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3색 친일파의 이야기

일반적으로 '친일파'라는 단어를 들으면 기회주의자적인 행태를 보이고 조선인들을 팔아먹었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친일파 세 사람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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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소개할 인물은 박중양입니다.
 
박중양은 본래 김옥균 등 개화파를 존경하던 인물로, 개화파적이고 일본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던 인물입니다.
 
청년시절 독립협회에도 참여하고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갔다오는 등, 지식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의 최후를 보고 연좌제와 가혹한 형벌에 대해서 비판적인 행태와 조선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었죠.
 
유학생활 도중, 박영효와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서 처치하고자 조정이 자객을 보냈는데, 신변위협과 함께 조선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성실히 공부하다가 이등박문의 아내를 구하는 일로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이등박문이 조선인이라 차별하지 않아 감동하였다는 이야기도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 서구문물의 유입, 규율, 통제, 질서 등에 대한 필요성을 가지고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해서 판관, 군수, 도지사 등을 지냈는데 능력도 능력이고 이등박문이 조선통감이라 빽도 있어서 무리없이 승진하게 됩니다.
 
행정업무도 무난한 편이라 위생사업이나 도로건설, 해로운 동물 구제, 병원건립 등에 힘을 썼고 조정과 마찰이 생겼으나 빽 덕택에 대부분 박중양 뜻대로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인에게 횡포를 부린 일본 순사들을 때리고, 백성에게 가혹하게 법집행을 하는 경우에 손을 봐줬으며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망신까지 주는 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뇌물이나 접대 등에 대해 부정적 의사를 내비치며 청렴하게 살아오던 사람이었죠.
 
물론 평안도에 재직중에는 일못한다고 욕을 먹었고, 한일합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인물이라서 한일합방을 주장합니다.
 
그 덕택인지, 일제강점기시절에 도지사 직위를 가지게 됩니다.
 
도지사 시절에도 도로 철도들을 깔고 무례하거나 조선인에 대해 막대하는 일본인 관리들에게 "응징하는 일"도 계속합니다.
 
3.1운동시기에는 나서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며 이에 대해 진압, 해산을 요구하고 여러 인물들을 신고하는 단체를 만듭니다.
 
다만 이때 주도자를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에 대해서는 "선동당한 사람들"이라며 석방을 요구하고 이를 거절하자 "응징"해서 기어코 석방시키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때의 공로로 훈장도 받긴 하지만, 일본인들의 미움을 사고 '청렴'때문에 아부와 뇌물에 서툴러서 총독부에게 단단히 찍혔고 성추문을 겪게 되자 사임합니다.
 
30년대 들어서는 중추원 위원으로 활동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총독부도 다시금 그를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특유의 당당한 태도는 변함없이, 조선총독 앞에서더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말을 다 하였습니다.
 
2차세계대전 시기에는 창씨개명과 징병제를 지지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어들였으며 백작 작위를 받게 됩니다.
 
뭐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은 패전하고 한국은 광복을 하게 되죠. 미군도 들어오고요.
 
이때 남긴 명언이 가관입니다. "친일파는 나같은 사람...나같은 사람을 처단하라"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싶지 않다. 그러니 죽여라"라는 말을 남기고
 
미군정장관과 이승만을 찾아가 "이런 시기에 친일파를 처단하기보다 그들 능력을 이용하라. 다만 친일파의 대표자인 나를 죽여달라. 어떤 처단이라도 감수하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나중에 반민특위에서 친일파 명단에 올라갑니다. 그가 체포되면서 했던 말이 "전 국민이 친일을 할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재판을 받으면서도 "국민의 신변과 안전,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정부에 왜 충성해야하는가?" "이완용, 김옥균, 박영효들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남기다가 폐렴때문에 풀려납니다.
 
6.25도 겪었으나 대구쪽이라 별다른 관련은 없었고, 이승만 까기에 열중하며 "미국이 나가면 이승만은 봇짐싸느라 바쁠 것"이라며 조롱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보내는 용기도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2002년 친일파 명단에 등재됩니다.
 
