(瀛濱樓)도 군중에게 습격과 테러를 당해 탁자, 유리문 등 107.21원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15일부터 24일까지 휴업했다. 영빈루는 오후 6시에 습격을 당했고 王子經(24, 상업, 산동성高密縣) 은 이마의 살갗이 벗겨지는 부상을 입었다.
인천 외리 218번지 소재의 잡화상 동성태(東盛泰)는 오후 5시에 군중에게 습격을 받아 89.46원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동성태는 15일부터 23일까지 휴업했다. 
주호림(周厚林 45, 상업, 榮成縣)은 동성태에 있다가 어깨와 허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9~304)

부천군 다주면의 화교농민의 농가들도 군중에게 습격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다주면 사충리193번지의 화농 張毓寬은 가재도구, 야채종자를 잃어 157.59원이나 손실됐다. 
같은 사충리의 宋光泰는 닭 5마리, 채도(야채칼) 등 57.8원을 잃었다. 向仁里의 화농 宮法興 농가는 배추, 쌀 등의 식량과 가재도구를 포함 32.24원을 잃었다. 향인리의 화농 曲德恩은 25.55원이라는 피해를 받다. 龍亭里의 李均能은 채도와 마늘, 톱, 도끼 등을 잃어 총 98.45을 잃었다. 
용정리의 곡지기(曲芝棋)는 농기구, 쌀 등의 식량을 포함해 368.05이라는 피해를 입었고 군중들은 곡지기의 주택을 태워버려 100원을 더 잃게 만들었다. 
그 밖에 인천부 도산정17번지의 화농于家謨는 51원, 신화수리의 화농 滕樹正은 63.35원, 만석정의 화농 張鴻淸은 72원, 부천군 남동면의 王義厚는 41.95원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7)

인천화교는 화교 집단거주지인 "지나정"과 새롭게 조성된 삼리채 청국조계 지역 부근인 내리, 외리, 신정 등지에 조선인과 섞여 살았다. 조선인과 섞여살아서 습격 받기 쉬웠고 경찰도 진압이 어려운 지역이기도 했다.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3)

인천 경찰의 경계태세도 허술했다. 
경성경찰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경성은 교의 집단거주지가 현 명동의 중국대사관 주변,덕수궁 대한문 주변, 그리고 청계천 수표교 주변의 3개소에 형성되어 있고, 화교인구도 1927년 말 현재 인천은 2,077명인데 경성은 4,639명으로 2배 이상 많다. 
하지만 인적 피해는 경상 3명, 폭행당한 인원 61명이고 물적 피해는 51.16원이었고 천명에 달하는 군중이 벌인 습격사건은 없다. 
경성에서는 경성경찰이 조치를 하여“무장경찰은 도로의 순찰을 했으며, 화교를 습격하는 어떤 시도도 즉각 진압"(주경성영국총영사관의 페이튼(Paton) 총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했다. 경성경찰서와 다르게 인천경찰서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6일이 되서야 무장경찰을 투입해 경계 태세를 하였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1~312)

3 1927년 배화폭동 이후

1927년 배화사건 일어난 뒤에도 많은 화교가 중국으로 귀환하지는 않은 듯 하다. 
1928년 화교수가 이전보다 현격히 줄기는 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44)

1927년 화교배척폭동 이후 일본당국은 중국인 입국을 더욱 강하게 단속했다. 
1931년, 대규모 폭동과학살이 일어나기전인 1931년 6월 '상해시보'에서 총독부으로 적극으로 벌이는 화교구축정책과 학교 박해사례를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 보도에선 인천, 조치원, 개성 같은 각지 사례를 거론하고 있다. 비자나 거주허가증이 없는 노동자는 불시로 체포와 강제출국하며 허가증 심사를 강화하고 불법 체류자에게 벌금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일이다. 
이 법령은 1910년대에 이미 제정했으나 유명무실했던 것은 일본당국이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던 것이다. 허가증 심사나 체포와 검색과정에서 일어난 힐문과 인격적 모욕이 공분의 대상이 됐다. 
무역과 성압활동이 위축되고 1927년에 폭동이 일어났으나 화교 노동자 입국은 오히려 급증했고 조선인 노동자 실업문제가 조선의 신문 지상에 보도됐다. 화교노동자 단속 강화는 곧 화교노동자가 들어오는 것과 그에 따른 노동시장에서 민족갈등이 높아진다는 것을 반증했다. 
1930년에 화교인구는 6만을 넘어 7만에 가까워졌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2~113)
그리고 만주사변 전해인 1930년 일본제국내에 중국인 거류는 일본에 3만명, 조선에 7만명, 대만에 5만명으로 조선이 가장 많았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
1929년 3월 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 따르면 음력 5월이 끝날 무렵이며 인천부두는 중국에서온 노동자 무리에 파 묻히고 그 수가 많으면 선박마다 한번에 1천 2~3백에 달한다고 보도하면서 상륙하는 중국 노동자 사진을 실었다. 
1929년 3월 28일 조선매일신문(朝鮮每日新聞)에서 중국 노동자 무리가 인천에 조수와 같이 밀려든다고 하며 3월 한달동안 인천에 상륙한 중국인 9,233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1929년 4월 19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중국인 노동자가 최근 급증해서 1,2월에는 약 3천명이 평균인데 3월에는 약 1만명이나 되고 4월에는 더욱 늘어나 선박마다 7백~2천여명에 가까운 중국인이 건너와서 당시까지 1만수천명이 들어왔다고 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김승욱, 20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日帝의 渡航 관리정책 - 중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8, 2013.6, 145)
1931년 5월~6월엔 경기도 일대에 화교노동자와 화교 농민 문제가 크게 떠올랐다. 
인천(仁川), 철원(鐵原) 등지에서 경찰관서는 화교노동자와 화교농민에게 거주허가증을 발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속을 강화해서 구금, 벌금, 강제출국을 하였다. 
경성의 중국총영사관은 이 사건을 "중화금공피압사건(中華禁工被壓事件)"이라 부르며 조선총독부 외사과에 강하게 항의하였다. 
경기지역이 문제가 된 건 고향에서 계절성 노동자를 고용해서 채소농장을 대규모로 경영하는 산동화교가 많기 때문인데, 예로 산동성 출신 강문환(姜文煥)에 따르면 노동 노동자로 고용한 산동성 화교노동자 7명에게 취로허가능 발급을 요청하면서 전해인 1930년 말 귀국 시에 '수원경찰서에 허가증을 반납하면 봄에 입국할 때 돌려준다'고 해놓고는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중국인 노동자 단속은 1910년부터 명문화됐지만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다가 갑자기 엄격하게 규정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1931년이 되면 일본과 조선 모두 세계대공황 때문에 경기가 나빠져서 일자리가 줄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강문화이 그렇듯이 재한화교들은 상점이든 농장이든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중국에서 동향인을 데려와 썼다. 조선총독보의 처지에선 조선인일 일할 일자리를 마련해야하는데 화교의 이런 닫힌 동향주의는 달갑지가 않았다.(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3)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게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이다.

4

4-1
사건은 길림성 장춘현 삼우 만보산 (吉林省 長春縣 三區 萬寶山)에서 일어났다.

중국인 학영덕(郝永德)은 일본측과 몰래 결탁해서 수전 경작 알선 회사인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했다. 
지주 12명과 4월 16일 수작경작에 대한 소작계약을 맺었고 조선인들과는 임대 이전 계약을 맺었다.(교육학석사논문 - 사보혜, 만보산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 18) 4월 16일에 지주들과 계약한 13항을 보면 "이 계약은 현 정부의 허가가 있는 날부터 효력을 발생하는데 만일 현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무효로 한다." 고 나와있다. (교육학석사논문 - 사보혜, 만보산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21) 
실제로 길림성당국은 벼농사에 종사하는 자는 중국인에 한하고, 그 외 한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학영덕은 정부에게 허가도 받지않고 조선인과 계약맺었다. (교육학석사논문 - 사보혜, 만보산사건과 인천 화교배척사건 연구-재만한인과 재한화교의 관계사적 입장에서-,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2009,24~25)


장춘영사 타시로(田代重德)가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외무대신에게 4월 7일에 보낸 기밀보고에 따르면 "계약을 맺을 때 장춘현장의 승인 얻어 장차 중국관헌의 압박을 받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할 예정"이며 "경영이 잘 될 경우 상당한 규모의 조선인 부락이 건설되어 소작농민의 복음 되는 것은 물론 이곳 장춘과의 관계도 밀접하게 되어 장춘 조선인민회 및 금융회의 사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일본의 금융 및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 할 수 있음)이라 판단했다. 중국은 만보산에서 재만한의 거주와 개장 자체를 허가한 바 없다. 
그런데 수로의 개발과 수중보를 건설하려하니 용납할 수 없었다. 참수 피해와 하운 장애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25일 장춘공안국 순경은 수로 개착 공사를 지휘하던 한인 감독 1명을 체포하고 한인 2명을 구타했다.  
장춘영사는 26일 장춘영사관 서기관과 영사관 경찰 4명을 현장에 파견하였다. 
이런 장춘영사관 경찰의 현장 파견과 한인 보호는 중국당국을 자극했다. 
장춘시정주비처장은 5월 6일 기존 거주자 이외에 새롭게 이주하는 한인을 절대 거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성정에부터 받았고 27일 방침에 따라 공사 제지에 불복하는 한인을 조사하고 경우에 따라 일본영사 및 사법기관에 인도하여 의법 처리하겠다고 보고했다. 중국측은 5월 30일 200명의 순경과 기병대를 출동시켜 6월 1일 한인 10명을 체포했다.
6월 3일 장춘시정주비처는 일본장춘영사에게 문서를 보냈다. 
수전개발 문제, 수로 개발에 따른 피해 배상 문제, 그리고 공안국의 명령을 거부하고 공사를 강행하다 체포된 10명을 돌려보내주겠다는 내용이다. 
장춘현장과 주비처장은 6월 2일 일본장춘영사를 방문해서 이번 체포가 지역민의 청원과 성정부의 명령 때문에 한 부득이한 조치이며 체포한 한인도 주비처를 통해 영사관으로 바로 인도하겠다고 하였다. 
일본 장춘영사는 장춘현장과 주비처장과 면담하면서 '평화적 해결이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중국 측의 한인 구축의지를 확인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외교적 경로를 통해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생각했지만 바로 포기했다. 
6월 2일 이후 일본 경찰 6명과 중국 경찰 180명이 대치하는 상황에 대해 외무성에게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재만한인에 대한 현지 보호방침을 포기하고 경찰을 즉시 철수하는 것, 다른 하나는 수로공사 완성 때까지 경찰을 증원하여 실력으로 중국의 '반성'을 촉구시킨다는 태도였다. 
보호 방침 포기 아니면 무력시위 둘 중 하나뿐이라 보고를 한 것이다. 사태는 현장의 외교교섭과 라인과 무관하게 봉천총영사와 길림성 주석의 교섭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일본 봉천총영사는 현지 파견 중국 군경과 일본 경찰의 동시 철수와 평화적 교섭에 의한 해결에 장작상이 적극 나설줄 것을 요청했다. 
장작상은 지방적 차원에서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며 양국 군경의 출동방지에 노력할 것이라 다짐했다. 
6월 6일 장춘주비처 외교과장은 일본장춘영사관 서기관이 있는 곳에 방문했다. 
재만한인의 현지거주는 절대불가하지만 이번 문제의 발단은 학영덕의 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한인의 선의는 분명하고 퇴거하면 개간 비용 배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군경철수, 학영덕의 사기 행위 인정, 한인의 선의 확인, 피해 배상등을 내놓았지만 재만한인 구축이란 방침은 변함이 없어서 장춘영사는 '일본의 세력범위에서 일본의 정당한 사업을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면 향후 만주발전의 퇴영적 경향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양측은 합의하여 공동조사단을 구성했다. 6월 9일과 10일 조사가 진행됐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고 양쪽다 합의를 얻지못했다.
장춘 주비처장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한인의 수전개발을 선의인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단념하면 학영덕에게 보상토록 하며 대신 밭경작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장춘영사는 이 제안을 속임수라 판단했다. 
현지가 습지이고 한인이 밭벼 경작의 경험이 없는 건 물론 경작 도구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안을 거부했다.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44~50)

이런 분쟁이 있을 당시 중국 정탐원은 당시 '만주·한국 주둔 일본군'을 정탐했다. 
그 뒤 침략할 움직임을 포착하고 보고했다. 
이런 움직임때문에 장작상은 만보산사건 역시 동삼성의 치안을 혼란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국토를 침략하려는 음모의 일환이라 생각했다.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2~53) 그렇기 때문인지 중국측은 일본에게 적극 대응하지 않았다.

