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니항사건의 진실과 학살 - 지식인들의 은폐




니항사건이란 것이 뭔지 암? 니항사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변 이라고도 한다. (러시아어로는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이 사건에 대해서 지식인들이 설명하는 내용은 이정도이다.

「자유시에 집결한 시베리아의 한인무장대 가운데 내부사정이 가장 복잡한 존재는 니항군대(尼港軍隊)이다. 이 군대는 처음에는 한인니항군대(韓人尼港軍隊)로 불리다가 자유시에 이동한 뒤에 사하린의용대로 개칭되었다. 사할린〔棒太島〕출신의 의용군이라는 뜻이다. 국내에서는 보통 사하린부대로 알려져 있다. 이 군대는 일본의 시베리아출병사(出兵史)에 유명한 니콜라예프스크사변〔尼港事變〕과 더불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1920년 1월부터 적색빨치산은 빈번히 니콜라예프스크를 습격했다.
이 때문에 반혁명세력인 백군은 일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일본수비대는 백군을 엄호했으나 같은 해 2월 말 백군은 전원이 참살되고 말았다. 적색빨치산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일본군에 강박(强迫)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같은 해 3월 12일 양자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부대는 쫓겨서 일본영사관에서 농성하게 되었는데 적색빨치산의 맹포격을 받아 석전(石田 ; 이시다) 영사부처 및 삼택(三宅 ; 미야께) 해군소좌(小佐) 이하 전원이 몰살되었고 육군부대 역시 5주야의 격전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극소(極少)의 일본인 생존자는 일단 투옥되었다가 5월말 적색빨치산의 철수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살되었다. 이때의 적색빨치산의 두목은 뜨라삐찐이었다.」
김창순(북한연구소 이사장), 자유시사변,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 4권 독립전쟁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sr&setId=618046&position=0

「러시아 한인 빨치산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가장 큰 승첩을 올린 전투는 니콜라예프스크(尼港)에서 벌어졌다. 아무르강 하구의 니항에는 2개 보병중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그 밖에 상인‧어부 등 일본 민간인 다수도 진출해 있었다. 니항은 태평양 연안의 어업 중심지로서 해상교통이 편리하였던 까닭에 상당수의 한인도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한인은 일본군의 침략 이후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빨치산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한‧러 연합부대는 1920년 3월 12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집중 공격한 끝에 니항 주둔 일본군을 섬멸시키고 영사 부부를 포함한 다수의 일본 민간인을 사살하였다. 니항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은 볼세비키와 한인사회에 대해 직접 공격을 감행하고 나왔다.」

朴敏泳, 庚申慘變의 분석 연구, 6쪽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kn_103_0060_0020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한인사회에 또 하나의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혁명 직후 「볼쉐비키 붉은군대」와 반볼쉐비키인「백위파 및 외국간섭군들」간에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 초 러시아 내의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군함을 상륙시킨 일본은 레닌의 볼쉐비키파와 대립하던 반볼쉐비키 백위파 군대를 지원하며, 극동지역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이때 만주, 러시아 및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빨치산들은 러시아 빨치산 부대들과 연합하여 일본 및 백위파 군대들을 상대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3월 5일에는 하바로프스크 북동부의 니콜라예프스크 항구(니항)에서 한인이 포함된 러시아 빨치산 부대에 의해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일본군대의 보복행위로 이어졌다. 1920년 4월 4일 야간을 틈탄 일본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극동공화국 부대를 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형스토리 은행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고려사람),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3499&cid=49390&categoryId=49390

「일본은 러시아혁명에 반대하여 1918년 1월에는 해군을, 6월에는 육군을 출병시켜 블라디보스또끄항을 점령했는데,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13개국 군대가 러시아의 동서남북으로 진주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미·영·불·일본이 협의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는데 일본은 1918년에는 1만 2천명, 한국에서 3·1운동을 봉쇄한 뒤에는 3개 사단을 넘어 1922년 패퇴할 때까지 많을 때는 7만 5천 명의 병력을 진주시켜 러시아혁명군과 싸우며 시베리아에 일본 괴뢰정부를 수립할 망상을 불태웠다. 일본군은 북사할린, 연해주, 흑룡(우수리) 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기세를 올릴 때는 치따에서 서진하여 자바이깔 주까지 육박하기도 하였다.
 그 때 한국독립군은 곳곳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다. 120년 3월 12일에는 박이리아 부대가 일본군이 주둔한 연해주 북쪽 항구(북사할린 건너편 니꼴라예프스끄를 공격하였다. 거기에는 일본의 식민지라도 된 것처럼 일본인 민간인도 상당수 이주하여 있었으므로 한국독립군의 공격으로 그들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작전이 감행되어 연해주 일대의 한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는데 그것을 4월참변이라고 한다.」
조동걸,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 역사비평 , 1998.11, 48쪽

그 외 어째서인지 일부 역사학자들은 니항사건을 거의 소개하지 않는다. 박환 교수는 "러시아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이란 책을 냈는데 거기에 니항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않는다. 분명 주제가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일텐데도 말이다.또한 박찬승 교수의 "한국독립운동사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에도 니항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자유시 사변은 자세하게 설명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니항사건은 빨치산과 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찌르기만한 사건일까? 혹은 그 과정에서 일본 민간인들 희생이 벌어진 선에 끝난 사건일까? 사실 이 지식인들은 아주 중요한 걸 넘기고 서술하고 있다.