그를 정리해보면 말그대로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신념을 친일로 잡은, 친일이 아닌 '일본' 그 자체를 꿈꾼 사람이고
 
조선인의 민족성을 아주 쓰레기로 보면서, 이 민족은 다른 민족의 치하에 놓일수 밖에 없는 운명이며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는 국가였다면서 개선가능성을 부정해버립니다.
 
아예 조선을 일본으로 만들어야 가능하다 하였으나, 법에 어긋나거나 가혹한 일본인들은 혼쭐을 내는 등, 자신만의 "일본적 지향점"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즉, '신념적 친일파'였던, 조선을 아예 일본으로 바꾸자고 했던 사람이였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술을 좋아하여 맥주 수십병을 마시는 모습을 보이고, 또 매우 성실하여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기 전까지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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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윤치호입니다. 박중양보다는 7년 연상이고요.
 
이 사람도 박중양과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일본에 유학가서 학습하고 서양의 문물 등을 배워 개화파가 됩니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 사람이 영어에 매우 능해서, 단순 암기가 아니라 영어를 이해할 정도의 수준으로, 국어에는 없는 말까지 영어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박중양과 차이점은 갑신정변에 가까이서 보았고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김옥균 등 개화파와 가깝다는 이유로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유학가게 됩니다.
 
가기 전에 상해에 들려 그곳에서 선교사들에게 감화되어 개신교로 개종하고 그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서 깨닫기를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 식민지가 되는 것이 낫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는 그의 천재적인 언어실력으로 대학교에 들어가 서구 사상은 물론, 신학-언어학-자연과학 등등까지 섭렵합니다.
 
우수한 성적이였는지, 대학원에서 "전액장학금을 줄테니 와라"라고 하였으나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며 거절, 조선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조선에 들어와 여러 부서의 자리를 얻었다가 여러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합니다. 회장까지 역임하는 등 주요인사였고 조선 인민의 계몽에 앞장서는 인물이였습니다.
 
을미사변 직후에는 일본의 잔혹한 행태에 대해 비판하였으나 그와 별개로 민비에 대한 행위(동학난 진압, 친인척 인사)에 대해서는 꼬집습니다.
 
독립협회 활동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노비해방, 의회의 필요성 등등 진보적인 의견들을 제출하다가 역사대로, 해산당합니다.
 
이때 고종은 물론 친일파의 이완용과 친러파 조병식, 6조 대신들을 모두 비판합니다. 당연히 조정에 찍혔으니 지방의 직위를 얻고 생활하다가 러일전쟁 이후에 와서야 외무부로 불려갑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또다시 비판하며 아예 정권에서 사퇴합니다.
 
이전에 독립협회가 해산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민회, 대한자강회의 회장 등을 역임하며 조선 민중의 계몽을 꿈꾸다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외무대신 직위를 주려고 하였고, 아버지가 일본남작이라 세습받아야 했지만 둘다 거절하고
 
왕족과 고관들이 일본에 협력하는 것에 실망하고는 재야로 내려가서 조선의 패망은 부도덕한 민중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으로 빚어진 당연한 결과라며 사회진화론적 체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가 105인 사건으로 끌려들어가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회유 끝에 전향서를 쓰고 전향(?)합니다.
 
기독교인답게 YMCA, 세브란스 재단 의사 등등에서 활동하고 독립운동과 무관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을 면회하고 활동을 묵인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총독부가 윤치호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그는 '강요된 애국심은 필요없다.'라며 협조를 거절하며 전향이 맞는건지 의문스러운 행태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 서명요청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줄 수 있는가?"라고 하지만 그는 다음 4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며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실제 활동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조선문제는 안건으로 상정될 가능성없다.'

'열강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

'미국이 조선을 독립시켜주겠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과 전쟁하지는 않을 것.'
 
실제 3.1운동이 열리자 그는 "학생들을 앞세운 뒤, 도망친 인사들은 음모꾼"이라며 규탄하였지만 학생들의 용기에 대해 경탄심과 일제의 체포와 고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일제에 대해 증오심도 품습니다.
 