중국 측이 계속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결국 6월 26일 공사를 재개했다. 
장춘영사는 지역민이나 중국 관헌의 반대가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공사가 재개되면 묵인할 것 이라 판단했다. 
왜냐하면 만보산 사건에 보여준 장작상의 태도, 장학량의 건강상태, 반장개석 운동의 대두 같은 시국상황을 변화를 고려하면 일본측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공사를 재개하면서 주민의 반대를 완화시키는 노력과 중국 측과 교섭하는 것을 같이 하고자 했다. 
일본 측은 공사재개는 물론이고 경찰 5명도 추가파견하였다. 
이런 공사재개와 추가파견은 중국측을 자극시켰다. 
7월 1일 일본의 예상과는 다른일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 중국농민 400여명이 삽 등을 휴대하고 공사현장에 집결했다. 
일본경찰이 만류하는데도 수로와 물막이 시설을 대규모로 파괴했다.  
이러자 일본경찰은 한인에게 '작업을 중지하고 저항하지 말것'을 지시했다. 
장춘영사는 사태가 나빠지자 영사관원을 주비처에 파견해 외교과장에게 농민을 진압을 오청했다. 
그러자 "농민이 본래 합법적 권리를 소유하였지만 불법 침해를 당해 정당방위를 실행하여 원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관부는 억압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4~55)
물론 중국이 정말 방조했던 건 아니다. 
7월 1일 오전 10시 중국 관할 공안분국장 전사곡과 7명의 순경이 현장에 출동했다. 
순경들은 현장에서 농민들을 말려서 못하게 하려했다. 
농민들은 전사곡 일행을 폭행을 했다.(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3~55)

그 이후 사건전개는 다음과 같다.
『"내일도 올 것이냐?"
"그렇다"
"몇 명이나 오냐?"
"오늘은 700명이지만 내일은 천명이 될 것이다."
"(화를 내며) 내일 천 명이 올 거면 천 개의 관도 같이 가져와라. 우리 (일본) 제국이 오늘 늦게 군대를 파병할 것이고 비행기 대포 기관총 수류탄 등을 준비해 둘 것이다. 천 명이 온다면 다 죽어 한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농민이 돌아간 후 일본 경찰은 바로 일본 영사관으로 전서구를 날려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 무장경찰 30명이 총과 탄환을 휴대하고 경찰서주임 중천의소(中川義沼)의 통솔 하에 출동하여 수로 좌우에 배치되었다. 오전 8시경 각 촌의 농민이 XXX(해석불가-블로거)에 집결하여 호미등을 들고 마가초구에 도착하였다. ……중천은 (농민대표) 손영경 등의 태도가 매우 강경하자 돌연 태도를 바꿔 경찰에게 그를 체포토록 명령했고 4~5명의 경찰이 그를 막사 악으로 끌어넣으려고 했다. 이 때 일반농민이 일제히 달려 나가 일본경찰을 포위하고 송영경을 탈취하였다. 일본경찰이 바로 사격하여 농민을 위협하자 농민들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였고, 그 중 백여 명은 가까운 집으로 돌아가 총을 갖고 돌아와 마가초구 하성옥의 담을 엄폐물로 하여 응사하였다. 서로 총격적을 1시간 가까이 벌였지만 양측 모두 사상자는 없었다. 이 때 (만보산) 제3구 공안분국은 이 소식을 접하였다. 분국장 전사곡(田錫穀)은 수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서둘러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쏟아지는 탄알을 무릅쓰고 중재에 나서 농민들에게 사격중지를 명령하였다. 농민 가운데 흥분한 자가 있어 전사곡은 가래로 가격하여 그의 왼쪽 어깨에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전사곡은 그래도 더욱 열심히 중재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약각 감동하여 사격을 중지하였다. 일본경찰에 대해서도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격을 막았기 때문에 10시경 농민부대는 해산하였다. 이것이 7월 2일 충돌의 실제 정황이었다.』
(만보산안조사상기, 혁명문헌, 제33집 602~603면, 손승회, 소설 만보산과 만보산사건, 大東文化硏究 54, 2006, 206에서 재인용)

당시 일본경찰과 중국농민은 양측이 총을 쏘긴했으나 위협사격만을 해서 죽긴 커녕 맞지도 않았다. 그러다 전사곡이 직접 끼어들어 몸으로 막아서니 양쪽은 더 이상 총을 쏘지 않았다. 이 충돌은은 결국 한명도 죽지않고 끝났다. 
진짜 사건의 시작은 만보산사건이 아니라 조선에 있는 언론들의 보도였다.
4-2
당시 조선에는 대표적인 두 언론이 있다. 그게 바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였다. 그리고 두 신문사는 경쟁관계였다.

이런 경쟁관계에서 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925년 9월에 사설 '조선과 노국의 정치적관심'때문에 무기정간을 당했다  10월 15일에 해제됐다. 
조건은 사설집필에 직접참여하지도 않은, 사회주의자로 지목된 기자들을 면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일보에서 면직된 기자들은 9월 27일, 조선일보사주 신석우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경쟁이 동아일보에 실었다. 
그 신문사는 당시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민두기,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相異한 民族主義的視角, 동양사학연구 65, 1999.1, 169~170) 이런 관계에서 두 신문사에서 경쟁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민족 문제였다.

동아일보는 1928. 4. 1.부터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하였고 조선일보는 1929. 7. 14. 부터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31년 여름 '브나로드 운동을 통한 문맹타파와 한글보급운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하기도 했다.
두 언론사의 경쟁은 충무공의 묘소를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충무공 묘소 위토가 경매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벌이면서 민족주의적 담론을 주도했다. 
1930년 10월 3일부터 동아일보에 이윤재가 '성웅 이순신'을 43회 연재했고, 1931년 6월 25일부터는 이광수가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안재홍 선생은 충무공의 생신날만 되도 그분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조선일보에 기재하였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담론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5~96)

만보산 사건 보도는 이 과정에서 나왔다.

그 이전에도 만주지역에서는 수전개간을 둘러싼 충돌이 자주 일어났고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갈등을 다양하게 일어났다. 
동북지역(만주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일에 대한 보도는 1929년부터는 이미 자주전해져서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41;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88)
당시 조선일보는 김이삼(金利三) 이란 사람을 장춘 특파원으로 두고 있었다. 
김이삼은 1920년 중반부터 장춘에 있으면서 재만 동포 관련 기사를 서울로 보냈다. 
'대만동포문제 전문기자'였다. 1920년대부터 1931년 7월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장춘에서 김이삼이 보낸 기사를 계속 실었다. 
김이삼은 적어도 1927년 말까지는 동아일보 장춘지국 기자였고 기자연맹 통신원으로 활동했는데, 언제부터 알 수 없으나 조선일보에도 특파원을 하였다.(동아일보 장춘지국장이면서도 X지 지국장까지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 X지가 조선일보로 추측된다.)
김이삼은 장춘에서 '재만 조선인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고 '재만동포옹호동맹'을 비롯해 각종 사회운동단체에 지도적인 인물이였다.
당시 만보사사건 오보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인 김기진의 증언을 들으면, 김이삼은 김좌진 피살 사건(1930.1)이 일어난 당시에 조선일보에 신속하고 정확히 기사를 보내온 적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김이삼이 만보산 관련 기사를 보냈을 때 의심은 하긴 커녕 호외까지 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김이삼은 1931년 4월부터 벌어지고 있던 만보산 지역 사건 소식을 그때그때마다 조선일보에다 보내왔으며 만보산 삼성보 지역의 지도까지 그려가면서 경과를 설명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기획기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때 동아일보도 지속적으로 만보산 지역에서 벌어지던 일을 보도했고 제목부터 읽는사람을 자극하는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1931년 6월 24일자 신문에는 강계 지국 기자인 오윤진이 쓴 기획기사를 실었는데 제목은 「전장 같은 만보산,부유같은 400생령(生靈)-중국 관현의 폭압 밑에 그 장래가 불안창검(槍劍)리(裏)에 안부는 여하」였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3~94)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관련 기사를 경쟁하듯이 실었다. 만보산 사건은 언론에서 계속 주목을 받던 사건이었다. 
그러다 김이삼한테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을 소식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만보산 사건 오보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민족담론과 관련해 경쟁을 했다는 점은 "별건곤"이나 "삼천리" 같은 잡지에서도 드러난다.(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5~96) 더욱이 미국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이 점은 좀 더 분명하게 따지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판했다. 
「재래 조선일보 는 동아일보 와 경쟁이 많았다.
전자 안창남 비행기 사건에 큰 감정을 맺었고 또 최근 이충무공 묘소 보존 문제도 앙앙한 가운데 홀연히 만보산 사건을 만나 큰 기회로 알고 떠들어 놓아 양국 민족 간에 대 불행을 끼쳤으니,이리로 보면 두 신문사의 경쟁이 안 씨 착오의 원인이라 한다. 
동아일보 는 이번 사건에 냉정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성망이 한층 더 높지만 그 성망이 능히 참극의 흘린 피를 씻을 가능이 없다 하면 당초 조선일보 와 합치를 못한 것을 뉘우칠 일이라 한다. 오늘 우리 민족의 만사가 다 이러하니 당파열에 맑은 정신을 잃어버린자는 경연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다.
김이삼의 사죄 성명은 왜놈의 참살을 받았으니 그는 죽어서 한국 귀신이 되리라 한다.」
(거북선,「평지 풍파를 일으킨 만보산 사건의 배경, 조선일보 특파원 김이삼의 사죄 =김이삼은 유혹에서 참살로 결과」 신한민보」,1931.8.20.,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6~97에서 재인용)

참고_국내에 최초로 오보(誤報)를 전했던 조선일보 장춘지국장(長春支局長) 김이삼(金利三)은 독립운동진영에서 밀정 혐의를 받아 7월 15일 길림에서 사살됐다고 한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 
그러나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위원회(吉 林韓僑萬寶山事件討究委員會)라는 단체는 다른 주장을 했다. 
김이삼이 죽인 건 일본이란 주장이다. 
7월 15일 상오 12시에 영사관 한인 순사인 박창하와 다른 한 수명을 파견해서 원동여관에 묵고 있던 김이삼에게 총을 7,8발 쏴서 죽였다는 주장이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2) 
또한 일부학자들의 주장을 따르면 김이삼은 일본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오보를 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증명할 근거는 없다. 김이삼은 죽기전 신문에 사죄서(謝罪書)를 올렸는데 거기에도 일본에 대한 언급이 없기도 하다. 
또한 김이삼은이 죽은건 김이삼 자신이 자살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석사학위논문 - 최효명, 만보산사건(1931) 직후 화교배척사건과 배일운동의 성격, 2015, 39) 김이삼이 죽은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지가 않다.

4-3
조선일보의 성격도 오보 사건 원인중 하나일 수 있다.

두 신문사는 정치적 성격을 서로 달리했다. 동아일보의 김성수나 송진우는 1925년경부터 총독부당국과 일정한 한도에 타협해서 조선의회설치를 얻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비타협적민족주의자인 홍명희, 안재홍, 신석우 등이 주동해 "진순한 민족당"만들어 대항하려 했고 그래서 1927년 2월에 결성된 것이 신민회였다. 
신민회 결성을 주동한 안재홍, 신석우 등은 모두 조선일보 계통 사람들이다.
당시 신민회는 사회주의자까지도 포함해서 신민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조직이 됐다. 
'현실적' 자치운동추진과 대원칙론적비타협주의 의 대립하게 된 것이다.
신민회의 삼대강령에 중 "우리는 기회주의 부인함"이 있다. 사실 원래는 다른 내용이었다. 
총독부당국에 사전에 전한 원안에는 "타협주의를 부인함"이다. 
동아일보는 1927년 2월 2~4일의 사설 "현하의 표면단체운동"에서 신민회를 세운 것을 "정면의 적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졸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비난했다. ("정면의 적" = 일본 총독부)
조선일보는 '원칙론'적 입장에서 동족애를 따른 여론의 압력을 강조하고 동아일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본의 세력을 구조적으로 인식해 자제, 진정을 적극 강조했다. 민족운동에서 조선일보는 원칙논적비타협주의, 동아일보는 현실의 구조적인식을 내세웠다. 두 신문사의 태도는 이런 방식이 반영됐다
(민두기, 萬寶山事件(1931)과 韓國言論의 對應- 相異한 民族主義的視角, 동양사학연구 65, 1999.1, 170~171)

사회주의자간에 있던 갈등도 한 원인이 됐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일보의 비타협적 민족주의는 신간회 해소(1931.5.16)문제로 사회주의자와 대립하기도 했다. 
실제 조선일보는 1931.7.4일에 사회주의 진영을 겨냥한 사설을 싣기도 했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97~98)

조선일보 본사에서는 7월 2일 오후 9시 전후 인천 지국장 최진하(崔晋夏)에게 만보산 사건 관련 호외를 보냈으니 배포하라고 통보했다. 호외는 11시 50분 인천에 도착했고 조선일보는 곧바로 호회 300~320~350매가 배포했다. 7월 3일 새벽 2시부터 화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1쪽;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4~245)
조선일보 인천지국장은 최진하(崔晋夏)는 『이미 경성 본사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본사의 지시가 있어서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배달시켰다.』고 말했다.(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2쪽) 실제로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서는 조선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대한 검열을 맡고 있었고 조선일보 호외도 마찬가지였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2~313쪽)
인천에서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일보는 과격한 시위는 반대했다. 
그러나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정당하다고 보도했다. 화교배척이 평양에서까지 일어나고 과도한 살상이 일어나자 과격한 시위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재만동포 옹호의 정당성은 여전히 강조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9쪽)

사법처리를 받은 조선인중에 신문기자는 7명인데 그중 5명이 조선일보 기자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9쪽)
최진하는 7월 4일 오후 8시반경부터 군중에 가담했고 시위중 최삼성(崔三成), 금형원(金炯源), 백창현(白昌鉉), 최동규(崔東珪), 김용백(金容白), 김맹렬(金孟烈) 같은 학생들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최진하는 '경찰당국이 너무 중국인을 보호하고, 조선인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 원이니 중국인의 집에 돌을 던지지말고 경찰관에게 돌을 던저여한다' 취지로 말했다. 
'오늘밤부터 다음날까리 계속하여 폭행을 해야한다'는 취지로 말을 하며 선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 화교 공격에 직접 가담해서 체포된 인물중에선 전명준(田明俊)이란 사람이 있는데 전명준은 인천 신간지회 간부였다(그리고 좌익계열인 권충일權忠一과도 관련이 있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6)
평양 부근 한천에선 흑우회 간부 전창섭(全昌涉)이 다른사람들과 공모해서 자유노동조합과 한천 청년회원들을 선동하여 시위를 벌이게 했다. 
그리고 이건 곧 폭동이 되었다. 전창섭 역시 조선일보 한천지국장이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7)