「The Japanese sortie of 4-5 April, followed by relief expeditions from Khabarovsk and Otaru (Hokkaido), had fateful results for thousands of hostages in Nikolaevsk. As the relief forces drew near in the last days of May, the partisans put to death their 136 Japanese prisoners, slaughtered approximately 4000 Russian Men, women, and children, and after torching the town, herded a couple of thousand dazed survivors up the Amgun River to Kerbi.」
 John J. Stephan, The Russian Far East : a history, 1994, Stanford University Press, 146쪽

4000명을 어쨌다고요?

「아무르강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던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1920년 5월말 일본원정군의 입성에 임박하여 시아빨치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항을 철수하면서 136명의 일본인 죄수들과 약 4천명의 러시아인어른, 아이들을 학살하였고, 도시를 완전히 불태웠다.…5월 중순이 되면서 아무르강의 얼음이 녹는 해빙기가 돌아오면서 니콜라예프스크항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트랴삐친의 빨치산부대는 니콜라예프스크로부터의 철수를 준비하였다. …수직전인 5월 하순 트리야삐친은 엄청난 규모의 테러를 자행하여 3천명에 달하는 주민들을 처형하였으며, 5월 24~25일 감옥에 남아있던 130명의 일본인들을 처형하였다거류민은 12명, 나머지는 군인.」
반병률,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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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사건은 일본군이나 일본 거류민만 죽은 게 아니라, 침략과 전혀 상관없는 러시아인 4천명까지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오히려 러시아인이 더 많았을뿐만 아니라 사건전개를 따져도 러시아인 학살이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식인이 적다.

그리고 이 사건의 관련자는 자유시사변 때 공격을 받은(가해자 측이 아님) 독립군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이 뭔 사건인지 이 글에서 다뤄보겠다


1. 사건의 주체

니항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뜨랴삐친(트랴삐친) 부대라고 알려져 있다.

뜨랴삐친은 누구인가 그 부대는 어떤부대인가? 뜨랴삐친은 제정 러시아 출신 군인이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을 하며 지냈다한다. 그러다 시베리아 내전 상황을 보자 봉기를 일으킬 결심을 한다. 자신의 애인이 레나를 포함해 뜻이 맞는 동지를 모은 후 봉기를 일으켰다. 그런 과정에서 점점 세력을 모았고 "흑룡강"(아무르강)을 들어올린다는 이야기가 돌만큼 세력을 키운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찬에서 자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니항으로 갔다는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와 니콜라예프스크 중간쯤 지점에 쏘피아라는 조그마한 어촌에서는 단념 22세의 뜨래삐진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살빛이 약간 갈황색이어서 얼른 보기에는 길기스 아니면 우즈베크종인듯한 청년, 코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날카롭게 생간 콧날은 그의 강직을 말하고 움푹 패인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듯, 머리는 흑각색, 나이는 30세안팎이나 되어 보이는 청년, 그가 바로 한때 흑룡강물을 거슬려 올린다는 소문까지 퍼뜨린 괴웅이다.…뜨래삐진은 제1차 대전시에 그의 조국을 위하여 종군하였다가 종전후에 귀향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고향에 돌아와 보니 들리는 소식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멀리 일크쯔끄까지 점령하리라는 소식이다. 아무리 자기 조국이 패전국이라 할지라도 원숭이 같은 일군(이지택 선생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본인이 직접 그런 비하가 있다는 건 러시아측에서 들었기 때문이지, 이지택 선생이 딱히 그런 비하를 만든 건 아닌 것으로 보이낟. 오히려 수기를 보면 이지택 선생에게 그런 느낌은 받지 않았다. - 글쓴이가 덧붙힘) 에게 점령을 당한대서야 참을 수 없는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애인 레나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애인 레나는 자기 고향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자기네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5인이 동지를 구하자가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들은 촌락을 기습하고 청장년을 모집하고 동시에 부유한 집에서는 무기와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렇게 흑룡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무기와 군인들을 마구 모집하였다. 당시 러시아 청년들은 대개개 출전하였던 군인출신이오, 시베라이 북극지대에서 기나긴 겨울의 주야를 농촌이나 어촌에서 보내는 것이 무료하던 차에 뜨래삐진 일파들의 애국적이고 모험적인 협객활ㄷㅇ에 가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뜨래삐찐과 마찬가지로 군대생활에서 또는 전선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사상, 무슨 주의는 모르지만 제정 러시아의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의 횡포…일러전쟁 이후로 가장 멸시하는 일본군대까지 자기네 영토에서 우쭐대는 것을 보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저기압상태에 처해있는 그들에게 '이놈의 세상을 때려부시자!'하는 뜨래삐찐의 선둥구호에 공명하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자기 집에 있는 연발 총이나 엽총이나를 되는대로 들고 뜨래삐진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흑룡강변 부락에서 월동하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여명이 뜨래삐찐의 무장집단에 가담하였다.」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1~322