그러면서 "약자가 강자에 대해 무턱대고 대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약자 자신을 괴롭힌다."며 사회진화론적 사상에 입각한 담화문을 작성합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활동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주요인사와 교분을 쌓았으나, 한번도 총독부-일제에게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이승만의 독립청원 사건 등이 터지고 외교독립론에 대한 회의감을 강력하게 느끼고 실력양성론에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매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경우를 보면서, "땅을 파는 것은, 그 땅의 식량,자원들을 일본에게 넘기는 것"이라며 매국행위라고 비난하였고 경제적 실력을 양성해야한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또한 한글보급교육을 진행하고 여러 학교에 기부금을 납부했으며 실업교육을 통해 "우리가 사용할 물건들은 우리가 만들수 있어야한다."며 자신의 자식들과 여러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목장을 꾸리기 위해 인가를 요구하나 거절당하고, 일본인 교사에 대한 동맹휴학 사태 등이 빚어지자 일제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게됩니다.
 
"일제가 조선을 발전시킨 것은 맞다. 또한 엘리트도 양성해주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기 일본을 위한 것이지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민족의 경제적 실력양성을 위해서 다양한 산업과 교육에 앞장섭니다. 이로 인해 6.10만세운동때 배후로 의심받기도 합니다.
 
또한 이상재 등이 죽자 독립운동가의 장례식을 주관하였고 신간회에 참여하고, 신간회가 내분에 빠지자 신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흡수하려고 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로 무산됩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사당이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자, 모금운동을 개최하여 돈을 모아 이순신 후손들의 빚을 다 갚고 남는 돈으로 주변 땅을 사들여 유적지를 보존하게 되었으나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힙니다.
 
1930년대 총독부가 내선일체론을 내세우고 친일파들이 대아시아 운동을 외치자 이에 대해 비판하고, 최남선의 일선동조론도 비판합니다.
 
또한 총독부에서 중추원 의원을 제안하였으나 거절하고 신사참배 요구도 신앙상 이유로 거절합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육군특별지원병제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등의 단체에 참여를 거절하고
 
안창호가 징역을 살자 보석을 요청하고 그의 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병원비를 다 지원해줍니다. 물론 안창호는 고문후유증, 병세 악화로 사망하고 윤치호는 1주일 내내 통곡을 합니다.
 
30년대까지, 그는 일본 왕족의 결혼식, 생일은 물론 덴노의 생일잔치에도 1번도 참석하지 않아서 총독부는 그를 추궁하고 미행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반미, 반영 활동을 강요하자 그는 거절하며 "마하트마 간디를 내버려둔 영국은 위대하다. 일본이었으면 30년 전에 죽였을 것"이라는 글을 일기에 남깁니다.
 
40년대 들어서는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창씨개명을 요구합니다. 그는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일본 남작이였으므로 친족에 친일파가 많았고
 
종친회가 열리자, 자신이 항렬이 높은데도 사촌에게 회장자리를 양보하고 논쟁끝에 창씨개명이 종친회에서 결정되자 창씨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국이 창씨개명을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은 모두 창씨개명 당할 것. 그러하지 아니한 자들은 반일분자가 될텐데, 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반일분자에 올릴 수가 없었다'며 일기에 글을 남깁니다.
 
41년에 들어서는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어떤 단체에는 참석하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어떤 단체에는 아예 불참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러던 중 이승만 밀사를 만나서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임박했다. 한국은 독립한다."는 내용도 듣게됩니다. 실제로 진주만이 터지자, 그는 자신의 판단을 내립니다. "일본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이때부터는 일제의 활동에 협조하여 학도병 지원 위원회, 중추원 회의 등등에 꾸준히 참석하였고 이 공로로 일본의 귀족원 의원에 선임됩니다. 1945년에요.
 
결국 일제는 패망하고 그는 친일파라며 엄청난 욕을 먹으며 괴한에게 암살시도까지 당하였고 그의 기념비들도 대거 파괴됩니다.
 
그러면서 김구, 이승만, 미군정에 대해 아래 내용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일본 신민으로서 '조선에 살아야했던' 우리들은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조선의해방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며 행운과도 같다"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간의 불화 속에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자들이 일제를 몰아낸 것은 아니다." 
 
편지를 쓴지 얼마 안되서 뇌졸중이 발병하였고 결국 45년을 일기로 사망합니다. 사후 친일파 명단에 오르죠.
 
