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단편글] 마왕-01

01.


 화창한 겨울 아침이었다. 노인은 그날따라 일찍 잠에서 깨어 모처럼 만에 문 밖의 눈을 정리하고 난 참이었다. 요 며칠간은 폭설이 내려서 눈 때문에 문이 열리지도 못할 지경까지 손도 쓰지 못했었는데 이 기회에 깨끗하게 치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북쪽산의 날씨는 험하고 종잡을 수 없다. 바로 당장에라도 폭설이 쏟아질지 모르기 때문에 이곳의 산장지기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하고, 또한 부지런해야만 한다. 다행히 노인은 그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산장 주변 눈을 다 걷어내고 돌아와보니 시간은 아침보다는 점심에 더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식사 시간을 따진다면 평소보다도 오히려 더 늦은 셈이다. 어깨며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 옷을 제자리에 얌전히 걸어둔 뒤, 노인은 찻잔에서 주전자를 꺼내 불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날씨를 살피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북쪽 하늘이 먼 곳에서부터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침에 일을 다 끝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노인은 주머니에서 비스켓을 꺼내 깨물었다. 그리곤 멍하니 창 밖의 모습을 감상했다. 사실 눈이 오면 피곤하긴 했지만 그 먹구름이 다가오는 광경은 볼 때마다 장관이었다. 특히나 이곳에서는 먹구름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마치 하늘에서 구름이 무너져내려오는 것 같은, 다른 곳에선 쉽사리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다른 때 같으면 산꼭대기에서 먹구름이 보이기가 무섭게 산장 위까지 구름이 순식간에 밀고 내려와 금새 하늘이 컴컴해지곤 했는데 이번엔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산 꼭대기 언저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수상한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그 순간, 번쩍하고, 저 먼 먹구름 속에서 거대한 빛이 번쩍 튀었다. 그리고 노인은 그 짧은 순간 목격했다. 바닥에 길쭉하게 보이던, 자신의 그림자와는 또 다른, 산 꼭대기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불길한 그림자를.

노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머그컵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차마 줍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산장을 빠져나와 산 아래로, 마을을 향해서 미친 듯이 달렸다. 손을 마구 휘두르고, 달리다가 몇번이고 넘어질 뻔 하면서도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마을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차가운 공기가 성대를 날카롭게 찌르고, 그가 발을 디딜때마다 폭발하듯 솟아올라 흩어진 눈 알갱이 하나하나가 폐로 들어가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와중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해 외쳤다.


 "마왕이 돌아왔다!"


 그리고 노인의 외침이 마을 어귀에 다다르기 시작할 때쯤, 산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먹구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02.


 왕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질 못했다. 그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은 채,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소식을 들고 온 신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비단 왕 뿐만이 아니었다. 왕이 주최한 연회, 그 존엄한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마치 박제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소식을 들고 온 신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신하가 참다못해 다시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왕이 술잔을 식탁 위에 떨어트렸다. 포도주가 피처럼 식탁보를 적셔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왕은 손을 벌벌 떨면서 되물었다.


 "지,지금, 뭐라고 했소?"


 그의 목소리는 딱할 정도로 잠겨 있었다.


 "산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했소?"


 신하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자신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그저 재미 없는 농담을 한 번 해봤을 뿐이라고' 대답하길 바라는 듯한 무수한 눈빛들이 그에게 쏟아져내려왔다. 그는 눈을 둘 곳을 차마 찾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지른 비명을 시작으로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느 이름 높은 가문의 귀부인은 실금을 하며 혼절했고 장군은 서있지조차 못해 의자에 주저앉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천년의 세월 동안 굳건하던 왕궁의 돌바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반은 소리지르고 반은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모습들을 연회장의 벽과 바닥을 빼곡히 채운 그림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포에 질리지 않은 것은 오직 한 명, 아버지를 따라 연회에 참석한 어느 젊은 귀공자뿐이었다.


 "아버지 대체 왜 그러시는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또 왜 그러시는거구요?"

 "아들아... 오, 아들아."


 그의 아버지는 아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며 대답했다.


 "이 나라는 끝났단다. 이제껏 너가 사랑해온 모든 것과 내가 일궈온 모든 것이 사라질게다. 마치 이제까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들은 그토록 품위있던 아버지가 체통도 지키지 못할만큼 무너진 이 상황이, 그리고 아버지가 말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아버지!"


 아직 어린 아들의 애처로운 질문에 아버지는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 듯 했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물을 입안 가득 흘려넣었다. 그리곤 아까보단 훨씬 정돈된 눈빛으로 아들을 마주보았다. 그는 아들에게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아직 너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북쪽 산 너머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마왕의 땅이라고 불렀다. 마왕이라고 하면 너가 어릴 적 침대에서나 들려주는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아들아. 그때, 마왕은 실존했단다."