「니꼴라예프스끄 전투에서 총지도자 뜨라비찐은 제정 로시아 시대에 니꼴라예프스끄 도시에서 포병대장으로 5~6년 동안을 복무하던 사람으로 1917년경에 제대하여서 빼젤르부르크에 있으면서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가을에 뻬젤부르크로 붙어 떠나서 자기가 그전에 복무하면서 낯익은 지대 니꼴라예프쓰크에 가서 혁명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서 동지 3명으로 작반하여서 발정하엿다.
혁명당시에 파괴된 철도 교통을 천신만고로 치따시에 도착하여서 몇을동안 류숙하면서 당시 치따 총독인 크냐세프의 양딸 레베지에파와 상교 - 결혼하여 가지고 려자와 동행하게 되엿다. 그 려자는 고등상식을 소유하엿으며 혁명적 학식과 사상이 풍부하엿으며 당시 치따에서 미인이란 칭호를 받던 녀자이다.」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2쪽
(112쪽에선 이 문헌이 니꼴라옙스크 사변이란 말이 없다. 다만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13쪽에선 이 문헌의 이름을 알 수 있다.)

「1919년 4월 블라지보스또그시에 있는 무정주의 무리가 약 30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쑤찬으로 와서 그의 우두머리가 쑤챤의 지도자에게 자기들에게 모든 자유와 완전한 자치 권리를 달라고 강요하였다. 거절을 당하자 드랴삐찐은 자기의 무리를 거느리고 하바로프스끄 근처에 있는 니꼴라예프스끄 시에로 갔다,"」
일휴호브, 싸무센고, 연해주에서의 빨찌산 운동, 김낙현, 빨찌산 김낙현 회상기,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429에서 재인용

이런 과정에서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빨치산들은 만나연합을 한다. 반병률 교수에 따르면 1919년 11월 2일 하바로브스크 교외 아나스타시에프카Anastas’evsk촌에선 인근의 빨치산 부대들의 대표자 협의회가 개체됐는데 이 협의회에선 니콜라예프스크 항구를 "해방"을 하기위해 부대 재편성이 결의되었다한다. (반병률,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19쪽) 이 때 뜨랴삐친이 참여한건지, 아니면 이 때 재편성된 빨치산부대들과 연합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뜨랴삐친 부대는 니항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 백군과 일본군과 어느정도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포기하고 2월 28일 러시아빨치산부대의 행동에 대해 중립을 하기로 약속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4쪽)

2. 입성 후 학살

입성 후 뜨랴삐친 부대는 백위파 옴스크정부의 관리·장교·자본가를 체포한 후 처형하였다. (반병률, 같은 책 24쪽) 며칠만에 400명 이상이 체포됐다.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19쪽) 당시 현장에 있던 항일운동가들이 증언하기를 이 때 '자본가'의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처형판결이 난 사람들은 아무르 강으로 끌고갔다. 그리고 얼음구멍에 쳐넣었다.

「자본가들(다수로 유태민족)과 중들을 모착하여서 야무르강 어름 구영에 띠엇다.」(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3쪽)

「그는 제1착으로 일본군 세력과 결탁한 유태계 자본가들과 악질적인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4쪽)

그리고 뜨랴삐친 부대는 음주, 양조에 대한 절대적인 금주령을 내렸다.이것에 위배하면 무조건 총살형에 처하다는 극단적인 포고령을 내렷다.

「뜨래삐찐」은 개선장군으로 입성함과 동시에 군대를 적소에 배치해 놓고 총사령부를 번화한 네거리 3층 건물에 좌정하고 제1호 포고령을 발하였는데 모든물자의 판매 이동을 금지하여 경제적 통제를 선포하고 당분가 군정의 실시를 포고하였다. 그 중에서 인상이 깊은 것은 군인이나 민간인을 막론하고 음주, 양조에 대한 절대의 금주령이다. 이 포고령에 위배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4쪽

3. 일본인에 대한 학살과정 ("니항사변")

러시아인 학살과 다르게 일본인에 대한 학살은 어느정도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에게도 책임은 있다.

뜨랴삐친 부대는 3월 5일에 백위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3월 12일엔 일본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요구하자. 일본군은 여기에 응하지않고 빨치산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3월 11일에 빨치산 본부에선 연회가 개최됐는데 일본군들도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2일 1시 30분에 빨치산참모본부를 기습하였다. 뜨랴삐친은 수류탄의 폭발에 발에 부상을 입었고 참모장 나우모프는 다음날에 사망할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빨지산부대는 곧바로 반격하였고 일본군은 얼마 안 가 항복하였다.(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4쪽) 