5

5-1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생각하기에 만보산 사건은 '우연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였다. 
5월 31일 부터 6월 4일까지 일본 거류민은 일부 중국관헌에 탄압받는 사건이 있었다. 택시기사나 트럭기사가 폭행 당하거나 농장 제방수축을 방해받은 사건 같은 것들이다. 외무대신은 이것과 같은 맥락이라 해석했다. 
외무대신이 심각하게 여긴 건 이런 사건들이 중국관헌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의 악화된 여론'을 억제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1)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보산 사건 때문에 1927년 화교배척폭동같은 사건이 재발할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중국 측의 구축 방침이 최근 더욱 노골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조선 내의 민심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일부 조선인 사이에는 조선 내 거주 중국인에 대해 보복적 수단으로 복수할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펼치는 자가 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1927년과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빠진 여론을 억제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손승회, 지역너머의 萬寶山事件(1931년) 사건을 둘러싼 실체적 외교행위 규명을 중심으로, 人文硏究 53, 2007, 51) 

이런 생각은 조선총독부측과도 일치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는 "만보산 사건이 발발하였기 때문에 뭔가 반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중국이 조선인을 "괴롭혔기 때문에 조금 당해도 이것은 자업자득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단속을 느슨히"했다. 
그런 상태에서 신임 경무국장이 보안과장에게 인수인수 업무를 위해 출장올 것을 요구했다. 
배화사건은 이 때 일어났다. 
보안과장은 사건이 커진뒤에야 "엄중하게 단속"했다고 한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1~312쪽;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1)
다나카 다케오는 사건이 커지지만 않았다면 그다지 엄중하게 단속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5-2 테러의 시작, 인천배척폭동과 배척테러

1931년 6월  당시 총독부는 일본 내각과 관계가 계속 나빠지던 중이었다. 총독은 17일 사임하고, 18일엔 정무총감, 26일에는 경무국장이 사임했다. 총독부의 주요한 국과장이 교체됐다. 
총동, 정무총감, 경무국장들이 새 사람으로 교체됐다. 
총감 7월 7일에 경성에 착임하고 총독은 14일이 부산상륙을 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9쪽) 
7월 3일부터 평양에서 학살이 벌어진 7월 5일까지 총독부의 치안책임자인총독, 정무총감, 경무국장, 경무국 보안과장 등 조선총독부의 치안책임자는 모두 경성에 없었다.
1936년 당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경우와도 유사하다. 1936년 당시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신문을 전국에 뿌렸을 때도 총독은 물론이고 총독부의 고위 간부중 누구도 경성에 없었다. (윤해동, “만보산 사건”과 동아시아 “기억의 터” -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SAI Vol.14, 2013, 505)

1931년 7월 3일 오전 1시, 인천에서는 폭우가 들이쳤다. 
이때를 틈타 한인 수십명이 인천 외리 지역에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발관과 요리점을 테러했다. 
날이 밝아지자 사태는 더욱 커져 화교들은 다투며 중국인거리로 몸을 피했다. 
당시 아침 8시, 인천사무소(仁川分事務所) 주임 장문학(蔣文學)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폭동이 확산되는 걸 말려줄 것을 요청하며 총영사관에 사태발생을 보고하였다. 
그 뒤 인천경찰서가 경계해서 잦아드나 했다. 
그러나 당일 저녁 폭동에 참가한 한인의 숫자는 3천명을 늘어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 인천 전지역이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화교들은 영사관 내 화교 학교로 다투면서 피신하였다. 
인천에서 3리 거리인 송림리에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우유가게로 피난가기도 했다. 
경찰병력은 30여명은 이곳으로 파견돼 경계를 했다. 
그런데도 조선인 200여명이 습격을 시도했다. 
경찰은 방관했고 화교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후 8시 30분부터 파출소 앞에서 약 4천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였고 군중들은 화교가 있는 거리로 가(2013년 기준으로 인천 신포동과 중앙동에 해당되는 곳) 화교상점에 돌을 던지고 화교를 구타하면서 행진했다. 
행진하던 군중들은 인천부청 앞에서 군중 1천명과 합류한 뒤 화교마을을 습격했다. 
4일 밤에도 군중들은 모여 거리로 나가(2013년 기준으로 인천 중앙동에 해당되는 곳) 화교의 가옥을 습격해서 건물과 기물을 파괴했다.사태가 커지자 장문학은 상회주석(商會主席)과 함께 경찰서를 방문하여 무장경찰을 출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서장은 상부(道廳)의 명령을 받지 못했다면서 거절하였다. 
4일 총영사(總領事) 장유성(張維城)은 인천사무소(仁川分事務所)쪽에서 긴급연락을 받고 7월 4일 오후 인천에 도착해서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경찰과 교섭했다. 
경찰서장은 사태진압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총영사는 경성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사태는 다시 나빠졌고 당일 저녁 9시경부터 외리 지역에선 각목·칼·도끼 따위 흉기를 든 한인 5천명이 모였다. 
당시 시내에서 군중들한테서 포위당했던 화교들 수는 약 1,500명인데 이들중 중국가에 있는 인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찰한테 보호받지 못했다. 
인천경찰서가 폭행자 검거와 시위세력 해산을 시도했지만 부족했다.
군중은 다른 곳(2013년 기준 인천 현 동인천에 해당)에 있는 화교가옥도 습격하러 갔다. 
이 때 군중들은 광목을 가로수 사이에 메어서 기마순사가 오는 걸 차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뒤 외리파출소를 파괴하고 점령하였다. 
전화와 절보선을 잘라 외부와 연락할 수단을 차단한 뒤 화교상점을 습격하고 약탈하고 테러를 벌였다. 
오전 1시경 경성경관응원대가 현지에 도착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해산된 군중은 화천군에 있는 곳(2013년 기준 도화동에 해당)으로 가서 화교가옥을 습격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오전 2시 전후에는 군중 100명이 한 동네로 가(2013년 기준 율목동에 해당) 화교의 가옥을 습격했다. 
연괴산(連魁山)은 중국빵집을 경영하다 이 동네에 피난을 와 있었다. 
군중들은 연괴산(連魁山)을 죽여버렸다. 
이준길(李俊吉)도 군중들에게 살해됐다.  
5일 오전 1시까지 군중들은 화교 가옥 68동에 피해를 입혔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30, 인천학연구 4, 2005.2, 235~236;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60;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1~302쪽; 석사학위논문 - 최효명, 만보산사건(1931) 직후 화교배척사건과 배일운동의 성격, 2015, 15)

당시 인천상황을 한 화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밤 10시. 내가 막 잠들려고 하는데 길거리에서 갑자기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 절규가 너무 처참하여 차마 문을 열고 바라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은 이미 문앞으로 다가와 손에 칼, 몽둥이, 돌 등을 들고서 만나는 사람마다 두들겨 팼다. 질서가 크게 무너지고 길에는 조선인들만이 가득했다. 우리 華人은 감히 저항하지 못한 채 재빠르게 도망쳤으나 남녀노소 울부짖음이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여기저기 살려달라는 자가 있고, 아들을 찾고 어미를 찾는 절규가 있어, 곧 지옥세계와 다름없었다. 모두들 살고 싶어 했지만 누구도 돌봐줄 겨를이 없었다. 동서남북으로 뛰어 성 밖으로 죽어라 도망칠 뿐이었다. 하지만 원한을 품은 조선인의 함성이 뒤따르는데 그 형세가 호랑이와 이리같이 위협적이었다. 해가 뜰 때 무렵 시내에 그 많던 화인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曾玉仁의 증언, 「華僑被難自述記實」, 萬寶山事件, 190쪽,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54쪽에서 재인용


당시 인천 군중에서는 동포가 중국인에게 피살당했다는 이야기에 "별로 아무런 느낌도 없거나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이 가므로 따라갔을뿐"이라는 증언이 있다. 만보산 사건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군중심리"에 이끌려 군중에 참여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22~323

당시 경찰은 군중해산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한 증언에선 "인천 신정新町(1946년 이후 신포동 - 글쓴이)에 200~300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일제경찰의 해산명령이 있었으나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다."고 한다.(경찰이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직접 해산을 시도하진 않은 것). 
군중이 돌을 던지고 있을 때는 "경찰관은 전연 보이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경찰관은 칼을 뽑아들고 있었는가?"라는 일제경찰의 질문에 "못 보았다"는 증언이 있으며, "그대가 통행 중 군중에 대하여 경찰관이 해산을 명하고 있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못 들었다"고 답변한 증언이 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3쪽) 
7월 2일 인천폭동에서는 붉은 색 바지에 녹색 웃옷을 입은 사람 1명이 폭동을 지휘했는데 경찰은 주위에서 방관만 하엿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60)

인천분사무소는 다시한번 총영사관에 전부를 보냈고 總領事 張維城이 총독부당국과 교섭해 무장경찰과 헌병 17명이 5일 새벽 3시 인천에 도착해 질서를 유지하였다. 6일부터 상황은 어느정도 안정되었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30, 인천학연구 4, 2005.2,
 236)
인천경찰은 1927년와 마찬가지로 1931년에도 치안활동에도 실패를 반복했다. 
1931년 7월 3일 새벽 1시 인천에서 시작해서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데도 경기도경찰부에서 응원경찰이 도착한 건 3일 오후 4시 30분이고, 경찰이 무장을 한 것은 4일 오후 9시, 헌병이 경성에서 도착한 것은 5일 새벽 2시였다.(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4)

7-3 인천이후 테러들
신의주에서는 6일 오후 9시 30분부터 군중 수백명이 화교거주지를 습격했고 7일에도 야채밭에 있던 화교를 습격했다. 
오후 11시에는 압록강의 한 섬에서 60여 명의 조선사람 군중이 화교노동자의 가옥을 습격했고 화교 1명을 살해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 쪽
7월 4일에는 개성, 대전, 군산, 공주에서 5일에는 원산에서 6일에는 재령, 진남포, 사리원, 해주에서, 7일에는 목포, 의주에서 8일에는 부산에서 화교를 배척하는 테러가 벌어졌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쪽

경성 3일 오후 5시에 종로 탐동공원뒷길목에서 권오봉이란 청년은 재만조선 동포에 대한 신문호외를 들고 있었다. 
때마침 초홍전이란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권오봉은 그 사람에게 신문호외를 보여주고 그 사람을 구타했다. 
이런 사고는 4일 오전까지 12건이 넘게 일어났다. 
서소문정, 관수동 같은 중국인거리에도 작은 충돌이 있었으나 크게 번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1931.7.5) 
4일 오후 8시경 광희문 신당리 에 있는 등정 농장에서 일을 하는 중국인 70명이 조선인 약 백명(대개 노동자)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중국인 가옥들도 파괴되어있었다. 
중국인들은 저항을 위해 곤봉과 칼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 한 중국인이 조선인 하나의 머리를 후려쳐서 부상을 입히자 조선인 군중들을 더욱 격분했다. 
동대문서장과 그 밑의 동대문쪽 경찰근무원 다수와 경찰부응원경관대는 현장으로 달려가서 해산을 시켰다. 중국인들은 장충상 뒷산을 넘어 피난하였다. (동아일보 1931.07.06)
경성에 있는 조선청년총동맹은 재만동포 위해(危害) 문제에 대한 항의문을 중국 국민정부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냈고 총동맹의 세포단체인 청년동맹들에게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키도록 지령을 발송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8)
강원도 영월에서는 좌경 청년들이 도처마다 선전활동을 하고 화교를 배척하는 폭동을 벌였다. 해당지역 경찰서에서는 주야로 진압하고 화교를 보호했다. 
원주에서는 7월 20일, 조선청년단이 화교를 무력을 써서 쫒아내는 일이 일어났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8)
조치원에서도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는데 경찰에서 조치를 하여 청년 20여명을 체포했다. 
춘천에서는 7월 6일 농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해서 중국인 떡집과 잡화점을 테러했다. 
같은 날 양주에서는 회천면 덕정시장에서 중국 요리점에 테러를 벌이고 중국인을 구타했다. 
덕정주재소 순경은 봉양리 청년 15명을 검거했다. 사리원에서 5일 저녁 10시 경  청년 노동자 수백여명이 곤봉과 돌맹이를 들고 모여들어서 중국사람이 경영하는 요리점 동승루를 포위하고 전선을 절단해서 전화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뒤 가게를 습격하고 가구를 파괴했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3-4곳의 요리집과 10여 곳의 포목상, 야채상을 습격해서 테러를 벌였다. 이리의 지경(地境)에서도 5일 밤 9시경 청년 수십명이 모여서 중국인 빵집을 테러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9) 

평남 안주에서는 4일 오후4시에 매일신보 지국에서 임시 의장 이선욱이 사회를 보며 장춘현 삼성보 동포구축 문제에 대한 시위 행렬에 관련된 구체안을 결의했다. 
그리고 6일 밤 안주에서는 읍내 중국상점을 습격하여 유리창과 간판을 파괴하는 테러가 벌어졌다가 경계하던 경관이 제지하자 해산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47)