그에 대해서 정리하자면, 냉혹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현실주의입니다. 마지막 일본이 승리한다는 내용만 제외한다면,

파리강화회의 내용이라던가 청원독립 등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완벽한 친일파라고도 보기 어려운 것이, 30년대까지 행적을 보면 친일파로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어울리고 고초를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전향서를 쓰고 나서도 실제 전향한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력양성론과 일제의 일본인 비호에 대한 비판을 일삼고 찍혀나갈 정도였죠.
 
다만, 외압이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한 것"이라서, 판단에 의한 친일은 변명할 수도 없이 온전히 자기 책임이니깐요. 30년대 죽었으면 어쩌면 교과서에 실력양성론적 독립운동가로 남았을지도 모르죠.
 
그의 친일을 생각해보면 '수단적 친일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민족의 안위와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필요한 친일을 하자는 입장이고 소극적 저항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를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적대적인 관계를 지양하고, 민족 내부의 실력을 양성하고 자립심을 기르자는 온건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하는 사람으로는 엄청난 모험이죠. 저 시대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그런 모험을 통해 목숨을 건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을겁니다.
 
그 또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대해 칭찬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쌓았으나,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였고 실제로도 연합국 덕택에 독립하였죠.
 
따라서 그는 역량에 집중하였고, 교육, 식산흥업 등으로 대표되는 행적을 보였습니다. 독립의지가 아예 없다고 볼수 없는 것이, 신간회 등에 참여하고 독립운동가를 뒤로는 지원했습니다.
 
안창호는 물론 양기탁을 보석시켰고(양기탁은 보석직후 만주로 도망쳐서, 윤치호는 찍힙니다.) 독립운동도 지원+묵인하고 일제에 대한 협조를 거의 않습니다.
 
그가 입을 열었더라면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제명에 살지 못하고 죽었겠죠. 임시정부에서도 그를 신뢰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분이 있었으니깐요.
 
박중양은 조선민족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한 반면에, 윤치호는 현재는 불가능하지만 민족성을 개선시키면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박중양은 아예 개선 자체를 포기했으니 언급조차 않았다만 6.25를 보았더라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참고로 이완용을 엄청 싫어했습니다. 독립협회때 친일파로 변절한거부터 시작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부린 것도 있으며, 유학생 감독관이였다가 이완용의 상소로 짤리고 한일합방때도 그의 행위를 비판하는 등 아예 경멸적 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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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이규완입니다. 이 사람도 개화파입니다. 박영효의 아래에서 배웠는데, 박영효랑 나이차이가 1살입니다.
 
위 두사람은 빵빵하여 잘나갔던 사람이였다만 이규완은 집안이 불운하였고 박영효 집에 가서 출입하고 식객이 되었습니다. 몇번 하인들에게도 내쫓기고요.
 
10대 중반까지 무학이었다만 박영효의 도움으로 글을 배우고 일본유학까지 갈 수 있게됩니다.
 
다만 군사훈련쪽에 배우게 되는데, 말이 군사지 다른 지식도 함께 배웠으나 돈부족해서 귀국하게 됩니다. 물론 그동안 받은 군사훈련으로 병조소속 무관이 됩니다.
 
그맘때쯤 갑신정변이 예정됩니다. 그런데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규완을 믿지 못하다가 서재필이 시험해서 통과, 갑신정변에 참여하게 됩니다.
 
무관답게, 민영익을 죽이려고 했으나 칼에 왼쪽귀가 베였고 총을 쏘았으나 피해 살아 도망쳤으나 나머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거 죽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3일천하가 되서 망명하게 되는데 망명국가는 미국이 됩니다. 
 
미국에 가서 충격(?)을 받게 되는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아랫사람들을 신분과 나이에 따라 차별해서 시중을 들게 시키고 수족부리듯이 다루려고 한걸 보게됩니다.
 
그러자 분노해서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 어찌 조선의 폐단을 바로잡겠는가?"라고 일갈하여 김옥균 등은 진심으로 사죄하고 각자가 자기일을 스스로 하도록 생활합니다.
 
나중에 일본으로 가서 박영효와 지내고 이등박문과도 친교를 맺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을 죽이려고 한 자객을 잡기도 합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김홍집 내각이 설치되자 박영효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해서 개화파 암살을 시도했던 왕족들을 '대원군이 보는 앞에서' 체포해갑니다.
 