「박(박 바실리-옮긴이)군이 내 침실로 들어서더니 일본군이 밀리는 것 같고 이쪽에서 사냥하러 다니는 모양이라고 일러준다. 접전한지 두시간이 이렇게도 빨리 끝날 수야 있나. 「뜨래삐진」이 이럴줄 알고 미리 대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일군 간부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7일이 전날인 8일 새벽 두시를 기하여 일제히 출동, 사령부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수류탄은 사무실에서 한개가 터지고 침실에서도 한개가 터졌다. 그 파편이 뜨래삐찐의 발목에 맞았다. 그는 레나의 침실 있는 으슥한 방으로 절룩거리면서 달려갔다. ……바로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던 호위대가 즉시 반격하였다. 동서남북 각처에 널려 있던 부대를 사방에서 몰려오면서 공격을 가하였다. 뜨래삐찐 군대는 입성한후에 큼직큼직한 개인사택에 주둔하고 있었다. 차폐물이 없는 네거리에서 배겨낼 수 없는 일군들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은 점점 밀려서 교외에 있는 자기네 병사로 도망쳐 숨고말았다. … 병영에 쫒겨간 일군을 뜨래삐찐 군대가 멀찌감치 눈속에 참호를 파고 포위해버렸다. 그 이튿날부터는 찐비랍흐 포대로 부터 일군에다 대고 포격을 개시하였다. 그 병영은 붉은 벽돌로 튼튼히 지은 2층 건물이기 때문에 대포 몇방에 부서질 염려는 없다. 그러나 몇방만에 지붕을 뻥뚫어 놓고는 북쪽으로 향한 창문을 모조리 부수어버렸다. 출입구쪽으로 포위병들의 총구가 총집중 돼 있다. 보일러가 터지고 파이프가 얼어붙었다. 죽은 병정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도 이를 악물로 견뎌 보려고 했겠지만 5일만에 흰기를 들고 나와 항복하고 말았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5

「뜨랴삐진은 무장해제된 일본장교들과 타협, 륭화책을 쓰엇다. 저녁이면 일본장교들을 청래하여 자기의 참모부에 모와서 유희, 무도를 하면서 유쾌하게 놀았다.
하로 저녁 11시 되어서 유희, 무도로 유쾌하게 노는 참모부 유리창을 마스고 폭탄이 들어왓다. 폭탄이 터져서 뜨라비찐은 중상을 당하엿으며 전 시가에는 시가전이 시작되어서 개인집에 산재한 무장 빨찌산 2000며은 무장이 충분치 못한 일본군대와 이튼날 아츰 동이 틀 때까지 전투하여서 폭동 일본군대를 진압하엿다.」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3

「시내에 있는 일본 부대들은 빨찌산 사령부들, 병영들, 빨찌산 포병부대들을 배신적으로 동시에 습격하였다. 왜놈들은 기관초응로 사격하였고 유리창들로 수류탄을 들이뜨렸으며 사령부가 있는 건물, 병영 기타 빨찌산들이 차지하고 있는 집들에 불을 질렀다.…나는 그날 밤에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중에 어머니가 나를 깨우면서 시내에서 화재가 나서 화광이 충천하고 총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린다고 말하였다. 나는 제꺽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빨찌산 사령부 건물과 병영들이 불타고 있었다. 나는 달음바질로 나의 부대가 있는 도시 중앙으로 가는데 중도에서 한 20명 되는 빨찌산들이 나를 따라나섰다.  백파놈들과 일본 거류민들은 집안에 숨겨서 거리에 있는 빨찌산들을 총으로 쏘았다. 나는 상관으로서 빨찌산들을 거느리고 저들이 숨어있는 집들에서 놈들을 격멸하는 작전을 하면서 2~3시 지나서야 우리 부대가 있는 도시 중앙에 이르게 되었다.…약 350명 되는 왜놈들이 자기들이 있던 병영에 남아서 맹렬히 대항하고 있었다. 왜놈들의 진지는 병영과 채 준공되지 못한 병영건물들에 엄폐되어 있기 때문에 보총들을 가지고는 쳐 없일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츠니르 요새에 있던 대포들이 당도하였다. 빨찌산 사령부는 일병 사령부에 투항하라는 최후 통첩을 하였다. 그러나 왜놈들은 "사무라이 전통에 의하여 천황폐하의 군인들은 투항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보내었다. 이런 대답을 받고 빨찌산들은 대구경포로 심한 포격을 하여 왜놈들이 엄폐하여 있는 병영 건물들은 죄다 허물어 버리었다. 게다가 35~40도의 추위는 왜놈들이 견디어 낼 수 없었다. 약 300명이 되는 사무라이들이 흰 기를 들고 투항하였다.」
김낙현, 빨찌산 김낙현 회상기,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402~403

이 과정에서 많은 거류민들도 무장을 하여 빨치산들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한국측만 주장하는게 아니라 일본측 전문가의 책에서도 나오는 것인데 하라 테루유키(原暉之)가 쓴 『シベリイヤ出兵-革命と干涉, 1917-1922』, 524쪽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5)

이 과정에서 빨치산들은 저항하던 거류민이던 민간인이던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로 학살한다. 학살이 너무 잔인했는지 한국인 거류민이 일본인 거류민을 살려주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시가지에서 일인집들과 러시사아 장교집들을 철저히 수색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일인 거류민들도 최후까지 항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가족의 몰살로 끝났다. 시가에 소탕전이 약 1주일 후에야 끝났다. 박이나 나는 1주일 동안 집안에서 딩굴었다. 공연히 나다니다가는 유탄에 맞아 죽기 알맞기 때문이다. 일군의 항전은 포로 30여명의 생존가 남았을 분 그외에는 모두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 군인인지 거류민인지 헐벗은 일본인이 문모라는 우리나라 사람집에 달려들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더란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루밤을 재워 보내면서 여벌의 외투까지 주었다는 것이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5~326