경성은 인천 평양보다는 빨리 대처했다. 
7월 4일 새벽부터 배화폭동이 일어나자마자 군중들은 왕십리 방면으로 몰려갔다. 
하왕십리 소재 화교 15명이 연화공장에 피난와 있던 상태였는데 그 곳을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순사는 이미 그곳에 잠복해 있었다. 6일 서대문경찰서에서는 서소문통과 태평통을, 수표정파출소에서는 관수동을 일대를 중심으로 시내에 흩어져있는 화교삼정에 한명씩 경관을 철야교대하며 경계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쪽)

1931년 화교배척폭동 당시 일본 경찰이 사전에 준비하고 질서를 유지한 곳에서는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나지않거나 일어나더라 규모가 낮았다. 
예로 남쪽 지역은 1927년 화교배척 테러가 격렬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대다수의 경찰은 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초기에 진압하여 큰 충돌이 없게 했다. 
대전 같은 충남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일본경찰이 질서를 유지하고 중국상인도 미리 대책을 강구해서 대체로 평정을 이어갔다. 
충남 선장(仙掌)은 조선인과 화교 사이에 친선의 정이 두터워 더욱 평온했다. 
전북 고창도 1927년에는 격렬한 테러와 폭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1931년에는 경찰서장이 특별히 보호해서 별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수의 북부지방은 시위와 화교에 대한 테러가 징후가 있는데도 경찰은 대응이 미숙했고 질질끌었다. 
북부지방에서 드문 경우는 평북 厚昌인데 화교가 1,500명 있었으나 경찰서장이 명령을 내려 실탄을 장전하여 화교를 보호하자 역시 별인은 없었다. 
경찰뿐만 아니라 지역 청년단체같은 사회단체가 사태를 진정시키거나 화교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밀양에서는 청년동맹 같은 기타 사회단체와 중국인 대표가 서로 양쪽 민족을 보호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산에서도 한중간에 일이 터지기전에 마산 노동연맹에서 방지책을 위해 방지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3)

일제치단당국은 화교 피해가 대규모로 커진 뒤에야 본격적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인천에서는 배화사건이 일어난지 이틀이 지난 5일 오전 1경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경관대가 도착해서 사건 관련자 40여명을 체포했다. 
경성에서는 화교배척 문제로 체포된 조선인이 7월 5일까지 300여 명이다. 평양에서는 사건 발생 이틀 뒤 6일부터가 되어서야 무장경찰이 투입됐다. 
평양 경찰서의 경찰과 헌병 70명, 소방대원 약 200명을 동원했고 조선인 57명을 체포했다. 
7일까지 체포된 사람은 28명이다. 11일에는 평양경찰서 경관 300명이 호별로 수사를 하며 사건관련자를 체포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 쪽) 13일까지 전국적으로 체포된 인원은 1,840여명에 달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5쪽) 
하지만 이미 평양에서는 대규모학살이 벌어진 뒤였다.

6
6-1
1927년~1928년 사이에 중국의 은값은 폭락하며 떨어지고 중국 내에서 동란이 일어나니 중국인 도래가 크게 늘어났다. 
1927년 2월 25일에는 중국인 800명이 들어오더니 그뒤 더욱 증가했다. 
3월까지 들어온 수는 14,000여명에 이렀고 4월 한 달 동안에는 5,000명이 들어왔따. 
7월중 신의주를 거쳐 들어온 화교의 수는 2,605명에 이뤘고 해가 바뀐 1928년 3월 그믐까지 700명이 들어와 평양부근 노동계를 위협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0)


1928년 '평안수리조합'에서는 '한국노동자는 게으르고 결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쫒아내고 대신 화교노동자를 고용했다. 
1929년 평안북도에서는 화교노동자만 고용하는 사례들이 여러차례 거듭됐다. 平北水組工事와 多獅島築港工事에서는 화교노동자만 사용하자 한국노동자들이 총독부와 도당국(道當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도당국 각 공사장에 시정할 것을 명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16)

1931년 화교배척폭동직전 평안남도 지역에선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이 증가하고 있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102)

국제조사에 따르면 1925년과 1930년, 5년 사이  평양의 화교인구증가율은 심했다. 
조선인 증가율은 66.8%, 일본 증가율은 14.5%인데 화교인구 증가율은 무려 111.8%로 조선인과 일본인 증가율을 압도했다. 
1930년에 평양 부내 1천 명중 25명은 화교일정도였고, 그만큼 조선인과 화교의 접촉은 많아졌다. 
1928년 6월 평남 평원군(平原郡) 동두면(東頭面)의 평안수리조합(平安水利組合) 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간 충돌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도 평안남도에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4~115)

그런 상황에서 화교배척폭동이 일어났다.

6-2
평양 4일 오후 6시엔 이문리 길가에서 조선 3명이 지내가던 중국인 2명을 구타했다. 
경찰은 이것을 제지했고 이 때만 해도 큰일은 없었다.  
밤 평양 중국인 요리집 동승루에서는 조선인 20여명이 달려가서 "굳게 다다걸은문을 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1931.07.06)
7월 4일 저녁 진남포(鎭南浦) 영사 서수(徐隨)는 경성과 인천에 배화폭동이 일어난 걸 알고 5일 새벽 평안남도와 황해도, 두 도청의 경찰부장, 평양경찰서장에게 전문을 보내고 진남포 경찰서장과 면담하여 화교와 지역 상회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5일 오전 11시 평양서 경찰서장 안도(安藤) 고등계주임은 평양상회 상무위원 장경현(張景賢)에게 이렇게 말했다. 
『폭동이 발생하면 본서가 반드시 확실하게 보호할 것인데, 만일 조선인들이 도발할 경우 양보하기 바라며 일찍 문을 걸어 잠그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6)

평양에서 격렬한 폭동이 벌어졌던 7월 5일밤 치안 책임자들은 연회에 출석했다 그 때문에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1; 윤해동, “만보산 사건”과 동아시아 “기억의 터” -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SAI Vol.14, 2013, 505)

그리고  안도 주임의 말과는 다르게 밤 11시에 엄청난 폭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은 손전등을 들고 곤봉, 칼, 도끼, 돌 따위 흉기를 들고는 조를 나눠 화교를 살상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 
주일공사가 보기에 군중은 조직이 잘 갖춰진 집단처럼 보였다. 이 군중들의 폭동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 7월 8일 기준으로 사망자 109명, 부상 163명, 생사불명자 63명이었다.(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6쪽) 

5일 오후 8시경부터 평양부 신창리에 있는 중국요리점 동승루 앞에 조선사람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그 곳을 습격하였다. 군중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합세하여 종로통으로 진행하며 가로에 있는 큰 중국인 상점들을 차례차례 습격하고 골목에 있 는 중국인 가옥까지 습격하였다. 피습된 상점은 상품이던 가구던 남아있는 것도 없었고 완전히 파괴를 당했고 남아있던 중국인도 피해를 입었고 이런 일은 6일 오전 3시까지 이어졌다. 
이런 사태로 전차는 오전 6시가 되서야 겨우 개통됐다. 평양 안에서 중국인집을 거의 습격당했고 보통강변에서 농사하는 중국인 가옥도 태워졌다. (동아일보 1931. 07. 07)
평양경찰서 근무자들이 총출동했고 헌병과 보조헌병 70여명과 소방대원 약 200명이 출동해서 경계하였다. 
평양근교에서 피난해 들어온 사람까지 포함해 중국인피난자 3100명은 평양경찰서 광장에 수용하고 400여명은 대동경찰에서 수용했다.
평양경찰서는 이번 테러사건 주모자로 인정된 조선인 57명을 검속했다. 이 폭동에서 경계하던 경관 28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동아일보 1931.7.7) 군중들은 6일 오전에도 도시거리를 돌아다녔다. 오후 7시쯤에 약 5천여명이 그부근 중국인 가옥을 다시 습격했다. 이 때 전차같은 일반교통이 두절된 상태였다. 
경관들은 공포탄을 쏘며 제지시도를 하였다. 경찰서에 수용한 피난민 4천여명은 군대와 경관의 호의를 받으며 남전에 있는 의전강습소로 이송됐다.(동아일보 1931. 7. 7)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은 수요일이엇다. 밤 아홉시쯤...
수요예배에 교회당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며 누워서 책을 읽고 잇노라는데 저편 행길에서 「와!」 「와!」하는 수백명 군중의 포함성이 들렷다. 처음에는 무심히 들엇다. 첫녀름 초저녁에는, 흔히 사람들이 모혀서 좋다고 떠드는 일이 잇스므로 그 일종이거니 하고 무심히 여겨 들엇다.
그러나 그 포함성이 줄지를 안코 차차 더 커갈 때에 문득 생각난 것은 아까 낮에 어떤 형사에게서 혹은 오늘쯤 중국인습격이 잇슬지로 모르겟다는 걱정을 들은 일이엇다. 만약 지금의 이 포함성이 중인의 집을 습격하는 소리라면 예배당에서 돌아올 아이들의 길이 근심스러웟다. 그래서 푸댄님에 속옷바람으로 포함성의 진상을 알아보려 행길로 나섯다.
과연 중국인 습격이엇다. 우리 집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안흔 곳에 잇든 중국인 리발소앞에 백여명의 군중의 물결이 흐느적거리는 것이엇다. 나는 그리로 달려가보앗다.
순사 두명이 그 리발소를 등지고, 군중과 마주 서잇다. 백여명 군중은 리발소를 향하여 연방 고함들만 지르고 잇다. 리발소 안에는 전등은 밝아잇스나 주인이며 리발사들은 업고 커다란 체경이 하나는 돌에 마저서 홍채 모양으로 깨여젓다.
그러나 그 뿐이엇다. 와- 와- 고함들만 지즈지 다른 변괴는 생길 듯 싶지 안헛다. 더구나 경관이 벌서 보호하는 이상에야...
거기서 문득 호기심을 이르켜 가지고, 중국거상들의 집합지인 법수머리로 슬금슬금 나려가 보앗다. 밤의 거리. 뒤에서 여전히 나는 포함성밖에는, 평온한 도회의 밤의 거리엇다. 가는 길에도, 과자장사라 식료품점이라 중국인의 상점이 두세개 잇는데 모도 덧문까지 굳게 닷고 박게는 2, 3명씩의 순사가 경게하고 잇섯다.
법수머리까지 갓다. 거기는 아직것 오든 곳과 달라서 흥분된 듯한 군중들이 여기저기 뭉켜서서 공기가 좀 험악해 보이나, 역시 그 틈틈마다 순사들이 지켜서, 무슨 일이 더는 버러 질듯하지 안헛다.
거기서 좀 살펴보다가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왓다. 시간은 열시가 지낫다. 그런데 예배당에 갓든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안엇다. 웬일인가.
이것을 또 나가보아야 하나. 집에서 기다려야 하나, 망서리는 동안 열시 반도 지낫다. 저편 행길에서는 또 아까보다 더 큰 포함성이 연하여 들린다.
아이들에게 대한 걱정이 차차 더하여진 나는 이번은 옷을 모도 주서입고 아이들을 차질겸 또 길로 니갓다. 행길에 나서면서 첫 번으로 눈에 띠인 것은, 아까 본 리발소앞에 잇는 군중들의 동요엇다. 아까는 둘러서서 고함만 지르는 군중이건만, 이번은 왓다갓다 무슨 어즈러운 행동이 시작되엇다.
속력을 다하여 거기까지 달려가 보니, 지키고 잇든 순사들도 할 수가 업는지 뒤로 물러서고, 군중들은 돌과 몽치로서 리발소를 파괴하는 중이엇다.
나는 그것을 구경할 마음의 여유를 일헛다. 예배당에서 아직 안돌아오는 아이들의 안부 때문에 가슴이 서늘케된 나는, 거기서 좌왕우왕 아이들이 이 틈에 잇지 안흔가 하고 차저본 뒤에, 예배당에서 집에까지의 통로로 좌우편의 구경꾼들 틈을 주이해 살피면서 달려갓다.
예배당까지 가서 벌서 컹컴하게 불끈 집을 보고, 도로 집으로 도라와 보매 아이들은 아직도 안돌아왓다. 여기서, 집안에서는 통떨처나서 아이들을 차즈려고 집을 떠낫다.
때는 바야흐로 열한시가 좀 지난 때, 평양 시내에서는 중국인 습격이 본격적으로 벌려 진 때엿다.
남문통 일대의 그 밤의 광경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이즐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엇다. 법치지에서 생긴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업는 기괴한 광경이엇다.
중국인거상들이 집합지인 남대문 일대는, 사람으로 꼭 메워젓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오리가리 찢어진 비단이며 포목필들이 수 없시 날아다닌다. 중국상관마다 다락에도 흥분된 군중들이 가득이 올라가 잇으며 거기서는 아래(사람으로 메워진) 행길을 향하여 비단이며 포목필을 나려던진다. 여러 필이 공중을 날아 다니는 포목필들, 그 아래서 흐느적어리며 야단들 하는 흥분된 군중.
내가 그곳으로 달려간 때는, 겨우 그 찢어진 비단이며 포목들이 길바닥을 엷게 깔은 때엇다. 그 길바닥의 포목들은 각각으로 두꺼워 갓다. 30분 뒤에는 그것이 벌서 발목을 감초리만치 두꺼워젓다. 한시간쯤 뒤에는 무릅을 넉넉히 감촌만치 놓아젓다.
포목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 군중들의 아우성ㅅ소리 그것은 놀라운 수라장이엇다. 관앞에서법수머리까지의 짧지 안흔 거리는 찢기운 비단과 포목으로 두껍게 깔려서, 거름을 자유로히 옴길 수가 없도록 되엿다.
나는 사람들에게 밀리우고 또 밀리워서 어느덧 이 수라장의 복판 가운데 들어와서 잇게가 되엿다. 전후좌우에는 흥분된 군중들이 「만보산」 「되놈」ㅅ소리를 연하여 부르찢으며, 상관2층에서 날아오는 비단 포목들을 받어서 찢기에 분주하엿다.
재고품이 얼마나 잇는지, 그냥 끈임 업시 나려오는 포목을 보면서, 나는 망연히 서 잇섯다.
「늬 치판아」
「네미X비」
어제까지도-아니 아까 낮까지라도 이 중국인들에게 향하여 서로 농담을 주고 바덧을 아모 악의도 업는 군중들이 몃 사람의 선동자의 선동에 흥분이 되여, 예기안하엿든 이러한 난포한 일을 하는 「군중심리」의 놀라운 힘에 나는 새삼스러히 몸서리를 첫다.
그새 수 십년간을 각고하여 겨우 이만한 뿌리를 싸하 놓앗든 이 상관의 주인되는 중국인들의 생명은? 미리 몸은 피하여 생명의 위해는 받지 안헛나? 혹은 이 상관 안에서 흥분된 군중에게 불행이라도 보앗다.
「여보!」
누가 내 억개를 힘 잇게 치는 바람에 깜적 놀라여 돌아보매 머리는 찢은 비단으로 질큰 동인 사람 하나이 힐난하는 눈으로 나를 본다.
「노형은 왜 찢지안쿠 보구만 잇소?」
나더려도 비단을 짖으랴는 명령이엇다.
나는 대답 업시 그에게 복종하엿다. 내 발 아레서 찌저진 세루의 한끝을 집어 당겨서, 그것을 또 다시 찢는 숭내를 내지 알흘 수가 업섯다.
「김선생!」
보매 어떤 지우엇다.
「웨 이리 흥분돼 그러시오?」
그는 내가 세루 찢는 숭내를 내고 잇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이엇다.
나는 고소하엿다. 그러고 한편 끝을 들고 잇든 세루를 내여 던젓다.
거기서 발을 떼어서, 군중들의 틈을 빠저서 나가려든 나는 몃 거름 못가서, 진긔한 한 개의 비희극을 보앗다.
어듸서 뛰처나왓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중국인이 수만명의 흥분된 군중 가운데 뛰처 들엇다. 그가 뛰처들은 겻헤는 마츰 다행히 순사가 한명 잇섯다. 왁하니 중국인에게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는 순사가 그 중국인을 보호하려 할 때에, 중국인은 어듸서 주섯는지 (그 근처 일대는 무릅에 닷토록 비단 포목 등으로 두껍게 더 폇는데) 돌맹이 한 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게냥을 하는 것이엇다.
미상불, 그는 너무 큰 공포 때문에 리성을 일헛든 것이다. 단 한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수 만명의 군중을 대항하려는 이 중국인의 행동은 성한 사람의 일로는 볼 수가 업다.
「되놈잇다」
「죽여라」
몰려 들으려는 군중 틈으로, 몃 명의 순사가 달려왓다. 그러고 어리둥절하여 돌맹이를 들고 망설이는 중국인에게서 돌을 빼서서 던지고, 보호하여 가지고 갓다.
두껍게 싸힌 포목들아대서 중국인의 시체(뒤에 소생하엿다 한다) 하나가 발견되여, 구루마에 실리워 경찰서로 갓다.
이 관앞 상관가를 떠나서 나는 중국인 료리점가를 가보려 대동문 거리로 빼처서 나왓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사건 전야에 부내에서는 만보산 사건을 빙자하여 중국인을 힐난, 협박, 구타 등 경미한 충돌이 6건이나 발생하엿섯다. 그러나 이것이 익야 중국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혈사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 하는 장본일 줄이야 누가 알앗으랴. 중국인은 새려 폭동군중 조차도 몰랏으리라.
5일 밤의 폭동은 오후 8시 10분경, 평양부 신창리 중국인 료정 동승루에 어린애 10여명이 투석을 시작한 것에서부터다. 이것이 1만여 군중을 미련하고 비열한 폭동에의 동원령이 되엇다기에는 일백번을 고처 생각해도 내 리지가 부인한다. 누구나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어쨋든 일은 여기서부터 확대되엇다. 어린애들 10여 명의 투석이 60여 명 장정들의 투석으로 변하고 동승루의 정문과 유리창이 부서지면서 큰 돌을 안고 옥내에 침입하는 자가 생기엇다. 어느듯 군중은 수천 명을 헤이게 되고, 고함은 점점 부근 사람을 모아 놓앗다.
『이 집의 소유주는 조선인이다. 집은 부시지 말자』는 함성이 구석구석에서 터저 나왓다. 가구 집기를 모조리 부신(전화 한 개가 남앗다-<10>2층 한 구석에 붙엇기 때문에) 군중은 그 다음 집으로 옴기어 군중은 각각으로 집중되면서 순차로 대동강안의 중국인 료정을 전부 파괴하고 대동문통 대로로 몰려 나왓다.
대동문통에서 남으로 서문통-여기가 중국인의 포목, 잡화의 무역상들이 집중된 상가다.
군중은 2, 3백명씩 떼를 지어 중국인의 굳게 닫은 상점을 향하야 투석하기를 시작하엿다. 심한 데는 어데선가 굵은 재목을 멫 명이 둘러 메고 와서 「엉치기」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닫은 문을 부시는 데까지 잇섯다고 한다.
기관총의 난사와 같은 투석은 삽시간에 굳은 문을 깨치엇다. 점내로 침입한 십 수의 장정들은 마치 화재 장소에서 물건을 집어 내듯 손에 닥치는대로 상품, 집기 등을 길 밖으로 내 던진다-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내던지는 상품을 밟고 찢고 뜯고...어느듯 남문정에서부터 종로통까지에 노도와 같이 움즈기는 군중은 1만여 명을 돌파하고 노상에는 주단 포목, 화양 잡화 등등...찢고 깨튼 상품류가 산적하엿다. 전차 자동차 등의 교통두절은 무를 것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군중의 물결에 싸히지 않고는 마음대로의 통행도 할 수 없엇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오기영은 배재고보를 마치고 1928년에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뒤 1929년에 평양에서 수양동우회에 입단했다.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1937년의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1938년 초 도산 안창호의 임종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7))