그러다가 또 역사에서 아시다시피 박영효가 실각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갑니다. 독립협회가 생긴 이후, 박영효가 "죽을지도 모른다"라며 만류했으나 독립협회 지원을 위해 귀국하였고
 
병크(?)를 저지르는데 '고종 폐위와 공화국 건설을 위한 음모'를 세우고 이승만 등 동지들을 끌어모으다가 적발, 체포명령이 떨어지자 3번째 망명을 일본으로 떠납니다.
 
점차 시간이 짧아지는건지, 1차망명때는 10년, 2차 망명때는 3년이 걸렸는데 3차망명은 1년만에 귀국합니다(1900년)
 
이번에는 공화국이 아닌 '고종 및 순종 폐위하고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계획을 내세웠으나 또 발각되었고 처벌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등박문이 나서서 고종과 쇼부(?)를 봅니다.
 
이등박문과 친교때문인지 별을 달고 육군소장이 됩니다. 그리고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는데 처음에는 "내가 문맹이라 맡을 수 없다" 거절하지만 권유끝에 수락하게 됩니다.
 
재직시절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항상 자신의 아랫사람들에게 자리 청소 등을 강조하며 노동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깨닫게 만드는데 앞장섰습니다.
 
업무시간이 끝나면 직접 산에 올라 땔감용 나무를 캤으며, 양복 한벌과 신발 1켤레로 30년을 썼으며, 기차는 무조건 3등석만 이용하였으며, 그렇게 아껴쓴 출장비는 효자들을 위한 지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관찰사 신분인데도 '이웃의 초상'을 도와주기 위해 직접 상여를 메고, 자신이 이웃의 접대를 받으면 그 사람의 하룻일(모내기,거름뿌리기)을 직접 도와주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색잡기를 매우 매우 싫어했는데, 길걷다가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면 판을 뒤엎어버리고 양반들이 기생집에서 논다는 소문을 접하면 '거름만지는 몸' 그대로 가서 흥을 깼다고 합니다.
집무실 곳곳에 어망틀을 놓아 틈틈히 매듭을 맺으며, 자기 자식과 며느리에게도 "화가 나거나 잡념이 있으면, 어망을 짜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일합방이 되는데, 그는 "게으름, 탐욕, 부패함으로 인해 벌어질 일이였다"고 생각하였고, 강원도 도장관의 직위로 발령받습니다.
 
그 직위에 맞게 총독부에서 남작 직위를 부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얼마 뒤에는 함경도로 발령받게 됩니다.
 
물론 거기서도 자신이 직접 푸세식 화장실의 분뇨를 거름으로 사용하여 도청 화단에 뿌리고, 입고 있는 옷은 거의 넝마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며
 
음식을 먹으면 쌀 한톨도 안남기는 모습을 보이자, 아랫사람들이 "인색하다, 궁상맞다"라고 하자 "그러다가 패가망신을 하게 된다"며 일갈하게 됩니다.
 
물론 독립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3.1운동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말고 평상시와 같이 노동에 열중하라는 경고문을 붙입니다.
 
1924년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추원 제의도 거절하며 자신이 꿈꾸던 식산흥업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황무지와 간석지들을 사들여 그것을 손수 개간하였고, 자신이 축적한 부를 통해서 학교를 건설하였으며 여러 학교의 가난한 학생들 교육자금으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물산장려회 및 국산품 애용운동에 참여하여 회장자리에 올랐고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고, 물레를 돌려 옷까지 지어 입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농업뿐만 아니라 석탄산업에도 관심이 많아 한성시탄주식회사 설립에도 참여하였으며 상업에도 관심이 많아 상공인협회 등에 참여합니다.
 
양성평등에도 관심이 있어서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단군 이래 악습이며 이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며 자신의 직원으로 여성을 뽑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추원이랑 남작위를 거절한 건으로 인해 총독부는 그를 경계하였고 전쟁 독려 칼럼을 쓸 것을 요구하지만 문맹이라는 핑계로 거절합니다.
 