뜨라비찐는 일본인은 로소남녀를 물론하고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하엿다. 이 명령을 충분히 실현되엇다. 은행과 상점들을 압수하엿다. 상점에 싸이어 있던 피물로 2000명 빨찌산 군복을 하여 입게 되었다.
이 때에 전설에 의하면 한 유대녀자가 자기는 죽이어도 자기의 어린아들을 살과달라고 애걸하엿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를 그 녀자 보는데 몬저 죽이고 다음에 그녀를 죽이엇으며 한 일본 은행사무원은 일본도 베게 두개만한 체적을 가지고 눈길에 시외 몇 낄로 멧틀에루 도망간 것을 고려인 빨찌산 두명은 그 자취를 따라가니 일본인이 자기에게 있는 돈을 줄 것이니 자기의 생명을 살과달라고 애걸하엿다. 그러나 그 돈을 일본인이 보는데서 불에 태워버리고 다음으로 일본인을 죽이엇다.」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3

이 사태가 끝난 뒤에 일본인 136명이 살아남았는데 여자, 아이들, 부상자들이었다. 빨치산들은 이들은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가둔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철수할 때 모두 처형했다.(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5~26)

일본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건 분명 사실이고 이건 당연히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엔 참작할 만한 부분은 있다. 문제는 그 뒤엔 그런 참작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4. 니콜라예프스크 "해방"
일본군까지 처리하니 빨치산들에게 거리낄 께 없었다. 사태가 정리되자 빨치산들을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렸고 주민들을 공포에 빠졌다. 이것을 한인부대도 마찬가지였다.

「홍(홍의표-글쓴이가 덧붙힘)군의 의미싱장한 말한마디로 우리들은 긴장해지기 시작했다. 홍군의 말인 즉 이번 사건이 좀 평정해지면서 우리 한인부대 군인들의 횡포가 심해져가고 가고 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주민들에게 대한다는 것이다. 자기집에 와서도 그렇게 우쭐대는 것을 보니 다른 집에 가서는 행패가 더 심하리라는 것이다. 고중대장(고명수-글쓴이 덧붙힘)과 홍군 아버지와는 형님 동생하는 친한 사이였다. 한인 군인들의 행패를 막기위해서는 무슨 대칙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도 하도 분해서 고중대장을 찾아서 자기 집에 총을 메고 와서 "술을 내놔라 일본놈을 내 놔라"하고 여자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당장 쏴 죽일 것처럼 행패를 부리니 어디 그럴 수 있느냐고 대들었더니 고중대장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과는 했지만 무지막지한 그놈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으니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6

그 후 뜨랴삐친 부대는 다음같은 포고문을 내린다.

「혁명군 총사령관 '뜨래삐찐", 혁명군참모총장 "레나"라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2호 3호 연달 포고문이 나 붙었다.
1. 새 화폐의 발행
1. 노동의 의무제
1. 모든 선박의 징발
1. 개인 주택의 징발
1. 특수 물자의 배급제
등등의 포고문을 매일 같이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6

이런 분위기에서 박 바실리는 이후 뜨랴빠찐이 벌인 계획을 알게되고 자유단원들에게 전하게 된다. 이지택 선생의 증언이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점점 따뜻하여가고 눈은 녹아서 길바닥이 낮아지고 있었다. 벌써 바닷물이 가까운 하류 강어구에는 얼음이 녹았단다.
강물만 녹게 되면 일본의 군함이 즉각 강어구쪽에서 올라올 것이다. 하바로프스크 쪽에서 군함이 밀려 내령로 것이다. 강어구에서 올라오는 것은 찐비랍흐 요새 근처에 좁은 물목을 메워 막는다, 내려오는 것은 군대를 보내서 싸운다, 그 동안에 군인들 가족과 선량한 시민들은 흑룡강 지류인 암군강 상류에 잇는 날비로 피난시킨다, 모든 악질적인 비협동 족속들을 숙청해버린다. 그리고 이 시가도 초토해버리고 만다. 뜨래삐진은 … 스케일을 자놓고 착착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박병길(박 바실리 - 글쓴이가 덧붙힘)군의 정보로 이러한 뜨래삐찐의 속셈을 알게 된 우리…」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7

이런 상황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다. 방식은 관리, 백군, 유대인 자본가들과 같았다. 총검을 찔러 얼음속으로 쳐박는 것이다.(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에 대한 캠브리지 대학 서평, Polar Record, Volume 31, Issue 176 January 1995, pp. 73-75 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polar-record/article/the-destruction-of-nikolaevsk-onamur-an-episode-in-the-russian-civil-war-in-the-far-east-****-gutmanaya-translated-by-wiswellel-edited-by-piercerichard-a-****-fairbanks-and-kingston-ontario-limestone-press-xxxiii-***-p-illustrated-hard-cover-isbn-0-919642-35-7-us2800/3EF89A409F7277ADD75905FA89BBEEFC)