「저녁 무렵 밥을 먹고 있는데 기마 순사가 말발굽 소리를 높이 울리면서 달려왔다. 
얼마 있다가 큰 길에서 “와”하는 함성이 울렸다.‘드디어 왔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옛날부터 평양 사람은 날쌘 동작과 거친 성격으로 이름이 나 있다.안중근을 비롯하여 많은 자객이 이 지방에 서 나왔다.경성,인천의 소요에 자극 받은 다혈질의 평양사람은 하룻밤에 100리를 뛰어 다니며 이 거리에서 중국인을 증오(이 잘못된 증오!)하는 소리를 높였다.
나는 한길로 나갔다.군중으로 꽉 찼다.동경의 메이데이 시위처럼,아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굉장하게 살기를 품은 대중이 무리를 지어 성안의 구 시가지 쪽으로 몰려갔다.
토,톡,토,톡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계속해서 유리가 깨져 내리는 소리.툭 하고 흙먼지가 일어난다.환성을 뚫고 비명 소리가 들린다.옷이 찢어진 채로 군중의 옷자락 밑으로 빠져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길모퉁이 어두운 곳에서 이 무의미한,정말로 잘못된 양 민족의 투쟁을 바라보았다.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불행한 양 민족이다.
다음날은 병사가 무장하고 말을 탄 그림을 그린 포스터가 동네 곳곳에 붙었다.그 병사가 오늘부터 출동하여 경계한다고 쓰여 있었다.빨간 모자를쓴 옛날 근위사단 병사 같은 순사가 총을 차고 트럭에 타고 돌아다녔다.병 사가 길목에 보초를 섰다.총독부에서 유고(諭告)가 나왔다.
파출소에는 포박된 조선인이 무장순사 앞에 웅크리고 있다.그의 양손에 걸려 있는 굵은 포승과 순사의 빨간 모자가 소요가 끝난 거리의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시의 공직자가 파괴된 집의 뒤처리에 경찰관,청년단,재향군인단원 등과 협력하고 있다.
온 시내에는 유언비어의 재즈가 울려 퍼지고 있다. 7월6일이었다.」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1931.8,「満州に漂泊う朝鮮人」 改造,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5쪽에서 재인용

평양에서 탈출한 한 화교는 이렇게 증언한다.
『이번 한인의 화교 참살은 사전에 일본인이 5일을 기한으로 하고 마음대로 살육하라고 한 것으로 조선인은 도끼를 휘두르고 무리를 지어호각을 불고 북을 치면서 나왔는데, 길이 1장 남짓의 죽창을 날카롭게 창처럼 깎은 것을 가진 자도 있었고, 손에 곤봉을 쥔 자도 있었으며, 돌을 집은 자도 있었다. 또 큰 차를 뒤에 따라오게 하여 많은 돌맹이를 싣고 다니며 무기로 쓴 자도 있었다....일본인은 사태가 시작된 후에도 비록 우리 동포를 보호한다고 말은 했지만 암중으로는 여전히 조선인을 도왔으며, 교포들은 일본인이 보호한다고 하여 의외의 사태가 없을 줄 알고 안심하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일본인의 귀신과 같은 계략에 걸려들었다....일본인은 교활한 술수를 부려스스로 화교의 건물을 훼손하고도 화교들에게는 韓人의 폭동이며 실로 일본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難僑二批抵靑」 「難僑經煙抵濟」 1931년 7월 20일 7면 申報 521쪽,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5에서 재인용)

중국 상해 시사신보(上海 時事新報)는 이렇게 보도했다.
「평양의 大屠殺(로이터 6일 東京電). 조선 서북 평양지방에서 야간에 폭동이 발생하여 華人 29명이 사망하고 130명이 중상을 당하고 일본경찰 3명도 중상을 당했다. 폭동은 밤 9시에 발생하여 6일 새벽 4시에 그쳤다. 한인은 화인의 가옥 100여 곳을 훼손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華人을 도로 한 가운데로 끌고 나와 30여명을 도살하였고 13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폭 당시 경찰서로 피한 자들은 부상을 면했다. 폭동이 일어난 후 경찰과소방대는 즉시 출동하여 질서 회복에 노력하고 조선인 100여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5천여명의 조선인은 계속 화인을 구타하였고 다음날 7시에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군사당국은 폭동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군대에게 필요시 경찰을 원조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로이터 6일 東京電,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7쪽에서 재인용
시사신보(時事新報)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중에서 동삼성 민보(東三省民報), 성시보(醒時報)와 함께 반일 색채가 제일 강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8) 그런데도 일본경찰이 부상당한 것을 보도했다. 그만큼 폭동이 격렬했던 걸 알 수 있다.

당시 군중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유언비어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적극참여했다.

『오후 11시, 이 때는 벌서 평양은 북에서부터 남으로 중국인의 상점과 가옥은 한 개를 남기지 않고 전부 부서진 때엇섯다. 누구의 입에선가 무서운 유언이 퍼젓다.
「영후탕(중국인 목욕장)에서 목욕하든 조선인 4명이 자살되엇다」
「대치령리(부외)에서 조선인 30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되엇다」
「서성리에서 중국인이 작당하야 무기를 가지고 조선인을 살해하며 성 안(부내)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장춘에서는 동포 60명이 학살되엇단다」
비상시기의 군중을 선동하는 류언과 비어는 실로 위대한 힘을 가젓다. 냉정에 도라가면 상식으로써 판단될 허무맹랑한 소리가 마츰내 전율할 살인극을 연출하고야 마랏다.
집을 부스고 물건을 찢고 깨트린 것으로써 고만인 줄 알고 일시 피햇다가 제각기 잔해만 남은 가구등을 수습하랴든 중국인은 이 때부터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야 다리가 뛰는 대로 다라날 수 밖에 없엇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전주ㅅ골 중국인 목깐탕에는 때마츰 조선 사람 욕객이 7, 8인 잇섯는데, 이 소동이 시작되자 목깐탕 주인 중국인은 칼을 들고 탕으로 뛰여들어가서 벍어버슨 욕객들을 모도 죽엿다...
-료정동화원에는 유흥객이 몃 사람 잇섯는데 소동이 시작되자 중국인들이 칼을 들고 객실에 뛰어 들어가서, 손님이며 기생을 모도 죽엿다...
-모상관에는 조선인 고인이 몇이 잇섯는데, 모도 참살을 당하엿다...
일견 그럴듯한 이런 소리들을 서로 주고 바드며 흥분된 군중들은 포목찢기에 분주하엿다.
몰려오는 군중들에게는 또 한가지의 새로운 풍설이 떠돌앗다. 지금 어둑신한 골목에는, 중국인들이 칼을 품고 숨어 잇서서, 통행인들을 함부로 살육을 한다 하는 것이엇다.
아직것 너무도 긔괴한 관경들 때문에 꿈과 가튼 마음으로 구경을 다니든 나도 이 풍설을 귀로 하고는 가슴이 선뜩하엿다. 례배당에 갓든 아이들이 인제는 집에 돌아왓다. 나는 즉시 파출소로 뛰처 들어가서, 집에 소란 통에 조선인의-그 가운데로 아이들의 사생자나 업섯나. 중국인에게 참변을 안보앗다 할지라도, 소란통에 밟혀서 상한 사람이라도 업는가고 물어 보앗다. 아직것 알을 한안에서는 조선ㅅ사람은 경상자 하나도 나지 안헛스며, 목깐탕의 참변 요릿집의 참변 운운도 모도 모도 풍설에 지나지 안는다 하는 것이엇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결국 오기영이 말한대로 "전율할 살인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7월3일 이후 평양)
유방이 양쪽으로 잘려나가고, 임산부도 참혹하게 살육당했으며 심지어 땅바닥에 엎어져 우는 화교 또한 밟혀 피 떡이 되었다
「朝鮮避難華僑之一封血淚書」(1931. 7), 萬寶山事件及朝鮮排華慘案, 中國國民黨中央宣傳執行委員會, 南京, 1931, 56쪽,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54쪽에서 재인용