합병 직후부터 그는 꾸준하게 조선인 참정권 및 자치권 운동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3.1운동 이전부터 이루어진 것이며, 문화통치 수단이 아닌 발전하고 개화하면 조선인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그 권리를 누려야한다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인은 게으른 민족이 아니며 신뢰할 수 있는 문명인들 중 하나이다."라며 총독부에게 역설하였고, 능력이 된다면 일본의 국회의원 심지어 국무대신(현재의 장관)도 해야된다고 하였습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자원해간 '조선인 병사의 원호와 성금, 위문품'을 위해 기부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나중에 총독부 등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비행기헌납운동 등등'에 대해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방공호 파기운동'도 지속적으로 거절합니다.
 
해방이 된 이후로는 "해방은 우리 손으로 만든게 아니다. 그러나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실력을 기르고 배우기를 주저하지 말아야하며, 노동을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말을남깁니다.
 
해방 직후에 강원도지사 직을 임시로 역임하고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다가 중풍이 악화되어 쓰러집니다.
 
죽기 전에도 어망들을 꾸준히 짰으며, 자신의 집 주변에다가 과실나무들을 심어놓아 배고픈 이들이 줏어먹도록 용인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장례식에 대해 "내가 심은 나무로 관을 짜고 조의금은 관을 살 필요가 없으니 5원(본래 10원)으로 하라. 그 이상 넘게 받지 말도록"이라 말을 남깁니다.
 
그러면서 사치풍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내비치며 외모,재산,지위,학벌 등에 연여하지 말고 초연할 것을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이후 중풍과 노환에 등창까지 더해져 46년에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장례식에 이승만,김구의 조문단과 강원도지사 및 지방의회 의장, 강원도 군정장관 등등까지 참여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왔고
 
2002년 친일파 명단에 등재되었고 2007 08년에도 마찬가지로 등재됩니다.
 
그의 사상은 노동에 대한 예찬입니다. 항상 거지들에게 자선을 베풀때도, 노동량을 설정해주고 달성하지 못하면 내보내주지 않았으며
 
항상 짚신, 어망 등을 꾸준히 만들였고 가족들과 함께 밭과 과수원 등을 운영하며 항상 모범을 보이고 식산흥업 정책에도 꾸준히 참여합니다.
 
근검절약도 중요하다며 위에서 서술했듯, 항상 헌옷차림으로 돌아다녔고 짚신을 매번 만들었으며 뜯어진 옷은 직접 바느질로 꿰어 입었습니다.
 
또한 노동을 천히 여기는 것이 민족고질병이라고 개탄하여 글공부보다 사람답게 만드는 학문을 가르쳐야하며 실용적인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거기에 더해 유흥, 도박 등에 대해 비판적이였으며, 청탁에 대해서 기피하며 '인맥을 이용한 특혜는 조선인의 잘못된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친일행적을 서술해보면 따로 항목에는 없습니다. 그의 행적은 정말로 전부가 '조선인을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지원 또한 '조선인 병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행정업무 등에서는 일제에 협력했다고 봐야겠으나 위키 등을 뒤져봐도 친일행적이 나오는게 없습니다. 애초에 윤치호나 박중양 같이 임팩트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죽었을때, 주변인들이 애통해하고 강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보면 개인적 탐욕이나 잔학한 행위는 저지르지 아니하였으며
 
박중양이 욕을 쳐먹고 윤치호도 피습당했는데 말짱하다는 점으로 보면 친일파 중에서도 '최선의 친일파'가 아니였는가 싶습니다.
 
그를 정리하자면 '현실적 친일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한국은 일본에 의해 병합되었고 일본이 열강이라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거기에서 최선의 상태인, 참정권 및 자치권을 획득하고 온 조선인들이 권리를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위의 박중양, 윤치호처럼 성실하였으며, 어쩌면 그보다 더 성실하였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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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모두가 민족보다 자신만을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겟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다들 '일본이 선의의 제국'이라고 오판한 것이겠죠.
 
그나마 이것을 알고있었던 사람이 윤치호였다만 마지막에서 갈등 끝에 변절을 택했으므로 오판을 하지 않았다고 볼수는 없을겁니다. 
 