이것 때문에 젊은 항일 청년들은 상당히 고민한다. 이 시절 니콜라예프스크에는 자유단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항일청년들이 조직한 집단이었다. 이 자유단의 청년들은 박병길(박 바실리)·김께샤·이지택 을 대표로 해서 뜨랴삐친에게 갔다. 자신들이 군대에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여러 조건이 달렸는데 그 중 하나가 "한인군인가족들의 처우도 러시아인군인가족들과 마찬가지 로 대우할 것"을 달았다. (이재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7쪽;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1~22) 이지택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지원한 이유엔 빨치산들에게 버림받고 일본군에게 보복을 당할 것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박 바실리는 당시 뜨랴삐친이 도시를 초토화할 것을 알았고 그걸 자유단 청년들에게 전했다. 자유단의 청년들은 이 때문에 굉장히 긴장하였다. 또한 한인부대들을 믿을 수 없었다는 게 지원 이유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7쪽) 한인부대를 포함해서  뜨랴삐친 부대에게 공포를 느낀 것이 협조한 이유중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청년들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5. 니콜라예프스크 초토화와 대량학살 (2차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은 니콜라예프스크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이동할 수 있는 아무르강이 얼어있기때문이다. 그러나 5월이 되면서 그 얼음이 녹아서 풀리기 시작했다. 뜨랴삐친부대는 철수준비를 하였다. 뜨랴삐친부대는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없앨예정이기 때문에 주민들을 껠비촌으로 피난가게하였다. 많은 주민들이 피난을 갔다. 하지만 모든 주민들이 피난가지는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고 일부 주민들은 사정이 좋지 않아 가지 않았을 것이고 상황을 잘 몰랐던 주민들도 있을 것이다. 뜨랴삐친 부대는 피난을 가지않은 주민들을 모두 처형했다. 이 학살엔 어른과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조리 살육버렸다.(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5~26)

“대중테러가 발생하여 수많은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가족과 우익사회주의 활동가들 심지어는 소비에트 권력의 동조자들까지도 희생되었다.동시에 이러한 테러는 암군강가의 마을에서도 벌어졌으며 아이들까지도 죽임을 당했다. 이사건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계속된 완전한 해명을 요구한다
Уполномоченный Военсовета Беуднин,Доклад о военно-политическом по
ложении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1920.9.9,с Керби(군사소비에트 전권위원 베우
드닌,사할린주 군사정치정세에 대한 보고,1920년 9월 9일,켈비),РГВА ф.170,оп.1,
д.35,л.14-18об.,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20쪽에서 재인용」

그후 마을은 모두 불태워지고 파괴됐다. 이 때 한인마을들도 폐허가 됐다고 한다. (김주용, 박환, 조재곤, 한시준, 한철호, 제59권 국외항일유적지,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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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니콜라예프스크와 살육된 사람들
Местный 란 사람이 올린 Фотографии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1920 года. 란 자료에서 http://www.aurora.mybb2.ru/viewtopic.php?t=2029 

훗날 뜨랴삐친은 자신이 니콜라예프스크에 모은 군인들에게 쿠데타를 당해 처형된다. 이 당시 이런 학살극을 벌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니항을 파괴한 것은 해빙되어서 일본군이 남하하면 또다시 그 적군의 근거지가 될 것이므로 전략상 부득이한 일이었소. 인명의 살상은 있었으나 무고한 인민을 죽인 일은 없고 군령에 불복종하든가 이적행위를 감행한 자를 처단했을뿐, 혹시 있었다면 부하가 한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진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4」

6. 암군강가에서 계속된 학살과 쿠데타

이 후 뜨랴삐친 부대는 암군강가로 이동했다. 위에서 베우드닌이 쓴 보고에도 나오듯이 여기서도 심각한 학살을 벌였다.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지원했던 군인들은 여기에 경악하거나 분노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테러는 암군강가의 마을에서도 벌어졌으며 아이들까지도 죽임을 당했다.
Уполномоченный Военсовета Беуднин,Доклад о военно-политическом по
ложении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1920.9.9,с Керби(군사소비에트 전권위원 베우
드닌,사할린주 군사정치정세에 대한 보고,1920년 9월 9일,켈비),РГВА ф.170,оп.1,
д.35,л.14-18об.,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20쪽에서 재인」

「뜨래삐찐이 날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행동을 하는 것 같아서 늘 불만이 만만하였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날비에 가서도 뜨래삐찐의 부하들이 사람을 어찌나 죽이던지 하루에도 한둘의 시체는 강물위로 떠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이따금식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심지어 감시대라는 것을 두어서 강으로 오르내리면서 강변에 걸린 시체나 떠오르는 강상의 시체를 거두어서 강변에 묻어주는 일을 하게까지 하였으니 그 살인적 행위는 불문가지였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3」