저 신문에 따르면 "참혹하게 살육"당했다고 한다. 그럼 그 "참혹하게 살육"했다는 건 어느정도일까?
「[世界文化社 平壤訊]평양 법원 8월 19일 화교 慘殺大暴動 사건에 대한 심리가 있었다.
범인은 모두 230명이고 주범은 金連植, 鄭良善, 高元圭 등 3인이었다. 검사는 3인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하지만 3인은 모두 항변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문서의 내용과 3인의 공술에 근거하면, 3인은 7월 7일 저녁 8시 평양 교외 江東郡 大成里에서 화교 縢欽和(37세)의 집을 습격하여 등씨를 구타하고 날카로운 톱으로 그의 다리 한쪽을 자르고 곤봉으로 내려쳐 죽였다. 범행 동기는 피고의 공술에 따르면 이러했다. 7월 1일 평양시내의 각 신문에 만주지방의 韓僑 200명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게재되었음을 봤을 때 피고의 사촌형 및 친척 모두 3년 전에 만주로 이주하였고 그 주거지가 長春에서 멀지않았기 때문에 필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으로 판단해 크게 흥분하였다. 대성리로 돌아와 바로 경찰서에 관련사실의 확인을 문의한 결과 鮮僑의 피살소식이 확실하다는 것을알고서 범행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자 3인은 크게 억울함을 호 소하였다. 나머지 227명의 범인은 살인ㆍ방화의 죄로 기소되어 再審을 기약해야 했다.범인 모두는 현재 자신들이 이용당한 후 일본인에 의해 심판받는 데에 대해 극히 불만을 느끼고 감옥 내에서 여러 차례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平壤暴動首犯之供詞」, 中央日報, 1931. 8. 28,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2쪽에서 재인용

이런 살육이 일어난 곳은 한, 두곳이 아니다. 평양에서 수없이 벌어졌다.
죽은 어린애를 죽은 줄도 모르고 힘껏 붓안은 채 경찰서로 도망해 와서 비로소 내자의 시체되엇슴을 발견하는 모성...젖 빠는 어린애를 껴안은 채 부축되어 서로 와서 땅 바닥에 뉘이자 숨이 넘는 모성. 시내는 완전히 XXX상태다.
곳곳에서 살인은 공공연히 XX의 XXX에(!) 감행되엇다.
군중은 완전히 잔인한 통쾌에 취해버렷다. 3, 4명 내지 6, 7명식 피흐르는 곤봉을 든 장정을 앞세우고 2, 3백명식 무리를 지어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마자 죽을 사람을 찾아서 헤맨다.
「여기 잇다!」한 마듸의 웨침이 떠러지면 발견된 중국인은 10분이 못 지나서 살려달라고 두 손을 합장한 채 시체가 되어버린다.
-늙은이의 시체의 안면에 구더버린 공포의 빛! 고사리같은 두 주먹을 엡브장스럽게 쥐인채 두 눈을 말둥말뭉 뜨고 땅바닥에 엎어저 잇든 영아의 시체!
날이 밝앗다. 간밤의 무참은 숨김 없이 드러낫다. 길 우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하야 보행좇아 곤란하고 전선에는 찌저진 포목류가 걸려서 새벽 바람에 건들거리고 잇다. 폐허다! 문허진 로마성인들 여기서 더하엿으랴. 곳곳에서 중국인 시체는 발견되엇다. 서성리 조성암(중국인)의 집에서는 일시에 10개의 시체를 발견하엿다. 피살된 자, 적어도 백을 넘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드러맞고야 말앗다.
아침부터 경관은 무장을 하엿다. 중대가 출동하고 인근에서 응원경관대가 오고-그런 중에서도 백주에 다시 재습 삼습-XX의 XX로 피난 장소에 가든 중국인이 중도에서도 타살되고 목숨이 귀하야 8, 9명이 한 곳에 숨엇다가 몰사를 하는 등. 재습, 삼습에서 공책 한 권이라도 그대로 내버려진 놈이 잇으면 마자 찢어버렷다. 잉크병 한 개라도 거저 내버리기 아까웟는지 쓰레기통에다 맛장구를 처서 죄 없는 쓰레기통이 붉고, 푸른 땀을 흘리고 섯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두껍게 싸힌 포목들아대서 중국인의 시체(뒤에 소생하엿다 한다) 하나가 발견되여, 구루마에 실리워 경찰서로 갓다.
이 관앞 상관가를 떠나서 나는 중국인 료리점가를 가보려 대동문 거리로 빼처서 나왓다.
대동문 아페서 강안통으로 우 춘관아페까지 가보매, 우 춘관도 모도 문이 부서저 나가고, 텅 뷔인 집에는 전등만 밝아잇지 인귀척은 업스며 그 조금 아페는 중국노동자의 시체(인력거꾼인듯)하나이 지키는 사람도 업시 구경꾼도 업시 행길에 누워잇섯서, 나를 소스러치게 하엿다.
몃 집 더 올라가서, 장춘관 건너편에 구경꾼 4, 5인이 들러서 잇기에 갓가히 가보며 중국인 시체둘이 덧두기어 잇섯다. 홍승루도 모도 문이 부서지고 그 집 아페도 시체가 잇섯다(고 귀억된다)
대동자동차부 앞에는 허리가 기억자로 뒤로 부러진 중국인이 아직 채 죽지는 안코 단말마의 신음을 발하고 잇고, 그 겻헤 다른 중국인 시체가 하나 잇고, 순사가 이 시체를 차고로 끌어 드리라는등 실타는등 다투고 잇섯다. 그러나 여기는 폭행군이 벌서 다녀간 뒤라, 비교적 조용하엿다.
료정가를 다 보고, 다시 아까의 관앞으로 돌아가 보려고 신창리 네거리까지 가매, 저편 보이는 관아페서는, 산악이 무너지는듯한 수만명의 함성이 울리기 시작하엿다. 그래서 그리로 띄여 갈 때에, 관앞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물껼이 이리로 밀려오기 시작하엿다. 그와 동시에, 기마순사의 모양이 비로소 여기저기서 번드기엇다. 군중은 긔마경관에게 몰리워서, 이리로 밀려 오는 것이엇다.
오늘밤의 돌발사건에 대하여, 인제야 경찰당국의 방침이 작정되여, 무장경관으로 하여금 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이엇다.
금만 흥분된 일이 잇서도 잠을 못이루는 나는, 이날 밤 가족들은 모도 피곤하여 잘 때도, 잠을 들지를 못하엿다가 새벽 다섯시쯤 후보가 궁금하여 다시 집을 빠저 나왓다.
백일하에 폭로된 참경!
범수머리에서부터 관앞까지 경관과 소방대로 철통같이 에워싸고, 통행을 금지한 이 평양의 간선도로는 무릅까지 빠질만치 각색의 비단포목으로 무치엇고, 전차 전등, 전화, 전동력의 각 전선에 역시 각색의 비단이 느리워 잇서서, 그것은 마치 때아닌 만함식이엇다. 거기를 여기저기 무장한 경관이 지키고 잇고, 소방수들은 도로에 덥힌 필육을 것노라고 야단들 하엿다. 구경꾼들이 벌서 경관망의 박게는 백 둘러서 잇다. 잠시간 이것을 구경꾼들 뒤에서 보다가, 나는 구경꾼들 틈을 헤치고, 그 아페 잇는 경관망까지 헤치고, 폭풍우 지난 현장에 발을 드려놓앗다. 경관은 나를 신문기자나 검사국원으로라도 보앗는지 아모말 업시 통과시켜 주엇다.
거기 들어선 나는 어마어마한 경관들의 시선을 등에 받으면서, 어젯밤,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파괴당한 중국인상점들을 집마다 들여다보면서, 세계 개벽이래 인류가 아직 듯도 보도 못한 「비단보도」의 길을 더듬엇다.
삿젼ㅅ골 압흘 지나다가, 나는 삿전ㅅ골 어떤 집 아페 서 잇는 무장경관의 표정이 심상치 안흔 것을 보고, 거리를 버서나서 그 골목으로 들어갓다. 그러고 서슴지 안코 경관이 지키고 잇는 집 대문으로 쑥 들어섯다. 들어서매 나의 지인인 몃 몃 신문긔자도 벌서 그 집에 들어와 잇섯다.
그 집 툇마루에 중국녀인의 시체가 하나 업드려 잇섯다. 광에 중국인들이 업드려 잇섯다. 역시 시체인줄 알고 가까히 가보매, 약간 호흡이 잇는 것이 아직 체 죽지는 안헛스며, (지금까지도 이 점은 알아보지 못하엿지만) 그 체격으로 보아서 17, 8세의 소년인 듯 시펏다. 그러고 그겻헤는-나는 그것이 영아시인지 혹은 셀로이드인형인지를 지금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영아라면 생후 3, 4개월 박게는 안되엿슬 것이다. 그것이 분홍빛이 도는 점으로 보아서는 혹은 인형인 듯 싶기도 하지만, 벍어벗은 그 물체의 국부(그것은 게집에엇다)까지 똑똑이 조각된 점으로 보아서는 인형으로 볼 수가 업섯다. 나는 잠시 허리를 굽으리고 그것을 굽어보앗다. 무엇인지 정체를 밝혀보려는 호기심으로, 손까락으로 만저보고도 시펏지만, 만약 그것이 영아시이면, 이 후에 손가락에 감할 불쾌한 추억 때문에 만저 보지도 못하고 그냥 굽어보고만 잇섯다.
「쉬야. 쉬야」
문득 뒤에서 들리는, 겁먹은 이 소리. 돌아보니 웬 조선노인이- 아니 조선옷을 입은 중국노인이 빈사의 소년들을 부르는 것이엇다. 이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잇서서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커다란 수획이엇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경악도 아니엇다. 비애도 아니엇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엇다. 그것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이엇다. 그의 입이 들먹거리지 않고 그의 입에서 음성만 나오지 안흐면 그것은 명공이 깍가노흔 한 개의 사인상이랄 수박게 업는 무표정한 긔게적 얼굴이엇다. 나는, 잠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노라고 다른 데 주의치 못하다가, 노인의 아페서 무엇이 음적거리는 것이 걸핏 보이므로 그리로 눈을 떠러트럿다.
거기는 너덧살쯤 난 중국 어린애가 하나 잇섯다. 노인의 다리를 두 팔로 잔뜩 부둥켜 안고 잇는 그 어린애의 한편 귀와 그 근처의 가죽은 찢어저 느러지고, 그 편쪽 눈도 업서젓스며 입도 찌저진 정시치 못할 참혹한 형상이엇다. 어린애는 울지도 안코 아버지인지 한아버지 인지의 다리를 부둥켜 안코 몸만 와들와들 떨고잇섯다.
나는 창황히 그 집을 뒤로 하엿다. 더 볼 용긔가 업섯다.』
-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조선하층민은 주거 시설이 변변치 못 했다. 그렇기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말했듯이 "조선인은 여름에 집 밖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다.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59)
평양은 그런 점이 조선에서 가장 심각한 곳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집 밖에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금방 대규모 군중이 되서 모여들었고 집단으로 테러를 벌였다.