어떻게 해석해보면, 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목숨을 거는게 쉽지 않고 그나마 조선인들을 편에 서서 보호해주어 나았다'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들은 결국 현실과 타협하였고 독립운동을 했으면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아는 '표준형 친일파'(=이완용)와는 다른 조금 색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여러모로 찾아보고 한번 써보았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일본..을 너무 강하고 극복할수 없는 대상이라고 본 나머지

우리가 조선인으로 남는것 보다 일본의 2등시민으로 있는게 더 낫다, 차라리 2등시민의 자리를 벗어날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하자 이런식으로 활동한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학교에서도 다 싸잡아 친일파는 나쁜놈! 민족반역자! 이렇게 가르치기보다는

이런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것을 가르치면서 국가의 역할,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까지 다룬다면 더 좋을것 같다

69개의 댓글

나는 솔직히 말해 일본이면 반일프레임을 바탕으로 쪽빠리 원숭이 꺼져라 대한민국 만세 외치는 사람들 중에

일제강점기로 돌아간다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이 중 몇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저런 식으로 최소한의 신념을 바탕으로 친일을 하긴 커녕 오히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친일파보다 악랄하거나 그 밑에서 빌붙어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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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빙봉빙봉빙봉빙봉
ㅇㄱ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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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조선이 노답이라 중국 아니면 일본한테 먹힐 상황이였는데
일본이 더 쎄니 일본한테 먹힌거지
일본은 악랄했지만 저런 사람들한테 새로운 세상을 깨닫게 했지.
중국이 지배했으면 일본보다는 덜했겠지만 아마 지금도 동남아시아 수준으로 살고있었을거임

종합하자면 큰 희생후 큰 대가를 얻은 역사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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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재밌네.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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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이렇게 보니 확실히 친일이라는 단어는 조심해서 써야할 것 같네. 민족반역자와 친일은 다르다는말을 알 것 같다.

신념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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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이런글 보고 여태까지 몰랐던 사람들 이야기도 알 수 있었고, 그 당시 지식인들이 선택해야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되네.
까놓고 우리가 저 상황에 몰리면 저러지 않을것이라고 자신 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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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카즈
[삭제 되었습니다]
2016.06.20
@데빌즈어드보캣
아 똥이랑 엮였네. 취소 시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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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그 당시 지식인들의 역활 혹은 신념에 따라서... 그럴수도 있다는걸 보네요... ㅎ (긴글 쓰는라고 고생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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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로 편입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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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개소리지.
사정없고 이유없는 사람 어딧냐.
결국 일제는 패망했고, 일제의 식민지는 무너졌으니
반민족 친일행적했던놈들은 깔끔하게 재산 몰수 + 죄의 경중에 따라서 처벌하는게 옳다.
하나하나 사정은 재판정에서 받아야지 감성팔이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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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그때 일본이 너무나 강대했음 2차대전 최대전선 보면

ㅆ쓸만한 중국영토 전부에 조선 일본 사할린 밑으론 인도네시아까지 다 먹었으니...

다 통수치고 프랑스령 영국령 네덜란드령 미국령 등등 동남아시아랑 동북아시아를 통합하고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음

잠깐이지만

그래서 친일파들이 잘못생각했을수도 있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쩌는지 잘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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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어차피 지금 주인님은 미쿡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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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
하긴 그당시 일본은 청나라도 깨부수고 러시아도 깨부순 초강대국이자 열강중 하나였으니. 그 시대의 정보력으로는 일본편에 서는게 최선의 선택이었을수도 있음. 우리야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니 이런말 저런말 할수있는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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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가 되느냐, 일본의 인간이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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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
어차피 개목걸이에 "조선" "일본"이런식으로 이름표만 바꿔달았지 달라지는건 없는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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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
솔직히 이글 보고 있는 개드리퍼들중에 일제강점기로 돌아가면 독립운동 할 개드리퍼 1퍼나 될껄 99퍼는 친일이거나 걍 인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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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에 산다면 어떻게 살았을 가능성이 높을지 생각해봤는데
딱 박중양 이 사람의 삶이랑 거의 비슷하다 ㄷㄷ
물론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 방에 일본의 뒤통수를 칠 준비도 하고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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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4
엑박 ㅂ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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