결국 뜨랴삐친 반대세력은 쿠데타를 벌이기로 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알렉세이란 인물이였는데 이 인물 역시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지원했던 사람이다. 한인 측에선 박바실라아를 비롯한 자유단 측이 참여했다. 이들의 특징은 니콜라예스크에서 지원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파괴당한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뜨랴삐친는 주변 마을에서 식량을 강제징발하기위해 기병대를 보냈다. 쿠데타를 세력은 이 때 쿠데타를 벌였고 성공했다. 이지택의 소감에 따르면 상당히 허무하게 성공했다고 한다.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2~344) 뜨랴삐친과 부인 레바등 7명이 처형됐다.  10명은 징역 10년을 받고 받고 치타로 호송됐다.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7쪽)

7. 학살에 관련된 한인

위에서 말한 것처럼 뜨랴삐친 부대는 엄청난 테러를 벌여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이 때 이 부대에는 한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한인들중에서도 학살에 관련된 사람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박일리야 라는 사람이였다. 이지택 선생은 이 사람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인상부터 몹시 냉냉하기 얼음장 같"(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4)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걸 볼 때 굉장히 차가운 사람인 걸 알 수 있는데 이 사람이 학살에 관련되어있다는 것은 여러 사료에서 알 수 있다.

먼저 러시아 문서에 그런 행적이 남아있다.

「.“첫째,위 부대의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한인특별보병대대 오하묵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블라고베센스크로 가서 2달 이상 체류한 점.
둘째,이곳(블라고베센스크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한인특별보병대대의 조직적 해체에 종사한 점.
셋째,이전 니꼴라예프스크 병사들과 관계를 맺고 박 바실리 동지의 살해를 막지 않은 점.
넷째,부대를 자유시에서 시골로 옮기면서 평화로운 러시아농민들을 강압적으로 약탈한 점.
다섯째,거짓된 정보로 한인부와 최고사령부로 하여금 거짓된 정세를 받아들이도록 한 점.
여섯째,유언비어와 모험적 행동으로 일부 한인혁명가들의 신용을 실추시킨 점.
일곱째,니꼴라예프스크 부대의 무책임한 테러리스트들로 그룹을 만들어 한인특립보병대대의 병사들과 지휘부를 낭패에 빠뜨린 점
-
Протокол No.1 Чрезвычайной Корейской Военной конференции,состояв шейся 2-го марта 1921года,в городе Чите,под председательством гр.Цой-Кван-юн при секретарах гргр.Цой-Шенг-у и Ким-Гю-чан(1921년 3월 2일 치타에서 열린 특별한인군사협의회 제1회 회의 회록), ,РГВА,Ф.221,оп.1,д.376,л.51об-52,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97쪽에서 재인용」

이 문서내용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그건 바로 이지택 선생의 수기다. 이지택 선생에 따르면 박일리아는 뜨랴삐친과 같이 남아있었더라는 것이다.

「혼성대대가 제1차로 출전당시 우리 한인 제1중대 참모로 있던(중대장은 고병익)박일리아는 출전하지 않고 한인부대의 전체 참모격으로 뜨래삐찐과 행동을 함께하였고 날비에서 지내고 있었다. … 뜨래삐진이 입성하면서 평소에 거래상 가깝게 접촉하던 고병익 1중대장의 소개로 뜨래삐찐과 접촉하고 1중대의 참모격으로 일보게 되었고 한인전반에 대한 모든 문제에 참여하면서 뜨래삐찐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번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혁명위원회에서 그의 처벌론까지 대두한 것을 박군(박 와실리-글쓴이)이 적극적으로 만류해서 평민으로 격하시키는데 그쳤는데 박일리야는 그것이 박군의 조작처럼 오해하고 불평불만이었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4」

이 때 뜨랴삐친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던 때였다. 러시아인 약 4천명을 학살한 테러에는 한인부대도 관련되어있던 것이다. 거기다  뜨랴빠찐이 처형 받을 때 박일리아는 뜨랴빠친을 혁명적인 애국자라고 간주하여 처형에 불만이었다고한다.(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7쪽)

뜨랴삐친이 처형뒤 박일리아는 박 바실리 세력에게 불만은 갖게된 것으로 보인다. 뜨랴빠찐 이후 부대는 갈라져서 이동을 하게됐는데 박 바실리 측은 오하묵이 지휘하는 자유대대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박 일리아는 그 일을 여전히 잊지 않은 모양이다. 이후 박 바실리는 박일리아 세력에게 끌려간 후 피살되고만다.

「경비원들이 차례로 한사람씩 불러내서는 "심심한데 빈데나 털어 볼까"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몽둥이로 온 전신을 두드려 패는 것이었다. 이렇게 며칠동안 못살게 굴더니 그들의 교대가 끝날 마지막 날에 와서 밤중에 4,5명이 우르르 몰려 들더니 박병길(박 바실리)을 불러 내더란 것이었따. 박이 불려나가니 또 빈대털리가 시작되나 보다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빼서 내려다보고 잇는데 박이 내려 서자마자 뒤에서 한 놈이 러시아식 뾰족한 총장으로 느닷없이 박의 등을 찔러버렸따는 것이다. 그놈들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나니 겁이 나서 더 죽일 용기가 나질 않았떤지 모두 몰려 나가고 쇠를 채우는 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지더란 것이었다.… 이 사건이 직접 간접으로 후에 일어난 소위 흑하사변(자유시 참변, 자유시 사변)의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9 」

그런데 이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는가? 아마 독립운동사를 공부했으며 이 이름이 아주 낯설 것이다.