평양은 만주와 아주 근접했다. 재만한인과 서로 관련있다는 측면에서는 평양이 인천보다 긴밀했다. 그리고 평양에서는 본인이 본인의 주변사람이 만주를 직접 체험한 사람도 많았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2) 그러나 신의주처럼 아주 가깝지도 않았다. 신의주는 국경도시였다. 국경 경계가 바로 닿는 곳이기에 국경경계를 넘어서 조선인과 중국인끼리 체육경기를 할 수 있을정도였고 실제 직접 교류가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화교와 조선인의 사회적 대립이 심할 때 화교의 사회적 공간이 평양, 인천보단 덜 위축되고 축소됐다.
(이은자,오미일, 1920-1930년대 국경도시 신의주의 화공과 사회적 공간, 史叢79(2013.5.31), 349~352,354)

박정현 교수는 "평양에서는 1927년 화교배척사건 때 거의 피해를 보지않았기 때문에 인천이나 경성 등 다른 대도시처럼 중국인들이 미리 대비하거나 대피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정현,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조선 민족주의운동,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252)

주일중국공사는 평양에서 재조화교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로 평양에 중국영사관이 없던 점을 지적하였다.(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2쪽) 

한 일본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세 소요 사건(3.1 운동 - 정병욱) 때 일본 민간인으로 살해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해하면 큰일이라는 것을 조선인폭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동(반중국인 폭동 - 인용자) 에서 죽은 자가 많은 것을 보면 약자에게는 멋대로 잔학하게 하면서 강한 자에는 약해진다는 것일까』
(酒井敏雄『日本統治下の朝鮮北鎭の歷史』 草思社, 2003, 158~159쪽,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70쪽에서 재인용)
오기영 선생도 비슷한 의견을 말했다.
『이날 오후에는 천여 명 군중이 기빨을 선두로 「용감한 정예병」(!) 30여 명을 태운 화물 자동차를 앞세우고 기림리로 재습의 장도(!)를 떠낫다. 여기서는 필경 1명의 총살자와 2명의 중상자를 내엇다.
그러나 이것은 경관의 발포에 의함이엇고 중국인은 결코 반항치 않앗다. 군중은 반항 없는 약자에게 용감하엿든 것이다. 이날 밤에는 다시 부외의 중국인 가옥을 닥치는 대로 충화하엿다. 밤새도록 평양성 밖에는 불꼿이 뻐처 잇섯다.』
-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중국 총영사는 7월 3일날 총독부에게 화교를 무장경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7월 6일이 되서야 이루어졌고, 30여명이 구타를 당하다 살해된 현장에서도 경찰은 현장에 없었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160)

한 중국언론은 이런 보도를 했다. 
당시 일본경찰이 폭동이 심각해지 전까지 잔압에 소홀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나온다.
『또 일본이 고용한 순사 보조는 대부분 한국인이라 분명히 폭동을 도운 흔적이 있다』(「韓人暴行列國同心憤激」 1931년 7월 12일, 4면, 申報 302쪽., )
이 폭동에서 조선인의 감정이 관련되어있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25)

평양에선 7월 8일이 되서야 경성의 조선총독부 경관강습소 간부 이후 강습생 150명이 도착해서 사태수습을 했는데 너무 늦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14쪽) 평양의 피난화교는 7월 7일에는 5천여명에 달했다. 
이처럼 많은 피난민들이 함께 생활하는 피난민수용소에서는 계절적 요인으로 인하여 전염병 환자가 속출했다. 
(최병도, 萬寶山 사건 직후 華僑排斥事件에 대한 日帝의 대응, 한국사연구 , (156), 2012.3, 304쪽)

이 사건때문에 평양에서 중국인을 구제하기 위해 '평양사회단체 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의 대표인 오윤선 선생과 조만식 선생은 일제의 진압이 너무나 무능력했던 점을 따지기 위해 10일 오후 3시에 도청으로 가서 평남지사를 만났다. 
대표들은 '경관이 보고 있는데도 살상이 일어났고 무장경관이 경계를 시작한 2일부터도 중국인 가옥을 향해 습격, 파괴, 방화가 있던 것'을 따지며 '무능했거나 무성의했음'을 따졌고 '중국인을 수용한 곳은 위생이 극히 나쁘니 시급히 개선방침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 1931.07.13)

동북지방정권은 귀국한 화교를 적극 수용했다. 
1931년 화교배척 당시 많은 화교들은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귀국하였는데 대부분은 조선과 가장 가까운 요녕성을 골랐다. 
조선에 인접한 안둥현(安東縣)에서는 화교배척이 일어난 뒤 7월 7일까지 귀국한 화교가 2000여명에 달했고, 7월 10일까지 3700여명이 도착하였다. 
동북지방정부는 이미 귀국한 화교들을 수용했고, 앞으로 귀국할 인원을 대비해 압록강에서 선박으로 화교를 인도하게 하였따. 
7월 10일까지 안동현의 각 여관과 가옥에 거주하게 된 화교는 모두 3000여명이였고 7월말까지는 9,000여명에 이렀다. 화교들에게 식료품도 제공하였고 당시는 여름철이라 전염병을 막기위해 의료서비스도 제공하였다. 
피난한 화교들중 고향으로 돌아기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는 귀향경비를 지급했다. 조선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화교들이 있으면 동북정부과 직접 일본과 교섭을 맡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특별기부금을 모금해 화교들에게 나누어주었다.(석사학위논문 - 최효명, 만보산사건(1931) 직후 화교배척사건과 배일운동의 성격, 2015, 32) 

평양지역 사망자수는 도부청(道府廳)조사결과는 95명인데 중국측 조사를 따르면 109명이다. 
평양중화상회의 9월 13일 피해조사 보고서를 따르면 사망자수는 남자 106명, 여자 7명, 어린이 8명 등 총 121명이다. 
중화민국외교부 조회에서는 1931 8월 22일까지 파악된 사망자의 총수는 121명으로 확인하고 있다. 
국제연합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던 顧維鈞의 보고서를 따르면 평양지역 사망자는 133명이다.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30~31, 인천학연구 4, 2005.2,
 236~237) 

평남경찰부장 야스나가 노보루는 이번일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 밑의 평양경찰서장도 사표를 제출했다. (동아일보 1931.07. 07) 야스나가 노보루는 임도사무관이였다가 1931년 1월 12일 발표에 따라 평안남도경찰부장이 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월 15일)

7
8김동인은 당시 평양 화교학살 당시 참사를 목격했다. 
그 현장에 끌려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1934년 12월 1일에 그것을 수기로 썼다. 그 수기를 보면 군중들의 학살을 잔인했다. 
그런데 김동인은 여기에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게 없다. 
오히려 흥미거리로 보고 있다.
『집으로 돌아와 보매, 집에는 아이들이며 아이들을 찾즈려 나갓든 사람이 모도 돌아와서, 오늘밤 견문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에 꼿이 한창피엇다. 아이들은 군중의 일지를 따라서 정거장까지 나가서 중국인들이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정거장에 모혀 잇는 것을 본 이야기를 한다. 순사들이 경게하고 잇서서 손을 부치지 못하드란 이야기를 하며, 중국인잡화무역상을 파괴하는데서 주서 왓노라고 「안주のみ취분」 두 통을 자랑하며 겸하여, 어떤 사람들은 큰 보통이로 물건들을 싸가지고 지고 가더라는 이야기를 한다』『「쉬야. 쉬야」문득 뒤에서 들리는, 겁먹은 이 소리. 돌아보니 웬 조선노인이- 아니 조선옷을 입은 중국노인이 빈사의 소년들을 부르는 것이엇다. 이 노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잇서서는 무엇에 비길 수 없는 커다란 수획이엇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경악도 아니엇다. 비애도 아니엇다. 겁먹은 얼굴도 아니엇다. 그것은 단지 무표정한 얼굴이엇다. 그의 입이 들먹거리지 않고 그의 입에서 음성만 나오지 안흐면 그것은 명공이 깍가노흔 한 개의 사인상이랄 수박게 업는 무표정한 긔게적 얼굴이엇다. 나는, 잠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노라고 다른 데 주의치 못하다가, 노인의 아페서 무엇이 음적거리는 것이 걸핏 보이므로 그리로 눈을 떠러트럿다.』
당시 현장에서는 화교가 군중에게 저항을 시도한 일도 있다. 김동인은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보기도한다.『거기서 발을 떼어서, 군중들의 틈을 빠저서 나가려든 나는 몃 거름 못가서, 진긔한 한 개의 비희극을 보앗다.어듸서 뛰처나왓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중국인이 수만명의 흥분된 군중 가운데 뛰처 들엇다. 그가 뛰처들은 겻헤는 마츰 다행히 순사가 한명 잇섯다. 왁하니 중국인에게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는 순사가 그 중국인을 보호하려 할 때에, 중국인은 어듸서 주섯는지 (그 근처 일대는 무릅에 닷토록 비단 포목 등으로 두껍게 더 폇는데) 돌맹이 한 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게냥을 하는 것이엇다.미상불, 그는 너무 큰 공포 때문에 리성을 일헛든 것이다. 단 한 개의 돌맹이를 가지고 수 만명의 군중을 대항하려는 이 중국인의 행동은 성한 사람의 일로는 볼 수가 업다.』
그리고 김동인은 화교학살과 폭동, 테러를 보고 무언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 4월 '삼천리'에서 단편으로 쓴 픽션소설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붉은산이다.
붉은 산에서 정익호란 캐릭터가 나온다. 
그 캐릭터는 평소에는 조선인을 괴롭혔고 사람들은 그자를 '삵'이라 부른다. 
그러다 갑자기 조선인 소작농 송첨지가 중국인 지주에게 맞아죽는다. 
이 송첨지는 '삵'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삵'은 이 일을 원인으로 지주에게 대들었다 맞아죽는다. 그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선생님. 저는 갓섯슴니다.」
「어듸를?」
「그놈―지주놈의 집에.」
무얼? 余는 눈물 나오려는 눈을 힘잇게 다덧다. 그러고 덥석 그의 벌서 식어가는 손을 잡엇다. 잠시의 침묵이 게속되엿다. 그의 사지에서는 무서운 경련이 끈임업시 일엇다. 그것은 죽음의 경련이엇다.
듯기 힘드른 작은 그의 소리가 또 그의 입에서 나왓다.―
「선생님」
「웨?」
「보구시퍼요. 전 보구시...」
「뭐이?」
그는 입을 움지기엇다. 그러나 말이 안나왓다. 긔운이 부족한 모양이엇다. 잠시 뒤에 그는 또다시 입을 움지기엇다. 무슨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왓다.
「무얼?」
「보구시퍼요. 붉은산이―그러구 힌옷이!」
아아 죽음에 림하여 그는 고국과 동포가 생각난 것이엇다. 余는 힘잇게 감엇든 눈을 고즈넉이 떳다. 그때에 삵의 눈도 번쩍 띄엇다. 그는 손을 들으려 하엿다. 그러나 이미 부러진 그의 손은 들리우지 안헛다. 그는 머리를 도리키려 하엿다. 그러나 그 힘이 업섯다.
그의 마즈막 힘을 혀끗에 모하 가지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엇다.―
「선생님!」
「웨?」
「저것―저것―」
「무얼?」
「저기 붉은산이―그리고 힌옷이―선생님 저게 뭐예요.」
余는 도라보앗다. 그러나 거기는 황막한 만주의 벌판이 전개되여 잇슬 뿐이엇다.
「선생님 창가 불러주세요. 마즈막 소원―창가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余는 머리를 그덕이고 눈을 감엇다. 그러고 입을 열엇다. 余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왓다.
余는 고즈넉이 불럿다.
「동해물과 XXXX」
고즈넉이 불르는 余의 창가ㅅ소리에 뒤에 둘러섯든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쓰는 울리워 나왓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차차 엄숙하게 울리웟다. 그 가운데서 익호의 몸은 점점 식엇다.』
김동인, 붉은산 - 어떤 의사의 수기, 삼천리 제4권 제4호, 1932.4.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삵은 중국인 지주에게 대들다 죽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개연성이 없다. 
이상경 선생이 지적하듯  만주의 중국인과 이주한 조선인 사이에서는 문화 차이에 따라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이런 이야기는 없다. 
또한 중국인 지주의 착취 때문에 소작농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도 없다. 
수전 개간을 둘러싼 물리충돌이나 이것에 개입하는 일본 세력에 대한 묘사도 없다. 그런데 삵은 갑자기 중국인 지주에게 대든다. 
삵은 조선인에게 암같은 존재였는데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점은 이미 옛날부터 지적받은 점인데 김흥규는 1977년에 「황폐한 삶과 영웅주의」(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7.03)에서 이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상경, 김동인의 「붉은 산」의 동아시아적 수용- 작품 생산과 수용의 맥락.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250-251)
또한 이런 소설은 김동인의 기존 창작 경향과도 전혀 달랐다. 
이전 김동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고 작품에서 계몽주의스런 요소를 드러내는 걸 부정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소설을 쑥 내민 것이다. 1931년 평양 화교 배척 폭동과 학살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
(붉은 산과 평양 화교 학살에 대한 연관성과 이에 대한 전문분석은 이상경 선생이 쓴 다음 논문을 참고하자.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7~110; 김동인의 「붉은 산」의 동아시아적 수용 - 작품 생산과 수용의 맥락,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249~255)

한국에서 대표되던 근대민족문학 중 하나였던 붉은산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것이다.

8
이 사건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부에선 이것이 일본의 사주라 주장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책임일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가 체험한 것으로 몇 가지 활례를 들어보겠다. 그 하나는 만주의 만보산 사건이며, 그 둘은 동경 대진재 사건인데, 그것은 모두가 터무니없는 일종의 낭설을 전포시킴으로써, 한․중이나 한․일 간에 정략적인 유혈극을 연출케 한 일본군벌의 조작극이었다.』
(사설, 「사상 선전전을 적극 경계하라」, 동아일보, 1954.12.1.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6에서 재인용)
『동포의 수난 원인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친일분자를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 (중략) 망국근성의 소유자인 매족도배가 일정의 앞잡이로 가서 가위 경쟁적으로 중국인의 권익을 침해하였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만주사변의 서곡이었던 만보산 사건의 준비공작이었다.』
김우평, 「만보산 사건 전의 만주출장」, 동아일보, 1955.5.15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6에서 재인용)
이런 경우는 한 두사례가 아니다. (윤해동, “만보산 사건”과 동아시아 “기억의 터” -한국인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SAI Vol.14, 2013. 486~488, 492~497 참고)

그러나 이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비판을 받고있다.

예로 일본군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가설에 반박이 있다. 
예로 이사하라 간지를 중심으로 관동군 참모부군에서는 '만몽영유계획' 골격을 이미 1931년 6월에 갖춘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보산 충돌 음모 → 만주사변 이라는 음모가설은 인과관계에 대한 정합성이 부족한 비약이란 지적이다.
(손승회, 근대 한중관계사의 새로운 시각 모색- 萬寶山事件 연구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02, 2009.6, 401)

그 밖의 사건의 원인을 음모론으로 보는 것에도 비판이나 반대의견들이 있다.