 그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모든 재앙은 북쪽 산을 넘어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말 그대로, 마왕은 북쪽 산 너머에 터를 잡고 앉아 각종 요술을 부려 이 나라에 재앙을 내리기 위해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저 위대한 믿음의 궁전에서는 예로부터 종종 마왕 토벌을 위해 신의 아들들과 마법사들을 대거 모아 보냄으로서 마왕의 힘을 견제한 바 있었다. 그런데 16년 전 겨울, 갑자기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냉기가 마왕의 땅에서부터 흘러나와 북쪽 산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믿음의 궁전에서는 이제까지와같은 방법으로 그 추위에 대항해보려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보낸 그 위대한 영웅들이 모두 냉기의 영역에 발을 들이자마자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몇몇의 목숨을 더 잃고 나서야 믿음의 궁전은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얼어붙어 시체조차 건사할 수 없는 무수한 넋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그리고 그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 위대한 마법사들과 신의 힘으로도 안됐다구요?"

 "그렇단다. 사실 마법과 신의 힘이란 세상의 힘을 잠시 빌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상의 정해진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단다. 그 추위, 그것은 마치 세상이 이 나라를 없애기로 작정한 것처럼 확고하고도 거침이 없었다. 나 역시 겪었었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소매를 걷었다. 그의 오른팔은 팔꿈치 위쪽이 움푹 파여있었다.


 "나는 추위에 삼켜진 곳을 조사하는 임시 조사단장이었다. 털가죽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돌입했지만 그야말로 칼과 같은 바람이 불어 도저히 깊숙히 갈 수가 없었다. 함께 간 동료들은 하나하나 멈춰버렸다. 그 중 한명은 내가 보는 눈 앞에서 마치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온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건물, 나무, 가릴 것 없이 추위에 덮쳐진 것들은 깨지거나 굳어버렸다. 그곳은 흡사 지옥 같았다. 도저히 며칠 전만 해도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후퇴해왔다. 마침내 추위의 영역에서 벗어났을 때, 난 그제야 내 옷이 바람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는 것, 그리고 오른팔이 드러나 동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살점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신기할 만큼 아픔이 없었다.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 뿐이었다."


 목이 타는지 그는 물과 포도주를 있는대로 입 안에 흘려넣었다.


 "결국 그 추위는 왕궁에까지 다다랐다. 당시 왕은 나라고 신하고 다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이 들키는 바람에 신하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상태였고 모두의 신뢰를 받고 있던 믿음의 궁전의 궁전지기님께서 왕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때의 왕궁은 왕궁이라기보다는 신전 같았다. 모두가 신께 기도했지. 사실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당시 왕자님... 지금은 폐하이신 바로 저분이셨다."


 아들은 왕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시절 용기 있게 나섰다는 그 모습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모습에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폐하는 자신에게 불을 붙여줄 어린 마법사 한명, 그리고 폐하와 동문이었던 믿음의 궁전의 한 사제와 함께 추위를 뚫고 북쪽 산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성공할 거라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냉기가 마침내 궁전 코 앞까지 닥친 날. 거대한 불기둥 같은 것이 북쪽 산 너머에서 솟구쳐올랐다. 내가 그것을 북쪽 산 너머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왕궁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이 그 솟구치는 불기둥이 얼어붙은 안개와 눈으로 가득찬 먹구름을 단 한번에 걷어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왕궁 바로 앞까지 전진해온 냉기가 사그라들고,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일주일을 내리다그쳤다. 불기둥이 사라진 것도 그 때쯤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등에 거대한 얼음을 짊어지고 사제와 함께 돌아왔다. 그 얼음 속엔 함께 나선 마법사의 시체가 들어있었다. 그 이후 우리는 그의 넋을 기리며 그 얼음을 왕궁 지하에 모셔두었고 폐하를 왕으로, 사제를 믿음의 궁전 궁전지기로 추대했다. 그 이후엔 그 두분이 마왕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바로 오늘까지는.. 말이다."

 "그럼 이번에도 폐하께서...."

 "아니란다 아들아."

 그는 애처롭다는 듯 아들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16년 동안 젊음과 힘을 잃으셨다. 이제는 육체적으로 우리와 별 다를 것 없는 사람일 뿐이지. 그러니 폐하께 우리를 지켜달라고 할 수는 없단다. 오히려, 우리가 폐하를 지켜드려야 한다."

 "저희가요?"

 "그래. 만약 마왕이 깨어나서 이리로 오는 것이라면... 가장 먼저 폐하와 궁전지기님을 노릴테니 말이다."


 아들은 왕을 다시 돌아보았다. 삐쩍 마르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겁에 질린 초라한 중년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그에게 생명을 지켜달라고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하죠? 저희가 어떻게 해야 폐하와 이 나라를 지킬 수 있죠?"

 "아들아.... 오, 아들아."

 아버지는 위엄을 잃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얘기를 하면서 틈틈히 목을 축인 술 때문인지, 아니면 이 순간까지나마 무너지지 않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는 아들 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들을 힘없이 껴안았다. 그리곤 아들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아들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비로소, 연회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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