박일리아(朴일리아) 1891~1938. 5. 25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당시 박일리아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중심인물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의 무장해제에 저항하였으며, 이때 약 500명의 무장부대를 지휘하였다.
독립운동가 공훈록 http://search.i815.or.kr/subContent.do」

오하묵과 군통수권 문제로 갈등했으며 자유시 사변 때 무장해제 거부에 중심에 있던 그 박일리아가 맞다. 이 사람은 독립운동사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아니다. 자유시 사변 때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걸 보면 니항사건이 독립운동사에서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유시 사변 때 이 박일리아가 어떤 인물인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하나더 있따. 이 박일리아가 지휘하던 부대가 니항부대(박일리아 부대)에서 이어진 사할린 부대였다. 위 회의 회록에서 나온 것 처럼  사할린 부대는 수천명을 죽인 테러범들도 상당수 포함됐던 집단이다. 이후 많은 만주출신 독립군들이 이 지역으로 옥 일부 만주출신 독립군들이 이 사할린 부대에 합류하긴 했으나 그건 일부였을뿐이었다. 홍범도, 이청천 등 만주에서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사할린부대가 아닌 고려혁명군정의회(사할린부대와 대립)를 인정했다.(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200~201) 여전히 사할린 부대에서 테러범들의 비중은 낮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책들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독립운동사에서도 니항사건이 뭔지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다. 내가 본 독립운동사 교양서와 개설서중 니항사건의 러시아인 살육을 다뤘던 건 반병률 선생의 책뿐이었다. 그것을 빼고는 설명하는 책을 본 적이 없다. 한민족 이주사로 봐도 중요한 사건이다. 이 때 한인촌도 초토화가 됐으며 많은 청년들이 어쩔 수 없이 군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설명한 교양서, 개설서를 본 적이 있는가? 정확한 이유는 나야 모르겠으나 국수주의에 불리하니 빼버린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8. 참고문헌

1차 사료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洪範圖 篇)
김낙현, 빨찌산 김낙현 회상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 洪範圖 篇)

한국 2차 자료
반병률,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김주용, 박환, 조재곤, 한시준, 한철호, 제59권 국외항일유적지
한국독립운동사사전-운동·단체편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외국 2차자료
John J. Stephan, The Russian Far East : a history, 1994, Stanford University Press (146-159쪽만 복사)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에 대한 캠브리지 대학 서평

사진자료
Местный 란 사람이 올린 Фотографии Николаевска-на-Амуре 1920 года. 란 자료에서http://www.aurora.mybb2.ru/viewtopic.php?t=2029 

9. 니항사건 현장에 있던 독립운동가들
- 박병길(박 바실리, 박 와실리)
미상~1921. 1. 28
애족장 (2006)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자유단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함. 호방하며 친절해서 지역 한인들에게 호감을 받음. 또한 백군과 적군을 가리지않고 교류를 할만큼 폭도 넓음. 뜨랴삐친 부대때문에 사건에 휘말리고 반강제로 군대로 들어감. 이후 뜨랴삐친을 체포하는 쿠데타와 트랴삐친을 처형하는 판결에도 참여함. 박 일리야 세력에게 피살당함. 불쌍한 양반임.

- 이지택
애족장 (1990)
1899. 10. 29~1976. 4. 2
니콜라예프스크에 오기전엔 "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함. 이후 니콜라예프스크에 와서 선생일을 하며 자유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함. 뜨랴삐친 부대때문에 사건에 희말림. 반강제로 군대로 들어감. 해붕 후에는 대한민국 측에 들어감

- 김낙현
1884~미상
애국장 (2009)
당시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에 살았던 공산당 운동가. 뜨랴삐친이 니콜라예프스크에 오기전부터 공산당 빨치산이였던걸로 추정. 가해자인지는 불명

- 홍파
1902. 1. 30~1977. 9. 26
건국포장 (1993)
당시 현장에 있었으나 정확한 활동을 불명

- 박일리아
1891~1938. 5. 25
애국장 (2006)
당시 니항에 있던 테러 가해 관련자중 한 사람. 자유시사변 뒤에도 계속 살아남음.
(해당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 참고는 독립기념관에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자료' 참고함 http://search.i815.or.kr/main.do )

이와 비슷한 네이버 카페, 디시 기갑갤러리, 나무위키에도 써있는데 그글들도 제가 쓴 것 맞음 .(루리웹에도 있던 모양인데 그건 내가 쓴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퍼간 것)

6개의 댓글

2017.01.23
대학교 보고서급이네
0
2017.01.23
교수님이 나눠주신 유인물같음.좋은자료 잘 보고감~,
0
와 진짜 글 잘 쓴다..;
0
2017.01.24
ㅊㅊ
0
2017.01.25
로소남녀? 남녀노소 말하는거지?
0
2017.01.26
@인치
원문이 그렇게 되어있음. (아마 남녀노소 말하는게 맞다 생각하는데 그 때는 그렇게 썼는 듯)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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