『화교배격사건의 원인을 일단 한국인의 화교배척감정(華僑排斥感情)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민족성 문제는 韓·中間을 이간질 시키려는 일본이 만들어 놓은것이고,이는 과거 개화파 지식인들이 만들어온 중국인 멸시관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이 민족성 문제가 화교배격사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으나,직접적인 관련은 없기 때문』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3쪽

『이러한 일본의 책동설은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그것이 다 사실에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일본의 대륙 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각각이 각본처럼 연결된 것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는 책동설의 근거가 부족하고 만보산 사건에서 만주사변 에 이르는 연쇄의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 정병욱, 신설리 패, 중국인 숙소에 불을 지르다 - 1931년 반중국인 폭동에 대한 재해석, 역사비평 , 2012.11, 340

『일본의 책임은 확인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사주’ 혹은 ‘음모’를 사건의 주된 요인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여 항일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만보산사건을 조작했다고 하거나, 오보를 양산하고 식민지조선인을 사주하여 눈엣가시인 화교를 축출하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의도된 행동으로서 배화폭동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더라도 1931년 조선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화교학살 폭동에 대해 한국인이 마땅히 지녀야할 역사적 책임감과 그에 따른 엄중한 반성의 당위성까지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손승회, 1913년 일제강점기의 배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2009.3, 163)

오히려 지구사로 따지면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사태였다. 딱히 '제국의 인위적인 음모'라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1927년의 배화폭동을 계기로 인적 교류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면서, 특히 중국노동자에 대한 단속문제가 한중관계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미 일본에서는 조선에 한 발 앞서,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와의 경쟁, 관동대지진
때의 중국인 학살이 발생했다. 이 과정은 넒은 의미에서 19세기 말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
학살과 1903년의 중국인 노동자 입국금지령의 전개와 흡사하다. 즉, 공업화 정도에 따라
해외노동력이 유입될, 그리고 그를 흡수할 수요가 발생하기까지의 시간이 틀리기 때문에,
시차를 두면서 유사한 현상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가 미국의 경우 19세기 중․후반
이었다면, 일본은 제1차 대전 호황기의 1910년대로 볼 수 있다. 외국노동자가 자국사회에
충격을 줄만한 규모로 유입되면, 이 인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논리와는 별도로 사회갈등
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의 경우 그 시기는 1930년대였지만 이미 1920년대부터 단초가 나타
나고 있었다』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2

김준현은 『‘만보산 사태’를 획책한 배후로 일본을 지목한 상태에서는, 다른 갈등주체들의 능동성을 소거해버릴 위험성도 내재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7)

학자들은 이점을 지적한다.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는 입을 모아 그 학살의 대 상에 갓난아이도 포함될 정도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배화 사건’은 조선인의 손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이민족에 대한 증오 공격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기억은 ‘만보산 사건’의 기억보다 더욱 마음 편히 접근하기 어려운 연구 대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배화 사건’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억압되어 있었다. ‘배화 사건’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는 한국문학사에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찾기 힘들며, 전국적 규모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이만큼 문학적 형상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현, 한국의 문학/지식 장에서 ‘만보산 사건’이 기억되어 온 몇 가지 방식, 한국문학연구 51, 2016.8, 59)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그러나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다양한 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현 시점이야말로 ‘배화 사건’을 불러내어 그 의미와 파장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 일 것이다.』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12)

『우리는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잊지 못한다. 당시의 기록과 증언을 찾아내고 그를 들이대면서 반성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참 불균형하다. '노근리'에는 치를 떨면서도 베트남에서 '우리'가 한 짓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반성하는 목소리는 의외로 작다. 꼭 마찬가지로 관동대학살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표시하면서도, 1931년 여름의 중국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전우용, 한국인의 화교관 -자가당착적인 민족서열의식, 실천문학 , 2001.8,91

9
참고문헌

1차 사료
김동인, 붉은산 - 어떤 의사의 수기, 삼천리 제4권 제4호, 1932.4.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김동인, 류서광풍에 춤추는 대동강의 악몽, - 삼년전조중인사변의 회고, 개벽 신간 제2호, 1934.12.1(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오기영, 평양폭동사건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1931.9.4(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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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개의 댓글

2017.02.09
가독성 보소..
0
2017.02.09
"그러나 조선 사회와 총독부의 조치에는 중요한 맥락이 무시됐다.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은 주범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좋은 일자리를 독점했고, 거기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점하지 않은 나머지 시장을 놓고 중국인과 경쟁해야했다. 일본인은 노동시장이 짦은데 조선인, 중국인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았다. 시간당임금을 따진다면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2.3 배 이상 많은 임금을 받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임금은 격차가 있어도 적었다. 토공이던, 목공이던 석공이던 성격이 다른 일자리들에서도 일본인의 임금은 2배에 가까웠다. "조선인노동자의 자리를 침식하는 중국인노동자"의 모습 뒤에는 일본인노동자가 숨어있었다. 그러니 식민권력이 총독부는 조선인노동자의 실업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존재가 아니었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7)

"당시 언론에서도 일본인과 대립하는 구도를 대신해서 조선인과 중국인의 대립구도를 부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식민지 상황에서는 일본인과 대적할 수 없으니 중국인은 일본인을 대신 중국인이 조선인의 경쟁 대상으로 지목됐다. 예로 동아일보 1924.9.22년 한 사설은 조선인들에게 말하길 "처지가 다른" 일본인에 대한 원망에 집착하지말고 중국인 사이에 있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설득하고 있다. 언론의 논지속에서도 조선인은 사회적 공간에서 일본인과 분리되고 중국인과 경쟁해야하는 공간 속에 놓인 것이다. 저항할 희망은 버려 단념하고 대상을 중국인으로 돌린 것이다."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 38~39)

당시 식민지 상황이 진짜 상황을 비참하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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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문틈
현대에 화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강력한게 박정희 시절 화교탄압인데 이전엔 비교도 할 수가 없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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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읽기 존나 힘들다 글 정리 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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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글 정리 좀 필요하지만, 일단 좋은 정보라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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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전가리
응급처치(?) 겸 엔터질을 오래 해봤는데 좀 나으신지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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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안티파굳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많은 글 내용들이 서로 붙어있어 눈이 어지러운거 같음.

그리고 글줄이 길어서 지금 독자들은 저쪽 끝까지 고개를 돌려 읽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음.^^


단락을 좀더 크게 나누고 숫자에 소제목도 달았다면 훨씬 가독성이 좋지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내 부족한 견해일수 있음.


좋은 정보이고 수고했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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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구로쪽 지나갈때마다 화교나 좆선족새끼들 다 추방시켜버리고싶음...바퀴벌레같은새끼들 여름엔 웃통 다벗고 다니고 ㅂ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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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야만의 극을 치달리던 시절이네
그나저나 북한의 사학계도 저러한 사실들을 은폐하고 있을까? 아니면 유산계급에 철퇴를 가한 학살을 드러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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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바이퍼7
북한은 민족주의의 극단성이 나치나 일본수준이니 아마 은폐하고 있을 듯 함. 거긴 한국인 우파가 저지른 학살도 미군이 했다고 왜곡할정도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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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나눠서 올리든가 해야지 긴것도 너무길지만 읽고싶지도 않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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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다 읽으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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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끝에 안나서 보니까 스크롤이 바가 아니라 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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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나눠서 올려줘...정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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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가독성 씹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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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우리나라도 잘 못한 점이 있지.. 근데 뭐 어디 책 그냥 긁어서 올린거냐? 그냥 차라리 링크를 달지?

여기 올릴라면 대략이라도 줄거리를 따서 주든가

니가 제목으로 쓴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화교학살과 배척테러 요거에 핀트를 맞춰서

대략 1910년도부터 이렇게 저렇게 늘었다~ 중간중간 24년 갈등 이런게 있었고 31년에 터졌다.

이렇게 쓰면 되는건데 넌 읽고나서 아! 이건 다른 사람도 다 알아야만 해! 라고 싹 긁기만 하면

그게 다 읽히겠냐? 읽기 존나 힘들었네 중간부터 집중력도 떨어지고

제목에 한 얘기 언제나오나 기다리면서 그냥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화교의 역사를 다 봤네 무슨 ㅅㅂ

댓글 써놓고 등록만 안하고 우리나라가 잘못한 이런 사건들은 사료 은폐하고 그래서 나무위키같은데 없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얘 그냥 화교 학살 관련 나무위키 문서들 그냥 싹 긁어온거네 ....

https://namu.wiki/w/%EC%9D%BC%EC%A0%9C%EA%B0%95%EC%A0%90%EA%B8%B0%20%ED%99%94%EA%B5%90%EB%B0%B0%EC%B2%99%ED%8F%AD%EB%8F%99

펌이라도 적든가 붐업준다. 글이 맘에 안들어서 붐업주지만 일본놈들이랑 다른 인간이 될라면 진짜 진지하게 우리 잘못도 반성해야하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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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비바람부는숲4
취향 다르다고 나무위키 퍼온 이로 몰다니, 트위터와 차이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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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안티파굳
??? 나무위키내용이랑 100% 똑같고 서문도 토씨하나 안틀리고 똑같은데 혹시 나무위키 내용 기여자 본인이세요? 그럼 사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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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비바람부는숲4
확인결과 나무위키 작성자 본인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저의 개잡질을 보고 기분나쁘신 작성자, 오해하신분들 사과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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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비바람부는숲4
그래도 착하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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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1
@비바람부는숲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띵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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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비바람부는숲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 저격당하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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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여기가 학계도 아니고 이게 뭐냐. 무슨 내용을 다루는 글이든 이런식으로 올리면 정보전달의 기능은 1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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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CO2생성기
응 너같은 애들한테만 못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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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짱개새끼야 그냥 퍼오지말고 정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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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아는척하는중
안 퍼왔다. 중국인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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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논문성 글을 게시판에 그대로 펌질 할 때는, 흥미롭게 재가공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요약은 있어야 되는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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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헤로잉
펌질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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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갑갤에 올라온 글 잘 읽었음. 여기 얘들 보니 글 내용 길다고 장작위키 펌해왔다니 마니 하는 소리들이 많은데 디시에 올린것처럼 한 5~6개 정도로 쪼개서 올리는게 더 낫지 않았나 싶음. 그리고 여기 얘들 보면 조선인의 중국인 학살 관련된 글에서까지 댓글로 화교를 추방시켜야 하네 마네 하는 댓글 달리는거 보면 좀 어이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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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가 중국 유리한거만 쏙 퍼왔네...ㅉㅉ
이사건 이전에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이 대거 학살되자 일본은 이걸 분열 정책으로 이용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반 중국인 감정 부추겨서 일어난게 전후관계인데 그저 중국인 학살했다 미개한 한국인 이런얘기 듣고 싶은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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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복리식정기예탁금
정확한 지적이 같아보임. 만보산 사건이후 일본이 한중사이에 생긴
악감정을 이용해서 부추긴 사태인걸 예전에 본 기억이 있음.

글에 전후 사정을 대략 요약하는것도 모르는 이들 오도하지 않는
필수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음.

좋은 지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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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복리식정기예탁금
만보산 사건 관련 그대로 썼는데? 출처까지 적으면서. 아주 자세하게 적었어. 유리한것만 쏙 퍼온게 아니라 네가 안 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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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복리식정기예탁금
글 처음부터 끝까지 흝어봤는데 만보산 사건 과정도 썼고 일본 내부 반응도 썼고, 배화폭동 당시 경찰들 행동들도 썼고, 음모론에 대한 여러 학자의 논의도 썼다.

관련 논쟁 다 썼어. 당신이 글을 안 읽었지.

만보산 사건 전개와 음모론에 대한 현재 학계의견까지 그대로 적었는데, 왜 글을 왜곡하는거지?
1
2017.02.10
@안티파굳
아, 미안하다. 나도 그 대목을 빼놓았나 본다.
좋은 글들 계속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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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파굳
너무 길어서 자세히 못본건 미안한데 글의 구성을 배경-내용-결과로 화교 배척에 대해 써야지 저런 구성이면 당연히 한국인=어떤 민족이든 배척하는 배타적 성향이라고 인식하지 않나? 글 구성이 이상하다는 피드백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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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글의 질 자체는 매우 자세하고 좋지만 여기가 역사 게시판도 아니고 이런식으로 모든 내용을 요약없이 던져버리면 일반 독자들은 고통받음.. 차라리 불필요한 내용 쳐버리고 사진 몇개 넣어서 두장~ 세장 분량으로 요약했으면 좋았을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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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삭제 되었습니다]
2017.02.10
@NoGravity
병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2017.02.10
@NoGravity
너는 이제 이불을 펑펑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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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아조씨 좋은글 읽고가욤,혹시 한일합방이후 일본내부상황같은거 해주실생각있으신가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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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읽다가 눈이 아파서 포기ㅜㅜ 폰으로 보기 넘나 힘든것. 하지만 좋은 논문주제이자 연구주제인건 확실한 듯. 물론 이 연구의 내용을 다른 것과 연계시켜서 조선인은 이렇게 미개하니 일제한테 먹힌거다식의 결론만 아니면 좋을듯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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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한 다섯편정도로 나눠서 올려주면 안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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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읽진 않았는데 쓴다고 고생해서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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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1
와 댓글보니까 진짜 개드립에 병신들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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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2
논문 한편 본것 같네 유익했어. 혹시 사학과 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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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3
ㅋㅋㅋ개드리퍼들 수준에 안맞는 글이라 퍼왔네 왜곡이네 염병 다떨고있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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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걍 여기에 올리지마세요! 댓글 보셨듯이 패배의식에 찌들어서 뭐든 되도않는걸로 일단 찡찡대고 그걸 합리적인 비판이라고 자위하는 애들이 대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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